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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추수감사주일 -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의 의미가 무엇이냐?
해마다 그 의미가 점점 깊어지고 이렇게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시편 23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다윗의 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냥 읽으면 굉장히 평탄한 인생을 살고 늘 형통했고 복받은 사람인 것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신앙 연력이 조금만 되면 구약의 다윗이라는 사람의 생애에 대해서는 일찍 배우게 되는 것이고 그 생애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는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왕권 싸움 때문에 험난했던 것이 아니라,
어렸던 시절 형들은 블레셋과의 국운을 건 전투에 나가고 다윗은 어려서 아직 군대에 가지 못했을 때, 부모님이 형들이 잘 있나 보고오라 그래서 전선에 나왔다가, 이스라엘군이 계속 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대적하는 적군인 블레셋의 대장 골리앗이라는 전사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떨고 숨고 패퇴하는 것을 보고 이 어린 목동에 불과한 아무런 무장도 하지않은 다윗이 물멧돌 다섯개를 들고 나가 골리앗을 첫 방에 이마에 돌을 던져 꽂아 이마에 돌이 박혔다고 되어있습니다.
돌이 박힐려면 시속 한 천킬로쯤 되어야 되지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구국의 영웅이 되죠.
그리고 당시 왕이었던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서 피난살이를 하게 됩니다.
어디까지 도망을 가냐하면 바로 그 적국인 블레셋에 망명을 할 정도로 곤궁하고 고통스럽고 막막한 피난살이를 여러 해를 합니다.
자기를 따르는 휘하에 그 추종자들은 이름없는 사람들 뿐이고 그들을 먹여살려야 되는 이중고를 겪으면서 사무엘서에 나오는 한 기록에 의하면, 한번은 너무 어려운 일을 당해서 `울 기운이 없을 때까지 울었다' 라는 기록이 나올만큼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나 사울왕이 죽고, 자기 민족들을 위하여 추대되어 왕이 됩니다.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후에, 아차 실수로 부하 장수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여 모든 국민 앞에 창피를 당하고 하나님 앞에 엄중한 경고와 그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실수의 핵심되는 죄를 깨우치고 다른 시편에 기록된대로 하자면,
`너무 울어서 침대가 둥둥 떠다녔다,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외적인 어려움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내적인 어려움도 당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을 살면서 경험했었거나 앞으로 하실 일 중의 하나는 이유없이 외적인 고난을 당하는 것 매우 억울하고 어렵지만,
자기 자신이 못났다고 아는 것은 외적인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됩니다.
존재의 근거와 존재의 힘과 이유와 방향을 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 존재가 분해되는 것 같은,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되는 고통을 다윗이 당합니다.
말년에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에 의한 반역으로 쫓겨 다닙니다.
결국 다윗이 이깁니마다는 다윗을 뒤좇던 부하 장수들이 결국 반역을 꾀한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을 이겨 다시 왕권을 되찾지만, 그 와중에 아들은 죽게 됩니다. 나가 싸우는데 다윗이 하도 아들 걱정만 해서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면 군대장관에게 압살롬은 무사하냐? 라고 묻곤해서, 그 휘하대장이 이렇게 불평을 한 적이 다 있습니다.
"왕께서는 어찌 적군 걱정은 하고 자기 휘하의 장수 걱정은 안 하십니까?" 라는 비난을 받을만큼 그런 처지에도 서보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왕권을 빼앗고, 그 여러 날 도망다녀야 하고 아들과 싸워야되는 그 일을 겪죠.
그런 사람의 인생이 이 고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뭐냐?
신앙이 뭐냐?
우리 신앙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누구시냐? 라는 질문을 사실 이 시에서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고, 그가 나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셨도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배경과 함께 우리가 겉보기로 판단할 수 없는 깊은 성경의 이해를 촉구한다 하는 도전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 성경적 이해에 관한 그 하나의 실마리는 시련 1편에 나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전체의 한 서문격인, 전체를 요약하는 중요한 시입니다.
여기는 두 종류의 사람들로 사람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
하나님이 인도하는 사람과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의 두 부류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입니다.
쉽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라는 어법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복받는다` 가 아니라, `복있는 사람은,, ` 입니다. 수동태적 입니다. 그죠? 복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오래 전에 학교 다니던 시절에 미국 재미있는 월간지의 만화가 있었는데, <매드> 라는 `미쳤다`는 그런 제목이 좋지 않은데, 재미있는 만화잡지였습니다. 그게 <본 위너>를 설명하는 대목이 기억이 나서 그렇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성자인 자, 그러니까 우리말로 번역하면, `행운아` 쯤 되겠죠.
