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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내려오다/장석주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내 정부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버렸다 내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당신의 경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내가 지켜야 할 계율은 내가 만든다 당신을 떠나면서 점집에 갔더니 구설수를 조심하라고 한다 구설수란 누구에게나 붙는 국민연금이거나 지방세 같은 것이다
당신을 버렸지만 길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무릇 길들이란 땅 위에 세운 당신과 나의 유적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이 바뀐다 길 없는 길 위에 서서 새 길을 꿈꾼다
끼니때가 되면 쌀을 씻어 안치고 밥물이 끊는 동안엔 슬하의 것들을 돌보아야 일과는 매우 신성한 것이다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잘 때가 되면 눈을 붙인다 고립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자에겐 고립이 아니다 심심한 큰 개가 희디흰 햇빛 속에서 저보다 몸집이 작은 강아지의 목덜미를 물고 마구 흔들어댄다 어디서나 힘없는 것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어 있다
노란 수박꽃 밑에 엄지손톱만큼 작은 수박이 매달렸다 지금 이 순간에 부화하지 않는 것들은 끝내 부화하지 못한다 올 봄에 심은 나무 중에 석류나무가 가장 늦게 잎을 피워낸다 저수지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비가 없다 벌써 용솔 묘목의 반이 벌겋게 잎이 말라 죽었다 물의 문하에 들어선 자에게 이보다 더 큰 실망은 없다 나는 절망함으로써 절망을 채찍질하며 절망을 건너갈 것이다. 너무 크게 상심하지 않기로 한다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 당신에겐 삶이 없다 이 순간에도 당신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내 전생은 라마승이었으니 마흔 너머부터는 라마승의 삶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큰 불편을 냉큼 받아들었더니 마음이 작은 불편들이 입을 다문다 시골에 오니 비로소 희망이 있었다
<시 읽기> 시골로 내려오다/장석주
장석주 시인은 출판인으로 성공하여 분홍색이 감도는 예쁜 건물을 역삼동에 짓고 활발하게 출판사를 운영하던 때였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그때 무슨 원고와 관련된 일로 그의 출판사를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차분하면서도 화사한, 그러면서도 세련된 출판사 사옥과 출판사 내부의 분위기는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느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장석주 시인을 만나기 위하여 2층에 마련된 그의 방을 찾았습니다. 저는 그의 방문 앞에서 순간 발걸음을 머추고 잠시 서 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제 눈을 사로잡은 그 방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장석주 시인은 자신이 머무는 방문 앞에 ‘완전주의자의 방’이라고 아주 예술적인 디자인으로 표찰을 만들어 달아 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는 순간 현학적인 그의 포즈가 느껴지는 것 같아 입가에 피식 웃음기를 흘리면서도, 곧바로 그이 제2시집이 『완전주의자의 꿈』이라는 사실과 그의 첫 평론집이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가 시와 삶 속에서 한 점 허술한 구석이 없는 완전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거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완전주의자의 방’답게, 그의 방 안은 손댈 곳 없는 예술품처럼 참으로 완벽했습니다. 잘 정돈된 책과 서류들, 군게군데 놓인 그림들, 잔잔히 흐르는 음악 소리,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장석주 시인의 단아한 풍모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아주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장석주 시인에게 마광수 교수의 소위 ‘즐거운 사라’ 사건이 덮쳐왔고, 그는 이 일로 인하여 그가 공들여 닦아온 출판인으로서의 길을 접어야 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그가 오랫동안 열정을 다해 키워왔고 닦아왔던 청하 출판사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저의 첫 평론집 『존재의 전환을 위하여』를 출간된 곳이 바로 장석주 시인이 운영한 청하출판사였습니다.
