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4) 견인의 교리에 근거하여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십시오!
1) 올바른 방향의 중요성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9:26)
아무리 빨리 달려도 다른 방향으로 달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칭의는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칭의는 '이미'와 '아직'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 전자만 알면 방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구원의 첫 열매인 '이미'의 칭의에만 관심을 갖고 살면 '세상적'이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아직'의 칭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칭의에는 '이미'와 '아직'이 있으므로, 궁극적인 구원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버림받음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적인 구원을 목표로 삼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바울은 좋은 모범입니다. 바울은 칭의를 '이미'와 '아직'의 구조로 이해했습니다(고전 9:23). 바른 방향으로 달려가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권연경 교수님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대로 된 구원 이해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말에 익숙하다. 현재 우리의 삶은, 어느 설교집 제목처럼 '구원, 그 이후'다. 그런데 바로 여기가 혼란의 지원지다. 실제 성경의 묘사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의 일관된 가르침은 구원이 우리 삶의 '최종 목표'라는 것, 그리고 우리 삶은 그 구원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를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성경은 이를 구원의 소망이라 부른다.
베드로전서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중생을 통해 '산 소망에로 거듭나게' 되었다(1:3). 소망의 대상인 구원은 아직 하늘에 보관되어 있고,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1:5). 구원은 '믿음'에 근거한 우리 삶의 '최종 목표'다(1:9). ... 바울은 이를 '달리기' 이미지로 묘사한다. 우리는 구원의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 '푯대'(결승점)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빌 3:12). 이 목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 곧 우리 몸의 부활이다(3:11). 우리는 아직 달리는 중이며, 목표는 여전히 우리 앞에 있다(3:13)."
우리는 마땅히 '이미'의 구원이 아니라 '아직'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긴장을 늦추지 말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이와 크게 다릅니다.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궁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다른 것에 눈을 돌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고 믿고 성공이나 상을 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들은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들의 전부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수가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경주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엉뚱한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깨닫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복신앙에 빠져 세상 사람들처럼 복과 성공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기복신앙을 퍼트린 한국의 모 초대형 교회의 원로목사가 교회 재정을 유용한 것이 보여주듯이, 방향이 바르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에는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고 따라서 회개치 아니하면 버림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인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는 초대형 감리교회의 원로목사도 또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과 달리 세상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전심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른 진리를 통해 구원을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른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진리를 아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진리를 통해 인생의 방향을 수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처럼 궁극적인 구원을 얻기 위해 부단히 달려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주일학교 선생님의 명설교
우리가 궁극적인 구원 즉 구원의 완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바른 방향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를 결정짓습니다.
전에 저의 초등학교 5-6학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셨던 한 선교사님의 간증을 소개해드린 일이 있습니다. 너무 은혜스럽고 보배로운 간증이라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에 이어 이 책의 첫 부분에 다시 실었습니다. 하루는 저와 그 선교사님, 같은 교회 출신의 통합 교단 목사님 이렇게 셋이서 수양관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짧지만 지금까지 제가 들은 설교 중 최고의 설교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제가 그때 들은 것을 그대로 잘 구현해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성경구절을 본문으로 선교사님께서 다른 선교사님들과 선교지의 영혼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중 어느 것이 보이십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세상 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좇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것을 바라보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그 나라를 사모하고 그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땅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참 증거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신자들과 똑같이 세상 것만 보인다면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만 진정으로 거듭난 자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다소 풍유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우리들 모두에게 너무나 필요하고 귀한 메시지입니다.
목표는 사람의 눈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 속에서 실제로 보입니다. 생각도 일종의 눈입니다. 우리는 생각의 눈으로 우리가 목적하는 것을 수시로 봅니다. 거듭난 사람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목표이기 때문에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치 나그네가 항상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마음속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습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습니다."(2절) 그 대표적인 예가 같은 장 13-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윌리엄 레인은 13절에 대해 "믿음은 '미리 보는 것을' 수여했다"고 썼습니다. 양용의 교수님도 "'믿음'은 아직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미래의 사건들을 마치 '실체'를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제공한다"고 썼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믿음을 통해서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미리 본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14절). 참 신자들은 믿음의 조상인 이들 족장들처럼 믿음을 통해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그 나라를 보고 그 나라를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거듭난 사람이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그러하십니까?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의 생각이나 관심이나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천국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천국이 아니라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마귀가 시험 산에서 예수님께 보여준 것과 같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보일 것입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부여주시는 '위엣 것'이 보여야 하고,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보여야 합니다(골 3:1-2, 엡 1:18).
불행히도 마귀가 보여준 세상 것들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궁극적인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목회자들도 궁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큰 교회를 세우고, 인기 강사가 되는 것, 교계에서 한자리하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목사들이 우글우글합니다. 목회자도 신자도 천국을 보지 않고, 불신자들처럼 세상 것들만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타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끝으로, '본다'는 것은 목표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삼으면 그것을 보고 얻기 위하여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 생각을 통해 실제로 날마다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변명을 하든지 실제로 우리 마음에 늘 보이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 말을 하자니 바울의 말이 생각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5-6)
여기서 '생각'은 그냥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붙잡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글라스 무는 이 구절에 나오는 '생각'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한편으로는 사망,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과 평안이라는 대조적인 운명과 연결시킬 '중간 용어'(middle term)로 '생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5절의 '생각하다'(think)와 6절의 '마음'(mind)이라는 단어들 모두 같은 어근의 헬라어에서 나온 것인데, 그 어근은 순전히 지적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이성, 오성, 감정 등 영혼의 모든 기능'을 포괄하는 의지의 전체적 향방(direction)을 가리킨다."
또 홍인규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여기 '생각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머리로 어떤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머리(Murray)는 그 동사를 '...을 사상과 관심과 애정과 목적의 열광적인 대상으로 취한다'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여기서 '생각'은 막연하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원하고 주의를 집중해서 지속적이고 의지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실제적인 우리 삶의 목적과 방향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바울은 그 결과가 단순히 공상으로 끝나거나 좋건 나쁘건 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는 사망이고 하나는 생명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생각이 생사를 좌우합니다.
이것은 조금도 지나친 주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칭의와 견인의 교리를 성경대로 바르게 깨닫고 믿는 자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육의 일을 거부하고 영의 일을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지근하여 막연하게 원하지 않고 뜨거워서 간절히 원하고 실제로 그것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한 대로 육체의 현저한 일들을 행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직 이런 사람만이 진정한 신자이며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반드시 이런 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