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그라시아(Gratia)
축일 11월 16일
그라티아(또는 그라시아)는
달마티아(Dalmatia)의 카타로 출신 상인인데
30세까지 바다를 항해하며 장사를 하였다.
어느 날 우연하게 베네치아(Venezia)의
성당에 이르러 어느 아우구스티누스 회원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서는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파도바(Padova) 교외의 몬테 오르토노의
평수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주로 정원지기로
일했는데 그의 성덕이 뛰어나 전 수도자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가 베네치아의
성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수도원에
살 때에는 신비스런 빛이 그의 방을
늘 비추었으며 그의 간구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71세 때에 그는 중병에 걸려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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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로코 곤잘레스(Roque Gonzalez)
축일 11월 16일
성 로쿠스 곤잘레스(Rochus Gonzalez, 또는 로코)는
에스파냐의 귀족 출신으로서 1576년에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Asunciun)에 왔다.
그는 특히 착하고 열심한 소년이었고 사제를
지망하였다. 마침내 그가 23세 때에 사제가
되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은 사제직에
부적합하다고 느끼고 인디언들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이때가 바로 유명한 파라과이 ‘정복’이
시작될 때였다. 에스파냐는 제국주의를
앞세워 이 나라를 무참하게 짓밟고 통치하였으며,
예수회 회원들은 그들의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원주민들의 개종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런 와중에 로코 신부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선교활동을 했는데, 원주민들로부터는 적대감을
이겨야했고, 정복자인 유럽인들로부터는
공개적인 반대와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1628년 로코 신부는 적개심을 지닌 ‘마술사’
일당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그가 살던 목조 건물은 불탔는데, 그 역시
그 화염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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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도비코 모르비올리(Louis Morbioli)
축일 11월 16일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의 부르주아
가계에서 태어난 멋진 젊은이였다.
그는 결혼하여 살았으나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중병에 걸리자 완전히
생활을 개선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개심은
볼로냐의 청년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더욱이 그는 아내와 헤어지고 회개생활을
간증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을 다니며 설교하였다.
그는 가난한 이를 위하여 문전걸식을 하였으며,
청소년들과 무지한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만년에 그는 남의 집 계단 밑에서 잠을 잤고,
병이 들었으나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였다.
그 대신 그는 놀라운 신심으로 기도하고
성체를 모셨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는
회개한 후 카르멜 3회원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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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피노(Rufinus)
성 마르코(Marcus)
성 발레리우스(Valerius)
축일 11월 16일
아프리카의 순교자인
성 루피누스(또는 루피노)와
성 마르코(Marcus) 그리고
성 발레리우스(Valerius)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로마제국의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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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르가리타(Margaret)
축일 11월 16일
헝가리의 레스카에서
앵글로 색슨 왕조 최후의 왕 에드워드 애틀링과
헝가리의 왕비 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난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헝가리의 성왕
스테파누스(Stephanus, 8월 16일)의 조카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성 스테파누스 왕의
궁중에서 보냈으며, 부왕이 세상을 떠난 후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패하자
가족과 함께 헝가리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배가 표류하여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그녀는 여기서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 3세와
결혼하였다.
이때부터 그녀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되었던 성직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Synod)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고, 던펌린(Dunfermline)에
삼위일체 대수도원을 세우는 등 교회 안팎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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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엘피디우스(Elpidius)
성 마르첼로(Marcellus)
성 에우스토키우스(Eustochius)
축일 11월 16일
성 엘피디우스(Elpidius)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 황실의
고관이었으나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졌으며,
성 마르첼루스(또는 마르첼로)와
성 에우스토키우스(Eustochius) 등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나운 말에 매달려 거리를
끌려 다니다가 결국은 화형대 위에서
불태워져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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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멕틸다(Mechtildis)
축일 11월 16일
성녀 멕틸다는 로데스포르프(Rodersforf)에서
수녀가 되어 처음에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1258년 수녀들이 작센(Sachsen)의 헬프타로
옮겨가서 3년이 지난 후에 성녀 대 제르트루다
(Gertrudis, 11월 16일)가 수녀원 교육을 받으러
들어왔는데, 이때 그녀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러므로 성녀 멕틸다는 성녀 제르트루다가
장성할 때까지 돌봐주었고, 뛰어난 신비가로
키운 인물이며,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의 나이팅게일’이 되어 그녀와 같은
신비적인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녀의 제자인 성녀 제르트루다가 자신의
신비체험을 써내려 갈 때, 처음에는 그것을
쓰지 말도록 경고하였으나 주님께서
성녀 멕틸다의 마음에도 감도하셨기에 결국
위대한 책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멕틸다도
영적인 체험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성녀 멕틸다의 계시록” 혹은
“특별한 은혜에 관한 책”으로 불리는 책이다.
