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6.9.27) 말씀 /고전 12:31 고전 12:31) 사랑하면 보이는 것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러분들, 명절 잘 보내셨나요? 저도 모처럼 가족들과 잘 지냈습니다. 오늘은 ’사랑하면 보이는 것들‘이란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자녀들이 컸을 때 어린 시절 기억나는 순간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거나 누군가에 사랑을 받았던 그때만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호스피스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어보면 돈, 공부, 운동, 출세 .. 이런 것들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족들을 좀 더 사랑해주지 못한 것, 아내를 좀 더 사랑해주지 못한 것, 좀 더 자녀들을 사랑해주지 못한 것들. 아무리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어도 사랑하면서 산 사람은 후회하지 않는데 억만장자가 되고, 세상이 알아주던 권력자가 되었어도 사랑하며 살지 않은 사람은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토니 캄폴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지 않고, 사랑하며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 2011년 10월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난 스티브잡스는 죽으면서 유언이 담긴 동영상을 남겼습니다. 그 동영상에는 부를 쫓는 삶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내용 일부를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에서 즐거움은 많지 않다. 결국 부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 병들어 누워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자부심을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다는 것을. 어둠 속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 빛과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보고 들으며 다가오는 '죽음의 신'의 숨결을 느낀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로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예를 들어 관계 아니면 예술, 젊었을 때의 꿈과 같은 것 말이다. 끊임없이 부를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나와 같은 비틀린 개인만 남는다.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만인이 가진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senses)을 선사했다. 내 인생을 통해 얻은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나를 따라다니고, 나와 함께하고, 나에게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스티브스도 결국 세상 최고의 부자로 살아보았지만 사랑만이 남는다고 합니다. 제가 과거에 섬겼던 선교단체는 말씀 그대로 순종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말씀 공부를 하고, 지도자가 본토 친척을 떠나라고 하면 결단하고 떠났습니다. 지도자가 방향 제시를 하면 어디든지 순종하여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저도 믿음의 결혼을 제시하자 얼굴도 보지 않고 제주도 자매와 순종해서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당시 U.B.F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말씀 중심, 성경공부... 절대 순종. 모든 것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조직도 나중에 몇 차레 무너지고 분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깨달은 것은 그런 현상도 사랑의 기초가 안 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기쁨>의 저자 피에르 신부는 믿음은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흔들리면 그 위에 믿음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가운데 있지 않은 믿음은 블꺼진 등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목회 30년 하면서 고민을 많이 한 것은 올바른 신앙, 올바른 사역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세상을 버리고 목회자가 되면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 줄 알았는데 왜 이런 문제들이 또 생기는지? 본토를 떠나고 순종하였지만 그 믿음 안에는 여전히 세상적으로 큰 것에 대한 욕심, 많은 것에 대한 탐심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때 모든 근본 원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처음 사랑’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한 게시록 2,3장 말씀을 통해서 교회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 2:4) 모든 문제의 원인은 처음 사랑에서 빗나가는 것이었고, 회복은 그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성경속에 사랑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13장) 고린도전서 16장 14절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들렸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에서 크고 첫째 되는 사랑의 계명.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부활 승천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과 갈릴리 바닷가 비취 티에서 물으신 말씀이 나에게 물으시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저는 내가 회복해야 할 것 내가 정말 붙들어야 것이 사랑의 계명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을 삶 속에서 조그맣게라도 베풀고 나누며 실천해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감동이 될 때마다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첫 번째 탄생한 사랑의 시가 <사랑의 눈을 뜨면>이었습니다. . 저는 이 시를 쓰고 수없이 읽고 들었습니다. 사랑의 눈을 뜨지 않고는 하나님도 하나님 말씀도 이해 할 수 없고,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없고, 나도 세상도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의 눈을 뜨는 것이 모든 변화와 새로움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많이 들으셨겠지만 다시 한번 더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어 만져지지 않는 것들도 있고 느껴지지 않는 것들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많아. 사랑의 진정한 출발은 바로 여기에 눈을 뜨는 거야.
사랑의 눈을 뜨면 깊은 곳을 보게 돼. 아이들 눈동자 속마음을 보게 되고, 이름 없는 들풀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늙고 볼품없는 아내의 깊은 주름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게 되고, 어둡고 삐뚤어진 세상 속에서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 소리를 듣게 되지. 사랑이 없으면 세월은 살같이 스쳐 지나고. 인생은 강같이 흘러가고. 모든 것은 가볍고 의미가 없고.
