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때로 위기에 처한 가족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일단 살고 봐야 하니 말이지요. 일상에서 서로 불편한 사이였다 할지라도 목숨이 위태로우면 살아야 하고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협력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불편한 사이였다 할지라도 가족인데 죽기를 기다리며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 위기를 벗어나려 서로를 생각해주고 돕습니다. 설령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해도 뛰어들 것입니다. 밉상이라 해도 돌발 상황에서는 감정보다 본능이 우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혈연 곧 피의 힘입니다.
허리케인으로 피난명령이 내려진 곳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려 해도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습니다. 재난의 현장이 되어 가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들 피난했을 테니 교통이 혼잡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맘껏 달리면 한 시간 여면 당도하리라 예상합니다. 그래서 ‘헤일리’는 자동차로 비바람 몰아치는 빗길을 달립니다. 안전요원들이 길을 막아섭니다. 사람들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찾으려고 이 험한 길 얼마를 달려왔는데 그냥 돌아설 수는 없는 일, 막무가내로 치고 달아납니다.
당도한 거처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강아지만 반갑다고 달려듭니다. 도대체 어디? 그래, 혹시 예전에 살던 집에? 엄마와 이혼하고 나서 판다고 했는데? 아직 팔리지 않았다면, 그래도 혹시? 그래서 다시 옛집으로 찾아갑니다. 소리소리 지르면서 집안을 둘러봅니다.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핸드폰을 다시 걸어봅니다. 어디선가 벨소리가 들립니다. 핸드폰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어디엔가 아빠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아무리 뒤져도 감감합니다. 밖에서는 폭풍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습니다. 지하실로 내려갑니다. 손전등을 찾아 비추면서 여기저기를 살펴봅니다. 지하실에도 이곳저곳 물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눈앞에 커다란 악어가 등장합니다. 놀래라!! 간신히 악어를 따돌리는 공간으로 피합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아빠를 발견하지요. 죽었나? 아직 숨이 있습니다. 부상이 큽니다. 살이 많이 파이고 찢겨 있습니다. 어찌 될지 모릅니다. 어서 구조대를 불러야 하는데. 전화로 구조를 요청하였는데 들리지 않는 것인지 통신이 안 되는 것인지 도중에 끊어집니다. 일단 아빠를 위로 옮겨야 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무거운 아빠를 들 수가 없습니다. 비닐 깔개를 찾아 올려놓고 끌어당깁니다. 그런데 물이 들어옵니다. 덕에 아빠가 일단 눈을 뜹니다. 물이 찬다, 악어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빠져나가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악어의 공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악어를 피하면서 지하에 있던 가재에 깔려 부상이 심해졌습니다. 움직이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합니다. 태풍보다 더 무서운 눈앞의 포식자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가 아닙니다. 쫓기고 물리고 뜯기고 지하 여기저기를 오가면서 술래잡기 하듯 오락가락합니다. 구조하러 구조대원이 오기는 합니다. 더구나 그 위험지구에 아마도 지인관계이니 적극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을 것입니다. 자기의 만류를 물리치고 그 폭우 속을 도망치듯 달아난 헤일리가 걱정되기도 하였겠지요. 그러나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나마 희망이 사라집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합니다.
헤일리는 아빠의 지도 하에 유망 수영선수가 되었습니다. 혹독한 훈련을 시키던 아빠가 밉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그 덕에 오늘의 영예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언니와는 다르게 아빠와는 그런 미운 정으로 더욱 끈끈한 관계가 이루어져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막무가내로 재난지역에 파고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둘이서 이 무서운 짐승과의 사투를 벗어나야 합니다. 과연 최고의 수영선수다운 면모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그 실력보다 과연 그런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아무리 수영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악어들이 오락가락하는 물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물론 살 길이 그것밖에 없다 싶으면 이판사판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짐승의 밥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어떻게 이기고 물속으로 첨벙할 수 있을까요?
재난의 현장에는 그 재난을 구실로 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혹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모두 날려버릴 재물이요 상품입니다. 이렇게 없어지든 저렇게 없어지든 나중에 재난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그것을 미리 탈취하여 사용한다고 해서 잘못일까요? 모두 피난가고 비어있는 마트에는 상품만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물에 침수되어 없어지든 내가 먼저 가져가서 사용하든 다를 게 없습니까? 그래도 침수되기 전의 행동은 도둑질이고 범죄 아닌가요? 물론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증인은 본인의 양심뿐입니다. 하지만 재난을 빌미로 득을 보려는 경우 오히려 그 재난에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도 말씀하지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데 이 악어, 상어 ‘죠스’만큼 무섭지도 긴장을 만들지도 못합니다. 단지 헤일리가 오히려 더 긴장을 조장해주지요. 연기가 볼만합니다. 영화 ‘크롤’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