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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한 초기 유럽 불교도
1. 들어가며
아시아로 전파되어 대표적인 ‘동양 종교’로 여겨지는 불교가 아주 오래전 유럽으로도 전해졌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유럽이 기독교화하면서 불교는 유럽에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19세기에 들어서서야 불교는 다시 유럽에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불교는 소수였지만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다. 철학자, 극작가, 문인, 종교인들이 낯선 ‘이방의 종교’를 사뭇 진지한 태도로 바라보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후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불교는 눈에 띄게 확산되어 심지어 불교운동을 거론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여러 부류의 유럽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불경을 연구한 학자들이 있었다. 사실 많은 세계종교의 전파과정에서 선교사나 포교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면, 유럽에서는 유럽인들 스스로 학술적 관심과 함께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들 학자는 산스끄리뜨어 그리고 특히 빨리어로 된 초기경전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애쓴 이들로 유럽 전역에서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독일어권 지역 학자들의 활약은 주목할 만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이 지역에서는 인도학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불교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들 학자에게 불교는 연구의 대상이었지 자신들이 수용할 수 있는 종교로 여겨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점차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불교도를 자처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 글은 이런 경향이 본격화되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세기 전환기에 독일어권 지역의 불교사에 이름을 남긴 노이만(Karl Eugen Neumann, 1865~1915)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단지 독일어권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학계에도 잘 알려진 불교학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빨리어 경전 번역을 통해 유럽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불경 번역가가 아니라 ‘정통’ 불교도라 불릴 수 있는 이였다. 이 글은 유럽 초기 불교사에 이름을 남긴 한 불교도를 통해 그가 이해한 불교와 그것이 보여준 특징적 면모를 살피고자 한다.
2. 빨리어 경전 번역가 노이만
불교 초기경전에 대한 비상한 관심은 독일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었고, 또 독일만의 현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독일어권 지역의 불교문헌학 발전이 괄목할 정도였으므로 이 지역에서 다수의 저명한 경전 연구자가 배출된 것은 당연했다. 노이만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학에 자리를 잡아 안정적인 삶을 누린 학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삶은 어려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도 불경 연구의 끈을 놓지 않은 집념의 연구자였다.
노이만은 1865년 오스트리아 빈(Wien)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계는 유대인 전통을 벗어난 상태였다. 빈의 궁정 오페라 극장 테너 가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독일 극작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와도 막역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일찍부터 그의 가족은 인도 그리고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독일에서 불교가 소개되는 초기 과정에서 바그너와 같은 인물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노이만은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글을 탐독하면서 한층 인도 그리고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관심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는데, 부모의 강권에 따라 김나지움 대신 라이프치히상업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인도와 불교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그는 극장 감독이 된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Prag)로 가서 김나지움을 마치고 베를린에서 인도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베를린에는 헤르만 올덴베르크(Hermann Oldenberg, 1854~ 1920)라는 유명한 불교문헌학자가 있었다. 그 밖에도 파울 도이센(Paul Deussen, 1845~1919)을 비롯하여 알브레히트 베버(Albrecht Weber, 1825~1901), 리하르트 피셸(Richard Pischel) 등 저명한 인도학자들이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는 이들의 영향을 받으며 인도학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리고 1890년 빨리어로 된 14세기 불교 강요서(綱要書) 《사라상가호(Sarasangaho)》의 번역본을 박사논문으로 제출하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이후 그의 학자로서 전도는 밝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었으며, 1892년 영국으로 가서 인도와 관련된 일자리를 구하고자 한 시도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 1894년 인도와 스리랑카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그는 일시적으로 빈 대학의 인도학 교수 게오르크 뷸러(Georg Bühler) 아래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1898년 뷸러가 사망하면서 이 기회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그는 1915년 폐렴으로 급작스레 사망하기까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불교 연구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빨리어 초기 경전의 독일어 번역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붓다의 가르침을 기록한 삼장(三藏) 중의 경장(숫타 피타카, Sutta Pitaka) 번역을 시도했고, 1892년에는 경장 주요부를 발췌 번역하여 《불교선집(Buddhistische Anthologie)》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물론 이 책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유럽학계에서는 여러 차례 삼장의 번역이 시도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대체로 부분 번역이란 한계가 있었다. 이에 비해 그의 번역은 경장을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번역한 것이었으며, 후일 그는 경장 전체를 거의 완역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그가 빨리어 경전과 기록물에 집착한 이유는 당시 유럽의 불교문헌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은 붓다의 가르침과 초기불교의 원형을 밝히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유럽에는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티베트불교와 관련된 여러 경전 및 해석본들이 잘 알려져 있었으며, 이를 이용한 연구가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노이만을 비롯한 독일 불교문헌학자들은 이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의 목표가 오로지 붓다의 역사적 실체와 그의 원래 가르침을 밝히는 데 있었지, 불교의 발전사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 불교문헌학자의 불교 이해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노이만은 아내, 노모와 은둔생활을 하면서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다. 경전 번역작업은 고독한 일이었으며, 또 번번이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의 번역본은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의 번역서를 읽고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노이만은 서구불교사에서 일반적으로 불경 번역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이런 그의 작업이 반드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번역은 전문 불교문헌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번역에 대한 평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그가 불경과 그 속에 담겨 있다고 여긴 부처의 가르침에 부여하는 의미가 남달랐다는 점은 틀림없다. 그는 불교를 ‘진정한 종교’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진리(Wahrheit)’라고 여기며 정통 불교도를 자처했다.