사랑의 눈을 뜨면 세월이 정지되어, 타오르는 감정은 견딜 수 없고, 순간순간의 삶은 격정에 불붙는 언어가 되어, 삶을 한편의 시로 만들지. 나는 행복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사랑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지는 거야. 여러분, 정말 변화되고 싶습니까? 달라지고 싶습니까? 이왕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가고 싶은가요? 짧은 인생이지만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가고 싶습니까? 사랑을 알고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피에르 신부 왜 세상에 우리는 태어났는가?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보다 더 고상한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눈이 떠질 때 어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까요?
첫째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전도서 3:11) 이런 창조의 아름다운 것들이 보인다면 그처럼 더럽고 추하고, 잔인하고 악하게 다투며 살 수 있을까요? 안보이니가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를 볼 수 있습니까? 사랑의 눈을 뜨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은 단지 내면의 의지가 겉으로 들어난 영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세상이 어두울 수밖에 없고, 마음이 밝은 사람은 밝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울한 사람은 바다에 가도 바다가 우울합니다. 미운 사람은 모든 것이 밉게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쁜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이쁘게 보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 눈을 떠지면 그동안 희미하게 스쳐지나갔던 것들, 안 보였던 것들이 환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 나무 꽃 등 다 환하게 보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세계가 보인다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면 그 어디나 천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과 떠오른 느낌을 글을 적으면 한 편의 시가 되고 나는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 별것 없습니다. 남이 못 본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듣는 사람이 시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삶을 아름답게 바꾸는 마술사입니다. 삶이 아름다워지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에머슨의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고, 한 사람이라도 나로 인해 행복해졌다면 그게 성공이라고 하였습니다. 빌게이츠도 죽어가면서 고백하였지 않습니까? 부자로 살아보았지만 사랑만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많이 남긴 사람이 부자이고 성공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적극 더욱 큰 은사를 구하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의 바탕이 될 때 각자 개개인에게 주어진 은사도 더욱 아름답게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랑의 불이 켜지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섬기는 일도 사랑이 뒷받침되면 더욱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도 사랑이 뒷 받침이 되어야 생명의 빛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은사도 사랑이 뒷 바침이 되어야 굳건해지고, 오래 참는 은사, 소망의 은사도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오래 참고 분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정원사로 있을 때 왜 시키지도 않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까? 정원을 매우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꾸미려고 화분에 조각을 했고, 틈만 나면 화분에 꽃을 새겨 넣는 일을 한 것입니다. 정원은 더욱 아름다워졋고, 그 스스로도 행복하였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사람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자발적 능력입니다.
둘째, 크신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시며 위대하시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심을 무엇으로 측량할 수 있습니까? 그 유일한 척도가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심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사랑의 눈금이 너무 작다면 종이컵 만큼 작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사랑이 바다 같이 넘치면 바다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다가올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랑의 척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신 하나님을 체험하려면 내 안에 사랑의 그릇을 우주처럼 키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키워도 다 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을 모르면 아에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고, 사랑을 알면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 모든 지식, 신앙의 비밀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만큼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내 보는 시야도 작아집니다. 내 가족, 내 교회, 내 성도들만 보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나와 우리를 벗어나 지역 사회가 보이고 나라가 보이고, 세계가 보이고 우주적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기도 폭도 넓어지게 됩니다. 내 가족 내 교회 내 성도를 넘어서서 세계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할 때 비로소 믿음도 성장하는 것이고 사람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른 은사들은 기능적입니다.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하고 홍해를 가르는 큰 일을 해도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면 사랑하는 만큼 인격 영성이 달라지고 성장하게 됩니다. 여러분, 홍해를 갈라서 바다를 육지처럼 만드신 하나님이 커 보입니까? 아니면 육신이 되어 죄인들을 섬기시는 하나님이 커 보입니까? 십자가 상에서 내려와 로마 군병들을 몰라내고 세상을 무력으로 통치히는 하나님이 커 보입니까,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셔서 만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하나님이 커 보입니까? 분명한 것은 사랑의 눈이 떠진 사람은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한 영혼의 가치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9~14에 불쌍한 한 손 마른 자가 나옵니다. 