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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30)】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심판이다"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30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심판이다
예수님이 듣지 않았으면 여기 이 말이 이렇게 있어. 이거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들었기에 이렇게 온다. 내가 이때까지 영화롭게 했지만 이 앞으로도 영화롭게 할 거다. 그담엔 제자보고 했으니까 그랬지. 그러니까 왜 자기위해 안 났을 리가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해둘 말이 야 왜 내 귀에 어떻게 나만 무슨 걱정이다. 너는 어떻게 너만 들었냐 넌 뭣 듣고 있냐? 너 우레 소리나 듣고 있냐? 그렇게만 해서 안 된다. 그럼 자기네만 예수님의 귀에 들리길 “내가 이때까지 영화롭게 했지만 이 앞으로도 영화롭게 할 거다.” 그런다면 저것들의 귀에도 그렇게 그 귀에도 들렸어야 할 건데 이 사람들이 그런 생각은 안 해. 어유 저 사람 무슨 이다음에 죽을란다 어드란다 남의 일인 것처럼 나와 예수와 딴 사람인 것처럼 생각을 하고 옆에 걸 구경하는 태도로 오는데 그 잘못되는 점이 있는 줄 아니까 그래 하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내 아까 말이 예수님의 의식이 우리 의식과 다른데 우리는 너는 너고, 나는 나고 하는 이 의식밖에 못되는 그걸 벗어나지 못하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런 의식이 아니라 네 의식 따로 내 의식이 따로가 아니라 그러니까 전체의 죄를 대속해서 죽었다는 거 그거 전체가 있는데 저것들 내가 그런 거야. 그것이 내일 그것이 내일 그러니까 내가 이때 면하면 좋겠습니다. 그랬다 그러나 바로 그걸 위해 내가 이때 온 겁니다.
그러고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는 이네 말이 나올 겁니다. 그게 이제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천둥하는 소리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다(요한복음 12;29)
어디까진지 믿음이 제게 있다하는 거 나 자신에게 나 자신이 문제라 하는 거.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받을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때다. (요한복음 12;30)
이건 무슨 말인가 내용을 말하면 자기가 죽는 순간 자기가 죽게 되는 건데 자기가 십자가에 반대파 놈들한테 꼼짝 못하고 말이야. 몰려서 몰려서 더구나도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가 팔아먹어서 그럭해서 아주 부끄러운 죽음을 죽게 되는 건데 그 시간을 뭐라고 예수님이 해석을 했나 그러면 그걸 어떻게 봤냐? 그러면 이 시간에 이 세상이 심판을 받는 때다 그래요. 판결은 자기가 받아가지고 십자가에 죽게 될 거인데 거꾸로 이세상이 심판을 받는다고 그래요. 그거가 어떻게 본자리냐, 이 세상 임금이 아주 쫓겨나는 시간이다. 이 세상 임금이라면 사탄을 말하는 걸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사탄의 권세가 이겨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몹시 까불대고 그러더니 꼼짝 할 수 없이 죽고 마는구나 그러게끔 됐는데 도리어 이건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 그래요. 그게 그럼 뭘 보시는 거여. 깊은 자기 임금 거길 보시는 거 아니여.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 받을 때요.
저 독일의 쉴러의 유명한 말이 그거 그런 말이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심판입니다. 그것 다 이런데서 나오는 거.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심판이다. 삼선개헌 한다는 게 공화당의 심판이다 그 말이야. 그런 소리 나오는 게 박정희의 스스로 심판받는 말이라고 삼선 소리 하는데 어떻게 양심을 가졌으면 그러겠느냐 전에 잘못 한 것 때문에 심판 받는 소리가 그 소리가 믿지 않아서 심판 지옥에 가는 거 아니라 믿지 않는 것이 벌써 지옥이라 그 말이야. 그러니까 세계 역사가 곧 세계의 심판이다. 우리의 조금 전 우리의 택한 것이다.
