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명심해야 할 기본 사항이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오늘날 대한민국 공문서 DB같은 공문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삼국사기 기년은 곧이곧대로 옳다는 꽤 강박증적
증세로 집착하는, 문해력 부족한 역덕들이 있으나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이들의 생각이 근거 없는 망상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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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집필진은 왜곡 없이 최대한 곡필 없게 객관적 서술로 일관하였으나 그가 수집한 자료 자체에 삼국인들 자신의 왜곡이 있었습니다.
1. 신라: 고고학적으로는 2세기 초중반에야 박씨 족단이 그때까지 서라벌 내에서 서로 팽팽하게 견제 중이던 고조선인 집단 세 부류를 규합한 것으로 판명되어 있으나, 이렇게 되면 고구려보다 건국 기년이 늦는 걸 참을 수 없었던 신라측이 고구려 건국년도보다 건국 기년을 인위적으로 앞당김.
1-1. 단, 그럼에도 준왕의 마한 건국보다는 연도가 늦음.
이는 사로국 진한왕이 적어도 의전적 서열은 보다 높은 마한왕과 교류한 내부 전승이 너무나도 확고했기에,
아무리 올려잡았어도 준왕 마한 건국보다 올려잡을 수는 없었을 개연성이 강함.
즉 신라가 인위적으로 기년을 조정했어도 나름대로 내부 기준에 따라 했다는 것으로 이는 오히려 신라본기가 최소한의 양심은 지켰다는 표지임.
신라본기도 일본서기마냥 철두철미하게 왜곡질 했다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그냥 헛소리임을 명심해야 함.
2. 백제: 고고학적으로는 2세기 중후반에야 연천 일대에 고구려 유민들의 흔적이 발견. 서울에서 발견되는 고구려계 고분들의 최상한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3세기 후반임. 그 이전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은 동북한계(옥저) 주민과 토돈분구묘인들으로서 고구려, 부여와 아아무 상관이 없음. 고로 고대국가 백제의 건국은 3세기 중반이며, 온조-비류 집단의 남하로 국가의 시기를 올려잡아도 2세기 중반이 한계임.
이 시점에서 또 아직 무덤이 발굴안되었단 말이에욥! 이라고 주장하는
말 안통하는 양반들 계시는데.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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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백제는 고구려 출신인 자기네 진실을 숨기기 위해 본인들은 고구려의 뿌리인 부여의 일파라고 억지 주장함. 그리고 주몽 집단 직후에 갈라져 나온 걸로 왜곡.
그러나 백제마저 어쨌든 초고-근초고왕 계열 왕가의 선조 온조가 주몽 아들이라는 사실만은 결코 부정하지 못했다. 정말로 올려잡고 싶었으면 주몽의 선대로 올려잡는 게 더 유리했을텐데도 끝내 이 전승만은 부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초고-근초고왕 계열 왕가가 정말로 주몽 후손들임은 따라서 부정하기 매우 어렵다.
3. 고구려: 신라가 고구려측 기록을 보고 기년을 올려잡았을 정도로 원래는 고구려측 전승이 원조. 그나마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자료가 연도 불일치 없이 거의 딱딱 잘 들어맞고 있다. 고대사에서 이렇게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자료가 연도 불일치 없이 들어맞는 사례는 적어도 익산 마한 건마국 외엔 거의 없다.
그러나 고구려본기라고 해서 왜곡 사항이 없는 건 아니다.
고구려측은 흡사 백제가 고구려에게 그러했듯, 본인들이 부여에서 나온 게 아니라고 주장했었다. 본인들은 부여에서 나오지 않았고, 부여의 뿌리인 북부여(=탁리국)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고구려는 북부여(백금보-망해둔 문명권)과 1도 관계 없다. 이는 백제 또한 고고학적으로는 부여와 관계가 1도 없음과 일맥상통한다. 고구려는 고고학적으로는 그냥 부여하고만 관계가 있다. 이는 백제 또한 고고학적으로는 고구려하고만 관계가 있음과 또 다시 일맥상통한다.
고로 이는 고구려인들 자신의 왜곡이다.
이러다보니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A.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계보가 정확하지만 5세기 중반 눌지 마립간 전 기사들은 기년(=연도)을 믿을 수 없다.
