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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이서영 목사
(요한복음 7장 강해설교) 율법을 지키지 않으므로 예수님을 죽이려함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아멘)
요한복음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을 믿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하되 더 풍성하게 얻게 해주려는 것을(3:16-17, 5:24, 6:38-40, 10:9-10, 12:50, 17:2-3, 20:31)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7장 말씀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므로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관점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한복음 7장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요한복음 7-11장 말씀의 구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전환이 7장 말씀부터 시작되기 때문인데 1-6장 말씀의 구조는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면 7-11장 말씀의 구조는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7-11장 말씀의 구조부터 먼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7-11장 말씀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다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간혹 믿는 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주로 붙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보내신 아버지와 믿음과 생명에 관한 것을 비록 1-6장 말씀과 같이 많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증언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1-6장 말씀에서는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에 믿음과 생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7장 말씀 이후로는 믿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므로 7-11장 말씀에서는 믿음과 생명과 관련된 언급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보내신 아버지에 관한 것을 빠지지 않고 계속 강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7장 말씀에서 살펴보면 먼저 아버지와 관련된 것인데 예수님께서 “보내신 이”(16, 18, 28, 33)라고 하신 것과 “하나님께로부터”(17)라고 하신 것과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9)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관련된 것을 살펴보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를 믿지 아니하고 배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1, 19, 20, 25) 노여워하고(23), 잡으려고 하는(30, 32, 44, 45)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장면은 비록 일부이지만 이미 1-6장 말씀 가운데에서도(5:18)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이려는 것을 전면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은 7장 말씀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격렬해지므로 7장 말씀에는 수군거리고(12, 32) 쟁론하는(43)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므로 생명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생수의 강”(38)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배척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23)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때가 되지 않았기에(30) 잡지 못한(44, 45)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7장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논쟁이 율법에 관한(19, 23, 49, 51) 논쟁으로 비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발단은 율법의 준수 여부인데 배척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안식일”(22, 23)을 지키라는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으므로 죽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은 전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보면 모세가 율법을 주었는데 오히려 너희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으므로 죽이려고 한다는(19) 것입니다.
그러한 근거를 제시해주셨는데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아니하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듯이 안식일에 삼십 팔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도(5:8-9)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는(22-23)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외적으로 판단하는 너희들이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24)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예수님과 배척하는 사람들이 서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죽이려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배척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죽이려고 한다는 말씀이 옳은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 배척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지켰더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겠습니까? 오히려 놀라운 일을 행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유대인의 명절과 연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유대인의 명절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명절에 관한 성경구절을 찾아보면 마태복음이 2개, 마가복음도 2개, 고린도전서는 1개인데 이에 비해 요한복음은 무려 13개나 됩니다.
이러한 요한복음 가운데 7장 말씀에 6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장 말씀은 특별히 초막절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초막절 전과(2, 8) 초막절 중간과(10, 11, 14) 초막절 끝날(37)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살펴보기 전에 6장 말씀을 살펴보면 6장 말씀은 유대인의 명절 가운데 “유월절”(요 6:4)과 연관하여 언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6: 53-58)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 생명의 떡과(6: 32-33, 35, 48-51) 생명의 말씀에(6: 63, 68)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7장 말씀에서는 유대인의 명절 가운데 “초막절”(2)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막절의 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말씀은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와 제단에 붓는 의식과 연관되어 보이는 37-39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 초막절과 연관된 것을 살펴보면 시간별로 구분해서 초막절 전과(1-9) 중간과(10-36) 끝나는 날로(37-53)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기도 하겠지만 배척하는 사람들의 부류에 따라 나눈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배척하는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면 초막절 전에는 첫 번째 부류가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형제들이 믿지 않는 것을(5) 볼 수 있고, 초막절 중간에는 두 번째 부류가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죽이려는 것을(11, 13, 20, 25, 30) 볼 수 있으며, 초막절 끝에는 세 번째 부류가 등장하는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믿지 않고 잡으려는 것을(45, 47, 49)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지키는데 있어 성경구절의 말씀을 정죄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다 더 잘 알고 보다 더 잘 믿고 순종하는데 사용하시고 아울러 이웃을 보다 더 사랑하는데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초막절 전에 일어난 일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면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 전에(2, 8) 일어난 일인데 1-9절 말씀이 이에 해당합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막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가라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올라가지 않으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는(8-9)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장 1절 말씀을 시작하면서 “그 후에”(1)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를 원어로 보면 지시대명사 “ou+'to"(후토스)”의 복수인 “tau'ta(타우타)”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그 후에”는 “그 일들 후에”라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지시대명사는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으므로 