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黨爭史3 - 東西의 葛藤
선조1)는 吏曹의 의견도 묻지 않고 特旨로 金孝元2)을 경흥부사3)로, 沈義謙4)을 개성유수5)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선조가 심의겸을 擁護하고 김효원을 排斥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동인들은 의심하고 공포를 느끼어 盧守愼6)과 李珥를 탓하였다. 노수신과 이이는 다시 아뢰어 효원을 삼척부사로 가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효원이 연소사류들의 추앙을 받아 기세가 성하매 전배사류들은 그것을 미워하면서도 겁을 내어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이는 그것이 장차 조정의 불화한 張本이 될까 하여 외직으로 보내자는 말을 내었다. 그러나 우선 진정시키자는 것이요, 깊이 追究하려는 뜻은 없었다. 그러나 효원이 배척을 받아 밖으로 쫒겨나자 서인들은 더욱 과격하여 기세를 얻어 동인들을 누르려 하였다.
노수신은 처음에는 동서에 관련이 없었는데 이 때에 와서 서인들은 수신을 동인으로 지목하여 그를 배척하였다. 이이는 서인들을 극력으로 말렸으나 서인들은 도리어 이이의 태도가 모호하다고 공격하였다. 李海壽7)는 이이를 보고,
"김효원은 반드시 일을 그르칠 소인인데 君이 그의 用心을 모르기 때문에 위에 아뢸 때에 시비를 가리지 않고 모호하게 아뢰었다."
하였다. 珥는 "나는 군들처럼 인백을 소인으로 보지 아니한다." 하였다. 鄭澈8)도 남방으로 가면서 이에게 효원을 배척하기를 권하였으나 이가 듣지 아니하였다.
서인들은 효원을 이렇게 미워하는 반면에 동인들은 효원을 쓰지 않고 내보낸 데 대하여 불평이 많았다. 大諫9) 洪聖民10)이 이이를 보고, "持平11) 李誠中12)을 彈核하려 한다." 하였다. 이는
"이것이 웬 말인가? 李는 허물이 없고 남과 다투려는 사람도 아닌데 다만 仁伯과 깊은 교분이 있는 것뿐이다. 인백도 공격해서 안 되는데 하물며 그의 친구라 하여 공격하겠단 말인가!"
하였다. 성민 등 서인은 마침내 성중을 탄핵하여 職을 갈아 버렸다. 사류들은 더욱 놀래었다. 이이는 "상하에 다 믿음을 받지 못하니 나는 물러가겠다." 하고 서울을 떠나면서 송별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 正論을 할 터이니 諸公은 들어 보시라. 奸臣이 濁亂을 일으킬 때에 그것을 肅淸하여 士論을 펴게 한 것이 方叔의 공이 아닌가! 인백이 國事를 하려면 巨室(大家)의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인데 전배를 눌러서 노하게 만들어 사림이 分立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인백의 罪다. 그러므로 그를 눌러 外職으로 보냈으면 할 만큼 하였는데 그 위에 미워하고 공격하기를 너무 심히 하는 것은 前輩의 죄다."
乙亥年13) 10월에 김효원이 나간 뒤로는 서인들의 세력이 勝하였으나 그들의 처리가 정당함을 잃어 公論의 지지를 받지 못하므로 淸名後進들이 동인에 加擔하는 이가 많아졌다. 이 무렵 서인의 强硬論者는 鄭澈이요 동인의 강경론자는 李潑14)이었다. 이이는 이발에게 편지를 보내어
"개인의 優劣을 가지고 온 사림이 血戰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지금 無故히 沈을 소인으로 서인을 邪黨이라 한다면 심은 아깝지 아니하나 서인이 可惜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戊寅年(1578)에 동인들은 서인 尹斗壽 3父子를 공격하여 기어이 제거하려 하였다. 金誠一은 珍島郡守 李銖가 윤씨의 집에 쌀을 보내었다는 소문을 듣고 조정에 말을 내어 대간이 들고 일어나 이수를 잡아 가두고 윤씨 3부자를 罷免할 것을 청하였다. 이수의 쌀을 중간에 맡아서 윤씨 집에 운반해 주었다는 被疑者 市人 張世良은 嚴刑을 받으면서도 自服하지 아니하였다.