오늘날 내 상태는 내가 한 것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거라 그 말이야. 그러니까 이게 현상보다 현상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보는 것 아니야 그건 우리가 나라의 일보는 것도 그런 눈으로 본다면 그런다면 의혹이 될 리가 없어요. 될 리가 뭐 이 앞으로 결과가 이렇다 저렇다 그걸 그대로가 심판이다. 어째 저 사람도 사람인데 사람의 속에 저런 생각밖에 못날까? 학생들이 반대를 하면 그건 난동이라고 퇴학을 시킬 생각뿐이 못날까? 그 속에 인간의 마음이 없을까? 그것도 인간일 거예요. 거기 학교 교장도 인간이고 교수들도 인간이고 거기 안전을 내리는 문교부 것들도 인간이고 그 꼭다리 있던 게 대통령 다 인간이겠는데 어째 인간에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하게 됐나. 벌 받아서 그렇지. 왜 벌을 받았을까? 그전에 잘못한 것 있으니까 사람노릇 못하던 양심을 깎아버렸지. 그랬는데 무슨 이다음에 투표결과가 어떻게 될까? 난 걱정 되도 걱정은 무슨 걱정이야. 난 내속에서 걱정이 없다. 심판 받은 놈 지옥에 갈 놈은 벌써 가 있고 천당 갈 놈 다 가있어. 나는 내속에서 결정이 돼있어요.
그러니까 그 순간에 자기가 도리어 십자가에 달린다고 하는 그 순간이 사탄이 쫓겨나는 시간이라고 참 재미있지 않아요? 이게 무슨 빈말이 아니에요. 고 아래 보니 “내가 땅에서부터 높이 들려올라가게 될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 그 정말 그럴까. 여기 아주 근사한 실례가 있어요. 간디 찬성하는 사람이 살았을 때보다 간디 죽는 날로 많아졌어요. 도리어 간디가 살았을 때에는 그런 거 실현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간디가 그렇게 죽어 죽는다는 것은 자기가 앓다가 죽는 거 아니에요. 반대자에게 암살을 당하는데 그런 거 십자가에 못박은 거와 마찬가지로 대죄가 손에 도리어 죽는 거 죽는데 죽으면 도리어 이때가지 이렇게 이럴까 이럴까 하던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싹 간디한테로 돌아가 그건 분명히 완전한 정도는 아닙니다만 예수님은 벌써 자기가 돌아가기 전에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어.
예수의 예수됐던 것
그걸 어찌해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그래도 하는 일은 악해도 그들의 속에 다 이게 하나님의 씨가 하나님이 다 들어줘 그렇기 때문에 그 죽는다 하는 것이 왜양으로 보면 못 견뎌서 죽는 거 같은데 죽으면서까지도 이 속에 이속에 있는 그 옳은 것이 밀알 속에 있는 생명이 밀알 속에야만 나올 수 있는 모양으로 말야. 이 사람 사람의 무한은 한없는 생명이 이속에 들어있긴 있는데 그 생명이 유한한 것 속에 갇혀있으니까 이렇게만 있으면 못 견뎌서 있는 거 같아 못 견뎌 이게 어떻게 돼서 이걸 내버려, 속에 있는 내속에 있는 무한한 생명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이걸 와서 벗겨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우리 정치에 대적이라는 사람들 종교에 대적이라는 사람들 권세 누린다는 사람들 그것들은 본래 이 세상에서 말하자면 이식대로 말한다면 하나님한테 벌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이야 좋은 일은 못하고 나쁜 일을 해.
