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소위 근대화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 학계(사회경제사학, 해방 후의 한국 역사학계-강단의 실증주의-, 그리고 강만길 교수도 주장)에서 제시된 것 중 하나가 자본주의 맹아론입니다. 일제가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할 능력이 없었고 자신들이 조선을 근대화시켜주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일제강점기 사회경제사학자들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전문적 연구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초기에 군사나 경제력 등등의 방면에서 손꼽히는 나라였던 조선이 성종 이래로 서서히 정체되어갔다는 점도 이해가 되고, 그 후 완전히 주자학이라는 이념에 매몰되어 기술 등을 천시한 것에 비해 일본은 경제가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근대라는 개념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사회 경제적인 발전의 도식을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근대 자본주의로 주장하였습니다. 만약 세계사에 이런 발전의 법칙이 정말 존재한다면 조선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조선이 근대라는 시점(혹은 시대)에 도달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한,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일단은 조선을 기준으로 19세기 후반 무렵) 이전의 세계사는 교류가 활발하기는 하였지만, 아직은 동아시아세계나 유럽세계 등이 서로에게 크게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사회경제사학자들이 제시한 저 법칙 또한 유럽의 역사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지, 동아시아 역사에 존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세가 교황을 정점으로 한 교회 중심의 사회였다는 점에서 흔히 암흑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물론 중세 나름의 발전도 있었지만, 일단은 특징 차원에서 말한 것임). 그러나 한국사의 경우 고려만 하더라도 이런 중세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고-중-근의 시대구분론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동아시아 역사토론장 495번 글 참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 유럽과 고려가 동일한 역사적 조건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두 세계가 처한 환경 등이 달랐기 때문에 고려에 중세적 요소라는 것이 존재할 까닭은 없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와 유럽이라는 굉장히 거리가 먼 두 세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내에서만 하더라도 각국의 발전상은 각기 다릅니다. 유목민이 국가를 세우는 과정은 정주민의 국가 발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김용만 선생님도 역사는 발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할 수도 있다고 하신 바 있었죠.
이러한 생각을 조선과 근대라는 개념에도 적용시켜봅시다. 조선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가 이미 싹트고 있었다는 주장은 역시 동아시아든 유럽이든 모두 근대라는 시간대에 도달함으로써 자연히 근대적 요소가 발달했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 발전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사회경제사학자들이 주장한 저 도식 또한 유럽의 것이라는 점에서, 이렇듯 단선적인 역사 발전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유럽중심주의의 일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 또한 유럽인이었고, 그의 이상향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유럽이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만 선생님께서 고대 중앙집권 국가론과 역사 진화론에 대한 비판 글을 올리신 적도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고구려의 발견 방 15번, 19번 글).
물론 저는 전문적으로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조선이 얼마나 유럽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따라서 조선에 근대적 특성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근대적 요소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전부 유럽의 특성이고 보면, 소위 자본주의 맹아론은 이러한 유럽 중심적인 역사해석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한 채 일본의 논리에 급급히 대응한 산물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그런 이유로 소위 개항기라 불리는 흥선대원군 정권 시기 이전의 조선에 근대적 요소가 있었다는 주장에 의문점을 갖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조선 후기 실학과 과학 기술의 발달, 부농의 출현 등을 무조건 근대적 산물로 이해하는 것에 저는 회의적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논의해보았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고2 때 한국 근․현대사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배운 것이 자본주의 맹아론이었는데, 처음에는 저도 이에 별로 의문을 갖지 않았다가, 조금 뒤 유럽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왔는데 이제야 약간이나마 글로 구체화해봅니다. 물론 이미 유럽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조선도 뒤늦게나마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노력하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도 전의 조선에 유럽적인 역사 발전 방향을 대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 논의가 다분히 유럽과 조선의 특징을 상대주의적으로 바라보게되어 유럽이 조선보다 앞서게 되었다는 절대적 측면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논의 또한 좋습니다.
최근 카페에 참신한 논의 주제가 덜 공급된다는 지적도 있고, 최근 한단인님께 근대에 대한 말씀을 들은 바도 있고 하여 근대에 대한 저의 사견(아직 정리된 주장이 아니라서요..)을 올려봅니다. 몇가지 더 생각한 바들(고구려, 에도 막부 시절의 일본 등)도 있지만, 일단은 조선 후기 문제만 다루어보았습니다.
첫댓글 개인적으로, 자본주의 맹아론은 단지 교조주의의 사생아일 뿐이라고 봅니다. 당장은 '식민사관 극복'을 한 듯 보여도 결국은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자들에게 꼬투리만 쥐어 준 셈이 되었지요. 근대=선 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도 이젠 깰 때도 되었습니다.
소현세자와 정조의 죽음이 조선에 서양문물을 전달받지 못해서 원통하다고 하죠.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이 개혁에 성공했다면 조선나름대로의 근대화이지 서양식 근대화는 아니라는 것이죠. 조선은 원래 분권과 견제를 기본으로 설계된 국가입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근대화란 세력이 강해진 자본가들이 절대왕정을 물리치고 얻은 정치권력화라는게 저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정치권력은 왕족과 귀족들만 갖는게 아니라 자본가들고 쥐게 되었죠. 말로는 전국민들이 평등화 되었다고 하지만 아니죠. 이제 정치권력이라는것이 피로 만들어지게 아닌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사회가 등장했으니깐요.
이제 세계는 그들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즉 위에서 말한 자본주의 맹아론이죠. 그리고 그것이 태동하게된 원인은 절대왕정때문이죠. 그러나 분명 분권과 견제에 성공한 조선이 개혁에 성공하였다면 분명 자본주의 근대화가 아닌 다른근대화가 펼쳐졌겠죠. 서양에서 말하는 입헌군주제등도 아닌 무언가 새로운 체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정조는 분명 당시 조선사회에 돌맹이를 던져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왕권강화나 노론견제 차원이라고 해도 그것은 조선에 이로웠다고 보입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야망과 로마의 앞길과 맞아 떨어지는것처럼요. 노예제도 철폐와 중소상인 지원등을 본다면 그는 양인들을 질적양적으로 키워
서 왕아래 양인과 양반이나 서얼등을 평등화 시킬려고 했습니다.(물런 왕실이 다른계층과 평등화 되게는 두진 않았죠.)그래서 정치권력을 노론에서 좀더많은 이들이 가지게 할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절대황제나 유럽의 절대왕정과는 분명 틀린 것입니다. 정조는 양인들 불만이 터지게 전에 개혁을 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래서 정조에 대해서 더욱 알필요가 있는것이고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조의 이런개혁 생각을 보지는 않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근대화가 되지 못했다고 한탄해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새로운시대로의 개혁을 못한것을 한탄해 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에서는 근대가 역사발전의 유일한 방향이 아니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이렇게 상대주의적으로 볼 경우 유럽이 다른 세계보다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김선생님께서 역사를 문명사의 단위로 보셨지만, 유목민이나 아이누, 아프리카인들의 삶에 대해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이 고민이라 하셨는데, 이렇듯 상대주의와 절대적 측면에서 어디께쯤의 접점을 찾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굉장히 난해하지요.
음.. 그렇군요... 또 그것에 대한 풀이가 필요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