청하 출판사가 이렇게 문을 닫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의 어느날, 저는 장석주 시인이 서울을 떠나 저 안성의 한 시골 마을로 내려간 것을 그가 발표한 시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의 시적 변화 과정을 지속적으로 살펴온 저의 눈에는 그의 시가 시골 마을로 내려가 달라진 삶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가 영위하는 새로운 삶도 궁금했고, 그가 펼쳐 보일 새로운 시 세계도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장석주 시인으로부터 한 권의 시집이 우송되어 왔습니다. 겉봉투의 발신인란에는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393 수졸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겉봉투를 뜯어내고 그 속의 시집을 꺼내 단숨에 작품을 다 읽어버렸습니다. 그가 보낸 시집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속의 작품을 이렇게 단숨에 읽어버린 날, 저는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그곳에는 ‘완전주의자의 방’을 지향하던 이전의 장석주 시인과 다른, 새로운 장석주 시인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보았던 ‘완전주의자의 방’을 떠올리며 달라진 ‘수졸재守拙齋’에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간’ 한 영혼을 훔쳐보고 싶었습니다. ‘완전주의자의 방’을 넘어서 ‘수졸재’를 만들어낸 한 시인의 겸허한 삶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봄기운이 감도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수졸재’를 찾아갔습니다. 산과 물과 사람이 ‘수졸’의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의 집 풍경은 더 이상 ‘완전주의자의 방’이라고 표찰을 달지 않아도, 더 이상 액자나 그림으로 장식을 하지 않아도, 더 이상 음악적 선율을 빌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조화롭고 완전해 보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들이 몸에서 힘을 빼고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기서 슬하에 강아지를, 새를, 들풀을 두고 외롭지만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수졸재’ 시편이라고 부를 만한 장석주 시인의 최근 시집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속에서 저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잡아끈 작품은 <시골로 내려오다>였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저는 그가 ‘수졸재’에서 살아가는 지금의 내적인 세계는 물론 외적인 세계까지도 한꺼번에 그려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도시를 버리고 시골을 선택함으로써, 달리 말하면 올라감을 버리고 내려옴을 선택함으로써, 이 시대의 세속인들이 상실한 채 살아가는 세계를 어떻게 얻고 찾아냈는가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좀 긴 작품이지만 전문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내 정부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버렸다 내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당신의 경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내가 지켜야 할 계율은 내가 만든다 당신을 떠나면서 점집에 갔더니 구설수를 조심하라고 한다 구설수란 누구에게나 붙는 국민연금이거나 지방세 같은 것이다
당신을 버렸지만 길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무릇 길들이란 땅 위에 세운 당신과 나의 유적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이 바뀐다 길 없는 길 위에 서서 새 길을 꿈꾼다
끼니때가 되면 쌀을 씻어 안치고 밥물이 끊는 동안엔 슬하의 것들을 돌보아야 일과는 매우 신성한 것이다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잘 때가 되면 눈을 붙인다 고립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자에겐 고립이 아니다 심심한 큰 개가 희디흰 햇빛 속에서 저보다 몸집이 작은 강아지의 목덜미를 물고 마구 흔들어댄다 어디서나 힘없는 것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어 있다
노란 수박꽃 밑에 엄지손톱만큼 작은 수박이 매달렸다 지금 이 순간에 부화하지 않는 것들은 끝내 부화하지 못한다 올 봄에 심은 나무 중에 석류나무가 가장 늦게 잎을 피워낸다 저수지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비가 없다 벌써 용솔 묘목의 반이 벌겋게 잎이 말라 죽었다 물의 문하에 들어선 자에게 이보다 더 큰 실망은 없다 나는 절망함으로써 절망을 채찍질하며 절망을 건너갈 것이다. 너무 크게 상심하지 않기로 한다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 당신에겐 삶이 없다 이 순간에도 당신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내 전생은 라마승이었으니 마흔 너머부터는 라마승의 삶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큰 불편을 냉큼 받아들었더니 마음이 작은 불편들이 입을 다문다 시골에 오니 비로소 희망이 있었다
시가 길어서 한참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 시를 읽으면서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각 연마다에서, 그리고 각 구절마다에서, 위 시를 쓴 장석주 시인이 예사롭지 않은 세계를 열어 보이며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충격에 빨려들며 시인이 만들어놓은 언어들과 동무하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위에 인용한 장석주 시인의 시 <시골로 내려오다>를 보면 우선 그 제목 속에 들어 있는 ‘시골’이라는 말과 ‘내려오다’라는 말에 눈길이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우리는 이 두 가지 말에 눈길을 잡히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까?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이 두 가지 말이 이 시대에 낯선 용어가, 아니 신선한 용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낯설고 시선한 까닭은 각각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그 하나는 ‘시골’과 ‘내려오다’라는 이 두 가지 말이야말로 20세기가, 아니 근대가, 아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버려야 할 후진적 유산으로 여기며 내팽개쳤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이렇게 내팽개쳐진 ‘사골’과 ‘내려오다’라는 두 가지 말 속에 20세기를, 근대를, 지금 이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비밀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모두 ‘도시’로 ‘올라가는’ 이 시대에 장석주 시인은 그들이 흐름에 역류하며 ‘시골’로 ‘내려온’ 것입니다.