그 <본 위너>란 어떤 사람인가? 이렇게 한 컷으로 잘 그려놨습니다.
요즘 우리 야구 인기니까 잘 아시겠지만, 야구장에 가면 최고의 복이 파울된 볼 하나 줏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대단히 위험한데, 공이 관중석으로 이렇게 날아오면 모두가 이렇게 덤벼들어서 벌떼같이 그 공을 뺏으려고 하는것 우리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워낙 야구를 오래전부터 국기로 삼고 즐겼던 나라이니까 그 장면을 <본 위너>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파울볼이 이렇게 관중석으로 하나 떨어졌는데, 사람들 수십명이 덤벼들어서, 만화의 그림이, 첫 사람 손에 맞고 튀어서 둘째 사람 이마에 맞고, 세 번째 사람 어깨에 맞고,, 흘러고 흘러고 흘러서 관심없이 팝콘 먹고 있는 아이 팝콘통에 딱 떨어지는,,
이게 <본 위너> 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팝콘을 먹어도 야구공이 생긴다,, 이런 뜻입니다.
얼른 이해가 되시죠?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어디로 인도되느냐하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도록 인도를 받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도록 인도를 받습니다.
그럼 그게 뭐,, 그럼 악인들은 하나님이 내버려 두고 버려둔 자들인가,,? 그런 개념이 아니고,
복 받는 자의 현실을 이해하도록 한 설명입니다.
시편 119편에 가면 이 말 뜻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65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66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착하고 순종적이어서 선한 길을 가는 사람과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이렇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에게 인간이 무엇이고, 세상이 무엇이고, 죄가 무엇이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침을 받는 자와 그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로 나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거부한다는 것은 70절에 보듯이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그기 각주가 붙어있죠?
살쳐서에 `마음이 둔하여 기름에 잠김 같으나,,`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 번역이 더 이해가 쉽죠.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 헛 된것으로 기쁨을 삼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고 진정한 가치를 추적할 마음이 없습니다.
기름에 잠겨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놔두지 않습니다.
꼭 어려워야만 이 복을 받는다는 개념은 아닙니다.
어려워도 이 복을 받습니다.
실패와 모자람과 잘못된 것 속에서도 인생이 뭐냐, 인간이 뭐냐, 무엇이 진정한 복이냐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형통한데서도 물론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은 이런 것과 상관없이, 성공하면 감사하게 되고 실패하면 기도하는 쪽으로 인도함을 받고,
그렇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는 자들은 성공하면 자랑하고 실패하면 원망한다는 거죠.
이것 조건으로 말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인간은 이 자랑과 원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감사와 기도로 올 수 있는 것, 하나님이 복 주신 탓이다 이런 고백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어떤 현실 속에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건 이겁니다.
어려운 일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현재가 어려우면 이렇게 되돌아본 자기의 인생길이 모두가 고난만 보이죠. 억울했던 일들만,,
기뻤던 날은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기쁜 날은,,
기쁜 날은 뒤돌아보지 않고 뒤돌아봐도 기억이 안나는데, 기뻤던 날은 생각 속에 없습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인간의 기쁨과 행복은 고민하나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시편 1편으로 돌아오시면 뭐라고 얘기하느냐하면,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날려 다닙니다 의인은 어떤가 보실까요?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입니다. 영향을 받아 섭취하여 나무가 큽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잠시 잠깐의 형통을 즐겨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이 없다는 건 `생각해야 된다` 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의 진정한 내용을 의논하고 요구하고 기도하고 소원해야 되는 것으로 깨우침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게 시편 23편의 가장 중요한 고백들 입니다.
`내가 실제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인생을 살았으나, 그 속에서 하나님은 진정으로 내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 이게 시편 23편으로 되돌아와서 3절입니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영혼과 의` 가 등장을 하죠.
형통하고 자랑하는 인생에는 이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자랑만 있죠.
`영혼과 의` 라는 단어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고백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이런 믿음을 고백하는데, 4절의 고백입니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겁날 것이 없는 겁니다. 겁날 것이,,)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서 원수는 누구일까요?
악인들 입니다.
악과 선이 싸우고 있어서 악인을 원수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수인 까닭은 하나님을 찾을 필요없이 인간이 스스로 필요와 욕심을 채울 수 있고, 자기를 증명할 수 있다고
조롱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허나 이 세상에서 세상적 잣대로 볼 때, 실패했고 보잘 것 없는 그 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을 베푸십니다.
이 잔치상을 풍성한 것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영양을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십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름을 붓는 다는 것은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왕이 될 때나 제사장이 될 때나 선지자일 때만 치루었던 예식입니다.