성녀 멕틸다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바 없으나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신심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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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녜스(Agnes)
축일 11월 16일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이며
성녀 클라라(Clara)의 동생인 성녀 아녜스는
불과 15세의 나이로 언니인 클라라의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언니 클라라가 수녀회로 들어간 후
집안 단속이 심하였지만 그녀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마침내 친척들이 아녜스를
억지로 끌고 가려고 산 안젤로 디 판초
수도원으로 몰려왔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버티었다. 마침내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고, 언니와 함께
성 다미아노 성당 곁에서 살았다.
그 후 아녜스는 1219년 프란치스코가 세운
피렌체(Firenze) 근교 몬티첼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만투아(Mantua), 베네치아(Venezia),
파도바(Padova) 등지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언니를 도와 클라라회의 청빈 정신을 고수하기
위하여 분투노력하였다. 아녜스가 죽을 때
언니가 동석했는데, 클라라가 예언한 대로
11월 16일에 운명하였다. 아시시의 산타 키아라
성당에 안치된 그녀의 묘소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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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판(Afan)
축일 11월 16일
성 아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웨일스 여행기” 속에 이런 구절이
보일 뿐이다. 헨리 1세 때에 라드놀의 성주가
성 아판의 성당으로 들어가서 일행이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 모두가
맹인이 되었다. 이들은 거의 일 년 간
암흑 속에 살면서 예루살렘 순례까지 한
이후에야 시력이 회복되었다. 이 사건은
그들의 신앙이 성 아판에 의하여 눈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하여 그를 더욱 공경하였다는
것이다. 성 아판은 주교였다고만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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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드문도 리치(Edmund Rich)
축일 11월 16일
영국 잉글랜드(England) 버크셔(Berkshire)의
애빙던(Abingdon)에서 출생한
성 에드문두스 리치(Edmundus Rich, 또는 에드문도)는
옥스퍼드와 파리(Paris)에서 수학한 뒤에
옥스퍼드에서 예술과 수학을 강의하였다.
또 그는 옥스퍼드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8년 동안 신학을 가르치다가
1222년경에 솔즈베리(Salisbury) 대성당의
주임 사제가 되었다.
그는 화술이 좋은 대중적인 설교자로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1227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Gregorius IX)의 요청에 따라 사라센을 대항하는
십자군을 상대로 설교하러 다녔고,
1234년에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캔터베리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왕 헨리 3세의
자문관으로 활약하던 중에, 1237년의 대헌장
인준 시에 헨리 왕을 보좌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헨리가 자신의 주교권을 침해하여
오토 추기경을 영국의 교황 대사로 임명하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극렬히 반대하였다.
헨리의 지지를 받고 있던 캔터베리의
그리스도 교회 수도자들 역시 그의 권리를
밝히도록 요구하자 그는 1237년에 로마(Rome)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헨리 왕과의 격렬한 논쟁에 빠져들게 되었고,
1240년에 잉글랜드를 떠나 폰티니의 시토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그는 그해 11월 16일에 프랑스의
수아송(Soissons)에서 운명하였고, 1247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옥스퍼드에서 중세기의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그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무덤 위에 세운 것이라는
전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유식하고 또
거룩한 사람이었으나 주교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그는
“저는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찾지 않았습니다.”