金繼輝15)가 지방에 나가 있다가 대간이 3윤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곧 서울에 들어와 윤두수를 옹호하여 아뢰었는데 과격한 말이 많았다. 사류들은 크게 노하여 '망국할 말이다'고 하여 弘文館16)에서 계휘를 탄핵하여 갈아 버렸다. 이발이 탄핵문을 소매에서 내어 3윤 일가의 숨은 허물을 낱낱이 들추어 아뢰었다. 선조는 '동인이 서인을 공격하는 것도 공정하지 못하거니와 계휘가 서인에 편당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동인들이 김계휘를 전라도 관찰사로 내보내어 '불길한 사람'이라 하였다. 윤두수사건은 珍島邸吏의 자백을 받아 3윤을 파면시켰다.
동인들은 청류로 자처하여 날로 기세를 올렸다. 정철과 이발은 사이가 더욱 나빠져서 동인들이 현저히 철을 소인으로 배척하여 다시는 동서가 서로 화합할 가망이 없어졌다. 李珥17)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조정에 벼슬하는 데는 식견을 제일로 하는 것인데 식견이 없으면 비록 현자라도 일을 그르친다. 이번 사류의 싸움은 식견이 없어 일을 알지 못하는 데서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한 번 일을 몰라서 김성일이 발단을 하고, 두 번 일을 몰라서 김계휘가 사류의 노염을 충동하고, 세 번 일을 몰라서 이발이 윤가의 숨은 허물을 들추고, 네 번 일을 몰라서 정철이 이발과 심히 틀려져서 동서협조의 가망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 후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났다. 그 중의 한 가지는 白仁傑18)이 소를 올리면서 동서분당을 언급하는 가운데 이이의 글을 빌린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양사와 옥당에서 이이의 탄핵 여부로 의논이 분분하여 동료들이 서로 대립된 적이 있었다. 이때는 벌써 이이는 서인으로 지목되어 동인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훗날 李植이 李元翼에게 율곡과 동서분당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을 때 원익은 답하지 아니하다가 이식의 청에 이기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언덕 아래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언덕 위에서 타일러 말리다가 취한 두 사람이 듣지 않을 때에 조급한 마음으로 언덕에서 내려와 싸우는 두 사람을 뜯어 말리려 하다가 결국 같이 끌리고 밀리고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이이는 처음에 조정하려고 애를 썼으나 교우관계도 있고 하여 마침내는 서인의 지지와 동인의 배척을 받게 되었다. 辛巳年(1581)에 심의겸의 탄핵사건으로 또 한 번 파동이 있었다.
李珥가 大司憲이 되었다. 이 때 李潑과 鄭仁弘은 沈義謙을 미워하여 기어이 쫓으려 하였다. 지난해에 심의겸, 김효원이 동시에 外職으로 나갔으나 의겸의 開城留守와 효원의 三陟府使는 너무나 엄청난 厚薄差別이 있었고 그 뒤에도 의겸은 내직으로 돌아 왔고 효원은 중간에 司諫의 望에 올랐으나 선조가 許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이 때 流言이 돌기를 「明宗이 돌아간 직후에 의겸이 喪中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宮中을 통하여 벼슬길에 나와서 권력을 차지하려 하였다」고 하였다. 동인들은 그 말을 믿고 憤激하였다.
1) 宣祖 조선 제14대 왕. 初諱는 鈞, 諱는 昖(공). 덕흥군 岹의 아들. 1552년 출생. 재위 1567 ~ 1608. 하성군에 피봉되었다가 명종사후 즉위. 비는 의인왕후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 김씨.
2) 金孝元 1532 ~ 1590 자는 仁伯, 호는 省庵. 본관은 善山. 현감 弘遇의 아들. 문과에 급제한 후 영남에 내려가 退溪, 曺植의 문하에서 공부.
3) 府使 조선시대 지방관직.
