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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엔 역사의 향기가 유난히 가득하다.
곳곳에 뜨거운 삶의 자취와 생각의 빛들이 숨어있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로 다루는 '허균(홍길동전의 작가)'은 좀 특별하다.
강릉이 고향이고 서울서 자란 분이라 용인과는 연고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허균이 부친 허엽을 비롯한 양천허씨 묘역이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다.
비운의 죽음을 맞은 조선천재 허균은, 그 관 속에 넣을 주검마저 허용받지 못했다.
서울 일대를 떠돌다 이산 가족이 모이듯, 넋들이 용인에 안착했다.
1968년의 일이다.
무슨 사연이었을까.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이를 계기로, 허균의 사람과 꿈과 죽음을 재조명해 보기로 했다.
허균 묘는 왜 깅릉도 서울도 아닌, 용인에 있을까
허균은 강릉 출신, 서울 건천동서 자라
1569년 11월 3일(음력) 허균이 태어나던 무렵, 부친 허엽은 강릉 초당동과 서울 건천동(현재 오장동부근)에 집이 있었다.
허균은 강릉에서 태어나 벼슬하는 아버지를 따라와 서울 건천동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어머니(허엽의 둘쨰부인)는 강릉이 고향인 강릉 김씨다.
허균의 묘는 용인특례시 원삼면 맹리 산자락에 있다.
그의 묘는 어찌하여 연고를 다 떠나 이곳에 와 있을까.
허균 묘뿐만 아니라 허엽 일가의 묘소가 모두 용인에 모여있다.
원래 허엽 일가의 묘들은 서울 서초동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1968년 서초동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무덤들은 용인으로 가지런히 옮겨진다.
그것이 용인 양천허씨 묘역이다.
지난 10월 23일 용인소식 취재팀이 현장을 찾았다.
좁은 길을 돌아 산길로 진입해야 나오는 묘역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친절한 안내 간판이 더 필요해 보였다.
인터넷 지도를 활용해 접근할 수 있었다.
비교적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고 묘들은 양지 바른 언덕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래에는 너른 풀밭이 조성되어 비로소 온가족이 모인 집의 마당처럼 트인 시야를 확보한 공간이었다.
1968년 서울시 용인으로 집단이주한 묘들
묘역 입구에는 이곳으로 옮겨올 당시에 세운 천봉기념비가 보였다.
기념비석 옆에는 허엽(1517~1580)의 신도비가 보인다.
이 비석은 양사언과 적봉 한호가 글과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양천 허씨 묘역에는 허엽 외에도 허실(1574~1629 조카), 허균(1569~1618), 허봉(1551~1588, 친형), 허성(1548~1612 아복형),
허엽의 부친인 허한(허균의 조부), 허구(1514~1601 백부)의 묘가 모여있다.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의 묘는 남편 김정렵(1562~1592)이 묻힌 광주시 초월읍 가월리에 있고
용인 가족묘역에는 시비 난설헌 시비만 서 있다.
묘의 풍경들만 보자면 평온해 보이지만 이들의 무덤은 참혹한 기억을 함께 묻어 놓았다.
안쪽으로 들어간 가운데쯤에 허균의 묘가 보인다.
그는 당시 대역죄인으로 몰려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았다.
3천번 이상으로 살점이 잘렸고 그 뒤에 목을 배었다.
역모의 죄인이었기에 누군가 나서 그의 시신을 거둬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시 아전 박충남은 허균의 머리를 가져가 장사를 지내려다가 그곳을 지키던 군사들과 승강이를 벌였다.
이 일로 고발당해 박충남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의 묘 아래엔 묻힐 것이 없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뒤 많은 이들이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헸지만 허균은 여전히 역적이었다.
성도 부르지 못했고 그냥 균 한 글자만 불렀다.
그가 체포된 뒤 모든 일가와 관련 인물들이 줄줄이 잡혀갔다.
