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원내대표 유승민은 사실 박근혜 대통령에 비하면 스팩이 빵빵하다.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 한국개발원(KDI) 선임연구원, 켈리포니아 대 초빙교수… 이 같은 경력의 유승민은 김대중 정부에서 공정거래 위원회 자문관을 했으며 1998~1999년까지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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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법 거부권 파동에서 관련내용을 방송한 채널A 쾌도난마 회면 캡쳐 |
박근혜 대통령은 학력으로만 치면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 학사가 전부다. 물론 여러 개의 명예 박사학위는 있다. 하지만 명예 박사학위를 스팩으로 치진 않는다. 그래도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5선에 거대 야당 대표와 거대 여당 대표의 권한을 가진 비상대책위원장을 역임한 중견 정치인이므로 일반적으로 말하는(학력과 경력으로 보인) 스팩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들은 둘 다 대구출신이다. 그래서 이회창에게 픽업되었다. 이회창은 박근혜를 픽업, 대구 달성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문시켰다. 이후 박근혜는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었지만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이 독선적으로 당을 운영한다며 탈당,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으나 역부족을 느끼고 대선 전에 복귀하였다.
이회창은 2000년 유승민을 픽업,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장을 맡겼다. 그리고 그가 여의도연구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한나라당 싱크탱크가 막강해졌다. 그는 연구원장으로 재직했던 3년 동안 그 이전 김영삼 당시 김영삼의 3남인 김현철이 맡았던 때에 비해 여의도연구원을 확실한 정당 싱크탱크로 변모시켰다.
2004년 총선, 한나라당은 기존의 때를 벗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비상 대권을 가진 박근혜는 박세일 서울대 교수를 영입, 공천심사위원장을 맡겼다. 박 교수는 ‘구태’의 냄새가 나는 현역들을 상당부분 쳐내면서 비례대표까지 신선한 인물로 채웠다. 유승민도 그때 비례대표로 의원 배지를 달았다. 총선에서 망외의 소득을 올리면서 다 죽어가던 생명이 살아난 한나라당은 당을 살려낸 1등공신이 박근혜 비상대표였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총선 후 비례대표로 당선된 유승민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6일 박창달 전 의원의 당선무효 확정판결에 따라 치러진 대구 동구을 후보로 공천했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유승민은 같은 17대에 비례대표 의원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신분이 변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기 위하여 2006년 당권을 내놓은 박근혜 의원에게 그때까지도 유승민은 측근 두뇌로 활동하면서 박 의원의 대권준비를 도왔다. 그리고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의 메시지 팀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박 후보는 이명박 후보에게 경선에서 패했다. 캠프가 정리될 당시 가장 늦게까지 캠프에 남아 뒷마무리를 했다. 이후 두 사람은 당내 비주류가 되어 언론에 노출되는 일이 줄어들었다.
박근혜는 정중동을 하다 대선 유세가 한창일 때 지원유세에 나서면서 전국을 돌았다. 곁에 유승민은 없어졌으며 대신 유정복이 있었다. 캠프 메시지 팀장이었던 유승민, 대변인이었던 이혜훈이 없는 자리에 이정현이 ‘대변인격’이란 타이틀로 박근혜의 행보를 대변했다.
2010년 한나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유승민이 최고위원으로 당선될 때 ‘친박계’란 타이틀이 달렸었는데 점점 언론은 유승민을 친박에서 제외해 나갔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유승민은 박근혜가 찍어내야 할 사람 1순위가 되었다. 이런 유승민을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앞서 거론했지만 박세일은 서울대 교수다. 박세일은 17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심사위원장으로서 활동한 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며 비례대표로 국회 입성했다. 하지만 이듬해 박근혜 대표가 수도이전을 위한 세종시법 처리를 추진하자 당시 정책위의장이던 박세일은 비례대표 의원직을 던지며 탈당, 박근혜 대표와 결별했다.
이후 박세일 교수가 정통보수를 표방하면서 창당한 신당 ‘국민생각’에 유일하게 현역으로 참여한 전여옥 전 의원 또한 박근혜 대표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지근거리에서 보좌했으나 지금은 완전히 멀어져 있다. 김종인 전 의원, 이상돈 교수, 김광두 교수, 이혜훈 전 의원…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원들이 박근혜와 지근거리에서 일하다 멀어져 갔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전여옥 전 의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내놓지 않는다. 그 점이 바로 보수진영이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있는 덕목이다. 야권은 피를 나눈 사이처럼 끈덕진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정치적 방향이 틀려 길이 어긋나면 극심한 내부총질을 통해 우군을 죽인다. 그러나 보수진영은 전여옥 같은 특별한 몇을 제외하면 입을 닫는 것이 금과옥조다. 그래서 내부 권력투쟁이 한창일 때는 저 집단이 저대로 갈 수 있겠나 싶다가도 그 투쟁이 정리되면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굳게 입을 다물면서 조직을 유지한다.