大都護府使(정3품), 도호부사(종3품)를 가리키는 말이며,
경주와 같이 종2품관을 배치하는 부의 수령은 부사라 하지 않고 府尹이라 불렀음.
4) 沈義謙 1535 ~ 1587 자는 方叔, 호는 巽庵. 본관은 청송.
영의정 連源의 손자. 청릉부원군 綱의 아들. 인순왕후의
동생. 스물 한 살에 진사가 되고 1562년에 문과에 급제.
대사헌에 이르고 세습으로 청양군이 되었음.
5) 留守 수도 이외의 別都 또는 行宮의 소재지에 두던 특수한 지방장관. 일명 留後·留臺·留司·留相·居留. 임금을 대신해서 머물러 지킨다는 뜻이다. 유사란 명칭은 漢나라때에 있었는데, 임금이 서울 밖에 나가있는 동안 서울을 대신 지키던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995년 처음 유수를 두었고 고려 일대를 통하여 3京의 유수제도가 계승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옛 서울인 開城에 유후를 두었다가 1438년에 유수로 고쳤으며, 廣州·江華·水原·春川에 유수를 설치하였다. 유수의 정원은 2명으로서 1명은 관찰사가 겸임, 품계는 正·從 2품이었으며 유수가 설치된 고을은 법제상으로 중앙관직에 속했다.
6) 盧守愼 1515 ~ 1590 자는 寡悔, 호는 蘇齋. 본관은 광주. 장인 李延慶에게 배우고 20세 때 博士로 뽑혔고, 27세에 李彦迪을 찾아 크게 啓發되었다. 154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初試·會試·殿試에 연달아 장원하여 成均館典籍·侍講院 司書를 거쳐 퇴계와 같이 독서당에 뽑혔다. 1585년에 영의정 1589년 정여립의 난으로 파직됨.
7) 李海壽 1536 ~ 1599 자는 大仲, 호는 敬齋·藥圃.
영의정 鐸의 아들. 1562년 문과에 급제. 詩와 筆法에 능통.
8) 鄭澈 1536 ~ 1593
자는 季涵, 호는 松江. 본관은 延日. 판관 惟沈의 아들.
서울 출생. 어려서 金麟厚, 奇大升에게 배우고 1562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 典籍이 되었다가 1567년 이이와 함께 湖堂에 들어갔다.
9) 司諫院 조선시대 諫爭·論駁을 맡은 관청. 1402년에 설치.
별칭으로 薇院이라 부른다. 정원은 大司諫(정3품) 1명,
司諫(종3품) 1명, 獻納(정5품) 1명, 正言(정6품) 2명으로
이들을 6방으로 나누어 番을 들게 하고, 諸司·各道에
명령을 내릴 때에는 먼저 사간원에서 이를 논의하였다.
諫言을 듣는 것은 임금의 주요한 미덕으로 되어 있었으며, 諫官이 오래 所言이 없으면 처벌하는 일조차 있었다.
연산군 때 잠시 폐지되었다가 중종 때 복귀하였다.
사간원의 하급관리로는 書吏 19명, 庫直 1명, 喝導 15명이있었다.
10) 洪聖民 1536 ~ 1594
자는 時可, 호는 拙翁. 본관은 南陽. 관찰사 春卿의 아들.
진사에 1등하고 1564년 明經試에 급제. 심의겸과 교의가
두터웠고 대사헌, 대제학, 호조판서 등을 역임함.
11) 司憲府 조선시대 감찰행정을 맡은 관청.
별칭으로 栢府·霜臺·烏臺 등이 있다. 조선시대를 통하여 표준이 된 직제는 대사헌(종2품) 1명, 執義(종3품) 1명, 掌令(정4품) 2명, 持平(정5품) 2명, 監察(정6품) 13명으로 되었고 書吏 39명이 있었다.
12) 李誠中 1539 ~ 1593
자는 公著, 호는 坡谷. 종실 계양군 增의 5세손.
1570년 문과 급제. 1593년 군량 책임자로서 영남에 내려가 대군의 병량을 보급한 후 咸昌에 이르러 심신의 피로로 기진맥진하여 죽음.