사위 이사성, 조카 허채, 허보, 허신 등이 의금부로 잡혀가 국문을 당했으나 저마다 '허균과 친하지 않았다'고 호소하여
화를 면하기도 했다.
허균 가묘 조성은 20세기 초
그의 가묘가 조성된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
허균의 가묘가 조성되었다고 신원회복이 된 건 아니었다.
양천 허씨 종친회가 정부에 허균의 신원 회복을 요청하는 청원을 올렸고 가문 차원에서 복원 운동을 벌인 것은 1999년이었다.
묘역 가장 높은 곳에 묘는 허균의 부친 허엽과 부인의 합장묘다.
1618년(광해군 10년) 아들 허균이 처형당할 무렵, 허엽은 부관참사(죽은 이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목을 베는 형벌) 형을
당했다.
허엽의 묘비 가운데에 보이는 두 동강 난 자취도 그 무렵의 수난이었을 것이다.
양천 허씨 선영엔 한떄 비만 오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위령제를 지냈다.
'허균을 아예 없었던 자식으로 생각하소서' 그렇게 절을 올린 뒤에는 울음이 사라졌다고 한다.
한 가문 전체가 풍비박산한 원통한 사건 앞에 이런 이야기들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비운의 천재들 '허씨 5문장'
당시 '허씨 5문장'이란 말이 있었다.
시문에 뛰어난 허엽, 허난실헌, 허균, 허봉, 허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섯 사람이 모두 끝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 허엽은 말년에 경상감사로 나갔다가 관직에서 해임되고 돌아오는 길에 상주에서 객사했다.
누나 허난실헌은 고생 끝에 요절했고 허균은 말로가 최악이었고 친형 허봉은 종성군에 유배 갔다가 풀려나 방황하다가
38세로 요절했다.
이복형 허성은 광해군의 생모(공빈 김씨) 추숭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받고 4대문 안 출입금지 명령을 받고
광주부에 은거하다가 병사했다.
글쟁이 천재들의 불운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가 갈등의 난세였기 때문으로 봐야할지도 모른다.
'난설헌 시비' 시를 풀어보니
묘역을 나오는 길에 양천 허씨 집안의 자녀이지만 시집을 간 여성이라 '시비' 하나로 서 있는 '난설헌' 앞에 잠시 섰다.
영영창하란 지엽하문방
서풍일파불 영락비추상
수색종조췌 청향종불사
감물상아심 체루점의메 '감우' 허난실헌(1563~1589)
하늘하늘 창가의 난초꽃
가지마다 잎마다 그려도 향긋하더니
하늬바람 한 번 스치니
뚝 떨어졌네 슬프게도 가을서릿발에
뺴어난 빛 여지없이 아울고 초췌해졌는데
맑은 향기는 끝내 죽지 않았네
그 모습이 나인 듯 마음을 아프게 하여
눈물이 주루룩 옷소매 젖네 '문득 느낀 바 있어' 허난설헌
저 작품에선 '감물상아심'이 마음을 움직인다.
난초 꽃이 떨어져 마르고 있지만 그 향기는 그대로이다.
난설헌의 심정이 이렇지 않은가.
난초가 가엽워서 우는 게 아니라 시든 난초로 남은 향기를 어찌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우는 중이다.
저 시를 난설헌의 대표작으로 꼽아 '시비'를 세운 사람은 누구일까.
그의 불운을 염두에 두고 저 시를 골랐을까.
호가 난설헌이나 난초 들어가는 시가 걸맞다고 여긴 걸까.
그가 난설이란 호를 쓴 것은 서릿발에 쓰러져 향기만 씩씩거리고 있는 난초가 아니라
세상의 추위에도 도도히 피어나는 꽃이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저 시의 마지막에 무너져 우는 그의 눈물이 허씨 묘역 전반을 떠도는 깊은 슬픔을 전해주는 듯 하다.
영원한 역적?...허균은 인본주의 외친 근대인이었다.