각설하고… 그러면 왜 서두에 유승민과 박근혜가 맺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두 사람의 부친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서다.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은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유승민 의원의 부친은 유수호 전 의원이다. 유 전 의원은 대구지방 변호사회장과 대한변협 부회장을 역임한 중견 법조인으로 전두환의 민정당에 픽업되어 13대와 14대 연이어 대구 중구에서 당선된 민정당 중진의원이었다. 그러나 유수호 변호사는 1971년 박정희 정권이 남긴 사법파동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법관들이 독재정권의 하수인을 거부하면서 1971년 일어난 사법파동은 우리 법조사에 큰 휴유증을 남겼다. 이 파동 때문에 박정희는 법관재임용 제도를 만들어서 입맛에 맞지 않은 법관들을 잘라냈다. 즉 10월 유신에 성공한 박정희가 권력에 맞선 기개 있는 법관들을 쳐내기 위해 유신헌법에 법관재임용 제도를 넣은 것이다. 그리고 1973년 전 법관들을 심사, 16명의 대법원 판사 중 절반이 넘는 9명, 일반 판사 497명 중 356명이 재임명되고 41명을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때 재임용에서 탈락한 대법관은 사광욱, 양회경, 방순원, 나항윤, 손동욱, 김치걸, 홍남표, 유재방, 한봉세 등 9명이다. 대법원은 이들을 ‘의원면직’ 형식으로 잘랐다. 이들은 1971년의 국가배상법 2조 1항의 위헌 판결에서 위헌 의견을 낸 이들이었다. 이어 재임용에서 탈락한 법관들의 면면을 보면 박정희 권력이 얼마나 권력 유지에 집요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에 기록된 자료들을 살피면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전횡이었다. 사법파동 당시 대법원장을 방문했던 판사들인 최영도, 목요상, 김인중, 금병훈, 장수길 등은 모두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최영도 변호사는 자신의 재임용 탈락에 대해 “무죄 선고도 많이 했고 구속영장 거부도 많이 했고 그래서 검찰에서 아주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라고 회고했었다. 사법파동 당시 평판사 대표로 대법원장을 면담한 서울고법 김인중 판사는 서울형사지법 재직 시 반공법 사건에서 자주 무죄를 선고하여 중앙정보부와 검찰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사법파동 당시 서울민사지법의 수석부장판사였던 박승호 부장도 해직되었다.
이건호 판사는 한국전쟁 당시 검사였던 부친이 납북되었으나 월북자 자녀로 찍혀 해직되었으며, 신민당 강근호 의원의 동생이었던 강은애 판사는 자신이 해직된 이유로 강근호 의원이 매우 강성인 야당의원이었다는 점을 들었다.
파월장병 사망자에게 국가배상 판결을 한 백종무 판사, 1971년 재일동포 형제간첩단 사건에서 피고인 5명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석조 판사,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판결에서 국가에 패소를 안긴 김동정, 유수호 판사, 특히 유수호 판사는 1971년 총선에서 공화당원의 선거법 위반을 엄히 다스린 바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뒤에 민변 부회장을 거쳐 대법관에 오른 이돈희 판사, 법관정풍운동을 주도했던 대구고법의 이존웅, 변중구 판사도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위 명단에 있는 유수호 부장판사가 유승민 의원의 부친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총재인 공화당원의 선거법 위반을 엄히 다스리다가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한 법조인, 박근혜 대통령과 정책 방향이 다르다고 ‘배신자’라며 찍어내려 하자 버티는 여당 원내대표. 여기서 핍박하는 대통령은 부녀간이고, 핍박당했거나 현재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부자간이다.
이로 보면 유승민은 박근혜와 애초 맺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유승민이 박근혜 비서실장을 하고 메시지 팀장을 하면서 원박으로 활동했지만 그의 혈통은 박근혜 혈통과는 원한(?)이 있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추후 사가(史家)들에 의해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한 귀퉁이를 장식할 지역주의 정치가 창궐하지 않았다면 유승민은 박근혜와 연결이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싸움의 결과가 더 흥미롭다. 유수호의 2세 유승민이 박정희의 2세 박근혜의 핍박을 견뎌낼 것인지… 아니면 유수호처럼 수년간 사라졌다가 다시 컴백할 것인지… 기록자로서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오늘 어떤 신문은 한번 마음 먹으면 물러서질 않는 박근혜 대통령의
성격상 유승민이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과연 유승민은 버텨낼 것인가?
(받은 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