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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식사를 위한 준비(12-16)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사람들을 관계 속에서 사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관계는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다음으로 ‘타인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주변 환경과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이들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12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12-16)
이제 예수님께서는 점점 십자가로 가까이 나가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례를 따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식사할 장소를 준비하길 원했습니다. 그 과정은 나귀 새끼를 준비하게 하신 때처럼(11:1-6),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신성을 잘 보여 줍니다.
(1) 유월절 준비(12-15)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기인 ‘유월절’은 니산월 14일 3시경에 성전에서 유월절 양을 잡으면서, 그 잡은 양들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다음날 니산월 15일 저녁, 즉 무교절 첫째 날에 먹었습니다. ‘유월절’은 15일 저녁 식사로 끝이 납니다. 이 유월절이 종료됨과 함께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동안 무교절 축제가 진행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하나의 연결된 축제로 생각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무교절은 8일간 진행되는 것처럼 간주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무교절의 첫 날’이라고 이 날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입니다. 엄밀히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인데, 무교절 첫날에 양을 잡는다고 말함으로써 유월절과 무교절을 하나로 연결하여 한 절기로 인식합니다. 무교절이라고 하면 8일 동안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어린 양을 잡는 날은 니산월 14일, 즉 유월절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무교절의 첫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시간으로 13일 낮이 끝나고 해가 막 진 14일이 시작한 시간입니다.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니산월 15일 저녁이 되면, 유월절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하루 전날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명절에 올라오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 장소를 빌려주는 데 관대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숙박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여행자를 위한 환대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월절 때는 대단히 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몰리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식사하는 방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함께 식사할 만한 넓은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리 유월절을 위해 준비하려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제자들은 마가복음에서는 무명의 제자로 언급되지만, 누가복음 22:8에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소개됩니다.
놀랍게도 유월절 식사를 원래대로 내일(15일) 저녁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14일) 저녁에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준비하게 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날 밤 식사를 유월절 양 없이 미리하신 것은, 그날 오후 원래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에 예수님께서 친히 몸소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견한 것입니다.
(2) 예비된 유월절(16)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 둘을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지시 사항은 매우 구체적인데,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13)라고 소개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 나귀를 준비한 장면과 비슷합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물동이를 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로서 남자(남자 종)가 물동이를 지고 있는 것이 상당히 예외적이기에, 제자들은 그 사람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 쉽게 하는 일종의 암호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미리 약속된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를 만나면 따라가서 집주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이 말에 그 사람은 잘 준비된 큰 다락방으로 안내해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세 묘사는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 집주인과 예수님 사이에 일종의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암시를 줍니다.
물동이를 들고 있는 남자 종이 일종의 은밀한 신호가 되어 먼저 와서 제자 둘을 기다리고 있고, 제자들을 미리 약속된 집으로 인도해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게 한다는 약속이 미리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집주인은 넓은 다락방을 소유한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예수님과는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계획대로 사람을 만났으며 준비된 집으로 들어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큰 다락방을 준비해준 제자의 이름은, 앞에서 나귀를 준비해준 사람처럼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시기 까지 그분 곁에서 그 길을 협력했던 사람들은 12 제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여인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무덤을 준비해준 아리마데 요셉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동거 동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 꼭 필요할 때, 각 자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깨어있는 사람들이었고,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유월절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기념하고 먹었던 유월절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땅에서 아직도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다시 한 번 해방을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유월절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 배신을 예언(17-21)
예수님께서는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세심한 시간표는 십자가의 날을 기준으로 정해졌습니다. 3년 반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과 상관없이 산 비참한 인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도차도 하나님의 세심한 예비하심 속에 묵묵히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17-21)
온전한 순종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유월절 식사 먹을 장소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식사 도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이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1) 다락방에 입실(17)
두 제자의 유월절 장소와 음식의 준비가 끝나고 날이 ‘저물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다락방으로 향해 식사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여기서 ‘저물매’라는 표현은 정확한 시점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가 보통 밤에 진행되었기 때문에(출애굽기 12:8) 니산월 14일이 끝나고 공식적으로는 니산월 15일이 된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간 계산법으로는 여전히 같은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지상에서 함께할 이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후에 등장하는 식사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매우 깊은 이야기를 전달하십니다.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세심히 준비된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식사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돌아가실 것을 알고 그에 맞추어 철저하게 준비시키십니다.
