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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1. 묵상글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 기왕 살바에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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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기왕 살바에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흔히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남에게도 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
-네가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도 해 주어라.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네가 싫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왜 네가 바라는 것을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 생각에 전 세계에서 제일 개인주의적인 나라가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어디를 가면 깃발을 앞세우고 그 뒤를 유치원 아이들마냥
졸졸 따라가기에 매우 집단적인 공동체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면의 이면에 너와 나의 경계를 분명히 두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들에게는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아주 분명하게 있고,
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예의입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남을 자기 집에 초대하지 않고
자기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단체로 움직이고 깃발을 따라 일률적으로 따라가는 것도
어쩌면 남에게 피해주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확치도 않은 일본 사람 얘기를 제가 왜 했냐 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가
그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간에는 아주 예의 바르고 절대 피해를 주지 않지만
서로 매우 경계하고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국가적으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가 또한 일본입니다.
어쨌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으로는
사랑을 이루거나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랑이요,
피해도 사랑도 주지 않는, 어쩌면 더 사랑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남을 해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십계명을 봐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외에는 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왕 살바에는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일생 걱정으로 일관하는 인생,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고,
비록 보잘것없더라도 목표만은 사랑에 두고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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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때문입니다. 곧 세속적이고 악한 생활로부터 영적인 분별력과 신중함을 가지라는 말씀이요, 나아가서 균형 있고, 조화 있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분별 있는 행동을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도 <수도규칙>에서 ‘분별을 모든 덕의 어머니’(64,19)라고 강조하였으며, 요한 카시아누스 역시 분별의 귀중함에 대해서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별의 은총 없이는 완전한 덕이 없다.”(담화 2,3)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이 아니며,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합리주의적 금언이 아니며, 오히려,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이며, 더 나아가서는 겸손하게 ‘먼저’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세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의 비유’입니다.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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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상처를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맞은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매 순간이 세상을 감당하는 도전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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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길에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 앞에서 아버지가 학교에 가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어린 딸은 해맑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흐뭇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축복을 받은 아이는 든든한 마음으로 학교로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힘들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믿고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아들 이사악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 축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형을 대신해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도 이렇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걸었듯이 내 길을 걸으며, 내 규정과 내 계명을 지키면 네 수명도 늘려 주겠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였고, 마귀를 쫓아냈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축복하셨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도 제가 먼 길을 갈 때면 항상 축복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주님만을 믿고 따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군대에 갈 때는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새 사제가 되어 첫 본당으로 갈 때는 무엇보다 겸손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멀리 외국으로 연수 갈 때에는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셨고, 성무일도를 빠지지 않고 바쳤습니다. 제가 31년 사제생활을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축복과 기도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보편교회는 ‘시노드’의 닻을 올렸습니다. 경청, 친교, 소통, 동행으로 교회에 산적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서 지역교회도 ‘시노달리타스’를 시작하였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셨듯이 각 가정에서 축복의 전승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축복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전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가정을 넘어 이웃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진복팔단’의 문입니다. 겸손과 희생이 좁은 문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좁은 문입니다. 오늘 하루 가족과 이웃을 축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오늘 제가 만나는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듬뿍 받도록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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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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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로운 성인의 삶
-분별력, 황금률, 좁은문-
깨끗한 욕심, 거룩한 욕심은 언제든 좋습니다. 누구에게나 무해한 아니 오히려 유익한 욕심입니다. 누게에게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욕심이 있습니다. 바로 성인이 되고 싶은 욕심, 청정욕淸淨慾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삶입니다. 사실 이렇게 살라고 주어진 선물 인생입니다. 하늘에는 여전히 빛나는 별들일텐데 요즘은 하늘에 별들 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천주교 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같은 성인들입니다.
천주교의 자랑이 이런 별같은 무수한 성인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되는,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우리 천주교가 참으로 부요한 것은 이런 별같은 보물같은 무수한 성인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써놨던, 가끔 인용했던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진리는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피어난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 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지금도 이 때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자비의 집 본관이 있기전 옛 토굴같은 방밖 창문을 열었을 때 뒤뜰 가득 눈부시게 피어난 샛노란 민들레꽃들을 보며 써놓고 큰 위로를 받았던 시입니다. 바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았던 우리 천주교의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예수회 출신 성 알로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그 어느 성인도 죽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어떤 성인도 때가 되면 죽습니다. 천상탄일에 이은 새로운 천상의 삶이 펼쳐집니다. 제가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본능적으로 하는 일이 생몰生沒연대를 헤아리며 산 햇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1591년 빼기 1568년 해보니 고작 만 23년 살았습니다. 참으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성인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참으로 살았느냐가 성인의 판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성 알로시오의 성덕의 얼마나 출중했던지는 그가 신학공부 4년째 페스트병에 걸린 이들을 돌보다 전염되어 중병을 앓다 선종하기 얼마전 어머니에게 보낸 구구절절 감동의 편지에서 잘 드러납니다.
“어머니, 우리의 이별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 우리 구원이신 주님과 결합하여 불사불멸의 끝없는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것입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어머니와 우리 온가족이 제 죽음을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해 주십사고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드립니다.
