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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말기 멸망원인의 내부분열에 대해서.. 생각..
번호 : 4760 글쓴이 : 밀리터리 나그네
조회 : 255 스크랩 : 0 날짜 : 2007.05.1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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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말기 멸망원인중 하나 제일 큰 이유가 바로 내부분열이었습니다. 이는 연개소문이 죽음으로서 그 아들들이 중심이 되어서 권력투쟁의 빌미로 고구려가 멸망하게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통적인 기록은 그의 아들들의 싸움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혹시 이 들의 권력 싸움에 보장왕의 개입없었을까 입니다.
당시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연개소문이 대막리지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모두 장악하여 있었고 보장왕은 권력에서 소외된 측면이라고 할까요? 이는 신대왕때의 차대왕을 시해하고 초대 국상이된 명림답부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국상이라는 자리가 거의 왕과 같았으니 말입니다.
명립답부 사후에 고구려 왕권이 다시 강력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고구려 멸망에서의 권력투쟁은 기존의 명립답부때와 다르게 빠르게 변화를 가속화하던 것이 아닐까요? 이른바 보장왕의 정치적 음모 말입니다.
우선적으로 연개소문이 사후에 보장왕이 다시 왕권 강화를 위해서 귀족들의 권력싸움으로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는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만.. 즉 그들이 서로 싸우게하여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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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牟大王 저는 연개소문의 카리스마적 통치 기간에는 잠자코 있던 온건파가 3년전쟁 이후의 총체적 난국과 연개소문 사망을 기화로 하여 다시 남생을 중심으로 뭉친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말씀하신 왕의 획책이나 외부세력의 이간질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일단은 근본적인 분열의 원인을 찾아야 하겠지요. 3년전쟁 즉 2차고당전쟁은 고구려 제국체제의 종말이며 고구려 국가 역량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딱 그 시기에 절대카리스마 연개소문도 죽습니다. 이쯤되면 이제 자존심 그만 세우고 당에 머리숙이고 살아남아보자는 식의, 과거 영류왕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나타날 만 한 상황이지요. 07.05.15 17:41
답글 추모왕 왜 어째서 고구려의 내분이 주전파와 주화파다툼이라고 생각하는것일까요? 또한 고구려가 662년전쟁에서 역량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하시는데요? 무엇때문에 드러났다고 하시는건가요? 662년전쟁은 도리어 당나라의 역량이 드러난 전쟁이었습니다. 신라의 소극적인 지원과 철륵의 뒷통수 때리기... 3개도행군 사령관들의 전사... 선박건조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의 이반등... 물런 고구려가 전략적인 판단미스로 무려3년간의 농사가 망하는 상황까지 몰리긴 하였지만 총체적인 국가역량 한계까지는 드러나진 않았습니다. 또한 667~8년전쟁은 당나라가 연남생의 지원요청을 접수한후에 666년 1년동안 전쟁준비를 한후에 667년에 개전합니다. 당나라 07.05.15 21:57
추모왕 의 위협도 없던 상황이죠. 고구려말기의 내전은 바로 고구려 귀족층의 내전입니다. 귀족층이 2개로 나누어서 내전을 벌인것입니다. 국내성파인 연남생과 평양성파인 연남건,남산형제의 내전입니다. 물런 이러한 가설도 제가 그저 혼자생각한 발생이지만요. 최소한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07.05.15 21:59
大高句麗帝國 윗분, 2차고당전이라고 하시면 661~662년전쟁을 말씀하시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당나라가 고구려에게 또다시 지고나서 국가사정이 많많치 않았습니다. 전쟁에 찬성하는파와 반대하는파의 끝없는 대립과, 거듭대는 고구려원정패전으로 주위 이민족이 당나라에 자신감을 갖고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즉 고구려가 외교적으로 당나라를 고립시킬 수 있는 상황이 왔던것이죠. 국가적역량의한계는 당치도 않다고 봅니다. 고당3차전쟁도 연남생이 당나라에 가서 고구려의 내분상황을 정확히 알렸기 때문에 당나라가 재침략을 결정한것이지, 연남생이 투항만 하지 않았어도, 고당전쟁은 2차전쟁으로 이미 끝이 난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07.05.15 18:23
답글 제국군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한 번만 하고 끝냈습니까?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히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남생의 투항은 언제든지 터질 화약고에 기름칠 한 것에 불과합니다. 당과 고구려는 어떤 이유에서는 다시 전쟁을 했을 겁니다. 거란이나 신라의 문제든지 아니면 당나라 내부의 정치적 상황에서든, 단적으로 수양제는 그렇게 대패하고도 나라가 망할 때까지 고구려원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07.05.15 19:48
밀리터리 나그... 미국과 이라크와의 전쟁은 두번 있었습니다. 걸프전과 이번 이라크전입니다. 그리고 고당전쟁과 이라크전을 비교하는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만.. 다시전쟁을 했더라도 시간이 상당히 지난 다음 일것입니다. 솔직히 두번이나 원정을해서 패배하고 돌아왔다면 원정국가의 피해는 막심한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인구의 감소 전비부담등이 이어지니까요. 수양제의 경우 전면적인 대군동원은 2번정도 인것으로 압니다. 나머지는 어느정도 비율의 군대를 차지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07.05.15 20:04