형 허봉을 통해 알게된, 서열 출신 스승과 스님
1617년 폐모론으로 갈등이 있었을 때, 48세 형조판서 허균은 폐모를 주장했고 영의정 기자헌은 반대했는데
이 일로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간다.
허균은 이후 좌참찬에 임명된다.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허균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가 혁명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황에서 이이첨이 등을 돌리면서 허균은 형신(조인 신문)도 받지 않고 결안(사형죄 확정문서)도 없이 사형을 당한다.
허균의 역정을 돌아보면 왜란과 반정에 이르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에 경쟁의 큰 바구니에서 순식간에 제거된 비운의 천재라고 볼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시대를 견인할만한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당시의 체제에서 그를 돋보이게 했던 것은 탁월한 문학적 역량을 바탕으로 대중국 외교에서 실력을 발휘했다는 점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인이었다.
난리통에도 시인이었고 관직에 있을 때도 시인이었고 탄핵당해서 쫓겨나서도 시인이었다.
이 점은 허균의 삶과 생각을 조명하는데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임진왜란 피난시절인 24세떄(1593년) '학산초담'을 쓴다.
허균의 시대에 활동하던 시인들의 이야기와 시평이 담긴 책이다.
영원한 시인이었던 허균
38세때(1607년) '국조시산'을 펴냈다.
조선의 시를 엄선한 시집이라는 의미다.
깎아낼 자를 쓴 것은 시에 미달하는 것을 칼같이 뺐다는 얘기다.
정도전에서 권필에 이르기까지 35명의 시를 분류해 비평을 실었다.
홍만종의 '시화총람'은 허균의 이 시집을 조선 최고의 시 모음집이라고 평가했다.
허균은 자작시도 꾸준히 썼다.
31세때 예조정랑 시잘엔 '남궁고(자작시 15수)'를 썼고, 38세때 내자시정으로 있을 때에는 '태관고(저작시 18수)'를
40세 형조참의 시절엔 '추관록(저작시 13수)'를 썼다.
41세때인 1610년경 전라도 함열현에 유배갔을 때는 '성수시화'를 썼다.
최지원부터 허균의 시대까지 800년간의 시와 시화를 모아 품평하고 정리했다.
1611년 42세때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낸다.
이듬해인 1612년 그는 절필을 선언한다.
벗이었던 석주 권필이 시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을 본 뒤였다.
권필은 왕실 외척 유희분의 방종을 풍자하는 '궁류시'를 썼다가 해남으로 유배가던 중 술을 폭음한 뒤 동대문 밖에서 눈을 감았다.
허균은 또 5편의 전(전기소설)을 썼다.
'손곡산인전'은 첩의 아들이었던 스승 이달의 전기다.
'남궁선생전'은 아전의 이야기며 '장생전'은 거지천민의 전기다.
'엄처사전'은 몰락한 양반의 스토리고 장신인전은 중인을 다뤘다.
홍길동전은 논란이 있으나, '수호전을 모방하여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록한 허균의 제자 이식의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
허균은 논설도 여럿 남겼다.
호민론은 '천하에 두려워할 자는 백성 뿐이며 그 중에서도 호민이 가장 두렵다.
사회가 어지러울 때 호민을 중심으로 응집하여 봉기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유재론은 '하늘이 재능 있는 사람을 냈는데 사람이 문벌과 과거로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 병론은 '양반 사대부들이 군대에 가지 않기 때문에 군사가 적다'고 적고 있다.
정론은 '당파싸움이 성행하는 것은 국주의 처신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고 학론은 '참다운 학자를 제대로 등용하여 경륜을
펼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도교와 불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단으로 유교를 능멸한 것이 아니라 '유학을 높여 선비의 습속을 맑게 하면서
부처의 인과의 화복으로 인심을 깨우치면 그 다스림은 다르지 않다'는 견해에 바탕한 것이었다.