제 희망의 성취인 그 항구를 향해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어머니께서 저를 친히 축복하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바쳐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더 확실히 보여 드릴 방도가 없기에, 어머니께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역시 성인의 배경에는 성녀같은 어머니가 배경에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회 총장이던 콜벤바흐는 다음과 같이 성인을 칭송합니다.
“성 알로시오는 어떤 환경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참 왕이며 참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충실한 벗으로 생활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뿐 아니라 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오히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의 시성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어 1605년 10월19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고, 1726년 12월31일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그후 그는 모든 신학생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지만, 이에 우리의 분투 노력의 응답도 필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첫째,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때 주어지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십시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밝고 돌아서서 우리를 물어뜯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편애나 무시의 차별差別이 아니라 분별分別의 지혜입니다. 각자에 맞게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내 읽은 책이 좋다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책은 아닐 것이며, 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누구의 식성에 맞는 음식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참 어리석게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에게 던져 주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짐만 될 것이며 곧장 쓰레기 통에 버려질 것입니다.
둘째, 황금률을 명심하여 늘 지키는 것입니다.
황금처럼 귀하다 해서 황금률이며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는 삶의 지혜입니다. 예수님 이전 힐렐 율사 역시 “네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 전부요 나머지는 풀이이다.”라고 황금률을 말했습니다. 부정적이도 소극적인 황금률이라 이러면 아무 일도 않게 됩니다. 이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오늘 복음의 황금률이 더 좋고 바람직합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런 황금률의 사랑의 실천은 끝이 없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경구와 일맥상통합니다. 좌우간 황금률은 사랑의 이중계명과 함께 가장 포괄적인 계율입니다. 이대로의 사랑 실천 노력에 항구하면 누구나 성인입니다.
셋째, 좁은문을 선택하여 통과하는 것입니다.
문이라 하여 다 똑같은 문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문도 있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화려한 죽음의 문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인 좁은문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이듯 구원의 좁은문도 선택입니다. 주님께서도 좁은문을 선택할 것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우리 수도자들처럼 자발적 기쁨으로 좁은문을 선택하여 사는 이들이 바로 성인입니다. 수도원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자발적 기쁨으로 세상에 거슬러 좁은문을 통과하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사는 성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 덕분에 유지되는 세상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교사와 주고 받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 선생, 왜 그리 힘들게 살아. 좀 편히 살아.”
“저는 이렇게 사는 게 편한데요.”
그렇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남이 볼 때는 좁은문이지만 안에서 내가 볼 때는 넓은문일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좋아서 사랑해서 기쁘게 택한 길이라면 살아갈수록 내적으로 점차 넓은문으로 변해갑니다. 성인들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늘 고통이 따랐다는 것, 휴식이 없었다는 것이며 그러나 이런 좁은문의 통과 와중에도 늘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좁은문이지 내적으로 감미로운 사랑의 넓은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이를 언급합니다.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밖에서는 좁은문이지만 갈수록 내적으로 넓어지는 감미로운 사랑의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넓은 문입니다. 바로 이런 영적 현실을 사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무엇보다 구원의 좁은문 통과에 결정적인 것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히즈키야 임금이 풍전등화 위기 상황의 좁은문을 통과할 수 있었음도 이런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이사야 예언자가 히즈키야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셨음을 알려줍니다. 그날밤 주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명을 쳤고,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무니, 히즈키야는 좁은문을 무사히 통과해 구원받았습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가 좁은문입니다. 태어날때부터 좁은문이고 계속되는 좁은문의 연속이요 작금의 생존경쟁,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세상은 좁은문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유독 자살자들이 많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유럽에서는 40도 이상의 폭염이, 아시아에서는 폭우의 홍수가 빈번하니 지구 역시 좁은문의 위기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 모두 좁은문을 잘 통과하여 지혜로운 성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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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평생 구두 수선을 해왔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주 작고 허름한 구둣방을 운영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지요.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니, 너의 구둣방을 오늘 방문하겠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니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구둣방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청소했고, 구둣방에서 드실 수 있는 맛있는 음식과 음료도 준비했습니다. 또 구둣방이 추워서 따뜻한 담요로 예수님 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개꿈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너무 생생한 꿈이었기에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아주 허름한 옷차림의 거지가 들어왔습니다. 너무 춥다고 하면서 이불이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담요를 주었습니다. 잠시 뒤에 한 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러니 음식이 좀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너무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청소부가 와서는 너무 목이 마르니 물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음료를 주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냐면서 따졌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의 구둣방에 세 번이나 갔었다. 그리고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이웃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내게 해 주는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를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기원후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자기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사실, 이와 비슷한 구절을 동서양의 여러 현인이 말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서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점에서 이 황금률을 새롭게 표현하십니다.
첫째, 보답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아예 생각하지 말고 솔선하여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교훈을 성경 전체의 정신을 종합한 말씀으로 제시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결국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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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감동하게 만들 수는 없어. 하지만 삶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지(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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