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혼인집 손님들이(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 - 이말의 문자적 의미는 '신랑방의 아들들'이란 뜻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위해 온 친구들을 가리킨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되는데 이 사람들은 결혼 마지막 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들러리였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에 비긴 반면 예수는 '신랑'으로 생각한 바가 있다(요 3:29). 따라서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은 신랑에 대한 예수의 비유 설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의 말을 상기했을 것이며 다른 누구보다 예수의 말씀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 예수의 이 질문은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실로 예수는 신랑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로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모양이 좋지 못한 것이다.
한편 구약에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으며, 특별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도래 또는 메시야의 잔치와 관련된 비유에서 종종 이 '신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에수의 응답은 메시야적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이 대답을 통해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종말의 날에 오실 신랑,
곧 메시야이며 따라서 그 예언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한편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로 비유한다(25:1; 고후 11:2; 엡 5:32). 신랑을 빼앗길 날 -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될 것임을 가리킨 표현이다.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 기간에는 설사 그 중에 금식일이 끼여 있다고 해도 금식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치 기간이 끝나기 전날 신랑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는 금식해야 했던 것으로서 영적 신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은 그때부터 당연히 슬픔에 빠져 금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만약 예수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한다고 한다면 예수의 오신 목적, 즉 병든 자에게 치유함을 얻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함을 주려는 그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고 또 마치 그리스도의 오심이 어떤 큰 재앙이나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있으리니 그때는 바로 신랑되신 주님을 잃게될 때인 것이다.
[마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 왜 금식하지 않는가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두번째 예화이다. 누가는 이 예화를 비유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나포스'는 한 번도 세탁이 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 말리면 줄어든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생베를 여러 번 세탁이 된 적이 있고 또 올이 낡은 베에다 대고 기울 경우 생베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어짐을 더할 뿐인 것이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이식에 접붙여질 경우 유대교 의식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예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이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세번째 답변이다. 내용상 이 세번째 예화는 두번째 예화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다 액체를 담아 놓는 데 사용된 용기이다.
근동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서 생겨나는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 부대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리석게도 배합하려고 한다면 하나는 파괴되고 만다는 뜻으로서 금식과 같은 생명력이 약한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생명력이 충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인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여기서 먼저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으로 가장 최근에 제조된 포도주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째번의 '새'(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로 가죽 상태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나타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지금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나라는 형식과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조직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이러한 새로운 조직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의 교훈과 구약의 율법은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한 견해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태는 계속해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을 연관시키면서 예수의 사역이란 바로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입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6,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 두 비유는 시각에 따라서는 금식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나, 예수의 새로운 교훈이 금식과 같은 유대주의적 의식에 맞게 변형될 수 없으며
또한 그 전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질서인점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적인 대답인 것이다.
[마 9: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이 말씀을 하실 때에 - 마태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신 사건(9-17절)과 직결시키고 있으나 마가는 예수가 바닷가에 계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와 연결시키지 않고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가다라 지방(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마태의 잔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모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한 직원이 와서 - 여기서 '직원'(아르콘)은 통치자, 또는 지배자라는 뜻으로서 어떤 관직이나 종교 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회다에는 몇 사람의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회당 건물의 유지.보존과 운용 및 회당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 본문의 이 직원은 아마 가버나움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 감독이거나 회당장이었던 것 같다. 절하고 - 원뜻은 '무릎을 꿇고'로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존경과 깊은 경의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 누가는 이 직원의 딸이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나이가 12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그의 딸이 죽기 직전에 있었으며 그후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의 집에서 보냄받은 사람들이 알려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결합하여 상세한 과정을 생략한 채 예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방장 죽었사오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에테류테센' 은 반드시 '죽어 있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죽으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셔서...손을 얹으소서 - 선지자들은 은혜를 빌기 위해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권위의 부여, 인격적인 관계성 설정, 생명과 축복의 전달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 아마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외에도 다른 병자들에게 손을 얹었던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회당장은 그 사실을 목격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살겠나이다 -
이는 그 회당장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여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에 주의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하는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만큼이나 훌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