안식일 날 회당에서 바리새인들이 그를 이용해서 예수를 죽일 궤계를 꾸밉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그를 공개적으로 고쳐주십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영혼의 가치를 보는가 못 보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깁니까? 바리새인들은 사랑이 없이 때문이고 예수님은 사랑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또 잃은 영혼을 찾으시는 비유의 내용이 나옵니다. 99홉 마리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 찾는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눅 15장). 이 내용을 보면 그 하나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힘을 다하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찾은 후에는 너무나 기뻐서 잔치를 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양들을 잃어버릴 수 있을 텐데, 다른 양들의 생명도 귀한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 사랑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하나의 가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물질이나 수 의 가치가 더 크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왕자와 장미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자는 처음에 자기별에 피어난 장미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몰랐습니다. 그런 장미가 지구에 와 보니 어느 정원에 5천 송이나 피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똑같은 장미가 수천 송이가 있다고 생각하자 더욱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자신도 슬펐습니다. 그러나 여우를 통해서 관계 맺는 것, 길들이는 것에 대해서 배우고 사랑의 눈을 뜨게 되자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장미들을 다시 보러 가봐. 네 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작별의 인사를 하러 네가 다시 돌아오면 선물로 비밀 하나를 알려주지. 어린 왕자는 실제로는 자신이 물주고, 바람막이를 해주고, 유리 덥개를 덮어준 그 장미가 유일한 나의 장미라는 것, 수많은 다른 장미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장미밭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르는 행인은 내 장미도 너희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나 그 꽃 하나만으로도 너희들보다 더 소중해. 내가 물을 준 꽃이기 때문이야.” 여우가 가르쳐준 비밀은 이것입니다.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 관심 거기에 들인 시간들 그리고 생명. 다 보이지 않지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요? 마태는 1만 달란트, 즉 6조원을 탕감해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로 죽을 우리 한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이 탕감해주신 값입니다. 그 가치 증명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나의 한 생명을 위해서 소자 하나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한 영혼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알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세상에 무가치한 존재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투자하며 살아야 할지 무엇을 위한 것이 최고의 가치인지 알게 해줍니다. 바로 한 영혼입니다. 우리가 평생에 살아가면서 한 사람만이라도 나로 인해서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도록 도울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성공 기업가보다도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수적인 경쟁을 하며 살 필요 없습니다. 사랑이 없고 영혼의 가치가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게 되면 영혼의 가치가 보이고, 가치를 알면 인생의 목표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한 영혼 사랑이 목표가 되고, 한 영혼은 온 천하를 주고라도 사야할 가치가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의 눈이 떠져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볼 수 있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한 영혼을 사랑하며 행복하고 아름답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일 생명말씀( 2026. 9.20.) 말씀/ 마태 22: 35-40
메라이언 법칙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요즘 독서를 하다보면 내용도 중요하지만 내용을 대하는 태도나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민규 교수는 말의 내용은 생각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옳은 말, 틀리지 않은 말,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하는 말이라도 목소리와 표정에 따라서 상대방을 얼마든지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의 내용 자체는 부정적일지라도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면 얼마든지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컴뮤니케이션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조사해보니 7%밖에 안 되었습니다. 시각적 요소는 55%, 청각적 요소 38%. 결론은 말이 전달하는 내용은 7%인 반면에 목소리 표정 비언어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93%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사 소통에서 말의 내용보다 목소리나 표정이 더 중요하다는 이론이 메라비언 법칙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태도, 이 메라이언 법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고심하며 생각해왔습니다. 왜 최고의 내용인 창조, 구원, 재림, 생명, 말씀, 부활, 하나님. 예수, 성령 사랑, 행복. 자유,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독교가 세상에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때론 세상의 지탄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복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최고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어떻게 믿는가, 어떤 교회를 세워가는가,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제자도의 내용이지만 어떻게 따르는가 하는 것은 제자도의 태도 문제입니다. 올바른 신앙과 올바른 교회가 어떻게 결정됩니까? 내용이 당연 중요하지만 세상에서는 태도가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도의 영원한 지도자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젊었을 때 영국으로 가서 온갖 차별과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발견하고 간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닌다. 