도교에 관해서는 '한정록'에 기록해 놓았는데 은일과 한 적과 퇴휴로 유유자역하는 이들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그는 근대적 사유'에 가까운 인본주의자였다
허균이 조선의 성리학자 지배질서와 왕조의 체제에 대한 이견과 불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천재시인으로 살아냈던 난세에서 그의 시적 정의와 문학적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형의 세계를 그리워한
것이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통합되는 질서 속에서 일탈과 방종의 행위를 보였던 것도 그런 의식의 발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근대적 사유체제에 가까운 인본주의 혹은 민본주의가 상당한 수준으로 그의 내면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점이다.
서얼차별에 대한 문제의식, 양반제도에 대한 비판, 당쟁과 군주시스템의 문제, 지속적으로 고통받는 하층민에 대한 시선,
이런 것들이 그의 사상을 이루는 시적 정의의 발로였다.
조선 왕국이 그를 참살한 까닭은 그의 행위가 위험해서라기보다는 그 질서의 근본적인 가치를 질문하는 허균의 다각적인 언어
행각들이 갈수록 불편해지기 떄문일 수도 있다.
홍길동전은 조선 양반사회의 모습을 공격한 '위험한 생각'의 출격이었다.
사회적 약자에 세심한 시선
세숫대야를 똑바로 들고있는 작은 부엌
섬돌 향해 무릎 꿇고 술과 즙을 올리네
궁궐 안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피할 일 없건만
평생동안 임금님을 뵌 적이 없으니
이반직수소주방 궤향요지진주장
봉착내가유불피 일생중미식군왕 궁사, 궁궐노래 83
당대에도, 후대에도, 지금까지도, 허균에 대해 지니는 상당한 선입견은 그가 괴팍하고 오만하며 음험하고 사나운 성정을 지닌 '머리 좋은 좌충우돌'이었을 거라는 짐작이다.
그의 삶과 사건들에서 드러난 결과나 양상에서 그런 추론을 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의 행위와 언행과 시문들 속에는 인본주의 라는고 부를 수 있는 평등감각과 자유감각 같은 것이 느껴진다.
허균은 일탈한 강자나 기회주의적인 승자나 무도한 권력에 대해서는 가차없었다.
하지만 그 떄문에 고통받는 약자에겐 한없이 부드럽고 세심했던 측면이 있다.
1610년 그의 나이 41세 때 쓴 시리즈 시편인 '궁사'는 당시 궁녀들의 속내와 애환을 다룬 놀라운 리포트였다.
(허난설헌 또한 여성적 감각으로 '궁사' 시리즈를 썼다.)
한 남자가 왕답게 살기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인갑답게 사는 것이 제한되고 금지되었다.
누가 이 위험한 비밀을 감히 입에 올리며 시를 쓰겠는가.
그 시행이 품고 있는 인간애와 정밀한 감정이입을 읽노라면, 이 체제와 권력의 반인권적이고 일상적인 비행이 깊은 측은지심에 얹혀, 읽는 이의 혀를 차게 한다.
허균이 제대로 이해되어야 하는 지점은 여기에서 출발해야할지 모른다.
조선은 왕의 나라와 일부 권력집단의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의 나라이며,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내는 인간들이 이뤄가는
나라임을 깨닫게 하지 않는가.
이것이 허균의 힘이다.
3천 갈래로 찢어 죽어야 했던, 그 체제가 거부했던 '근본적인 혁신의 시선'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투철한 연민, 조선 역사에 이런 시인의 심장을 지닌 아름다운 이가 또 있었던다.
시인 허균, 난설헌과 허봉, 매창...그들이 나눈 시의 향기
허균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조선이 낙인찍은 대역죄인의 굴레 떄문에 그의 진면목이 대부분 가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는 조선은 물론 중국에서도 갈채를 보낸 걸출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곧 삶이기도 했다.
