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교회 한국 최초의 교회는 순전히 우리 조상들에 의해 세워진 자생토착교회인 황해도 장연군 대 구면 송천리의 소래교회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두해전인 1883년, 고향 의주에서 박해를 피해온 서상륜 상우(보통 경조로 통함) 형제가 교회 창설의 주역이었다.
이 교회가 세워진 송천리의 명칭은 순토박이 말로 '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다 시 그것이 '소래'가 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들 어간다.
기독교가 전래되던 당시 소래에는 약 70호가 살고 있었는데 소래교회는 서씨들이 모여사는 아랫마을과 광산 김씨들이 모여사는 구석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 두 가문은 모두 10 여년 전에 이주해온 일종의 피난민이었다. 즉 광산 김씨는 김마리아 가문으로 그의 고조부 때까지는 서울에서 판서 벼슬까지 한 명문이었으며 서씨는 평북 의주의 양반가문이었다.
고향서 박해피해 내려와
만주에서 쪽복음서를 갖고 밀입국(1882년) 하려다 관헌에 적발되었던 서상륜은 고향에서의 전도도 위기를 느껴 결국 피신해 간 곳이 소래였다. 거기에는 그의 삼촌(또는 당숙)이 살고 있었다. 서울과 소래를 오가며 전도하던 그는 1883년 봄에, 그리고 의주에 살던 동생 경조는 다음해 봄쯤에 소래로 아주 이주 하였는데, 서상륜은 1883년 초가을부터 자기 친척과 몇몇 동네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상경한 형에게서 신약과 '덕혜입문'을 받아 소래로 돌아온 경조가 결단을 하고 믿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약전서를 수차 읽어보니 예수교할 마음이 깊이 들어가는 동시, 그 교를 하면 피살하리 란 마음이 또 생겨 시중전이 일어나" 반년이나 갈등하다가 로마서를 보고는 "사도 바울의 죽음을 무릅쓰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보고 내 생각에 바울도 사람이라 어찌 죽기를 두려 워하리오 … 죽는 것은 잠깐 동안이오 죽을까 두려운 마음이 실상 어려우니 성신을 받아 두 려운 마음이 없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 없고 또한 생사가 천주의 뜻대로 되리라" 결심하 였던 것이다.
십자가 교회당 상징으로
형제가 함께 나선 소래에서는 84년에 13명, 이듬해에 20명의 개종자가 생겼다. 그중 7명이 상경하여 언더우드에게 세례받기를 원했으나 서경조 최명오 2명만이 세례(85년)를 받게 되 었으며 그해 9월에는 언더우드가 소래로 직접 찾아와 서경조의 석달된 아기 병호에게 역사 상 최초의 유아세례를 주었으며, 86년에는 아펜젤러가 같이와 5인에게 세례를 주었다(서경 조,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설립역사, 그러나 언더우드의 기록에 의하면 서상륜을 첫 대면한 것이 86년이고 그가 인솔해온 소래사람 4명 중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3인에게 세 례를 준 것은 87년 1월이다. 또 87년 가을에야 소래에 직접 내려가 세례를 직접 세례를 베 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7년 말까지 소래에는 10여명의 교인이 생겨났다. 이듬해에는 서울에서 교회사상 최초의 사경회가 한달동안 열렸는데 소래교회에서도 10여명의 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이후 소래교회는 새로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어학 및 한국풍습을 배우는 곳이 되기도 했다. 1889년에는 게일이 이듬해에는 마펫이 소래에 들렀고 그해 겨울 서울에서 열린 사경회에 서 경조를 비롯한 소래교인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서경조는 이 사경회에서 어학선생 문제로 애 로를 겪고 있던 펜윅을 만나 그의 어학선생이 되기로 하고 이듬해 봄 펜윅이 소래에 정착하 였다.
그러나 펜윅은 93년 원산으로 옮겨갔고 대신 매켄지가 소래에 왔다. 이 때부터 소래교회는 본격적인 발전을 하였다.
한복을 입고 한국말을 배우며 전도하던 중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매켄지는 서경조와 함께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군들을 감싸주고 피신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서경 조가 동학 접주를 직접 만나 학덕으로 그 기세를 꺾기도 하여 '송천에서 양인과 서경조를 보호하라'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또 교회당에 성 조지 십자기를 걸고 비기독교인들까지 피난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깃발은 북쪽 지역에서 그 이후로도 교회당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동학과 청일전쟁을 치르면서 교회는 더욱 부흥하였다. 전쟁으로 무법천지가 되고 민심이 흉흉할 때일수록 더욱 열심히 전도한 것이다. 한편 서울에서는 서상륜이 법무대신 서광범을 찾아가 기독교인의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20~30명이 서경조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두 난리를 피하여 극락세계' 가 된 송천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매주일 80여명이 예배'하니 장소가 좁아 새 예배당을 건축 해야 했다.
그리하여 '연보를 시작할새 우리의 예배당은 조선에 처음이니 외국인의 재물은 들이지 아 니하기로 작정하고' 전 교인이 나서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곡식을 내고 어떤 사람은 부역을 했다. 김윤방 윤오 형제는 자기 선산 나무를 베어 재목을 대었다. 마침내 1895년 기와집 8간짜리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매켄지 목사가 예배당 완공 무렵 열병에 걸려 신음하다 죽는 불상사가 일 어났다. 그래서 헌당식은 7월3일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이뤄졌다. 서경조는 초대장로, 김 윤오 안제경은 집사가 되어 소래교회는 명실상부 당회를 가진 조직교회로 우뚝 섰다.
소래교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해서제일학교의 설립이다. 교회 건축이 끝날 무렵 매켄지 와 서경조는 교인자녀 7~8명을 모아 사랑방을 빌려 학교를 시작했다. 지리와 한글공부를 위 주로 성경도 가르쳤다. 매켄지 사후에는 그의 유산 3천냥과 교인들의 기부금으로 건물을 새 로 짓고 4년제 보통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여기서 세브란스 첫 졸업생 김필순과 그 형 제, 경신 첫 졸업생 서병호, 세브란스 전 원장 김명선 등을 비롯, 김필례 김마리아 김함라 등 여성지도자들, 허성묵 허응숙 등 민족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학교설립 민족인사 배출
1896년에는 또 교회가 비좁아 8간을 늘렸다. "이때 교인 수는 2백여명이라 칭찬 아니할 수 없는 일은 밤새도록 금식기도하는 일,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3~4월이 되어 어려운 사람이 생기면 신 불신을 막론하고 구제해 주는 일, 근농으로 교회설립 3~4년만에 박토가 옥토된 일, 주색잡기 투전 미신 등이 없어진 일, 열심히 전도하는 일이었다"
소래가 거점이 되어 인근 장연읍을 비롯, 송화 은율 풍천 문화 해주 옹진 등 일곱 지역에 수십개의 교회가 서게 되었다.
흔히들 한국의 천주교회는 자생교회이며 개신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식되었 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소래교회가 보여주듯 한국교회의 창설은 분명 성경을 번역한 평신 도들의 독자적 전도와 한글성경 산포에 근거를 둔다. '역간된 복음서들은 누구나 읽으면 곧 그 뜻을 알게되기 때문에 개종자가 급증,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열심히 책을 얻어 읽 고 있는 현상은 놀랄만한 일'이라 언더우드도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백성 들이 점점 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국인의 신앙열정을 대변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