이는 당시 불교를 연구하는 문헌학자라고 해서 반드시 불교에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 그리고 특히 독일어 문화권에는 불교와 연관된 듯이 보였으나 실은 불교적 기반은 취약한 여러 경향이 대중적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심령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어 불교에 접근해간 신지학회 관련자들이었다.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 1831~1891)와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32~1907))에 의해 만들어진 신지학회는 라이프치히와 뮌헨을 비롯한 독일 도시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또 이들과 연결되면서 채식주의나 동물보호를 내세운 ‘생명개혁운동’을 주창하는 이들도 활발히 세력를 얻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불교와 강한 연대성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사실 불교도라 불릴 수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이런 환경에서 스스로 불교도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그 중심에 노이만과 같은 이가 있었다. 그는 불교를 학술적 차원을 넘어 종교적 차원에서 받아들인 경우에 해당했다. 그러나 이 글은 이렇게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실은 불교에 대한 특별한 문제의식과 함께 자신의 관점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는 초기 수용단계의 유럽 불교도였고, 따라서 그는 특별한 문제의식과 함께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하에서는 이런 그가 보인 불교 이해의 특수한 면모를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1) 우선 그는 대부분의 당시 독일어권 불교문헌학자들이 그러했듯이 불교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불교를 연구하는 대부분 유럽 연구자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붓다 가르침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있었다. 노이만 역시 시종일관 “진정한 불교교리의 순수성과 고매함”을 논하면서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종교로서 불교를 높이 평가하는 데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은 명백했다.
그리고 이때 그는 불교를 기독교와의 비교 속에서 파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유럽의 기독교라는 종교와 문화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불교와 기독교를 종교적 유사성 내지 공통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차이에 더 많은 관심을 두면서 비교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유일신 사상에 기반을 둔 기독교의 입장에서 불교는 전혀 다른 종교이거나 아니면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이만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불교 이전의 인도 종교를 거론하면서 그것이 기독교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불교 내지 인도 종교가 일반적으로 기독교와 “인간 지각의 쌍극을 표현”한다는 생각을 비판하면서 두 ‘세계관’이 ‘내적 연관성을 가진 것’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그는 기독교의 일신론과 인도의 다신론이 모두 “구원 내지 해탈(Erlösung)을 추구”한다고 보았으며, 나아가 기독교가 상정하는 ‘신의 왕국(sein Reich)’과 인도 종교가 추구하는 ‘윤회로부터의 해탈(die Erlösung von der Welt, vom Samsara)’이 동일한 성질의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두 종교의 유사성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적 심성에서 우러나온 친연성(eine andere, gleichfalls aus innerster Herzensgesinnung hervorgehende Verwandtschaft)”을 가진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그가 주목한 것은 “무한한 사랑, 즉 끝없는 동정의 마음(die unbegränzte Liebe, d.h. das schrankenlose Mitleid)”이었는데, 그에 따르면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는 동일한 것이었다. 즉, “남을 나와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경계 없는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놀랍고 가장 눈에 띄게도” 두 종교가 “자기 존재 부정의 교리(die Lehre von der Verläugnung seines eige-nen Selbstes)”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두 종교는 유사하다고 보았다. 물론 여기서 거론되어야 할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기독교와 불교 내지 인도 종교의 유사성을 거론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에서도 특정 경향 그리고 기독교 사상가 중에서도 특정 사상가에 주목하면서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기독교에서도 특별히 주목한 이는 중세 후기 독일의 신학자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였고, 그가 생각하기에 이 신비주의자가 기독교의 정신을 가장 잘 그리고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중세의 신학자는 개인 영혼의 내적 체험을 중시했고, 또 그를 통해 신적 존재를 내면화하기를 추구한 신비주의자였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은 완전히 무(ein reines Nichts)”이며, 신(Gott)만이 “진정으로 순수하고 명징한 유일자(ein lauteres, reines, klares Eines)”이므로 “우리는 그 유일자 속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무엇인가로부터 무(Nichts)로 영원히 침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신비주의자에게서 기독교 정신의 핵심을 본 노이만은 이를 불교의 무아론(無我論, Anatmanlehre) 그리고 열반에 대한 지향과 연결시켰다. 즉, 그는 붓다의 가르침이 불변의 실체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 그 핵심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영원한 존재는 “무상한 것”이며 따라서 그 “존재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으로 열반”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 붓다였다는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에크하르트의 의미에서 “무로 영원히 침잠하는 것”과 동일한 지향을 가진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그가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독교적 문제의식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그가 기독교와의 연결점을 통해 불교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물론 그는 두 종교를 연결시키면서 두 종교에 대한 긍정적 인식에 이르고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는 끊임없이 두 종교의 유사성을 거론하면서 그 속에서 진정한 종교성의 추구가 가능하다고 쓰고 있었다.