무슨 큰 의미가 있다고 골치가 아프게 원어로 살펴보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7장 말씀의 주제를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들은 어떤 일들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그 일들은 5-6장 말씀의 일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장 말씀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의 삼십 팔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과 관련된 일과 6장 말씀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표적과 관련된 일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 후에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다니시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갈릴리에서 다니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5장 말씀에 나오는 일과 관련된 것입니다. 5장 18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와 같으므로 7장 말씀을 처음 시작하면서 나오는 그 일들에 대한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한 것은 안식일을 어겼고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고 하여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말미암아 죽이려고 하였는데 7장 말씀 이후로부터는 본격적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 후에”라는 말씀은 간단해 보이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말씀인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7장 말씀의 주제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배척한다는 7-11장 말씀의 주제까지도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살펴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였는데 얼마나 죽이고 싶어 하였겠습니까? “죽이려”(1)라는 단어 가운데 “려”의 원어원형은 “zhtevw(제테오)”로 “찾다, 갈망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죽이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을 갈망하기에 찾아 죽이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앞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9절 말씀의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예수님께 은밀하게 행하지 말고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도록 여기를 떠나 유대로 떠나가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라고 한 것은(3-4)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어떤 특별한 존재로 보이기보다는 육체의 형제로만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일반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떠나 가버리기를 바랐으므로 3절 말씀에 “떠나···가소서”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가소서”도 떠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의 원어원형은 “uJpavgw(휘파고)”인데 “떠나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떠나”와 “가소서”를 보면 둘 다 모두 명령형이므로 형제들이 얼마나 떠나 가버리기를 원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6, 8)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6-8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아멘.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고는 갈릴리에 머무르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초막절 전에 일어난 장면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미 믿고 계신다면 감사드리시는 가운데 더 잘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예수님을 믿는 가족을 대하실 때 육체의 가족으로 볼 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도 보셔서 예수님의 가족인 것을 아시고 예수님의 가족으로도 대하시길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초막절 중간에 일어난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면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 중간에(10, 11, 14) 일어난 일인데 10-36절 말씀이 이에 해당합니다. 여기에서는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죽이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명절 중간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이려고 한다는 것과(10-24)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25-36)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0-24절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공개하지 아니하시고 은밀하게 올라가셨습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으면서 어디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엇을 하려고 찾았겠습니까?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께 대한 수군거림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무리를 미혹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께 대하여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말조차도 조심한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찾으려고 한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찾아서 죽이려는 상황이므로 자칫하다간 불똥이 튈 우려가 있으므로 모두가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배우지 아니하였는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말하면서 놀라워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놀라워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해주시기를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6-1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의 교훈이라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대답해주셨는데 율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아멘.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행하였다면 예수님을 죽일 리가 없지만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라고 준 율법규정이 오히려 죽이는데 사용되어버린 것입니다.
무리가 예수님께 대답하기를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누가 죽이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대로 된 율법의 정신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안식일에 할례를 받기도 하듯이 안식일에 삼십 팔년 된 병자의 전신을 건전하게 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것으로 성을 내느냐고 하셨습니다.
21-24절 말씀을 보면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율법을 지킴에 있어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운 판단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많이 아프고 괴로우면 안식을 누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로나 도움을 받게 되거나 더 나아가 고침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즐겁고 평안하겠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안식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율법 준수의 정신이요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실 때 종교적으로 주일을 지키지 마시고 주일성수의 정신을 살려서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시고 아울러 주일에 선을 행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힘쓰셔서 다함께 안식을 누리게 되는 제대로 된 주일성수를 지키시길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25-3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죽이려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고 하였으며 보라 드러내어 말해도 아무도 말하지 아니하므로 당국자들이 혹시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이신 줄로 알았느냐고 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드러내어 말씀하셔도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지만 자기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사는 사람이고 어디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육의 입장에서만 알고 있고 영적으로는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코앞에 두고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27)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크게 외치셨습니다. 28-29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보내셔서 오셨는데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한 반응이 어떠합니까? “아멘”이라고 크게 화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무도 손을 대는 자가 없는 것을(30) 볼 수 있습니다.
