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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지루한 대치전 양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즈음 7년 전쟁의 흐름을 바꿀 울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왜 하필 울산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을까?
(울산성 전투)
태화강은 울산시 한가운데를 흘러 동해로 이어진다.
울산성(蔚山城)은 태화강 옆 해발 약 m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도시 건물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성이 있던 자리는 학성공원으로 꾸며졌다.
얼핏 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성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공원 안에 군데군데 우거진 수풀을 제거하면 조금씩 성의 흔적이 나타난다.
일부 지역에는 성벽의 흔적이 비교적 뚜렷하고, 경사진 성벽은 일본군이 쌓은 것이다.
왜 이곳에서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을까?
경남 사천만은 남해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바다와 접한 한 언덕에서는 2000년 봄에 유물 발굴을 했는데, 다른 발굴터와 달리 다듬어지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돌무더기만 나타났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돌들은 바로 성벽이었다.
이것 역시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일본군이 쌓은 성이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철수한 일본군은 사천 선진리에 토성위에 그대로 돌을 쌓아 올려 성을 쌓았다.
이곳에 급하게 성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군은 이곳에 성을 쌓아 진주와 남강을 통해 내륙 깊숙히 들어갈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었다.
(일본 왜성의 흔적)
일본군은 사천 선진리처럼 우리나라 남동해안의 요충지 곳곳에 28개의 왜성을 쌓아서 다시 북상을 노렸다.
한편 새로운 대치국면을 맞은 조ㆍ 명 연합군도 대규모 전투를 준비했고, 공격목표는 남동해안의 왜성들이었다.
그러나 공격목표를 둘러싼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순천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를 먼저 공격하자는 '전라도 공략론' 과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를 먼저 쳐야 한다는 '경상도 공략론' 이 팽팽하게 맞섰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논란 끝에 결국 경상도 공략론이 힘을 얻었다고 되어있다.
왜의 소굴이라고 할 부산이나 서생포 지역은 그들의 상륙 거점이었고, 왜군의 대표적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한 곳이 '울산성(蔚山城)' 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약 5만의 조ㆍ 명연합군이 출병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일본군의 소굴이던 부산과 울산, 그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울산성(蔚山城)이었다.
🌹 울산성(蔚山城)은 어떤 모양인가?
조ㆍ명 연합군과 일본군의 최대 승부처가 된 울산성(蔚山城)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성이었다.
성의 외곽을 따라 높은 성벽이 둘러쳐졌는데, 단조로운 모습이 아니라 꺾여 있기도 했다.
적이 성 안으로 들어올 때 방어 하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성벽 위의 구조물이다.
조선 산성의 경우 성벽위에는 아무것도 없는것에 비해 울산성(蔚山城) 성벽 위에는 목조 구조물이 있다.
병사들이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 전투를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군이 쌓은 울산성(蔚山城)의 규모를 기록에 따라 알아보면 성벽의 높이는 4 m에서 최고 14 m로, 가장 높은 곳은 대략 건물 5층 높이였다.
울산성(蔚山城)은 조선 침략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했다.
축성의 대가로 알려진 그가 설계한 울산성(蔚山城)은 어떤 비밀과 특징이 있었을까?
(가토 기요마사)
태화강을 따라온 일본군은 곧장 성 아래 선착장에 다다를 수 있었고, 계단을 따라 성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울산성(蔚山城)의 입구는 왜성답게 매우 독특했다.
적이 곧바로 성으로 접근할 수 없도록 성 입구가 몇번이나 꺾여 있다.
현재 울산성(蔚山城)의 입구는 위치만 파악될 뿐 그 원형은 찾을 수 없다.
조금씩 보이는 성벽은 그나마 왜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성벽은 들여쌓기에 따라 위로 갈수록 비스듬한 각도를 보여준다.
꺾어진 성벽 위에는 전투도에서 본 것처럼 목조 구조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전투도는 지형조건을 무시한 채 울산성(蔚山城)을 하나의 성으로 묘사했는데, 실제로 울산성(蔚山城)은 모두 3개의 구역이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본성 외에 다른 2개의 공간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울산성(蔚山城)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86년 동아대 박물관팀이 울산성을 발굴했다.
발굴 결과 울산성(蔚山城)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지만 경사진 지형에 모두 3개의 구역이 있었고, 각 구역은 계단으로 연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울산성(蔚山城)은 혼마루라는 첫번째 지역과 두번째 지역인 니노마루,
세번째 지역인 산노마루가 구릉 위에서 상중하 삼단으로 나뉘어 있고, 주변에 석담이 둘러져 있었다.
구마모토는 울산성 전투를 지휘한 가토 기요마사가 다스린 지역이다.
그는 전쟁 직후 일본으로 돌아와 이곳에 구마모토성을 쌓았다.
구마모토성은 울산성과 마찬가지로 가토 기요마사가 직접 설계했는데 그 원형이 지금도 잘 남아 있다.
구마모토성은 약7년의 공사 끝에 1607년에 세워졌다.
성은 몇 번의 내전을 겪었지만 함락되지 않은 난공 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
구마모토성은 나고야성, 오사카성과 함께 일본 3대성의 하나로 손꼽힌다.
비스듬한 성벽과 성벽 위의 목조 구조물인 성루는 일본 성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은 한국의 왜성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구마모토 성)
일본 성의 또 다른 특징은 내성을 둘러싼 외곽 구조이다.
성으로 들어가려면 몇 번 꺾여 있는 입구, 즉 호구를 지나야 하는데 이는 적의 기병이나 보병이 곧바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 접근하는 적의 속도를 떨어뜨려 방어가 쉬워지게 만든다.
또한 호구에 들어온 적은 세 방향에서 협공을 받게 된다.
(어쭈구리~쪽국도 제법인걸?)
이렇듯 구마모토성의 입구는 방어구조가 견고하다.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한 울산성(蔚山城)도 가파르고 꺾인 성벽과 목조 구조물, 그리고 복잡한 입구까지 구마모토성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었을 것이다.
울산성(蔚山城)은 구마모토성에 버금가는 철옹성(鐵饔城)이었던 것이다.
울산성(蔚山城)은 모두 3구역으로 나뉜다.
가장 높은 지역인 본진과 그 다음으로 높은 제 2 구역, 그리고 가장 낮은 지대인 제 3구역인데 각각의 구역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본진에는 일반적으로 전투를 지휘하는 천수각이 있지만 울산성(蔚山城)의 경우 천수각의 위치를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그 대신 성벽이 삥 둘러서 있고, 성벽 위에 야구라라는 성루가 있다.
성루가 없는 곳에서는 총구가 뚫린 담이 있고, 담 너머로 태화강과 선착장이
보인다.
그러니까 울산성(蔚山城)에는 중요한 보급로이자 퇴각로가 되는 선착장이 발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울산성(蔚山城)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급하게 지었지만, 일본 특유의 축성술에 현장의 지형 지물을 잘 이용한 철옹성 이었다.
🎓 다음은 울산성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일본군과 조명 연합군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