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영월 광풍헌&자규류, 창절서원
2026.10.11(일) 강원 20대 명산 영월 발산(667m) 산행후 영월 광풍헌&자규루 및 창절서원을 찾는다(14:40~15:20)
관풍헌(觀風軒)
조선시대 영월 관아의 누각과 동헌 건물
관풍헌은 태조 1년(1392)에 건립된 조선시대에 영월군수가 업무를 처리하던 관아의 동헌(東軒) 건물이다.
1457년 9월에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세조는 다시 노산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봉했다가 단종 복위운동을 구실로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으로 하여금
사약을 들게 하여 단종은 이 해 10월 24일 17세의 일기로 이곳에서 죽었다.
동헌의 동쪽에는 단종이 시를 읋었다는 자규루(子規樓)가 있다.
현재 관풍헌은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건물은 팔작 맞배붙임집인 정사(正舍)와 정사 좌우의 익사(翼舍) 1동씩으로 모두 3동이 세워져 있다.
광풍헌은 치석된 한 단의 장대석으로 된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기둥 위의 공포(栱包)는 이익공(二翼工)으로 처리하고, 전면 3칸에는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았다.
관풍헌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관풍헌의 정문을 백운루(白雲樓) 또는 관풍루(觀風樓)라고 부른다.
외씨버선길 15구간 안내도
자규루(子規樓) 조선시대 영월 관아의 누각과 동헌 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6호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984-3>
자규루는 단종 (재위 1452~1455)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어 잠시 지낼 때
이 누각에 자주 올라가 자규시(子規詩)를 지었다고 전한다.
자규루는 원래 세종 10년(1428년)에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고 부르던 건물이다.
단종이 영월군 남면(南面) 광천리(廣川里) 국지산(菊芝山) 밑에 있는 청령포로 유배된 그 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자 이곳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종은 이 관풍헌에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어 심정을 토로하였으므로
후인들이 자규루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자규(子規)는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뒤 크게 퇴락하였으므로 정조 15년(1791)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에게 명하여 중수하게 한 뒤
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누기(樓記)를 윤사국이 쓰고,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상량문을 이동욱(李東郁)이 썼다.
이곳의 누기와 상량문의 탑본(搨本)을 모아 『자규루첩(子規樓帖)』 책자가 전해지고 있다.
자규시(子規詩)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 원한 맺힌 새 한 마리가 궁중 떠난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쌍영벽산중) :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假面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 해가 가고 해가 와도 恨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 자규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루춘곡낙화홍) :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 하늘은 귀먹었나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고
何奈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총) :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내 몸의 귀만 홀로 밝은고
광풍헌(光風軒)
약사전(藥師殿)
지금은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인다.
< 창절서원 & 창절사 >
창절서원(彰節書院)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조선후기 박팽년 등 사육신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85년(숙종11) 장릉(莊陵)을 개수하면서 감사 홍만종(洪萬鍾)과 군수 조이한(趙爾翰)이 도내에 통문을 돌려 기금을 모아,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 이개(李塏) · 유성원(柳誠源) · 하위지(河緯地) ·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9년(숙종25) 창절(彰節)이라 사액되어 서원으로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으며
1791년(정조15)에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낸 호장 엄흥도(嚴興道)와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추가 배향하고 그 뒤 화의군(和義君)을 추가 배향하였다.
1741년(영조17) 왕명으로 서원을 훼철하고 위패는 매립한 뒤 유적지만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1868년(고종5)경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 때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창절사(彰節祠) · 강당 · 동재(東齋) · 서재(西齋) 등이 있다.
매년 봄 ·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창절사는 202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창절서원 배견루
배견루는 '두견새에게 절하다' 라는 뜻으로 단종이 죽은 후 두견이 되었다고 하여 단종을 사모하는 충심의 뜻이 담겨있다.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쓴 현판은 6.25때 소실되어 현재 현판 글씨는 1964년 당시 서원장 정연홍이 쓴 것이다.
창절서원 정문인 배견루(拜鵑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계 건축이고
강학 기능을 갖춘 창절서원은 중앙에 6간 대청을 갖춘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창절서원(강당)
유생들 모여 공부하는 강학 공간 강당과 동·서재, 정문 누각인 배견루를 갖추고 있다.