시골로 내려온 장석주 시인은 그가 시골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시골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하여 <시골로 내려오다>의 첫 연을 다 바칩니다. 그 첫 연을 다시금 조용히 읽어보면 ‘나는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다/나는 길들여진 자가 아니라 창조하는 자다’라는 소리가 울려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장석주 시인은 <시골로 내려오다>의 첫 연에서 위와 같은 소리를 강한 어조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내 정부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버렸다 내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당신의 경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내가 지켜야 할 계율은 내가 만든다 당신을 떠나면서 점집에 갔더니 구설수를 조심하라고 한다 구설수란 누구에게나 붙는 국민연금이거나 지방세 같은 것이다
저는 방금 장석주 시인의 시 <시골로 내려오다>의 첫 연을 인용했습니다. 그 첫 연의 첫 문장에는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내 정부가 아니다”라는 외침이 들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이 외침을 들으며 전방위 문학가이자 연극연출가인 이윤택 시인의 평론집 『우리에겐 또 다른 정부가 있다』를 떠올립니다. 이윤택 시인은 여기서 문학인들에겐, 더 나아가 예술인들에겐 국가를 유지시키는 세속적 정부와 다른, 그들만의 정부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문학인들에겐, 더 나아가 예술인들에겐, 국가를 유지시키는 세속적 정부 너머의, 그것을 초월하는 그들만의 또 다른 정부가 있습니다. 문학인들은, 그리고 예술인들은 그들이 설립한 이 정부에서 그들만의 문법을 창조하고 유지하며 그들만의 삶을 살아갑니다. 세속적인 정부의 숨막히는 문법을 벗어날 때, 그 해방감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이런 점에서 장석주 시인이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내 정부가 아니다”라고 외친 것은 그 어떤 존재도 그를 억압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스스로 만들고 지키고 향유할 것이라는 해방과 자유에의 의지를 표출한 것입니다.