옛날에 저 4·19 할 때 누구들을 시킨 줄 아세요. 요새 보기 달라요. 옛날 사형시킬 땐 아주 사람 중에 아주 나쁜 놈들 집행수는 이 보통 사람 안 시켜요. 좋은 사람 안 시켜요. 그런 모양으로 말이야 세상엔 악한 걸 처분시킬 땐 나쁜 걸 들어서 유대사람들이 잘못하니까 걸 집행하기 위해서 느부갓네살을 들었다. 느부갓네살 잘난 놈이 돼서 들은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너는 그딴데나 써먹자 그래서 그렇게 쓴 거지 히틀러가 썩 잘나서 권세를 쥔 거 아니라 유럽에 있는 나쁜 놈들을 제거하려면 너같이 나쁜 놈같이 다른 거 가지곤 아까워서 못쓰겠다. 그럭했기 때문에 히틀러를 들어 썼고 제일 나쁘기 때문에 레닌을 썼고 제일 나쁜 놈으로 좀 없어도 괜찮은 것 들라니까 스탈린을 들었고 이밖에 이승만을 들었고. 또 박 아무개를 들고 언제든지 못쓸 걸로 이 세상에 어려운 걸 하게 되는 거 아니오. 이속에 걸 생각하면 상관없어. 내가 그런다고 개인적으로 누굴 멸시한다든지 인간으로서 뭐 나쁘게 보는 생각 조금도 없어 뭐 안 그래. 진리의 세계를 얘기할 땐 그런 걸 어떻게 사실이 그런 걸 이 시간에 내가 죽더라도 그 증거는 할 거예요.
이 세상에서 제일 영웅이라고 나폴레옹은 왜 그러냐? 나폴레옹은 나쁜 놈이니깐 나쁘게 처분 저 똥을 칠 때는 좋은 재목으로는 안 해요. 똥지른 막대기이냐 나쁜 막대기 가지고 똥을 치지. 좋은 막대기 가지고 누가 똥 치겠어. 세상이 그런 법이라 그 말이야. 이 세상에서 권력자 되겠으면 철저히 악해만 지라고 그럭하면 권력은 쥘 거니까 틀림없이 쥐는 거예요. 권력이란 뭐냐 세상에 착하자는 사람 달래 죽이자는 거예요. 이 세상엔 양심적으로 되는 사람 될수록이면 다듬어서 그 양심이 껍데기가 죽으면서까지도 튀어나오자는 걸 보자는 게 소위 이 세상에 권력국가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소? 다른 걸 얘기한다면 모르지만 이 속에 생명을 얘기한다면 그렇다 그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외양으로는 죽은 거지만 죽는 순간에야만 이속에 있는 그 자유로 해방이 되요. 예수의 예수됐던 거는 예수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렇게 나타나질 못했을 거예요. 십자가에 무참하게 죽으니까 예수의 예수 됐던 점이다. 하나님의 아들 된 점이 환하게 이렇게 나타났지. 그러게 살아있을 땐 모르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후 “어휴 저거 하나님의 정말 아들이다” 그러지 않았어요. 그랬다가 또 다시 내버리고 가긴 가지만 적어도 그 순간은 사람들이 그걸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어.
간디 죽어도 요새는 약해간다고 할 말도 있긴 있습니다만 간디 죽은 걸 찬성해 간디 죽여 놓고야 간디 죽는 걸 보니까 “어유 그 정말 참 진리다 보통사람이 아니다” 알게 되요. 그건 그럼 이게 속에 귀하니 만큼 귀하다 하는 것은 겉에 것을 잃어버리면서 지켜서만 증명이 되지 말이야 거 예수님도 그때 어떻게 해서 보통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양으로 이제 이 사람들 그러지 않아요? 묻길 아니 왜 이 말하니까 이전도 이걸 알거든. 우리는 성경에서 배우길 어떻게 배웠냐? 그러면 메시아라는 사람은 영원히 있다고 그러는데 메시아가 한번 통치해서 영원히 통치한다고 그러는데 예수님이 일상에선 안했지만 뭔지 모르게 그걸 느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저이 그다. 그러니까 당신은 말하길 인자가 높이 들린다 높이 들린다고 그랬지 죽는다고는 안 그랬지만 그 높이 들린다고 하는 게 아무래도 죽을 걸 의미하는 거다. 그 사람들 모두 분명히 느꼈어.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내가 세상의 빛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기는 메시아가 오면 그 절대 권력을 가지고 모든 거 다 인제 통치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당신은 어느 면을 보면 메시아라 그래 인자라 그러면서 말이 난 죽어야 된다 그래. 죽어야 된다. 그러니 그 그럼 어떻게 되 하는 말이요. 뭔지 기건 묘한 것 같은데 그 말을 알아듣기 어려우니까 그래 인자라는 건 뭡니까? 그랬어. 그러니까 예수님이 참 뭐 이렇게 떠들고 이렇게만 말할 거 아닙니다. 가만히 자기가 각자 속에 맛볼 겁니다만, 그 말씀하니까 그 아래편에 이제 비쳐지는 대로 고 얘기 조금 있다 설명합시다.
