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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계산[白鷄山] 506m 전남 광양
산줄기 : 호남백계단맥
들머리 : 옥룡면 추산리 추동마을
위치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높이 506m
[옥룡면 추산리에서 바라본 백계산, 뒷편은 백운산~억불봉 능선]
백계산(505.8m)은 주산인 백운산(1,218m)에서 뻗어내린 지맥으로 형성된 아담한 산으로 백운산의 중앙부에 위치
한다. 백계산에 7천여그루의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백계산 동백림은 선운사나 오동도에 비해 덜 알려진 동백림이지만 역사는 깊다. 신라 때 도선국사가 옥룡사를 창건
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보호수를 심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동백숲은 해발 403m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펼쳐져
있다. 동백이 펼쳐져 있는 숲만 2천1백 평 정도. 인공림이 아닌 자연림이고 동백 크기는 5~6m 정도로 큰 편이다.
[거대한 운암사 황동 약사여래입상 뒤편으로 자연 동백숲이...]
수백 년된 동백이 옥룡사지터와 운암사 뒤쪽 산을 가득 메우고 있다. 동백이 팔뚝굵기로 자라는 데만 1백 년이 걸린
다는데 이곳의 동백은 20~40cm인 것이 흔하다. 3월 초순에 꽃을 피워 월말이면 절정을 이룬다.
7천여 그루 자생
광양 백계산 동백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동백 7천여그루가 2만여평의 산에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가히 필설
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지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아 오붓하게 정취를 즐길수 있고 무엇보다도 동
박새를 만날수 있어 좋다. 3월초부터 피기 시작해 중순에 절정을 이루는데 4월까지 예쁜 꽃송이를 간직하고 있다.
옥룡사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백계산 동백림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반들반들 윤이나
는 진초록 잎새 사이로 빠알간 꽃송이가 보색 대비로 강한 인상을 준다. 족히 한 아름은 넘을 것 같은 동백이 이곳
동백림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동백터널을 지나 조금 오르면 탁 트인 곳에 옥룡사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보통 크기의 시골 기와집이라 절인지
가정집인지 얼른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처마밑에 한글로 `옥룡사'라고 쓰인 간판만이 절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때 수백여명의 사문들로 법석댔다는 역사적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만큼 쇠락한 모습이다.
옥룡사를 감싸고 있는 동백림의 압권은 옥룡사에서 운암사에 이르는 산책로. 터널을 이룬 산책로에 들어서자
`삐리리 삐리리' 동박새의 울음소리가 경쾌하다. 조그만 비둘기 크기의 동박새는 잿빛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이 가지
저 가지에 열심히 옮겨 앉는다.
조매화(鳥媒花)인 동백에게 있어 동박새는 사랑을 전해주는 전령같은 존재다. 동박새가 꽃가루를 부리에 묻혀 암술
에 옮겨주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작업중인 옥룡사 사지]
#주변볼거리
옥룡사지 사적제407호(국가지정문화재)
옥룡사지는 통일신라 말의 뛰어난 고승이자 한국풍수지리의 대가인 선각국사 도선이 35년간 머무르면서 수백명의
제자를 가르치다 입적하신곳으로, 우리나라 불교역사에 매우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천년의 불교성지이다.
옥룡사지는 옥룡면 추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
온다. 옥룡사지를 싸안고 있는 백계산(505.8M)은 주산인 백운산(1,218M)에서 뻗어내린 지맥으로 형성된 아담한 산
으로 백운산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옥룡사는 신라 말에 조그만 암자였던 것을 도선국사가 864년에 중수하여 거쳐하였으며, 수백명의 사문들이 그의
법문을 듣고자 몰려들어 "옥룡사파"란 지파가 형성되자 몰려드는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인근에 운암사라는 사찰을
추가로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백숲에 둘러쌓인 도선국사 부도탑 右]
옥룡사는 몇 차례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사세를 이어 오다가 1878년 화재로 소실된 후 폐찰 되었으며 현재
서 있는 대웅전은 1969년에 건립되었다. 옥룡사지에는 도선국사와 수제자인 통진대사의 비와 탑이 세워져 있었으
나 1920년경에 모두 없어져 버리고 비문만이 탁본되어 "동문선"등에 전해온다.
#들머리안내
*버스: 광양읍-옥룡면 추산마을(시내버스 1일 9회, 30분소요)
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광양 IC에서 빠져나와 광양읍 초입인 새광양교회에서 우회전 해 이정표를 따라 6km쯤 국도
를 달리면 삼정교에 닿는다. 직진하면 백운산 가는 길. 이곳에서 왼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의 농로를 1km 더 가면
추동마을이 나오고 곧바로 지나치면 목적지인백계산이다.