이렇게 장석주 시인은 그만의 정부를, 그만의 경전을, 그만의 계율을 만들고, ‘수졸재’에 머뭅니다. 그에게 ‘수졸재’는 어떤 외침도 허용되지 않는 자유와 해방의 독자적인 공간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사실을 장석주 시인은 <시골로 내려오다>의 제2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을 버렸지만 길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무릇 길들이란 땅 위에 세운 당신과 나의 유적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이 바뀐다 길 없는 길 위에 서서 새 길을 꿈꾼다
방금 인용한 제2연에서 우리의 눈길을 잡아끄는 대목은 “길 없는 길 위에 서서 새 길을 꿈꾼다”는 뒷부분에 있습니다. 세속의 정부가 그를 버리기 전에 그가 먼저 세속의 정부를 버리고 더난 자리에서 새 길 찾기에 몰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길이라고 하는 것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가 알고 있는 길이라는 것의 속성은 타클라마칸 사막 위에서의 길과 같이 순간적이고 가변적입니다. 그러니 이미 정해진 길이나 영원 불변한 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석주 시인이 제2연에서 들려준 내용에 귀를 기울여보면 그것은 “길 없는 길 위에서서” 끊임없이 새 길을 꿈꾸며 길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수졸재’에서, 장석주 시인은 길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어떤 길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그만이 갈 수 있는 길을 계속하여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골로 내려오다>의 제3연으로 가면 수졸재에서 그만의 길을 창조하며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이 조금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우선 그는 “끼니때가 되면 쌀을 씻어 안치고 밥물이 끓는 동안엔 슬하의 것들을 돌”봅니다. 이것을 가리켜 그는 “매우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매우 신성한 일입니다. 한 그릇의 따스한 밥을 손수 만들고, 그것을 만들며 슬하의 것들도 함께 돌보는 일, 그것은 신성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눈물겨운 일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잘 때가 되면 눈을 붙”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문화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생물로서 자연과 우주의 흐름에 그의 삶을 일치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잘 때가 되면 눈을 붙”이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무해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평화와 안식 속에서도 그는 가끔 ‘고립감’을 느끼는가 봅니다. 하지만 그는 이 고립감을 슬기롭게 넘어섭니다. 하지만 그는 이 고립감을 슬기롭게 넘어섭니다. 그는 깊은 사색의 끝에서 “고립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자에겐 고립이 아니다”라는 경구를 만들어 내면화시키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동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의 ‘수졸재’는 ‘시골’로 ‘내려온’ 자가 만든 외딴 집이지만, 그는 이 속에서 고립감을 넘어 충일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관심은 이제 그가 키우는 슬하의 큰 개와 강아지로 옮겨갑니다. 이 개들을 바라보며 그는 세속사의 끈질긴 원리를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디에서나 힘없는 것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지긋지긋한 짐승의 냄새입니다. 오랫동안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이 원리에 길들여져왔습니다. 장석주 시인은 그만의 정부에서 이런 세계의 폭력성을 거두어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런 세계의 폭력성을 보며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을 함께 갖는 것 같습니다.
이미 요지가 되는 것을 먼저 말해버렸지만 여러분들이 글을 읽는데 단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오다> 제3연을 인용해 봅니다.
끼니때가 되면 쌀을 씻어 안치고 밥물이 끊는 동안엔 슬하의 것들을 돌보아야 일과는 매우 신성한 것이다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잘 때가 되면 눈을 붙인다 고립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자에겐 고립이 아니다 심심한 큰 개가 희디흰 햇빛 속에서 저보다 몸집이 작은 강아지의 목덜미를 물고 마구 흔들어댄다 어디서나 힘없는 것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어 있다
이제 제3연을 지나 제4연으로 가보겠습니다. 제4연 역시 ‘수졸재’에서 장석주 시인이 살아가는 구제적인 풍경이 그려져 있는 곳입니다. 그는 그가 보살피고 바라보는 ‘수졸재’의 식구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끼며 그로부터 삶과 존재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비밀을 읽어내곤 합니다. 제4연을 단독으로 옮겨보겠습니다.