인자라 했다. 인자가 뭘까 난 아침에 생각을 해 그전에도 몰라요. 나 신학 그런 거 전문의 연구 안하니까 인자라는 말이 왜 왔는지 어디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아요. 모를 것도 같아. 그렇지만 이번엔 그렇게 생각해 인자라는 건 이제 요것 사람의 아들이라 그 말인데 사람의 아들이라 그 말인데 하나는 건 그전에도 한 말입니다. 아무개 김 아무개 아들, 이 아무개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야 그러니까 그건 어느 누구 이씨 김씨 개인이 아니라 본래 여기 이 유대사람들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데 아무개 아들 아무개라 그럽니다. 시몬 바요나 그런 말이 시몬 바요나야 바라는 게 아들이란 말이고 요나라는 거가 시몬 바요나는 요나의 시몬이라 그 말이야요. 시몬이라는 말이 하도 많으니 어느 시몬인가 요나의 아들시몬 말이다. 그 아버지를 달아서 시몬 바요나 요나의 아들 시몬 그러는 모양으로 그럼 요나의 아들이라 하는 대신에 인간의 아들 예수 이렇게 돼. 보통말로 하면 예수 바요셉 그랬을 거야요. 요셉의 아들 예수, 혹은 바 마리아한다든지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렇게 마리아나 저 개인이 문제가 아니야. 낳기야 개인의 어느 부모가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해서 낳겠지만 문제를 말하면 나는 인간의 아들이다. 그러면 그가 인간이야 사람이라는 거 어떻게 생각했나를 알 수가 있을 거야. 김씨, 이씨 문제는 상기되고 이 사람들 굉장히 가족주의야요. 가족주의 시댄데 그때 그런 말 안하고 난 인간의 아들이다 그랬다는 것도 생각하는 문제고 또 하나는 영어로 하면 썬 오브맨(Son of Man) 그렇게 되지 않아요. 번역을 하면 이제 그 말로도 그랬을 거예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썬(son)은 뉘 썬이냐 그러면 썬은 하나님의 썬인데 썬오브갓(Son of God)인데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거는 인간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인데 인간으로 인간으로 된 아들이라 그 말이야. 썬 오브 갓(Son of God)이지 썬 오브 맨(Son of Man) 문학의 사람 예술의 사람 그럴 때 오브 맨 뭣에 사람이라 하는 모양. 그런데 그럼 이건 하나님의 아들인데 인간형상 천사형상이든지 그런 건 인간으로 난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러니까 이속에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씨를 가지고 있다하는 사람은 다 가지고 있다하는 그 의미 그래 강조해서 그렇게 쓰지 않았나? 그러나 하여간 그 인자라는 이가 높이 들려야 한다.