일반인들에겐 낯선 곳이라 얼마전 도선국사 유물 발굴로 유명해진 옥룡사를 물어 찾아가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옥룡사가 바로 동백림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광양읍 터미널(061-762-3030)에서 옥룡면 추산마을행 시내버스 1일 9회 운행, 30분 소요
*남해고속도로 광양 IC → 광양읍(11번 지방도) → 옥룡 → 추산리 옥룡사지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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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계산 조감도]
옥룡면 추산리 백계산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 4대 고승(원효·의상·진표·도선) 중 한
사람이며, 한국 풍수지리 원조인 도선국사가 35년간을 머무르면서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내고 열반에 든 곳으로 불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곳이다. 또한 옥룡사 일대를 백계동이라 부르는데 일명 '백학동'이라 하여 길지(吉地)로
손꼽는다.
도선국사가 수백 제자를 기른 곳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에서 태아나(827) 15세에 머리를 깍고 불교에 입문하였다. 이후에 곡성 태안사에서 당시 우리
나라 선종의 대사인 혜철선사로부터 불법을 배웠으며, 뒤이어 전국에 명당자리를 익히며 수행하였다. 37세되던 해에
는 옥룡사에 들어와 도호를 "옥룡자"라 칭하고 72세에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시대상황은 신라말기로 혼란기였으며 도선국사는 신라가 망하리라는 것과 고려 건국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미리 예견하여 청년시절의 왕건에게 고려 건국에 필요한 덕과 지략을 가르쳤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또한 그 당시 유행한 묘지 터를 중요시하는 중국식 풍수지리상을 과감히 깨뜨리고, 모든 절터와 집터 그리고 촌락과
도읍지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중요시하여 결함이 있는 터에는 나무와 탑을 세워 땅의 결함을 보완해
야 한다는 등 비보풍수, 즉 한국식 풍수지리상을 개창 하였다.
이와 같이 도선국사는 뛰어난 선승으로서, 사회 혼란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선각자요 경세가로서,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사상인 한국풍수지리설의 원조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도선국사 비석은 깨어지고 비문만 전해옴
도선국사가 기거하였던 옥룡사는 임진왜란 등의 수난으로 몇 차례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지곤 했는데, 1878년 화재
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조그마한 절은 196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한편 절 동편 일명 '비석거리'에는 도선국사와 수제
자의 동진 대사비가 고려 초기에 세워져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도선국사 비문이 조선시대 문집인
'동문선'에 실려 전해오고 있어 도선국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백림은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12호
옥룡사지를 감싸고 있는 백계산 동백림인 동백나무는 일반적으로 남쪽의 해안지대나 섬지역에 밀집하여 자라고 있
는 것과는 달리 육지부로 상당히 들어온 곳에 자리하여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생육상태 또한 무척 양호하다.
해마다 2월이면 꽃을 피기 시작하여 4월까지 피는데 그 무렵이면 동백꽃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동백림은 옥룡사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조성되어 있는데 총면적 7㏊에 수백년 넘은 고목 등 6천여 그루가 있다.
동백나무는 도선국사가 절터의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옥룡사지는 1988년 8월 국가사적 제407호로 지정되었으며, 시에서는 지난 1994년부터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의뢰
하여 제4차에 걸친 옥룡사지 정밀지표 조사를 시작, 정확한 절의 이치와 규모 등을 파악하고 그 조사결과를 토대로
종합정비 복원 계획을 수립한 후 원형대로 복원, 관광자원화 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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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백계산(白鷄山)
전남 해안에 있는 광양의 백계산(白鷄山)은 예로부터 지금의 백운산(白雲山 1,218m)을 통칭하던 이름이었
으나 조선후기에 주산은 백운산으로, 백계산은 그 혈처인 추산(秋山)의 명칭으로 분리되고 바뀌었다.
오늘날 백계산은 (505.8m)은 주산인 백운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지맥에서,한 맥이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백운산 남쪽 중앙부에 형성된 추산리 도선국사의 탑이 있는 산을 말하고 조선중기 이전의 기록은
주산인 백운산과 혈처인 운암사를 함께 통칭했었던 말이다.
광양현지도(1872) ⓒ 데일리안 |
대표적으로 도선국사 비문에서 “백계산유고사왈옥룡(白鷄山有古寺曰玉龍)”즉 “백계산(백계산)에 옥룡 이라는
옛 절이 있다”는 기록에서 ,백계산은 주산인 옥룡산을 말하고 경보선사의 비문에서 “백계산동지운암강(白鷄山
東之雲巖崗)” 즉 백계산을 동쪽 운암사 산 능선이라 한 것은,백계의 혈처인 추산리 백계산을 말하는 것으로,
운암사 동쪽 산 능선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삼신산의 우두머리인 방장산(지리산)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좌측에 있는 백운산은 그 자체가 “순천 서면
(西面)”과 “구례 간전면(墾田面)”에 두 발(鷄足山)을 딛고 ,동서(東西)로 날개를 펴고 ,북쪽을 향하여 날아오르
는 닭의 형국이다.