13) 宣祖代의 연대 戊辰(1568) - 己巳(1569) - 庚午(1570) - 辛未(1571) - 壬申(1572) - 癸酉(1573) - 甲戌(1574) - 乙亥(1575) - 丙子(1576) - 丁丑(1577) - 戊寅(1578) - 己卯(1579) - 庚辰(1580) - 辛巳(1581) - 壬午(1582) - 癸未(1583) - 甲申(1584) - 乙酉(1585) - 丙戌(1586) - 丁亥(1587) - 戊子(1588) - 己丑(1589) - 庚寅(1590) - 辛卯(1591) - 壬辰(1592) - 癸巳(1593) - 甲午(1594) - 乙未(1595) - 丙申(1596) - 丁酉(1597) - 戊戌(1598) - 己亥(1599) - 庚子(1600) - 辛丑(1601) - 壬寅(1602) - 癸卯(1603) - 甲辰(1604) - 乙巳(1605) - 丙午(1606) - 丁未(1607) - 戊申(1608)
14) 李潑 1544 ~ 1589
자는 景涵, 호는 東菴. 본관은 光州. 伸虎의 아들. 1573년 문과 급제. 알성장원. 士論을 세워 조광조의 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음.
〔 김계휘 김효원 노수신 백인걸 부사 사간원 사헌부 선조 심의겸 유수 이발 이성중 이이 이해수 정철 홍문관 홍성민 〕
15) 金繼輝 1526 ~ 1582
자는 重晦, 호는 黃康. 본관은 光州. 현감 鎬의 아들.
49년 문과에 장원급제. 중시 장원. 식견이 높았다 함.
16) 弘文館 궁중의 經書 및 史籍을 관리하며 문서를 처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는 조선시대 三司의 하나. 관원은 모두 문관이며 經筵의 관직을 겸임함. 大提學(정2품) 1명, 제학(종2품) 1명, 부제학(정3품) 1명, 直提學(정3품 都承旨겸임) 1명, 典翰(종3품) 1명, 應敎(정4품) 1명, 부응교(종4품) 1명, 校理(정5품) 2명, 부교리(종5품) 2명, 修撰(정6품) 2명, 부수찬(종6품) 2명, 博士(정7품) 1명, 著作(정8품) 1명, 正字(정9품) 2명이 있었다.
17) 李珥 1536 ~ 1584 자는 叔獻, 호는 栗谷.
아명은 見龍. 본관은 德水. 강릉 출생. 元秀의 아들.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 16세에 어머니를 잃고 세상의
허무를 통탄하여 3년상이 지난 54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함. 1년만에 귀가하여 성리학 연구에 몰두. 58년 이황을 찾아 학문을 논의함. 그해 겨울 別試에 장원하고 이후 과거 때 마다 장원을 하여 九度壯元이란 칭송을 받음. 보기 드문 천재로서 성격과 태도가 이황과는 달라 기상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학문에 있어서도 분석적인 해석보다는 근본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특징이었음. 사상은 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23세 때 지은 《天道策》 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훗날 제자들에 의하여 동방의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畿湖學派를 형성하게 됨.
18) 白仁傑 1497 ~ 1579
자는 士偉, 호는 休菴. 본관은 水原.
조광조의 제자. 기묘사화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금강산에 입산, 후에 돌아와 사마시에 들었으나 조광조의
제자였던 관계로 배척을 받아 성균관에 오래 있다가 예조
좌랑을 지냈다. 을사사화 때 윤원형에 반대하다 파면되었고 1548년에는 벽서의 변으로 안변에 유배되었다가 곧 특사, 이후 20여 년을 고향에서 지내다 윤원형이 죽자 복직됨. 선조 즉위 후 조정의 신망을 받아 교리·승지·이조참판·대사간을 거쳐 대사헌이 됨.
벼슬에서 떠나자 조석을 끓이지 못할 정도로 청빈하여 감사 윤근수의 상소로 쌀을 하사받음.
[출처] 黨爭史3 - 東西의 葛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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