그러니까 옛날 메시아 관련과 달라. “옛날 사람들 한번 다스렸으면 영원히 끝남이 없이 그런다고 하는데 당신은 죽어야 된다하니 것과 반대말 아니요. 어째 그렇소? 또 인자라는 건 뭐요.?” 그러니까 이제 거기 대한 대답이 뭐라 그랬지요. 직접 대답은 안하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아직 얼마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이거는 인자라하는 대신에 빛으로서의 자기를 대신 내놓아 말하는 겁니다. 자기를 인자라고도 하지만 또 빛이라고도 말씀이라고도 그래요. 근데 그 너희 가운데 빛이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다니고 어두움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도록 하라. 다른데도 말씀한 거지만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래 빛 가운데 행하고 어두움에 넘어지지 어두움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도록 해라 내말 들어라. 그래 그말 한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두움 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빛이 있는 동안 너희는 그 빛을 믿고 빛에 말대로만 따라오라”고만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빛에 빛을 믿고 빛의 아들이 되라 그래서 이제 같은 자기라 해도 인자라 하는 이름으로 표시되는 것과 말씀이라 하는 빛이라 하는 걸로 또 표시되는 말씀, 그걸 들어서 말씀하신 여긴 이건 생각을 하자면 다시 많을 겁니다만 나는 이걸 보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거 위에 말대로 그게 나를 위해난 거 아니라 널 위해 났다하는 모양으로, 점점 더 우리 속에 우리가 스스로 이속에 직접 체험이 되는 그 메시아 누구나의 속에 다 본래부터 있는 그 메시아 그게 정말 참 자기가 들어내는 거니까 그 점을 강조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그런데 하여간 그럴라면 인자가 들려야 한다. 저 위에서도 그랬지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런 건 어떻게든 자기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을 말씀해서 그랬어요. 그런데 고 아까 말대로 다시 올라가서 십자가라는 건 보통 말하는 모양으로 우리들의 인간의 죄악을 위해서 그건 외면에 나타난 걸로하면 그렇습니다. 그 점도 무시해선 못씁니다. 그래 종교라는 건 이제 철학은 아닙니다. 철학만이 아니라. 이렇게 실지로 역사적으로 있는 어느 사건에 근거해 가지고 있는거지. 거저 이렇게 가만히 명상을 해서나온 그것만을 가지곤 종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겐 그거 없이 되는지도 몰라요. 난 거기까지는 또 단언은 안 합니다마는 적어도 보통 종교라 그럴 땐 역사적인 어느 사건을 만들어낸 거냐하면 사실이 있던 사실을 근거로 해서 역사적으로 마리아에게 요셉의 가정에 났던 예수, 그 예수가 한 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고 그걸 근거로 해가지고 기록된 거지, 누가 무슨 생각을 해낸 그런 건 아닙니다.
신비주의 종교와 역사적인 종교
그러니까 역사적인 사건이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만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그 사건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무엇 때문에 이 의미를 가지냐 하면 인간존재의 이 성격 때문에 가져요. 그게 없이는 역사적인 사건도 거기서 나온 거지만, 그러니까 같은 말로 하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고로 죄를 범하게 됐다. 그 까닭으로 인해서 인간이 타락이 됐다. 그 역사적인 사건이 그 사건이 사실이 있었냐? 없었냐? 그건 증명할 재주가 없어요. 있다 하더라고 그건 역사적인 사건을 말하는 거지 그것만이에서는 안 돼. 물론 그렇지만 사건보다는 사건이 있은 다음에는 지금은 이제 그걸 통해서 그 어느 면을 강조하는 거냐 하는 걸 따라서 인간적인 성격을 강조하냐? 역사적인 사건 있었던 것을 강조하냐? 하는 걸 따라서 사실 정통주의적인 신앙이 되냐 그렇게 않으면 내적인 신비적인 신앙이 되냐 그게 달라지는 거. 다른 말로 하면 외적인 신앙이 되냐 내적인 신앙이 되냐 그 말이야.
