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서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서 1:1~5)
모든 복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기초하고 거기에서 그 권위가 유래합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셨으며(요 1:1; 17:5 참조)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골1:17)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는 대등한 관계에 계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아버지와 아들은 한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히1:3; 8:1; 계3:21참조). 두 분 사이에는 평화의 의논이 있었습니다(슥6:12,13 참조).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기는 하셨으나 그의 일생 동안 줄곧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로 그의 친자권이 온 만물에게 증명되었습니다(롬1:3,4참조).
갈라디아서 1장은 사도바울의 인사말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주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능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요3:34). 그러므로 바울은 권위를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서신이나 성경의 다른 말씀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권위를 인식해야 하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뿐만 아니라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벧전4:11)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서신은 바울의 사도직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권세를 가지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인사말은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를 이루시므로 여기에서도 바로 창조적인 말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렇게 말씀으로 모든 창조 사업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시33:9). 그러므로 여기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인사말을 그저 시작하는 인사말로 읽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의 모든 축복들을 가져다 주는 창조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3:15).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을 보내셔서 모든 사람에게 의와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드리신 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로부터 그가 사신 것인 우리의 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 "이 악한 세대"는 바로 우리 자신의 죄 있는 자아,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세상을 악하게 만든 것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상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악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세상을 도피하여 수도원에 갔었지만 그 곳에서 그의 죄가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한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 무겁고 짓누르는 짐을 우리의 마음과 등에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에 "악이 함께 있는 것"(롬7:21)을 발견합니다. "이 악한 세대가 항상" 함께 있으므로 탄식하고 절망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소리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가장 큰 시험을 만나셨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은둔 생활이나 수도 생활이 하나님의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부패를 막는 소금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향기가 세상이 부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사람들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소금은 썩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것과 잘 섞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확신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셨기 때문에 그 죄들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고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주장할 권리 또한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죄의 행위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있고 또 나타나는 죄들을 사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에 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우리 자신들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들을 그리스도께서 사셨다는 사실에 뒤따릅니다. 우리의 죄들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사시면 역시 우리 자신도 사시는 것입니다. 딛2:14, 고전6:19, 벧전1:18,19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상점에서 원하는 물건에 값을 치르고 샀다고 하십시다. 상인은 그 물건을 구입자에게 빨리 가져다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구입자는 자기 물건을 소유하기 위하여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가 복종하고 안 하는 일이 예수님께는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신의 피로 사신 영혼들을 무한하신 사랑으로 사모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므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1:4~6) 우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하나의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세가 아버지에게 있으시다는 것을 인정하므로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시100:3). 권세와 영광은 같은 것입니다. 엡1:19,20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권세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롬6:4절에서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고 알리는 "영원한 복음"을 마지막으로 선포하는 취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계14:6,7)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갈라디아서는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는 책이며 특별히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주신 기별입니다.
· 디도서 2:14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전서 6:19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베드로전서 1:18,19 -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