존귀한 자리라는 것이죠,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라는 즐거운 고백과 즐거운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랑을,,
그런 차원에서 우리 인생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우치고 그의 보호하심을 구하는 인생이 되었느냐? 그렇지 않느냐? 의 대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는 이야기가 되죠.
성공을 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으면 그 성공이 복이고, 그 성공이 여러분으로부터 하나님을 한 걸음 물러나 계시면 그 성공은 벌입니다.
여러분이 당한 실패나 고난이 하나님 앞에 한 걸은 더 나아가게 하고 한번 더 무릎 꿇게 했으면 그건 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실패나 고통이 여러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더욱 더 세상에게 목매달게 했다면 그건 크나 큰 저주입니다.
그게 이 성경이 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약성경에 오면 동일한 일관된 신앙의 핵심된 내용으로 이 경계와 이 교훈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이 거의 끝나가는 것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단 하나, 이 핵심을 꼭 확인하고 그의 생애를 마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어있는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입니다.
세상의 끝이 무엇인가? 역사의 종점이 어딘가?
인생이 방향과 목표를 어디다 두어야하고 무엇으로 내용을 삼아야하는가? 에 가장 중요한 근거,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입니다.
뭘 하라고 하는가?
<말씀을 전파하라> 입니다.
말씀을 전파한다는 건 쉽게 하나의 어떤 실천과 행위로써 전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으로 살아라> 그겁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는 자로 살아라> 가 우리가 본 시편식 표현이고,
<하나님을 믿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예수 안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라> 신약적인 표현입니다.
그것을 함축하여,,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가 됐죠.
<살아있는 신앙의 증거와 표현이 되라>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들이, 자칫 사도바울이 기독교 역사에 가지는 너무나 높은 지위와 명성 때문에, 어떤 훌륭한 인생을 사는 멋진 업적을 남긴 자의 교훈같이 기억이 됩니다.
바울은 그런 뜻으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자신이 한 일이 어떻게 기독교사의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지 본인은 모르고 죽었습니다.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살아라> 그겁니다.
`그것이 어떤 업적을 만들어 낼 지 그것은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내가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된 길로 가듯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이 길을 가라는 것이지, 훌륭해지고 쓸모있어라는 얘기 아니다` 그거죠.
우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하는 것과 그것을 거부하는 인생으로 대별된 오늘 시편 23편, 시편 1편이었듯이,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쓸모있는 것이나 업적을 만드는 일과 다릅니다.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을 아는 자의 어떤 진정성과 그의 인생과 `그`라는 존재를 맡기는 충성과 인내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실은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제 삼의 곳에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인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인 것입니다.
때를 따라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연부년,, 해를 지날 수록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복되심을 확인하는 연수가 되고,
얼마나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내가 확인되고 있는가는,, 사실은 이 말씀 속에는 설 자리는 없습니다.
각자 다른 삶의 상황과 배경과 조건 속에서 이 동일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신 말씀처럼,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런 표현은 무시무시한 표현이죠.
그의 신실하심의 무한한 시간적 확인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에는 끝없이 이 말을 또 반복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종되었던 에굽하에서 해방시킨 너희의 구원자 하나님이니라>, 신약에 오면 더 무시무시하게 되어있죠.
<나는 내 아들 예수를 너희에게 준 너희 아버지이니라>,, 그것이 확인되어 나오는 것,, 이것이 우리 안에서 맺어지는 결실들 입니다.
그것이 감사절이죠.
하나님의 일하심이 결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하나님이 중단치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감사절이죠.
얼마나 많이 주셨는가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인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니할 것은,,`
이 되는 것입니다.
멋진 신앙의 모습은 나이와 비례합니다.
좇아올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누적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년이면 십년만큼, 백년이면 백년만큼인데, 꼭 믿음이라는 이 영역에 들어와서만이 아니라,
인생살이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다윗에게 있어서도 그랬듯이,
그의 실패와 그의 억울함과 그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했듯이,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이 우리의 삶의 모든 정황 속에서, 모든 경륜 속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런 고백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축복을 받은 자인줄 아시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 안에 맡기고 승리하며 감사하는 인생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복되심과 능력에 그저 항복할 뿐입니다.
해를 지나고 더 많은 고난을 겪어 배우는 것은 세상은 거짓되다는 사실입니다.
체념과 한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우시다는 고백이 뒤이어 나오게 하셨는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가 절망하고 울부짖는 순간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우는가 확인케 하옵소서.
우리의 소망과 답이 어디있는가 알게 하옵소서.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며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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