그의 시와 그의 누나인 난설헌이 형인 허봉에게 보낸 시, 그리고 매창이 그에게 보낸 시를 읽으며 시적 향기가 가득했던
그 삶을 돌이켜본다.
그는 오랜 뒤에 용인에 묻힐 것을 예감했을까.
기이하게도 함께 용인에 잠들어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며 옲은 시가 남아있다.
두 분 다 비명에 가셨으니 회한이 없을 수 없겠지만 죽음에도 대의를 살핀다면, 세상의 바른 도리를 향한 투철한 소신이 닮아있다.
두 분의 넋이 함께 용인에 깃든 것은 우연만은 아닌 듯 싶다.
1. 포은을 생각하며 교산 허균이 쓰다
능지처참으로 죽은 시인의 철퇴에 맞아 죽은 시인에게 '그 죽은이 재앙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
말은 맞지만 기승전결을 알게되는 후손으로서는 비감과 깨닫음을 함께 맛본다.
포은 선생은 고려말에 사신 분으로
충절이 늠름하게 꽉 차서 누가 앗을 수 있는 게 아니네'
어찌 단지 성리학을 이땅에 전한 분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로만 따지겠는가.
포은 공은 나라를 어찌 살려야 하는가 그 암벽에 서 있었다네.
송악산 고려왕조 기운은 500년으로 끝이 나고
이성계 건국몽인 금척(금으로 된 자)이 밤에 수강궁에 내려왔네
포은 공은 큰 띠를 드리우고 얼굴빛도 변하지 않은 채
호랑이나 표범처럼 은거하며 깊은 숲에서 도사렸네
선죽교에 뿌린 한 바탕의 피는 백이 숙제가 긂어죽은 서산처럼 이름이 치솟았네
도읍은 남쪽으로 옮겨지고 왕조와 시장은 텅 비었지만
옛 사당의 향불엔 아직 향기가 나네
안경창(동행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집터를 찾아가니
무너진 담장에 풀덩굴이 돋아 뒤엉켰네
산바람 쓸쓸하고 빚는 해는 어둑해지는데
짙은 안개가 숲을 덮고 새들은 슬피운다.
허무하구나 옛일을 슬퍼하며 눈물을 닦는다
어진 이는 복받는다더니 하늘이 어찌 헷갈리는가
사내 한번 죽는 일 회피하긴 정녕 어려우니 차라리 마음 먹건대 이 몸을 장차 충의에 바치리라
그대 못봤는가.
삼군부 안에 창칼 쭉 세워놓고
왕을 기만하여 왕자의 차례 바꿔 하늘을 거역한 것을
꾸민 일이 끝나자 마자 사회(남조시대 송나라의 중서령)는 죽었으니
선죽교 가운데서 갑자기 죽음을 당한 일이 재앙만은 아니로다. 허균 '정몽주 옛집을 지나가며'
이 시는 1598년에 씌워진 것이다.
허균의 나이 29세 때다.
이 젊은 천재가역사를 어떻게 들여다 보는지 그 왕조의 현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시 속에 녹아있다.
1597년 봄에 그는 정9품 검열 겸 춘추기사관 세자시강원 설서로 임명되었지만 몇 달 못가 파직을 당했다.
4월에 문과 시험이 이었는데 여기에 1등을 한다.
정6품 예조좌랑이 벼술이 뛰어올랐다.
여름에 중국에 원군을 청하는 사신의 수행원으로 갔고 10월에 병조좌랑이 된다.
1598년은 그 이후 중국의 장군과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한 출장이 잦았던 때였다.
그리고 병조좌랑이 되어 평안도를 다녀왔다.
이때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송도)에 들렸을 것이다.
초은 정몽주가 살던 옛집을 지나면서 감회가 있었다.
원래 성격이 활달하지만 한창 잘나간던 떄라 그런지 시 속의 분위기도 장쾌하고 거침없다.
신숭은 개성 송악산의 다른 이름이다.