이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31)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믿기는 믿었는데 무엇을 믿었는지는 불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표적을 보고 믿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믿을 때 보다 정확하게 알고 믿어야 할 필요성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장면이 진행되는 가운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45-52) 단서를 제공해주는 장면이 살짝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2절 말씀인데 예수님에 대한 무리의 수군거림을 바리새인들이 듣고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낸 장면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어서 계속 무리와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3-34)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내신 이에게로 떠나가신다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찾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가라고 하면서 흩어져 사는 헬라인에게로 가서 가르치려고 하는가라고(35)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육의 상태로 보았으므로 나를 찾아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요 나 있는 곳에 올 수도 없다는(34)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므로 이 말씀이 무슨 말이냐고(36)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의 상태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으시되 보다 정확하게 알고 믿으시길 바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도 보다 더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초막절 끝에 일어난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면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 끝에(37) 일어난 일인데 37-53절 말씀이 이에 해당합니다. 여기에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믿지 않고 잡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명절 끝날에 예수님께서 믿는 자가 받을 성령님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것과(37-44) 예수님을 잡으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들먹이면서 사람들에게 따지는 것을(45-53) 볼 수 있습니다.
먼저 37-44절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반석이신(출 17:6, 고전 10:4) 예수님께서 서서 크게 외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7-38)고 말씀하셨습니다.
39절 말씀을 보면 배에서 흘러나올 것이라는 생수의 강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아멘.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처럼 성령님을 받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님을(14:17, 23, 15:26, 16:13) 받아야 율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고 믿고 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율법을 알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예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율법의 진정한 내용은 모르고 율법의 껍데기 규정만 알고 그 규정으로 정죄하고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들을 듣고는 쟁론이 일어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0-43절 말씀인데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쟁론”(43)의 원어원형은 “scivsma(스키스마)”인데 문자적인 뜻은 “잡아 찢기, 갈라진 틈”이며 은유적인 뜻은 “분열, 분쟁, 언쟁”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쟁론은 쟁론할수록 분열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배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참으로 선지자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라고 하기도 하였지만 쟁론수준을 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가운데 “그리스도”를 언급한 성경구절을 찾아보면 18개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 7장 말씀에 가장 많은 5개(26, 27, 31, 41, 42)가 나오지만 애석하게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믿지는 않고 이론적으로만 쟁론한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그들 가운데에서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고(44)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30) 손을 대는 자, 곧 잡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는(요일 5:18) 말씀처럼 손도 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님을 충만하게 받으셔서 율법의 진정한 내용을 알게 되시고 이를 통해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쟁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으시고 증언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쟁론을 일삼으면 예수님과의 사이든 사람과의 사이든 찢어져서 멀어질 수 있으므로 쟁론을 삼가하시길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45-53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들먹이면서 사람들에게 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돌아오자 그들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그를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결코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대답하기를 너희도 미혹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 가운데에서 그를 믿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규정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에 기록된 예수님이시라는(5:39, 46) 것을 알지 못하고 잡으려 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로 보고 저주를 받은 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전에 예수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1)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52)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찾아보라는 것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율법으로 따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율법을 살펴보기는 살펴보는데 부정적인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과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적용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면 사람을 살리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잡아 죽이게 되고 저주를 들먹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실 때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으셔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시고 예수님을 바르게 전파하셔서 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7장 말씀에서는 초막절을 시간별로 구분해서 초막절 전과 중간과 끝나는 날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구분을 함에 있어 이와 관련하여 배척하는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초막절 전에는 첫 번째 부류가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형제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초막절 중간에는 두 번째 부류가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죽이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초막절 끝에는 세 번째 부류가 등장하는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믿지 않고 잡으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님과 배척하는 사람들이 서로 주장하기를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죽이려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누가 옳다고 하였습니까? 배척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죽이려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율법을 모르면 배척하게 되고 알게 되면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면 믿지 않게 되고 심지어 잡아 죽이려 하고 저주를 받은 것으로까지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의 형식적인 규정을 지키면서도 율법의 진정한 내용은 잘 알지 못하게 되므로 율법의 규정을 들어 정죄하고 배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고 지키실 때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성경말씀을 제대로 알게 되셔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게 되시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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