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의 저서 “성교회의 거울”은 중세의
영국 신비주의를 밝히는데 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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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우케리오(Eucherius)
축일 11월 16일
프랑스계 로마인으로 귀족 출신인
성 에우케리우스(또는 에우케리오)는
갈라(Galla)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성 살로니우스(Salonius)와
성 베라누스(Veranus)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둘이 모두 주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에우케리우스는 중년의 나이에 레랭(Lerins)에서
수도자가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생트-마르게리트(Sainte-Marguerite) 섬의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지혜와 덕에 대한
명성은 그를 은수자로 살지 못하게 방해하였고,
435년경에 리옹의 주교로 불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독수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글과 더불어
테반 지역의 순교자에 관한 기록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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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오트마로(Othmar)
축일 11월 16일
게르만족 출신으로 라이티아(Raetia)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된 후 그 지방의
성 플로리누스(Florinus)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성 오트마루스(Othmarus, 또는 오트마로)는
720년에 황폐해진 스위스 장크트갈렌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의 수도규칙 하에 있던
그 지역 수도자들을 모은 후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수도규칙을 도입하여
수도원을 부흥시키고, 병원과 학교 등도 지어
스위스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늘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수도원의 식량창고가
비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의 두 명의
백작이 수도원의 재산을 빼앗으려 하자 그는 이에
저항하였고, 결국 박해자들에 의해 보드만(Bodmann)
성에 갇혔다가 라인 강에 있는 한 섬으로 이송되었다.
결국 성 오트마루스는 그곳의 감옥에서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인의 사후 그에 대한 공경이
널리 퍼져나갔고, 오늘날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한
성인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769년에 장크트갈렌의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867년 성인을 기념하여 장크트갈렌에 지은
성 오트마루스 성당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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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제르트루다(대)(Gertrude the Great)
축일 11월 16일
흔히 '위대한 게르투르다'
(Gertrudis, 또는 제르트루다)로 불리는
성녀는 1256년 1월 6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되던 1261년 아이슬레벤(Eisleben)에
있는 헬프타 시토회 수녀원 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수도원은 성덕으로 유명하였는데,
이 수도원의 설립자이자 원장인
하크본(Hackeborn)의 게르투르다는 수녀원을
지혜롭게 운영했으며 그곳을 문화와 영성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성녀 게르투르다는 수녀원장의 동생이면서
수련장이었던 메크틸드(Mechtild) 수녀 밑에서
개방적이고 휴머니즘적 교육을 받았다.
15세 때 학교를 마치고 수녀회에 입회하였는데,
그녀의 지적 열망과 타고난 지능으로
베네딕투스(Benedictus) 성인의 영성뿐 아니라
음악, 문학, 문법학, 예술 등에 능통하였다.
그런데 1281년 1월 27일 예수의 발현을 체험하고
나서는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 그리고 전례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또한 그녀의 생활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영적 체험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삶과 그리스도의 발현,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비로운 은총적 계시를
다룬 5권의 책이 “하느님의 사랑의 사자”
(Legatus divinae pietatis)로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 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성사에서
‘예수 성심의 신학자’라고 불리어졌고,
예수 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겨졌다. 그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특히 13세기 독일 교회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여겨지고, 그녀의 풍부한 신비 경험으로
‘독일의 테레사’라고도 칭해진다.
1302년 11월 16일 헬프타 수도원에서 중병을 앓던
그녀는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다.
게르투르다는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 독서,
찬가에서 그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았다.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다른 게르투르다와 구별하고 그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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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테옥티스타(Theoctiste)
축일 11월 16일
전승에 의하면 성녀 테옥티스타
(Theoctistes, Theoctista)는 에게해(Aegean Sea)의
레스보스 섬에 살다가 아랍인들에게 납치되어
파로스(Paros) 섬으로 끌려가던 중에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녀는 숲 속으로 도망하여
수색대가 돌아갈 때까지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30년 동안 은수자로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오직 채소와 열매만을 먹었다.
그러나 성체를 모신 적이 없었기에 늘 걱정하던 중에,
한 번은 그 주위를 지나는 연로한 사제를 만났다.
이 사제의 이름은 시몬(Simon)으로 1년 뒤에
성체를 모시고 그녀를 찾았고 그녀는 비로소
성체를 모셨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그 성녀를 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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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피덴시오(Fidentius)
축일 11월 16일
교회 전승은 성 피덴티우스(또는 피덴시오)를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탈리아 파도바의
주교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또한
확실하지 않고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