금척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 전에 꿈을 꾸었는데 신선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를 주었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말이다.
수강궁은 현재의 창경궁 자리에 있던 고려시대의 궁궐이었다.
조선 초기에 이곳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다.
이 묘사를 보노라면 허균이 왜 조선 제일의 시인인지 절로 실감하게 된다.
스산한 풍경만을 가만히 짚어나가면서 극한의 비감을 끌어올리는 솜씨.
정도전이 일을 꾸며 조선 창업을 이룬 뒤에 죽게 되었다는 것을 비유하며 선죽교에서 죽은 '충의'가 결코 잘못된 선택이나
억울함만은 아니었다고 허균은 주장한다.
이 죽음을 생각하며, 그 또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더욱 참혹한 죽음을 알고 있고, 그 죽음 이후 조선이 끝나는 내내 '역적'으로 낙인 찍혀 역사에서 내려졌음도 알고
있다.
이 죽음은 '재앙'이런가.
결국 천지가 어지러움을 벗겨 그 충의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는 것인가.
2. 오빠 허붕이 난설헌에게 쓰다
홍문관 시절 오아이 내려주신 붓이란다.
가을 여동생의 방에 마음을 담아 보내니 풍경을 보며 여흥을 즐기렴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달빛도 그려보고
등불을 따라 가며 벌레와 물고기도 담아보렴 친오빠 허붕이, 여동생에게 붓을 보냄
선조구사문방우 봉가추규완경여
응향오동묘월색 궁수동화주충어 허봉 '송필매씨'
홍문관을 맑은 벼술이라 불렀는데 청황ㄴ에 근무하는 이를 선조(신선나라)라고 일컬었다.
허분은 1583년에 홍문관에서 지낸 일이 있다.
그떄 왕에게서 받았던 붓을 가을날 쓸쓸한 규방에서 지내고 있을 여동생 난설헌에게 보낸다.
시름을 풀 겸 해서 오동나무의 달빛이나 불빛 속의 벌레와 물고기를 그려보라고 권한다.
귀한 것을 멀리 있는 여동생에게 선물하는 풍경도 눈을 아련하게 하지만
천재 난설헌의 외롭고 답답한 처지를 늘 걱정하는 마음이 내가 마치 오빠인 것처럼 짚이기도 한다.
난설헌은 1589년 26세로 돌아갔다.
1583년과 1589년 ㅅ이 이 시와 성ㄴ물이 오갔을 것이다.
그가 오빠 마음을 떠올리며 그렸을 충어도나 오동나무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3.난설헌이 오빠 허붕에게 쓰다
어둑한 창에 은빛 촛불이 나즉하다
어지러히 나는 반딧불은 누각 높이까지 오르고
이 걱정 저 걱정 깊은 밤은 싸늘하고
쓸쓸히 쓰쓸히 가을잎 지는데
오빠 계신 변방에선 소식도 없고
예민해진 근심거리를 놓을 수가 없네
멀리 청운궁을 떠올리니
산은 휑하고 담쟁이덩굴에 달빛만 희다 기하곡 허난실헌 오빠 하곡(허붕의 호)에게
4.매창이 허균을 그리워하며 쓰다
그리워하는 일은 도리어 말 못하는 것 속에 있도다
하룻밤 마음을앓으니 머리카락 절반이 하예진 듯
이 몸이 얼마나 그리워 괴로웠는지 아시러거든
쪼그리는 금반지를 한 번 보세요 매창 이계량(규원)
상사도재불언리 일야심회빈반사
욕지시첩사앗고 수시금호나감구위
허균은 시인 매창의 두 번째 사랑이었다.
그와 그녀는 두 번 만났다.
네 살 위인 허균을 매창은 28세 때 한 번 보았고, 7년 뒤인 35세 때 다시 보았다.
매창이 허균을 그리워하며 거문고를 뜯었다는 소문이 있자, 허균은 짐짓 농담을 섞어 '그 소문 떄문에 내게 허물이 생겼다'며
원망하는 편지를 썼다.