제국군 2번 사이사이에 비행금지구역을 둘러싸고 틈틈이 미국이 이라크를 공습으로 때려 댔습니다. 내 기억에 몇차례 되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미국에 뭔일 생기거나 훈련삼아서 심심하면 때려 대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양제도 틈틈이 소규모 병력으로 고구려를 떼려 댔습니다. 물론 그 효과를 보기전에 망했지만요. 07.05.17 00:30
이승수 어느 나라든지간에 외부에서 오는적들로망하는것보다 내부분열로 망한다고생각합니다 07.05.15 19:03
답글 百濟 牟大王 660년에서 663년의 기간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고구려 국가역량의 한계라고밖엔 할 수 없습니다. 660년 - 거란이 완전히 당 치하로 넘어가고 백제 중앙정부가 망합니다. 662년 - 고구려 편으로 넘어왔던 철륵이 다시 당에 복속됩니다. 663년 -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고 야마토가 고구려 진영에서 이탈합니다. 2차 고당전쟁에서 고구려는 당군에게 도성이 포위당하기까지 하는 등 위기에 몰렸고, 그동안 우방국들의 멸망과 이탈을 막지 못했습니다. 07.05.16 10:33
답글 百濟 牟大王 고구려가 왜 당과 싸웠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은 고구려에서 뭘 뺏어먹으려고 침략전쟁을 일으킨게 아닙니다. 그냥 고구려가 당에 고개숙이고 복속하여 당중심의 조공체제만 인정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입니다. 즉 이건 제국의 패권전쟁이라는 겁니다. 제국체제의 유지는 자기 나라만 지킨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고구려가 당에 맞서는 제국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고 당에 반기를 든 우방국들을 지켜주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거란에 군사를 보내 당과 싸우고 백제를 돕기 위해 남진을 강행했던 이유이며, 또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은 고구려 국가역량의 한계인 겁니다. 07.05.16 11:07
답글 百濟 牟大王 665년에 고구려는 태자를 보내 당에 입조합니다. 이건 연개소문 집권 이후 전례가 없었던 사건입니다. '입조'라는 단어야 그냥 사신만 와도 중국애들이 멋대로 써댄 단어이지만 태자가 갔다는건 이게 이전의 사신파견과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역량의 한계를 절감한, 고립된 섬이 되어버린 고구려가 당제국의 우위와 대세를 인정한 의미로 볼 수 있는것이며 연개소문 사후의 고구려 내부에서 온건파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광개토왕 이래 300년 가까이 이어온 고구려 제국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인 겁니다. 07.05.18 19:15
답글 百濟 牟大王 고당전쟁과 고구려의 붕괴는 비유하자면 현대의 미소 냉전 및 소련의 붕괴와 그 인과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제국이기 때문에 자기 나라만 지킨다고 되는 게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베트남에서, 중동에서, 동유럽에서 여러 가지 유형의 수많은 대리 전쟁을 치르게 되고 그걸 위해서 막대한 군비 경쟁을 계속하였던 겁니다. 결국 역량이 달리는 소련은 미국과 자본주의 체제의 우위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를 따르던 사회주의 진영의 많은 나라들이 이탈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소련은 필연적으로 내부로부터 붕괴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07.05.16 10:52
답글 ★明治好太王★ 제 생각으로는 2차 고당전쟁 이후 고구려와 당 모두 국력의 한계가 드러난 전쟁 같습니다.(당도 분명 엄청난 인적, 물적자원의 크게 손실되었기에 2차 고당전쟁 이후 반전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당고종은 전쟁을 중지합니다. 사실상 이때 고당전쟁은 끝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다만 총체적인 국력면에서 당 보다 열세인 고구려가 한계점에 당 보다 조금 일찍 도달했기에 연개소문 사후 태자를 당에 보낸 것은 계속 된 대전으로 인한 경제력 악화 때문에 연남생과 국내성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반전파 귀족들이 고개를 다시 든 것으로 보여 집니다. 07.05.16 12:11
답글 ★明治好太王★ 당시 고구려의 정권 구성은 온건적인 강력한 구귀족 국내성파와 강경파인 신흥귀족 평양성파 그리고 중립적인 태왕파가 3개의 축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연개소문은 혁명을 일으킬 때 200여 명의 대신들을 죽이기도 하였지만, 연남생의 처가 내지 외가가 국내성파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볼 때 일정선의 타협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국내성 귀족들은 정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면 국가 정책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양태왕대에서 영류태왕의 정권 성향이 변한 것도 국내성귀족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지며 훗날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강경노선이 연개소문이 07.05.16 12:23
답글 ★明治好太王★ 죽은 뒤 고구려의 정권이 강경파에서 온건파로 바뀐 것도 국내성 귀족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2차 고당전쟁 이후 대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강경파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할 수는 없었던 반면 온건파들은 더 이상의 전쟁은 불가하다고 마음 껏 주장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차 고당전쟁 이후에는 명분으로도 온건파들이 앞섰을 뿐만 아니라 이 때는 민심도 온건파쪽으로 흘렀을 것입니다. 아마 연개소문이 혁명 전후 국내성 귀족들과 타협을 할 때 내가 아니더라도 전쟁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단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라가 망하면 당신들의 기득권도 무사하진 않을 것이라라고 설득 했을 것입니다. 07.05.16 12:36
밀리터리 나그... 윽.. 원래 저의 목적은.. 이 권력싸움을 보장태왕의 왕권회복및 강화의 목적의 보장태왕의 음모가 아닌가.. 인데..^^;; 07.05.1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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