신앙이라면 두 면이 다 있지 어느 한 면만 가지곤 안돼요. 신비주의적인 신비주의라는 거 내 마음에 깨달음을 얻어낸 종교도 있고 또 역사적인 사건에 있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서 거기서 교훈을 얻으므로 그래 되는 것도 있고, 그러니까 복음주의적이라고 하는 복음은 이렇게 이렇게 다 돼있는 사실을 내가 겸손하게 인정하므로 인해서 내가 이제 구원을 얻는 자리에 간다고 하는 것, 이 속에 종교라는 건 도덕적인 인간으로써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 거기 나타난 어느 이치를 깨달아서 내 속에서 나는 힘이 내속에서 자라나는 힘 때문에 구원을 얻는다, 하는 둘이 다 있어야 해요. 사람은 내속에서 자라나는 힘이 없인 물리적인 인간이 아니니까 소용이 없어. 그러나 사람이 다 완전이 힘이 인간이 다 그렇질 못해 밖에서 오는 어떤 힘에 도움을 받지 않고는 거기를 가질 못해. 그러니까 그 둘이 이렇게 합작을 해. 내 노력하는 것과 위로부터 주는 은혜와 이 안팎으로 합작을 해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 그런데 그전처럼 우리의 자각이 일어나기 전에 있어서는 바깥으로 오는 그것만이 강조가 됐어. 나이가 차차 들어 우리의 도덕 연령이 올라가는 시대에 있어서도 그것만을 강조를 하면 미신이 돼버린다 그 말이야.
그래 나는 그걸 모르자는 건 아니지만 그걸 아는 동시에 지금쯤 오면 우리가 속에서 깨달아서 그 어떤 중 그렇게 됐다고 하는 그 힘을 힘입어서 갈뿐만 아니라 내가 여기서 속에서 힘이 생겨서 그전에 지은 죄를 다 탕감해 나 이제는 안 본다. 그렇게 없애 주었다하는 데만 고맙게 생각하는 거 아니라 내가 이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성격을 가지게 나도 났던 성격에서 죄 짓지 않게 되는 그 점을 강조해야 된다. 속죄 속죄 힘쓰는 사람들 보시오. 이 앞으로 죄 안 짓는다는 문제보다는 말이야 과거에 지은 죄를 다 물어주었다고 하는데 고마워서 고마워서 그거는 빚은 밤낮 지고 남보고 물어달라고 하는 주정뱅이 아들과 마찬가지에요.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의 참 소원은 물어줄 땐 물어주지만 물어줄게 이다음부터 빚지지마 빚 안져야 하지, 어휴 물어주니까 고맙습니다. 또 질랍니다. 또 물어주면 더 고맙습니다. 그게 무슨 그게 아들이라는 거야. 적어도 지금 그런 생각해야 된다 그 말이야. 이렇지 않소. 그래 내적인면 외적이면이 이렇게 다 있어야 되는데 역사적인 사건만 보면 암만해도 밖이 되기가 쉬워. 그러니까 그거는 우리의 성격적으로 해요 죄를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게 그 까닭으로 해서 자자손손이 다 죄인이 됐다. 그래 원죄다. 그렇게도 보지만 그것만이 아니에요. 보는 동시에 인간의 성격이 말이야 인간이 존재의 성격이 본래 죄적으로 돼있어.
하나님이라는 우주의 말하자면 전체의 중심인데 말이야. 거기다 나는 나 중심으로 살려고 잘 아는 것이 일종의 나 중심의 통일이 있는 이상 저의 대립이 될 수밖에 없어. 이것이 풀어지지 않은 한은 안 된다. 그 이속에 내적으로 그걸 체험을 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면이 있어서만 역사적인 사건에 의미가 더 높아지고 그러고 이걸 도무지 모르면 도리어 그걸 믿으므로 인해서 내속에 있는 힘이 자라질 못하고 그 점이 현대에 와선 옛날 그대로 나이 어릴 땐 우리가 그대로 지내왔지만 지금하면 그 점이 모순을 차차 모종을 하게 됐으니까 이 앞에 있는 성년기에 들어간 인간을 가르쳐 주려면 구원하려면 어느 정도 그의 그 자주성을 인정을 하면서 네가 하려면 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그 제 자주성을 인정해주면서 해야 하는데 “이 자식아 너는 도무지 모르는 거야 내말만 들어. 너는 내말 덮어놓고 들어야 된다.” 그래 가지곤 안 된다 그 말이야. 말하자면 어느 정도하면 지금까지 종교는 아버지가 그 점만 이 자식아 내가 다해 줄터이니 네가 걱정을 하라고 그래 이 집에 것 네 건데 말야 내가 다 해줄 너는 아무소리 말고 아버지하라는 데로만 해라. 어렸을 땐 그래도 괜찮아. 허나 나이 차차 들면 “이 자식아 내 것이 네 것 아니냐? 이따가 네가 할거 아니냐? 네가 네 것인데 왜 그렇게 하냐?” 그러고 스스로 자기의 자주성을 인정해 주면서 그렇게 해야만 그 더 자라는 점이 생기지 안나. 이 점이 말은 같은 말이지만 발표된 현실은 달라져야 한다하는 그래 그런 의미에서 할 때 인자가 들려야한다. 인자가 들려야한다 그런 게 이제 깊은 생각할 거예요.