노란 수박꽃 밑에 엄지손톱만큼 작은 수박이 매달렸다 지금 이 순간에 부화하지 않는 것들은 끝내 부화하지 못한다 올 봄에 심은 나무 중에 석류나무가 가장 늦게 잎을 피워낸다 저수지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비가 없다 벌써 용솔 묘목의 반이 벌겋게 잎이 말라 죽었다 물의 문하에 들어선 자에게 이보다 더 큰 실망은 없다 나는 절망함으로써 절망을 채찍질하며 절망을 건너갈 것이다. 너무 크게 상심하지 않기로 한다
노란 수박꽃, 그 수박꽃 밑에 달린 작은 수박, 올봄에 심은 석류나무, 용솔 묘목, 저수지…… 이 모든 것들은 다 장석주 시인의 ‘수졸재’에서 함께 사는 그의 식솔들입니다. 그는 이들을 애지중지 바라보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노란 수박꽃 밑에” 달린 “엄지손톱만큼 작은 수박”이 보입니다. 그뿐 아닙디다. 그의 눈에는 “석류나무가 가장 늦게 잎을 피워낸” 것도 들어옵니다. 또 그뿐이 아닙니다. 그의 눈에는 “용솔 묘목의 반이 벌겋게 잎이 말라죽”은 것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겐 이런 긋들은 바라보는 것이 곧 세계의 비밀을 깨닫고 그 자신이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인가를 다짐하며 자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를테면 그는 “노란 수박꽃 밑에 엄지손톱만큼 작은 수박이 매달”린 것을 보며 “지금 이 순간에 부화하지 않는 것들은 끝내 부화하지 못한다”는 비밀을 읽어냅니다. 저는 이 말에서 부화의 절박성이랄까. 부화를 위한 치열성이랄까. 부화의 순간성이랄까 하는 것을 느낍니다. 또다시 예를 들면 그는 “용솔 묘목의 반이 벌겋게 잎이 말라죽”은 것을 봅니다 이것은 그에게 실망감과 그 실망감보다 깊은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용솔 묘목의 반이 벌겋게 잎이 말라죽”었다는 것은 시골로 내려온 자에게 너무나도 큰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부정적 감정을 잘 다스리고 발효시킵니다. 그런 시간과 노력이 있었기에 그의 입에서 마침내 “크게 상심하지 않기로 한다”는 자위의 말이 나옵니다. 절망감과 자괴감 속에서 이런 말을 찾아내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 저는 이런 그의 말을 무책임한 가벼움이 소산이라 보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신중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꽤 긴 작품이지만 어쩌다 보니 이제 마지막 연을 함께 읽어볼 시간이 되었군요. 한 작품의 마지막 연을 대하면 등산을 마치고 하산이 가까워온 사람처럼 일을 다 마쳐간다는 안도감과 이제 그 일을 더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몰려옵니다. 장석주 시인의 시 <시골로 내려오다>의 마지막 연 앞에 선 지금의 제 심정도 이와 같습니다.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 당신에겐 삶이 없다 이 순간에도 당신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내 전생은 라마승이었으니 마흔 너머부터는 라마승의 삶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큰 불편을 냉큼 받아들었더니 마음이 작은 불편들이 입을 다문다 시골에 오니 비로소 희망이 있었다
위에 인용한 마지막 연을 보니 ‘수졸재’로 내려오기까지, 아니 ‘수졸재’에 내려와서도 그는 앓이를 한 것 같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앞에 놓고 그는 긴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고통의 시간 끝에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위에 인용한 제5연을 보니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 당신에겐 삶이 없다”는 말과, “이 순간에도 당신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말 속에 그가 깨달은 바가 들어 있습니다. 그는 한 순간에도 패배하고 싶지 않을 만큼 자신의 인생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만의 정부를 보기 좋게 수립한 승리자가 되고 싶을 만큼 자기를 아꼈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희망’을 놓치지 않은 희망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 만큼 자기를 채찍질했던 것입니다.
장석주 시인은 수많은 앓이의 시간 끝에 자신을 라마승과 같은 존재로까지 동일시함으로써 그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큰 불편을 냉큼 받아들였더니 마음의 작은 불편들이 입을 다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라마승과 동일시한 데서 얻은 크나큰 소득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제 웬만한 불편으로 느껴지지 않는 단계에, 그런가 하면 웬만한 고통은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 단계에 장석주 시인은 자신을 올려놓았습니다. ‘수졸재’에 들어선 그만의 정부는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보다 자유롭고 해방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누구도 흔들거나 침범할 수 없는 그의 ‘수졸재’ 속에서 장석주 시인의 영혼이 익어갈 것입니다. 영혼이 익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의 영혼이 익어갈수록 그의 시 또한 깊이 익어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
첫댓글 나는 이 글을 세 번째 읽는다 아직도 마지막 단원은 못읽었다
나는 지금 장석주 엣세이집을 읽는중인데, 시골 살이 한대목을 읽었다 그래서 이 시의 해설을 읽으면서 장석주 작가의 이력을 읽었다고하겠다. 요즘 나의 눈이 고단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