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오누이 쌀
김 선 구
카 톡! 하는 소리가 늦가을의 청량한 공기를 진동했다. 휴대폰을 여니 “안녕하세요. 수확의 계절입니다. 저의 친정 오빠가 농사지어 생산한 햅쌀을 소개합니다. 일품 아끼바리, 백 진주, 찹쌀. 삼년간 발효시킨 퇴비를 써서 미꾸라지와 함께 생산한 쌀입니다. 지력이 좋고 공해 없는 환경 속에서 생산되어 품질이 좋고 밥맛도 좋습니다.”하는 문자가 떴다. 우리 모임 회원인 J여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그 때 나는 집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저수지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매일 한번 정도 들려보는 이 연못을 남매지라고 불렀다. 남매의 다정한 모습이라도 연상 시켜 줄 것 같은 이름이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슬픈 사연이 깔려 있었다. 고생 속에 어렵게 살아가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천애의 고아가 된 남매 앞에 나타난 것은 빚쟁이 영감이었다. “빚을 갚지 못하면 누이를 첩으로 들이겠다.”고 통고했다. 이에 동생이 애걸복걸 말미를 얻고, 객지로 나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돈을 구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누이가 보이지 않았다. 약속했던 기일을 넘기는 바람에 누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여 못에 투신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동생이 돌아 올 날을 학수고대했던 누이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갔다. 망연자실한 동생도 뒤따라 못에 투신하고 말았다. 전설 치고는 너무나 허전한 내용이다. 남매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졌으면 좋았으련만!
못의 둘레가 길어서 한 바퀴를 돌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도중에 못 가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 앉아 주변 정경들을 감상하기도 하고, 바람결에 파문을 그리며 요동하는 물결 따라 시름을 띄워 보내기도 한다. 때로는 못에 얽힌 사연을 되새기며 애절하게 죽어 간 남매의 영혼을 위무하기도 한다. 그 날도 같은 생각에 젖어 있는데 카 톡 메시지를 받았다. 순간 다정한 남매의 모습이 남매지의 전설에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농사꾼 오빠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겠다는 동생의 간절함이 물결위에 파장을 그리며 지나갔다. 묘한 감흥에 일전에 J여사로부터 들었던 집안얘기가 떠올랐다.
그 녀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이 문경 어느 산골마을이었다. 집안이 곤궁하였다. 농토가 충분치 못할 뿐더러 땅이 척박하여 소출도 넉넉지 못하였다. 하루 끼니를 걱정 할 만큼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뒷산에 가서 땔감용 나무를 한 짐 하고 돌아와 보니 부엌에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났다. 혹시 병환 중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 어머니 옆에 웬 편지 봉투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고등학교 합격통지서였다.
그 때 집안형편으로는 고등학교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중학교도 간신히 다녔는데 언감생심 어찌 고등학교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헌데 옆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보니, 혼자 소외된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어디 한 번 시험이나 봐 보자고 부모님 모르게 대구의 모 여학교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렀다. 그 결과 합격통지서가 온 것이다. 엄마가 눈물 흘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괜한 짓을 하여 부모님 속만 아프게 한 것 같아 죄스러웠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손위로 오빠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보낼 수 있는 형편이라면 오빠가 먼저이지 자기에게는 어림도 없는 꿈이었다. 합격통지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별 의미 없이 무덤덤하게 받아드렸다. 그때였다. 오빠가 나서서 누이 편을 들어 주었다. “어머니. 저는 진학을 안 해도 좋으니 누이를 고등학교에 보내도록 하세요. 누이의 재능이 아깝지 않아요.” 뜻밖의 사태에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오빠가 그저 고맙기만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고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타고 난다고 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주어진 운명을 헤쳐 가는 것은 각자의 소명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바로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 말단공무원이었지만 사회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열심히 업무를 익히고 보다 적극적으로 삶을 헤쳐 나갔다. 나름 데로 사회에 적응훈련도 하고 여유를 보면서 공부도 더 했다. 대학은 못 나와도 남에게 뒤지고 싶지 않은 오기가 있어서다. 특히 동양학에 관심을 두고 한문과 명심보감 등 유학의 기초를 익히다보니 공식석상에서 문자까지 쓰게 되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주효했던지 차곡차곡 승진도 했고, 결국은 근무처의 국장이란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오빠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정을 이끌었다. 오빠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집안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학업에도 힘이 되었다. 동생의 사회진출과 적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응원도 아끼지 않았다. 다정한 남매로 서로 의지처가 되었다. 오빠는 순수한 농사꾼으로 변하였다. 그러면서 나름 데로 앞길을 개척해 나갔다. 농업기술에 대한 교육과 훈련도 받고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것이 현재의 미꾸라지 농법이다. 잘 부숙 시킨 퇴비를 충분이 넣어 흙을 기름지게 하여 모를 심고, 미꾸라지를 넣어 함께 사육한다. 땅 심이 살아 있으니 농사도 잘되고 미꾸라지도 잘 자란다. 순수한 유기농인 셈이다.
이렇게 생산한 쌀을 도정 할 때면 동생이 나서서 쌀 홍보요원 역할을 했다.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인연이 닿는 곳에 연락한다. 비록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지만 상대방이 부담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행보이다. 나와의 인연은 한국 국학진흥원에서 행하는 선비아카데미 과정을 함께 하면서다. 그 때 만난 멤버들이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손쉬운 접근이다.
오빠의 배려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고마움을 항상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쳐졌다. 쌀을 주문하여 받고 보니 역경을 딛고 일어선 오누이 모습이 살 포대위에 어른 거렸다. 무언가 덕담을 한마디 던지고 싶은 충동이 생겨 “문경 오누이 쌀”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다. 경산 남매지의 애달픈 사연을 상쇄 할 만 한 소재가 될 것 같아서다. 그리고 평소에 도움을 주었던 지인들에게도 한포씩 선물했다. 남매의 정이 숨 쉬고 있는 쌀로 거듭 태어나기를 기대하며.
첫댓글 정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누이 쌀 작명이 잘 된 것 같습니다. 사람의 팔자는 타고 난다고 하지만 노력과 꾸준한 전진으로 팔자를 바꿀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오빠의 새로운 농법으로 개발한 쌀, 자기를 희생하면서 동생을 공부시킨 오빠를 돕기위한 홍보요원,
어려울 때 일이 생각납니다.
저도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힘들 게 공부시켜주신 부모님과 오빠의 권유가 생각나서 울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