서재(西齋)
서원 서편에 있는 집으로 유생이 거처한던 곳으로 구한말 소실된것을 2000년 10월 27일 복원하였다.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
<충의공 엄흥도 선생>
내가 육신들과 함께 죽기를 맹약했는데 그들이 모두 참형을 당하였으니
내 혼자 산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선대 임금을 뵐수 있겠는가
<충정공 박심문 선생>
내가 어찌 죽음을 아까워하여 위대한 현인들의 충의의 이름을 끝내 묻히게 하갰는가
<문정공 남효온 선생>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을 당하여 남자가 태어나서 도를 행할수 있다면 출사하고
도를 행할 수 없다면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청간공 김시습 선생>
청연일에 한 자 칼로 당신을 폐하고 옛 주상을 복위하려 했으나
불행히 간악한 자에게 적발되었으니 나를 빨리 죽여주시오
<충목공 유응부 선생>
소장각판
육신사기외1면, 영종/숙종 어제 어필 등 6편, 육신사/장철사 개견 상량문, 창절서원 보수 중건기 5편 모두 25각판
동재(東齋)
서원 동편에 있는 집으로 유생이 거처하며 글을 읽던 곳이다(현재는 사무실로 사용)
나는 상왕의 신하인데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겠소
일찍이 충청감사가 되어 일년 동안 장계에 신하라 칭한 적이 없었소
<충정공 박팽년 선생>
옛 임금님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이오
하늘에 두 태양이 없듯이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오
<충문공 성삼문 선생>
우정처럼 중할 때는 사는것도 크거니와 홍모처럼 가벼울때는 죽는것이 영광이라
새벽까지 잠 못 이루다 문을 나서 떠나가니 현릉에 우거진 송백들이 꿈결속에 푸르네
<충간공 이단 선생>
사내의 득실은 고금이 다를게 없고 머리 위엔 분명히 해가 떠 있네
도롱이를 보내 준 뜻이 무엇인고 하니 비내리는 오호에서 만나자는 게로군
<충열공 하위지 선생>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렸더니
문전에 수성어적이 잠든 나를 깨워라
<충경공 유성원 선생>
내삼문(內三門)
삼문을 지나 한 단 높은 제사 공간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창절사(彰節祠)와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창절서원의 전신인 육신사의 현판은 송시열(宋詩烈)이 썼고
송시열이 쓴 현판이 오래되어 없어져서 박팽년 후손인 영월현감 박기정(朴基正)이 다시 썼다고 한다.
창절사 사액 현판은 권상하(權尙夏)가 썼다.
창절사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1번지에 있는 사육신 등이 배향되어 있는 사당이다.
창절사(彰節祠)는 원래 단종의 묘 옆에 세운 육신사(六臣祠)였다.
1685년(숙종 11) 강원도관찰사 홍만종(洪萬鍾)과 도사(都事) 유세명(柳世鳴)이
영월군수 조이한(趙爾翰)과 상의하여 단종의 묘우(廟宇) 옆에 건물 3칸을 세워 사육신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1698년(숙종 24) 단종의 복위가 이루어지면서 왕릉 곁에 신하들의 사당을 둘 수 없다고 하여 1705년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로 옮겼다.
1709년 육신사를 창절사로 고쳐 사액(賜額)을 내리면서 몇 사람을 더 배향하고, 창절서원(彰節書院)이라고 명칭을 고쳤다.
창절서원은 배견루(拜鵑樓)가 정문이고 안에 강당이 있으며 뒤쪽으로 가면 창절사가 있다.
창절서원의 현판은 1791년 윤사국(尹師國)이 쓴 것이고, 창절서원 건물은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창절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현재 창절사에는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엄흥도(嚴興道)·박심문(朴審問) 등 10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창절사에 모신 10명의 신위는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동등하게 봉향(奉享)되어 있다.
창절사에서 봄가을로 봉행되는 제향(祭享) 가운데 가을의 제향을 ‘창절사 대제(大祭)’라고 이름 붙이고, 매해 10월 9일 대제를 봉행한다.
창절사 대제는 창절서원이 주관하는데, 영월군수가 초헌관(初獻官)이 되고, 영월군의회 의장이 아헌관(亞獻官)이 되며, 종헌관(終獻官)은 문중 대표가 맡는다.
그리고 영월군의 유림과 주민 등이 참석하는 상당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 복위운동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사육신 등 충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계급에 따라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간다고 하며
<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류성원-유응부-김시습-남효온-박심문-엄흥도 > 순서로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무(東廡)
서무(西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