B.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오히려 3세기 후반 책계왕 이전 기사들까지만 기년이 틀려 있다. 책계왕 이후 기사는 기년을 신뢰할 수 있다. 적어도 기년 자체는 신라보다 상대적으로 정확한 편이다. 단, 계보 자체는 그야말로 기본적 사항들 외엔 엉망이다. https://blog.naver.com/hopeater/222872706331
C.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적어도 모본왕 사후 ~ 태조왕 즉위 때 외엔 기년 오류는 없다. 그러나 계보 자체는 백제 본기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양호하지만 최소한 주몽 ~ 신대왕 이전까진 상당히 뒤죽박죽 엉터리다. 이는 적어도 계보 자체는 모두 사실임이 높음이 논증되고 있는 신라본기만 못한 부분이다.
AB. 고로 백제-신라 관계 기사는 신라측 국왕 기록에 맞춰 신라쪽 수정기년으로 끌어내려 분석해야 한다.
예컨대 백제신라 갈등 기사에서 근초고왕-나물 이사금 기사는 실제로는
침류 혹은 진사왕 - 나물 이사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백제와 신라의 제대로 된 외교적 첫 접촉은 비류왕-흘해로 나와 있으나
이는 실제로는 근초고왕-흘해가 더 자연스럽다.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사 시리즈 참조.
백제-신라 교전 사항은 대부분은 아예 기사를 후대로 끌어내려서 봐야 한다.
AC. 고구려-신라 관계 기사도 석우로가 맞서 싸운 고구려측 임금은
엉터리인 삼국사기 기년상 임금 동천왕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후대 임금이다.
요약: 계보신뢰성 신라 > 고구려 > 백제
기년신뢰성 고구려 > 백제 > 신라
첫댓글 모든 시대의 역사가 사료를 의심해야하지만, 근대사는 기초적인 사실 자체를.검증해야하는 일은 드문 편인데 고대사는 이점에서 더 어렵군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부분이 문제가 있다는건 얼핏 들었는데 잘 읽었습니다.
다만 풍납토성의 경우에 백제 초기에도 상당히 중앙집권화된 정권의 존재를 보여주는듯 한데 어떤가요? 제가 마지막으로 들었던건 건축연대가 기원전2세기~서기 2세기 사이 정도로 판명되었다고 들어서... 2세기 중반보다는 좀 더 앞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 고대사는 제가 잘 몰라서 제 기억이 틀릴수도 있구요. ㅇㅇ
"상당히 중앙집권화된 정권"의 지표는 성곽, 집중된 고분군, 전문기술자 집단의 집중(=토기 양식의 통일성 및 귀족 문화유형 등. 심발형 토기 고배 등) 세 가지가 나타나면 부정할 여지 없는 고대 국가라고 합니다.
한성백제는 이와 같은 지표가 3세기 4/4분기, 삼국사기상 연대에 의하면 책계왕 때 완비되는데 "초기"라고 함은 어떤 시기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건축연대가 기원전2세기~서기2세기라고 판명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얘기입니다.
풍납토성은 고고학적으로 3세기 4/4분기가 "상한선"이고, 몽촌토성은 그나마 3세기 중반이 "하한선"인데 성곽만 갖고 중앙집권화된 정권 운운하긴 좀 그러하지만 여하튼 서울이 기준이면 3세기 중반이 한계입니다.
게다가 제가 말하는 정보는 2012년에 그간 발굴된 성과들을 갖고 논하던 성과라서 그나마도 오래된 정보인데 이 정보에서 업데이트된 건 딱히 없는 걸로 압니다.
그나마 풍납토성 있던 자리에 3중 환호와 목책 정도는 기원전 1세기 경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것은 동북한 옥저계 중도문화유형 주민들이 건설한 것으로서 우리가 아는 백제 지배층과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구려계도 부여계도 아니기 때문인데다 이들은 정작 고대 국가 백제가 들어서던 무렵인 3세기에는 죄다 피지배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법의활 잘 읽었습니다. 제가 풍납토성의 건축연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군요. ㅇㅇ
결국 구라치는것도 뭔가 기반이 되는 자료는 봐가면서 해야하네요
일본서기도 왜곡 패턴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문자로 쓰인 것만 파악한다는 문해 능력 없는 자들의 헛소리는 귀담아들을 여지가 없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