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을 한 눈에 보는 것은 어렵지만 마지막을 보는 것은 묘지이다.
묘지 답사는 4월 초만 지나면 풀이 우거지고 뱀이 나오는 계절이라 답사 하기는 어려운 시기이다.
창녕에 있는 벽진이씨 복재 이도자 선생의 자료는 우연히 접 하였는데, 찾아기로 결심읗 하고
위치를 파악하고 찾아 갔다.
울산에서 1시30분거리라 오후에 차를 몰아 갔는데 다행히 비도 그치고 바람만 약간 불지만
오후라 날씨는 그런대로 따뜻함을 준다.
벽진이씨 선영은 창녕 부곡에 있으며, 우리가 잘 아는 부곡 하와이 뒤에 있다.
1시30분을 달려 도착한 보니 산은 그다지 높지는 않았으며, 그다지 크지 않은 저수지가 보인다.
저수지 앞을 지나 산을 오르니 필자가 살고 있는 남산 정도의 높이 이다.
10여분 걸어가니묘역이 보인다.
올라가면서 묘지가 몇좌 보이지만 나중에 보기로 하고 제일 위에 있는 묘를 먼저 들어 간다.
묘는 3좌가 있으며 상하로 되어 있다.
제일 위를 보니 이엄의 묘 이었고, 그 아래로 아들인 덕암 이석경의 묘다.
제일 아래가 필자가 보고 싶어 온 복재 이도자의 묘이다
3대의 묘가 상하로 되어 있다.
이도자의 조부인 이엄의 벼슬은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조지의금부사 로 되어 있어 아들이나
손자의 영향으로 증직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이분이 창녕 부곡의 입향조 이다.
덕암 이석경은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길(汝吉), 호는 덕암(德巖). 영산현(靈山縣) 온정리(溫井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 이엄(李儼)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승의부위(承義副尉) 박광미(朴光美)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아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1580년(선조 13)에 정구(鄭逑)가 창녕(昌寧)군수로 부임, 이석경을 방문하여 수일간 강론하여 보고서 ‘좌우에게 근후(謹厚)한 사람으로 재식(才識)이 매우 뛰어나 벼슬을 하게 되면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벼슬을 싫어 하니 애석하다’고 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이석경은 자제(子弟)를 이끌고 곽재우(郭再祐)의 진(陣)에 나아가 곽재우를 도우고 있던 중 부친의 병모를 듣고 귀가하였다. 1600년(선조 33)에 효행(孝行)으로써 사과(司果)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뒤에 다시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 5) 이석경의 아우 이후경(李厚慶)이 음성현감(陰城縣監)으로 재직할 때 편지로써 선조(先祖)의 청백(淸白)의 훈계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통정대부공조참의(通政大夫工曺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영산(靈山) 덕봉서원(德峯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덕암문집(德巖文集)』 2권이 있다.---한 민족대백과 사전에서 발췌 하였다.
덕암 이석경의 묘는 망주석이 모자 같은 느낌 나며, 상석과 묘비 향로석을 갖추었다.
향로석은 다기 사다리 꼴 이라 독창적인 멋이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역을 보니 둘레석이 보이지 않아 봉분의 흙이 내려 앉고 있어 적절한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 아래에 있는 복재 이도자는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지지(至之). 호는 복재(復齋) 또는 양심헌(養心軒). 영산현 온정리(靈山縣溫井里)에서 출생. 아버지는 공조참의(工曺參議)에 추증된 이석경(李碩慶)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晉州河氏)로 수군우후(水軍虞侯) 하함(河艦)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0년(선조 13) 향시에 합격한 뒤 정시(庭試)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1589년에 학명이 높아 지방의 선비들을 모아 회연당(檜淵堂)에서 심경(心經)을 강론하고 이듬 해에는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를 업고 피란하여 안전하게 보호한 뒤 이듬 해 김면(金沔)의 진중에 나가서 위장(衛將)으로 활약하였다. 1600년 고령향시(高靈鄕試)에 스승의 권유로 나가 장원하였고, 순찰사(巡察使) 이시규(李時揆)가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했으나 나가지 아니했다.
무흘서당(武屹書堂)에서 예설을 강론하며 후진을 교육하며 삭망고강법(朔望考講法)을 만들어 시행했다. 뒤에 덕봉서원(德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저서는 여러 번 난리를 격는 동안 거의 유실되고 다만 『복재집(復齋集)』 2권이 있다.---한민족 대백과사전에서발췌
이도자의 묘는 상석과 묘비는 있고 향로석은 보이지 않는다.
묘비는 새로 세워서 깔끔 한 느낌이 난다.
여기의 봉분도 둘레석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덕암, 복재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찾아 간 것도 있지만 신도비를 보려고 간 것인데 신도비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그냥 왔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으니 묘역에는 신도비는 없고 다른 곳에 있다하니 다시 가야 한다.
이런 낭패가 ~~~~다행히 울산에서 가까이 있는 곳이라 가면 되지만 시간과 경비가
만만치 않다.
이 세 묘역을 보고 나서 내려 오다가 왼편에 묘를 보니 외재 이후경의 묘이다.
외재는 덕암 이석경의 아우이고 복재 이도자의 숙부이다.
외재 이후경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무(汝懋), 호는 외재(畏齋). 아버지는 이엄(李儼)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승의부위(承義副尉) 박광의(朴光義)의 딸이다. 이정구(李鄭逑)에게서 수학하였다. 학행이 높아 영남지방의 명유로 추앙을 받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광해군 때 이시발(李時發)·김우옹(金宇顒)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 해 가을 강화도에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그 공으로 서울로 돌아와 음성현감을 지냈다.
죽은 뒤 1648년(인조 26)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경상남도 영산의 덕봉서원(德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외재집(畏齋集)』이 있다.
외재 이후경의 묘는 망주석과 묘비,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여기의 봉분도 둘레석이 보이지 않는다.
4좌의 묘역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소개 할 목적도 있지만 신도비를 보러 간 것인데
묘만 보고 왔다.
다시가야 하지만 시간이 날지 모를 일이다.
벽진이씨 문중에서 문집을 발간하고 선조를 알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 올 바른 방향이라 생각이 들고
그래도 500년전의 무덤이 잘 보존 된 것도 잘 한 일이라 생각이 든다.
길 떠나는 답사객
옥산 이희득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