그 인자라 하는 거 특정한 역사상에 있던 그 인자만이 물론 그렇지. 예수에게서 인자를 본 예수에게서 보면 거길 저 밖에 있는 예수를 보는 동시에 본 다음엔 여기서 안으로 들어와요. 그 예수가 어디 있지? 2천 년 전에 나타났던 그 예수를 사실은 여기 안에 있다. 인자가 여기 이 안에 있다. 내 속에 예수도 자기 속에 그림자로 모셨던 나도 예수를 믿으므로 인해서 그림자를 내 속에서 볼 수 있어, 이 인자가 들리는 날이 와야 된다. 잔뜩 뭐 그러니까 이 껍데기에 이것이 죽기 전 죽음에 직면하는 그거를 경험해보기 전 이 속에건 들리지 않는다. 그걸 들려야만 이제 모든 사람이 내가 누군질 알게 된다. 자기한테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정말 속에 있던 이 생명을 버림받은 그때 가서야 들어나는걸 말씀하신 거 아닌가? 오늘은 그만 하겠습니다.
천당이 있으면… 천당이 없으면…
질문자1; 선생님 그 악을 반항을 한다 할 때 말입니다. 죽기까지 반항한다. 선생님 경우에 있어서는 말이죠. 죽은 다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까? 죽은 다음에 무엇이 있다든가 내게 뭐 관계될 것 있다든가 없다든가 이런 거 전혀 관계없이 지금 현재에 있는 것이 악이니까 내가 죽기까지 요걸 제거해야 된다 하면서 멈춰지십니까?
함석헌; 아니 그거는 우리에 가장 잘 아는 것이 죽음에 특징이니까 그런 게 그런 문제는 별개문제도 아니고.
질문자1; 그런 게 아니고 이 종교라는 건 역시 사람노릇 하자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람노릇이라는 게 확실한 분별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젠 거 같은데 분별을 해서 악이라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리면 예수처럼 죽기까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싸워야한다 그래서 죽게 된다. 그런 걸 확실히 알게 될 때는 그래도 그다음 문제는 전혀 욕심이라든가 지금 기독교인이 크리스천들이 얘기하는 그렇게 해서 나 죽으면 천당 간다. 그래서 좋은 데로 간다. 이런 생각은 전혀 없이 말이죠. 단순히 죽는 거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니까 죽는 거다 거기서 끝나시는 겁니까?
함석헌; 아니 그러면 그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이제 그럼 이 다음에 무슨 심판이라는 게 있어서 아니 그러면 이제 그게 그 문제를 밝혀야 되지를 않나.
질문자1; 그런 게 아니고 요즘은 어떤 생각이드냐? 그러면 혹시 잘못되고 있는데 죽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 안하는 건 아닌데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아는데…
함석헌; 아니 그거는 이것 보시오 죽어야 되지 않겠냐. 사실 그런 그렇게 생각할 것도 난 아니고 나도 부족해 모릅니다만 그렇게 생각할건 아니야 나는 나할 거를 내할 것을 하면 그야 죽던지 살던지 뜻대로 하십시오. 그야 뭐.