매창은 답신을 보내 '그것이 어찌 나으리의 허물인지요?'라고 따졌다.
허균은 '한 무덤에 묻히고자 약속했으니 그대 허물이 나의 허물이 아니오?라고 말했고,
매창은 '송도의 황진이와 화담 선생이 한 무덤에 묻혔습니까?
제가 말씀드린건, 화담과 먕월처럼 되자고 약조한 것이었지오'라고 답했다.
허균은 '우린 동침한 일이 없으니, 화담과 명월보다 한 수 위가 아니오?'라고 했고 '우리가 이승에서 동침하지 않은 건, 무덤에서 영원히 함께 동침하기 위함이 아니었느냐'고 매창은 응수했다.
이런 편지를 나눴던 두 사람 사이의 그리움이 절절히 읽히는 시다.
허균 '홍길동전'의 실제 인물이 일본에 건너갔다?
한때, 홍길동전은 허균이 지은 작품이 아니라 는 연구발표로 시끌시끌한 적이 있다.
이윤석 교수(전 연세대 국문학교수)는 황일호(1588~1641)가 쓴 노혁전을 공개했다.
노혁전은 황일호의 '지소선생문집'에 한자로 씌어져 있는 홍강동전이었다.
황일호는 전주 판관으로 근무할 때인 1626년 전라감사 종사관(임계)에게서 홍길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힌다.
홍길동은 15세기 초 실존 인물?
노혁전에서는 '노혁의 본래 성은 홍씨이고 이름은 길동이니 우리나라 명망있는 집안이다'라고 말하고
그에 관해 '뛰어난 재주를 품었고 글에 능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윤석은 이와 관련해 허균이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노혁전이 나왔다고 해서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추가 증거'의 제시가 필요해 보인다.
홍길동은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었으며 허균이 당시 떠도는 민담과 기록들을 참고해
소설을 만들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는 어렵기 떄문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근거는 백당 이식의 백당집에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구절이다.
이 소설에는 17세기 도둑인 장길산이 등장해 허균 자작설이 읫ㅁ케 하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조선소설의 특징인 이야기 전달자들의 가필과 윤색이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홍길동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남아있다.
'연산군 6년(1500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 우의정 이극균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실록에는 이외에도 1588년(선조 21년)까지 홀길동이라는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고 한다.
이 역사적 인물에 대해 민담들이 떠돌았고 허균이나 20년쯤 뒤의 사람인 황일호는 허군의 소설을 보고 참조했을 수도 있고
그냥 다른데서 들은 이야기즐만으로 정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황일호 '노혁전'과 홍길동의 형 홍진동?
노혁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40년간 도둑들을 이끈 홍길동은 갑자기 '대장부가 변화를 당해서는 매미가 껍질을 벗는 것 같아야 하니 나는 마당히 지금부터
새사람이 될 것이다'라며 무리를 해산했다.
그는 관서의 관찰사 홍진동에게 몸을 의탁했고 여자와 결혼해 자식을 많이 맣았으며 천수를 누렸다는 것이다.
저 관찰사의 이름이 우선 흥미롭다.
허균은 홍길동을 홍길동이라고 쓰고 있으나 황일호는 홍길동이라고 쓰고 있으면 실록에도 동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홍진동은 서자 홍길동과는 달리 적자로 벼슬에 올랐던 집안의 형제였을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조정에서도 초미의 관심을 기울였던 도적을 도지사인 형제가 이렇게 품어줄 수 있었는지는 '소설공간' 안에서 따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해피엔팅을 위한 장치로 이해할 수는 있다.
저렇게 처리할 수 밖에 없는 홍길동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민담'이 재대로 추적하지 못했기 떄문이 아닐까.
연산군 시절인 1500년 실록은 '홍길동을 잡았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그는 처형되지 않고 남해 삼천리유배형(국외추방형)을 받았다.