(2) 배신 예고(18-19)
두 제자의 유월절 음식 준비가 끝나고 날이 ‘저물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식사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여기서 ‘저물매’라는 표현은 정확한 시점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가 보통 밤에 진행되었기 때문에(출애굽기 12:8) 니산월 14일이 끝나고 공식적으로는 니산월 15일이 된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간 계산법으로는 여전히 같은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지상에서 함께할 이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후에 등장하는 식사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매우 깊은 이야기를 전달하십니다.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세심히 준비된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식사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돌아가실 것을 알고 그에 맞추어 철저하게 준비시키십니다.
본문에 ‘다 앉아 먹을 때에’라는 표현은 팔레스틴의 식습관을 알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넓은 방에 사람들이 비스듬히 누워 팔을 걸고 앉아서 다른 한 손으로 식사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손수 치밀하게 계획하신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이미 예견한 대로 유대 지도자들에게 넘기질 사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제자가 범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18)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친숙한 교제 관계를 나타내는 식사 자리에 함께한 사람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팔 자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제자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마가복음 독자들이라면 예견된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모의를 하는 장면이 바로 직전에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라는 표현은 시편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는 표현을 반향한 것입니다. 구약의 원래 문맥에서 이 말씀은 다윗이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던 아히도벨이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협조한 것을 기억하며 고통스러운 심정을 묘사한 것입니다.
실제로 쿰란공동체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빵을 먹던 모든 사람이 내게 등을 돌렸다’(1Qs 5:23-24). 이런 용례로 생각해봤을 때 유대인들은 시편 41편의 표현을 가까운 사람에게 배반당하여 겪는 심적 고통을 표현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관례대로 이 구약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아픔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의 반응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한 명씩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할 때 사용하며, 제자들이 예수님의 폭로에 적잖이 당황하였음을 시사 합니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경험은 충격적입니다. 더욱이 제자가 선생님을 배신다는 것은 팔레스틴 문화권에서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3) 열둘 중 하나(20-21)
18절에서 배신자가 제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는데, 20절에서는 그 사람의 정체가 열둘 중의 하나라고 하여 그 정보가 좀 더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이미 독자들은 14:10-11에서 유다의 배신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문맥 속에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20)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지는 적시하지 않지만, 함께 식사하고 있는 제자 중 한 명이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며 사역을 감당해야 할 열두 제자 중에서 배신자가 나오리라는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이 대목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략과 이에 동조한 제자에 의해 힘없이 처량하게 넘겨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본문은 이러한 조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21)라고 이 일들은 성경에 예언된 일이라고 하십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은 이 일의 주도권이 종교지도자들과 배신하는 제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5-18도 같은 전망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합니다.
‘이를(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배신하는 자에게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실이 다음 구절을 통해서 확증되고 있습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21)라고 하십니다. 배반한 제자가 입게 될 화를 생각하면,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상 유다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유다를 향한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동생 아벨에게 살의를 품고 있던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6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4:6)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를 받고 난 다음에 가룟 유다는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제자들의 그룹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다 들통 났으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주님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하겠다고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유지하시고 보호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누구든지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인생이 될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살았지만 사실은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은 주안에 있지만, 마음은 밖에 있고 세상에 빠져 있는 유다처럼 되지 않길 원합니다. 속히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사죄의 은총과 회복의 영광이 있는 하나님의 품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아시면서도 그와 식탁을 함께 하신 것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참기 어려운 배신과 견디기 힘든 고난을 이기는 비결은, 그 속에서 하나님 뜻을 발견하고 따르는 영적 의지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에 놓고 흔들릴 만한데도 예수님께서는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그 길을 가십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서 배신과 의문, 혼란의 게이지가 상승합니다. 고난 주간 동안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의 곁을 지키며 동참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