질문자1; 해야 하는 일이 죽음 아니면 안될거라 그렇게 결론을 내려 내리는데.
함석헌; 아니 그럼 그저 그 죽는 데가 보통일이요. 죽는 건데 그건 의외 뜻밖에 또 아주 살려주기도 해요. 상관없어요.
질문자2; 그런데 선생님 본질이 인간성에 그 자체에 있는 거냐? 죽은 연후에 있는 거냐? 도대체 누가 그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본질이 인간으로써 행 했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이 거기에 있느냐? 죽은 연후 거기에 있느냐?
질문자1;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도 아니고 죽는다 생각을 하니까 사실 뒷일을 걱정이 된다 말입니다. 죽을 필요가 나이가 20살밖에 안됐는데 지금 죽어 뭘 한다. 그 점입니다. 천당이 있으면 죽어 주는데 천당이 없으면 못 죽겠다. 그 말입니다.
함석헌; 그런데 이것 보시오 그건 천당이라는 말은 그야 뭐 천당이라고 믿어지면 믿으세요. 그건 믿지 않을 필요는 없어 했는데 뭐 있지요. 있는데 그건 왜 천당이라는 말로 발표하나 그건 상관없어. 아무건 난 관계없다고.
질문자1; 천당이라고 단정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뭣인지 여기서 죽었으면 이렇게 얘기하는 선생님은 상을 얘기하지 말라고 자꾸 그러시는데 말입니다. 보상이 없다고 생각하라면 선생님은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 만들어야 한다고 그런 말씀하셨는데 저는 어떻게 생각하면 보상 없으면 보상 만들어야 천당 없으면 천당 만들어야 될 거 아니에요. 지금 기독교인들이 사실 옳은 일을 하자는 거 아닌 것도 아닌데 말이죠. 어떤 때는 사실 그 역사가 죽음을 가르키는 데도 있는 데가 있는데도 있는 것 같은데 죽는다는 문제에 부딪치게 될 때는 말입니다.
함석헌; 그러니까 사람이야 근데 지금 사람이야 더구나 이렇게 인생관이 현실적으로 됐기 때문에 더 악해지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소위 말하는 천당이요 그렇게 말하지 안하고도 어 영원한 생명이라고 이 성경에 봐 영원한 생명 그럼 목표가 거긴데 참 성경 잡으면 관계없을 거라고 될 거라고.
질문자2; 선생님 그저 저 사람들이란 정의를 말입니다. 이렇게 내리면 어떻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천당이라 하는 것은 장소적인 그런 그리스 철학 있지 않습니까. 우주의 법칙에 인간의 생의 영역을 삽입 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냐? 즉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도전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순수성 즉 상태 순수성에 인간 영역을 바로 우주 원칙에 삽입 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냐? 그러니까 즉 말하자면은 이 속에 백 명이 있다면 백 명이 각자의 하나님이 백 개를 만들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런 논리로 보는데 그러나 그 하나님은 동일해야 된다는 것이죠. 왜 그러냐 하면 본질이 같기 때문에 그래 선생님 말씀 어떠냐하면 그러면 선생님이 강의하시는 설교하시는 걸 들어 보시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장소를 객관화 안 시키고 자기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 속에 있다는 지.
함석헌; 근데 체험한 거는 뭐 사람을 따라서 다르고 이렇게 아주 상관없지요. 근데 요즘 사람은 통속적인 보통말로 하면 그야 하나님이 저기 계신다. 건 벌써 그렇게 생각을 못하게 됐다. 그러니까 난 그거 강요하지 말라고 그럴 뿐이지.
질문자1; 이제 어쩌다가 말로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이 저기 있다고는 그렇게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도 생각은 않습니다. 그러고 천당이라고 그럴 적엔 어디 장소가 한정이 되가지고 여기서 멀리서 싸우다가 죽으면 거기로 들어가서 아주 영화로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죠. 그런 생각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의를 위해서 싸웠다면 보상을 기다리는 것은 의가 아닐는지. (녹음30, 3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