특히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그에게 큰 감명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은 간디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하고는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여러 차례 청원을 해보았으나 교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기가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한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경멸한다.” 그는 결국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10억 인구의 인도를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 교회가 간디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인도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면서 세상에 소망을 심어주시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세상을 섬기는 태도가 세상 매너리즘과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도 달랐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고백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19)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따르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나는 집도 없고 쉴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네가 따른다 할지라도 월급도 줄 수 없다. 굶을 수도 있다. 잠자리가 없어서 길에서 잘 수도 있다. 그래도 계속 따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따른다는 의지 결단보다 따르려는 그의 태도 자세를 보신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말합니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우선시한다면 주님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태도를 보시는 것은 의지만으론 주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 문제는 신앙생활이건 직장 생활이건 어느 곳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앤드류 카네기는 40명이나 되는 일용직 노무자를 백만장자로 만들어놓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은 매우 독특했습니다. 가장 먼저 확인했던 점은 기꺼이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정신이었습니다. 그다음 그들의 마음이 명확한 목표를 향해 단단히 고정되어 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을 발견하면 자기 회사의 핵심부서로 끌어들여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카네기의 성공철학을 엮은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이라는 책이 탄생한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출내기 잡지사 기자였던 나폴레온 힐이 카네기의 성공담을 잡지에 싣기위해 인터뷰를 하러 갔습니다. 당시 거대한 철강산업을 일으켜 막대한 부를 이룬 카네기는 성공철학을 완성할 수 있는 적임자를 찾고있던 중이었으며, 이미 250명 이상의 젊은이들과 면담을 끝낸 상태였습니다. 카네기는 그의 성공담에 대한 운을 떼면서 힐이 오랫동안 찾던 성공철학을 정리할 수 있는 적임자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테스트를 시작했습니다. 힐에게 던진 카네기의 첫 질문은 이랬습니다. "이 일을 맡아서 끝까지 완성할 자신이 있습니까?" 힐은 "예."라고 대답했고, 곧이어 카네기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 성공철학을 완성할 기회를 준다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당신의 힘으로 생활하면서 20년이라는 세월을 성공과 실패의 원인에 대한 연구에 기꺼이 바칠 수 있겠습니까?" 힐은 충격을 받았지만 잠시 생각한 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나폴레온 힐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카네기는 질문을 하면서 스톱워치를 손에 쥐고 있었고, 대답을 듣기 위해 정확히 60초를 정해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힐이 실제로 대답하는 데 걸린 시간은 29초였습니다. 카네기는 목표가 뚜렷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천부적인 그릇'을 찾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온 힐은 보상을 생각하지 않는 원칙을 응용해 카네기로부터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책은 전 세계적으로 2천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힐을 돈방석에 앉혀놓았습니다. 실제로 힐이 그 책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은 단 4개월이었습니다.
옛날 한 정원의 영주가 자신이 고용하고 있는 젊은 정원사의 일과를 눈여겨보았습니다. 정원 구석구석을 아주 열심히 아름답게 손질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자기가 관리하는 나무통 화분에 꽃을 정성껏 조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영주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화분에다 꽃을 조각한다 해서 품삯을 더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거기에다 그토록 정성을 들이는가?" 젊은 정원사는 이마에 맺힌 땀을 옷깃으로 닦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정원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꾸미려고 화분에 조각을 하고 있습니다. 조각하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그러다 틈만 나면 화분에 꽃을 새겨 넣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주는 젊은 정원사가 너무 기특하고 또 손재주도 있는 것 같아 그에게 조각 공부를 시켰습니다. 이 젊은 정원사가 뒷날 이탈리아 르레상스 시대의 최고 조각가요. 건축가이며 화가인 미켈란젤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세계에도 일반 세상에서도 원리는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두각을 나태내고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을 보면 무엇인가 일하는 자세 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인데도 시간을 활용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하루를 살아도 깊이 있게 산다는 것입니다. 태도가 다르니 결과도 다릅니다. 여러분, 왜 책을 많이 읽나요? 지식 자랑하려고요? 비어지고 깨어지고 낮아지고 마침내 겸손한 자가 되어 세상을 섬기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위해서 책을 읽습니까? 책을 읽는 바른 태도는? 읽을수록 모르는 자가 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 하고, 하나를 알면 실천하고 실험해보고 경험해서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 그럴 때 “아 저 사람이 책을 제대로 읽고있구나” 하고 존경받게 되는 것입다. 여러분, 성경을 많이 읽습니까? 많이 읽어 자부심을 가지려고요? 능력을 많이 받으려고요? 