2) 이렇게 노이만은 기독교와 유사성에 대한 인식 속에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 불교를 결코 독창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는 불교가 “그 출현 이전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직관”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 인간 역사 속에서 등장한 “모든 종교적 사고가 공히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쓰고 있었다. 물론 그는 고집멸도의 사성제(die vier heiligen Wahrheiten)는 붓다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된 가르침이며, 그것을 진리라고 서술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이루어낸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그의 생각은 불교가 예술의 차원을 가지는 것이란 주장과 함께 잘 표현되고 있다. 그는 불교를 “예술로서 종교”, 또 붓다의 가르침을 “예술작품”이라고 서술하는 흥미로운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때 그는 예술을 본질, 진리를 향한 적극적 수단이라 전제하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아폴로를 조각한 예술가가 인간 형상의 본질, 즉 가장 아름다운 청년을 만들어 냈듯”이 붓다의 가르침은 “세계 존재의 가장 깊은 인식을 완벽히 표현한” “예술작품”이라 쓰고 있다.
이런 모습에서 그가 불교를 진리라는 차원에서 이해했지만 동시에 이를 자신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예술에 대한 판단은 학문과의 대비 속에서 적극적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우선 그가 보기에 학문은 “영원히 불충분하고, 따라서 절대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를 수 없는 것”이었다. 학문은 “역사적 발전”을 거론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종교 그리고 예술이 추구하는 참진리의 문제와 무관한 것이었다. 반면 예술과 종교는 참진리의 추구라는 차원에서 높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예술과 종교를 관련 지어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은 그의 독창적 생각은 아니었다. 이때 비교적 명확한 것은 바그너의 영향이다. 바그너는 예술과 종교를 참진리 추구라는 차원에서 높이 평가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참진리를 인간의 내적 구원으로 보고 불교에서 그를 향한 통로를 찾으려 했던 이 역시 바그너였다. 이렇게 예술과 종교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동시에 불교를 통해 그것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은 바그너로부터 시작되어 많은 유럽인들 사이에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이만 역시 이런 생각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는 붓다의 가르침을 예술작품과 같이 “결코 낡은 것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영원한 젊음 속에 빛나는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불교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한 그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유럽의 전통 속에 붓다의 가르침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과 동일한 차원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 바로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사상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쇼펜하우어를 접하면서 불교에 빠져들게 되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거론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붓다의 가르침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화가, 시인, 음악가, 혹은 철학자이든” 그가 “예술가라면” “그 자신의 완전히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쇼펜하우어도 붓다도 같은 일을 한 이”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대와 분야를 달리하지만 “동양과 서양의 두 위인”이 예술가 그리고 사상가라는 공통성을 가진다는 그의 인식 속에 그가 불교를 파악한 독특한 방식이 드러나고 있었다.
4. 그의 불교 이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노이만은 빨리어 경전을 토대로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바친 연구자였다. 그는 초기경전에 기록된 붓다의 가르침을 밝힘으로써 불교의 원래 모습을 밝힐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그들의 불교를 대하는 태도가 가진 진정성은 너무나 명백했다. 이 글은 동시에 노이만이 불교를 접한 초기 단계 유럽 불교도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당시 유럽 불교도들이 새롭게 접하게 된 한 동양 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나아가기에는 제한적인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당시 불교를 접한 서구 지식인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이는 무엇보다 당시 연구자들이 불교 초기경전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며, 이후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된 불교의 발전사에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불교 이해가 제한적 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점은 너무나 명백했다.
그런데 이는 그들이 불교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지향하면서도 자신들의 ‘관심, 이해, 아젠다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불교를 이해하고자 했기 때문에 초래된 현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서구의 불교 수용자들은 먼 ‘이방의 종교’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자신들의 ‘틀’에 따라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것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붓다의 가르침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내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노이만의 경우 불교도임을 자처했지만, 불교의 의미를 자신의 종교적이고 사상사적인 문제의식과 연계 속에서 발견해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불교의 종교적 의미를 파악함에 있어서 중세 유럽의 한 기독교 신비주의자와 근대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연관시키면서 파악하고자 했으며, 불교를 스스로 높이 평가한 예술에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 변형된 방식으로 불교를 수용하고 체화해 가는 유럽 불교도가 보여준 전형적인 모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박용희 hiyonghee@gmail.com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졸업(역사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학문이라는 이름의 “상상” 독일 인도학자 헤르만 올덴베르크의 불교 이해와 인종주의〉 〈독일초기 불교 수용자들의 인종주의와 불교인식-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경우〉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WISE캠퍼스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