백계산의 혈처라는 도선국사의 비가 서 있는 산은 보는 사람마다 이견이 있겠지만 날아오르는 닭의 등에 해당
하는 것으로, 즉 이러한 전체적인 풍수는 학(鶴)을 타고 승천하는 신선도(神仙圖)와 같은 의미이고,혜철국사가
이 산을 크게 중용한 것은 북쪽의 한반도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태평성대를 위한 포석을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백계산에는 왜 물이 귀할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계산(白鷄山)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산 머리에 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
샘이 있으며,샘 밑에서 흰 구름이 때로 일어나는데,소원을 빌기만 하면 문득 영험이 있고 몸과 마음이 깨끗이 하
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 하지 않으면 샘물이 마른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을 알 수
가 있으며, 또한 이곳은 백계(白鷄)라는 풍수로 보아도,수맥이 있어서도 안되는 곳이다.
즉, 계(鷄)는 물이 없어야 하고, 용(龍)은 물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계(鷄)와 용(龍) 둘의 조건은 ,물이 있
고 없음에 따라 생사(生死)가 갈리는 극과 극이다. 다시 말하면 백계(白鷄)의 혈처에 옥룡(玉龍)이 있는 것은
상극(相剋)이고 현무(玄武)의 혈처에 옥룡이(玉龍)이 있다는 것은 상생(相生)이니,풍수로 보아도 백계의 혈에
옥룡이 있다는 것은, 합이 맞지 않는 잘못된 것으로 ,자자손손 패가망신(敗家亡身)할 혈이다.
도선국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때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 백룡(白龍)이 살고 있었는데,숯으로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지었다는 전설에서 보듯이 ,백룡(白龍)은 옥룡(玉龍)과 같은 “흰 용”으로 옥룡(玉龍)의 혈처에 지은
법당이라면,그것이 연못이든 물구멍이든 당연히 수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추산이 백계산 옥룡사는 전설과는
거리가 먼 땅이다.
도선국사가 점지했다는 백계산 운암사라는 지명과 풍수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이곳이 백계(白鷄)가 알을 품고
홰를 치는 명당이라는 등등.......저마다 그럴 듯 한 이유를 들어 명당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이는 운암사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 실체는 물론 풍수의 기본도 모르는 잘못된 해석이다.
계(鷄)와 수(水)는 상극인데, 닭이 알을 품은 백계포란(白鷄抱卵)의 혈처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운암(雲巖), 즉
구름과 바위가 있고, 더구나 그 알을 훔쳐 먹고 사는 뱀 즉 용(龍)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은, 패가망신하고 자손
이 멸절(滅絶)될 뿐,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임에도, 엉뚱한 전설이 이어져 온 것은, 부질없는 사람들의 허욕이,
도선국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 망상일 뿐, 이곳에 운암사를 세운 도선국사의 마음은 분명 아니었다.
또 다른 전설에서, 도선국사가 절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하려고 심었다는 주위의 동백나무숲
역시 이른바 풍수들이 밥을 빌기 위한 말장난이다.
세상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동백나무숲이 백계산 백계포란(白鷄抱卵)의 혈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면, 그곳에 구멍
즉 우물을 파는 순간, 흰 닭이 품고 있던 신령한 알은 깨어져버렸고, 다시 사람이 머물며 불을 지핀 것은, 곧 그
백계마저 죽여 태워버리는 사혈(死穴) 즉 사지(死地)가 되었고, 사람의 시신을 그곳에 묻는 것은, 신성(神聖)해야
할 신의 땅을 오염시키고, 포란을 부패시키는 일이므로, 아마도 도선국사 이후, 그곳을 살아서 들어가, 살아서 나
온 이는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까지도 그 터가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하고, 끝없이 수난을 당하는 이유라 할 것이다.
- 백계산과 풍수와의 모순
이러한 풍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무엇이든, 백계의 혈에 우물을 파고, 구들을 만들어 불을 피우고, 시신을
묻고, 탑과 비를 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절대 금기사항인데....... 임금의 명령으로 백계산에 비를 세운
경보선사는 말할 것이 없지만, 천하 풍수의 대가라는 도선국사가 자신이 살아생전에 신을 위해 마련한 신의 땅을,
죽어서 침범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르브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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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박혜범 데일리안광주전라 편집위원]
현무산은 그 형국이 백계산 방향에서 보면, 마치 남해(南海) 용궁(龍宮)에서, 동천(東川)을 거슬러 육지로 올라온
거대한 현무가, 서북쪽으로 긴 목을 돌려, 북쪽의 백계산을 지키고 있는 장중한 모습이고, 옥룡중학교 앞 도로에서
보면, 남해 용궁에서 삼한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육지로 올라온 현무가, 북쪽으로 달려가
는 전투적인 모습이지만, 현무가 등속에 감추고 있는, 이 분지는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으며, 설마 산 능선에 이런
분지가 있을 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비처(秘處)다.
◇ 현무산(玄武山) 전경 ⓒ 데일리안 |
◇ ⓒ 데일리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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