실천 못할 것이면 그 많은 지식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동안 성경 책에 줄을 많이 그으며 읽었다면 이제는 삶 속에 줄을 그으면서 읽는 연습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무엇이든지 알수록 지식인은 책임이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식인은 아는체하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 말을 쏟아내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속으로 품고 조금씩 예수 향기, 겸손한 삶의 태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 더 좋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래전 중국에 선교사로 떠난 목사님 2년 동안 예수 한마디도 안 했지만 그 후에 온 동네가 다 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런 뜻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오히려 더 강력한 영향력 있는 전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자긍심이 강하고, 믿음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큰 교회 다니면 그게 더 심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교회도 크고, 담임 목사님도 유명한 목사님이시고, 교회내에는 국회의원 교수 박사 연예인 등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있고 나도 그런 교회의 교인이니 말입니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자부심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아무리 큰 교회 최고급 내용을 가지고 있어도 크신 주님은 어디든 같고, 주 앞에 나는 지극히 작은 자 아닙니까? 내가 죄인임을 통회 하며 겸손히 가슴을 치는 겸비함이 없으면 크고 작은 것이 아무 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유럽에 가보면 과거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들이 유명관광지가 되어있습니다. 좋은 것 많이 받고 누리는 데서 그쳤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설령 건물이 크고 사역이 큰 곳에서 순종하고 섬기며 많은 일을 할 수 있어도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그저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자랑하고 긍지를 가져야 한다면 오직 작은 능력으로 충성하는 것, 가난해도 언제나 손을 펴서 나누어줄 수 있는것, 적은 무리지만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삶을 사는 것, 예수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긍지를 갖는 것뿐이라고 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았지만 적은 능력으로 충성하였다고 칭찬을 받았고, 서머나 교회는 가난했지만 실상은 부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처럼 사람을 외모로 차별을 하고, 기득권을 주장하고, 외적인 것을 화려하게 꾸미기를 좋아한다면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교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돌아서는 것은 교회가 작고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화려하고 추구하는 것이 세상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와 행동의 가치관이 세상관 정반대가 되면 그 때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아침 다 큐티를 하고, 꼬박꼬박 주일에 만나서 예배하며 말씀을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식을 쌓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내 모습과 달라지고, 세상과 다른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받고 있는 말씀 익숙한 습관이 되지 않고 어떻게 받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 태도를 바꾸고 배우려는 것입니다. 말씀을 비추어보면서 나의 모습을 점검하고, 잘못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채우면서 달라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가족들부터 내가 달라지고 있음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행동할 것인지? 메라이언 법칙으로 모든 계명의 말씀을 바르게 보는 관점과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마태 22: 35-40을 한번 보겠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가장 큰 계명 두 가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용만 말씀하시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는 태도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라고요? 먼저 마음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니 저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 마음이 멀었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숨만이 아니라 뜻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마음, 목숨, 뜻을 다하라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가? 말로만 고백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말과 글과 감성 지식, 예술적 감각, 의지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용만 아니라 삶의 태도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게 하나님 사랑이라는 거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도 단지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몸처럼 소중히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태도가 보면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테이시 가델라’라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접시 하나를 닦아도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 자세가 사장의 눈에 띄어 정식직원으로 채용되었고, 불과 5년 만에 본사 마케팅이사가 되었습니다. 그 회사는 미국 외식업계 4위인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체인점이 많이 있습니다. 에버랜드에서 티켓을 파는 평범한 여직원으로 입사한 ‘이은혜’라는 신입사원이 있었습니다. 이 여직원은 공원입구에서 신발이 눈에 젖어서 발을 동동거리는 아이에게 자기 신을 벗어줄 정도로 서비스에 투철했습니다. 투철한 서비스정신이 인정받아 입사 4년 만에 ‘서비스 아카데미 강사’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이처럼 작은 일 하나라도 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될 사람인가 안될 사람인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제대로 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무엇을 하던지 태도가 따라야 합니다. 나의 삶의 태도가 나를 만들고 내 삶의 질을 높인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명절 연휴 여러분들의 믿음의 태도가 가족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섬기며 사랑으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가정 복음화 역사도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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