소설에서는 조정이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그는 조선을 탈출해 중국 난징 근처의 섬에 도착해 유력자가 되었고
이후 다시 멀리 남쪽 섬으로 가서 율도국을 차지했다고 말하고 있디.
'홍길동이 1500년에 일본 섬으로 들어왔다'
오키나와 현립 도서관 사서였던 가데나 쇼도쿠는 그 지역 일대의 자료와 유적지를 연구한 끝에,
홍길동이 1500년 12월 5일 그를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파조간도(파도에 비치는 사잇섬, 하테루마지마)에 들어온 것을 밝혀냈다.
가데나 쇼도쿠는 작고한 학자인데 이분의 이 글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발표됐었는지는 찾기 어렵다.
즈다만 이 일본학자의 발표를 계기로 홍길동의 율도국이 오키나와라는 주장들이 힘을 얻어왔다.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을 지낸 강철근교수는 2010년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람의 나라'라는 소설을 써서 출간했다.
홍길동의 무리는 1501년부터 1503년까지 인근 석원도의 대진촌(큰바닷가마을, 오하마무라) 후루수토에 마을을 조성해 살기로 했다.
홍길동은 주변의 죽부도(다케토미지마), 서표도(이리오뫁지마), 여나국도(요나구니지마)를 지배했다.
1504년에는 궁도도(미야코지마)를 슥격했다.
궁고도는 나카소네라는 지배자가 있었는데 세금 착취와 독재로 민심을 잃고 있었다.
그곳 주민들과 합세해 나카소네를 섬의 동북부 숲으로 쫓아낸 홍길동은 궁고도에 조선인 초가집 마을을 만들었다.
현재도 초가가 8채 남아있다고 한다.
세력을 키운 홍길동은 1505년에 구미도(구메지마)로 들어가 섬의 지배자인 마다후쓰를 몰아내 영토를 확장했다.
홍길동은 자신의 영토에 조선 양식의 성을 쌓았고 동중국해에서 일본과 유구족, 중국을 상대로 해상무역을 했다.
현재 일본 자위대의 레이더 기지가 설치되어 있는 우강성(우에구스쿠)은 홍길동의 장남이 쌓은 성이며 중성(나가스쿠)은 차남이 조성한 성이라는 설이 있다.
홍길동은 유구국의 최남단에서 시작해 '민중의 제왕'으로 떠올랐고 유구국에 맞서는 세력으로 성장했으나 왕국의 토벌로
패배하고 말았다.
석원도의 대빈촌에 있는 기원공원에는 1953년 4월 6일에 조성된 오야게 아카하치의 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오야게 아카하치의 병명이 홍가와라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있고 자유인권운동의 선구자로 기록되어 있다.
홍가와라는 보타케가와(무기를 숨긴 개울), 호리카와하라(굴이 있는 개울서 온 사람), 타모츠무라(무기를 숨긴 기왓장) 이라고도 불렀다.
이 사람은 석원도의 대빈촌을 근거지로 한 15세기 말의 호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바로 홍길동이라는 얘기다.
석원도 시립팔중산박물관에는 홍길동의 출생년도가 기록된 족보가 보존되어 있다.
또 조선에서 가져간 농기구와 화폐도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석원도에서는 홍길동의 부인인 고올노가 풍년을 가져다주는 여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첫 정착지였떤 파조간도에는 홍가와란의 탄생비와 처남인 장전대주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었고,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 섬을 지배했다는 이야긴ㄴ '설화'로 전해지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적인 사실에 부분적으로 근거를 지니고 있어서 문학적 상상력을 돋우는 대목이다.
소설과 역사 사이에 지워진 경계, 어쩌면 허균은 그 속으로 틈입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허균이 꿈꾼 '새로운 세상'이 그저 문학적 상상력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동기와 동력을 지닌 시대의 절실한 욕망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용인소식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