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백제 지배 계층은 적어도 문헌학적으로 봤을 때는 이원적입니다.
온조 전승과 비류 전승으로 나눠져 있는데 두 전승이 비슷하면서도 분명코
입장이 다릅니다.
1. 온조 전승
온조와 비류가 둘 다 비류국 송양왕 둘째 딸의 자녀고,
아버지는 주몽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비류는 인천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나 아우인 온조가 성공하고
본인은 망하자 절망에 차 자살하는 걸로 나옵니다.
주몽에 대해 다른 얘기는 없지만, 주몽은 해모수-주몽 계보인 만큼
해부루나 금와에 대한 다른 얘기는 일절 없습니다.
2. 비류 전승
온조와 비류는 둘 다 소서노의 자녀로 나오는데, 두 사람의 어머니에 대해
자세하게 밝힌 건 비류 전승 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해부루의 서손 우태로 나옵니다.
비류가 주도적으로 온조와 함께 내려와 백제를 세운 걸로 나옵니다.
1. 다들 아는 것처럼 온조-초고-근초고왕 계 왕가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으나,
2. 비류 전승도 엄연히 남아 전승되어오고 있었다는 걸 볼 때 온조 전승과는
꽤 다른 비류 전승을 보존했을 또 다른 왕가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마침 고이-분서-계 왕가는 앞서의 온조-초고-근초고왕계 왕가와 확연히
계보가 다르고, 우씨 인물들도 유력하게 많이 분포되어 있는 걸로 보았을 때
이들이야말로 비류 전승을 보존한 왕가였음을 부정하긴 어렵습니다.
게다가 유독 고이계 왕가는 동명묘를 참배하지 않고 천지신명에게 바치는
제사를 더욱 중시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은 비류 전승에서 아예 존재조차 거의 나오지 않는 주몽의 예와 의미심장하게
큰 연결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제는 문헌적 자료가 적기에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의존도가
신라 혹은 고구려보다도 더욱 큽니다. 그렇다면 고고학적 자료는 이에 대해
누가 옳은지 답을 제시하고 있는 걸까요?
고고학적 자료로도 백제 왕통이 이원적인 걸로 드러나긴 합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초기 한성백제의 지배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고구려식 적석총, 구체적으로는 주로 압록강 이남 고구려인들 묘제인
사각형 제단이 붙은 적석총 묘제를 주로 쓰는 집단
2. 기원전 1세기부터 산동을 거쳐 경기도로부터 파급되는, 원래의 기원은
초오월이지만 거기서부터 주욱 산동을 타고 북상해오다 서한 시대에
한반도로 유입되었기에, 일명 한(漢)식 토돈분구묘제 세력으로도 부르는
세력
이 둘입니다.
3. 그리고 적어도 얼마 안 되는 세월 내에, 1과 2를 절충한 특유의 묘제,
즉 일명 백제식 적석총으로 불리는 묘제가 한성백제 지배층의 지배적 묘제가 됩니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아올려 분구묘를 만들고 그 쌓은 지상부위에 관을
넣는 것까진 2와 같지만, 그 바깥에 촘촘하게 돌을 쌓아박아서 겉으로 볼 때는 외양이 1과 같아지는 특유의 방식입니다.
승자인 온조-초고-근초고 집단이 여전히 기득권층 일부인 비류-고이-분서-계 집단을 배제할 수가 없었던 사항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그러나 뇌피셜은 여기까지입니다.
물론 고고학적1 집단이 문헌학적1 집단과 같은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적어도 문제의 절반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적2 집단이 문헌학적 2집단과 연결될 껀수가 전혀 없는 게 또 다른 큰 의문입니다.
주로 해상 집단임이 유력한 고고학적2집단은, 비류가 바닷가인 미추홀에 자리잡았다는 온조 집단 전승과 아주 약간 연관은 있으나, 엄연히 중국 서한 시기에 중국 초오월에서 시작한 토돈분구묘제 집단의 후예기에,
주몽과 무관한 졸본부여 집단의 인식, 그리고 북부여보다는 본래의 동부여 혹은 부여와 밀접한 관념을 가진 문헌학적2집단과는 저언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선은 확실한 부분에서부터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합니다.
온조-초고-근초고왕 계 왕가가 주몽을 조상으로 하는 왕가고 고구려가 뿌리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항은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태자 시절
고구려 고씨 장수에게 '우리는 성이 같다'라고 말한 것에서 다시 입증됩니다.
게다가 백제는 고구려에게서 왕가와 지배층이 나왔다는 걸 극구 부정하기 위해
뿌리가 부여라고 계속 줄기차게 주장하였으나, 문헌학적1 온조 전승은 어디까지나 온조는 주몽 아들임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온조 왕가가 백제는 부여에서 나왔다는 걸 강조하려면 가장 먼저 삭제해야 할 인물은 주몽입니다. 소서노가 주도적으로 고구려를 세웠고 뿌리가 부여란 얘기는
문헌학적2 비류 전승에서 하는 소리지, 온조 전승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점도 크게 시사할 부분입니다. 아예 주몽 자체를 과감하게 삭제해버리고 고구려 주몽 왕가의 북부여 해모수 드립 껀덕지 또한 가차없이 배제해버린 문헌학적2 비류 전승과 크게 대비되는 내용입니다.
이는 즉 부여에서 백제가 나왔다고 주장하던 백제 왕가조차, 온조가 주몽 아들이라는 자기네 전승 기초 골자는 절대 결코 부정할 수가 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보다 나라를 먼저 세웠음을 강조하던 신라인들조차, 박혁거세의 기년을 주몽보다 앞세웠을 망정 마한 건마국 준왕의 망명 시점보다는 앞당길 수 없었던 현상과 일맥상통합니다. 수백 년 동안 너무나도 분명히 전해져온 핵심 뿌리기에 이건 도저히 어쩌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헌학적2집단과 고고학적2집단이 왜 다른지 규명할 시간이 왔습니다. 내용이 길어져서 이건 다음에 얘기하겠습니다만, 스포부터 하나 하겠습니다. 답은 같을 이유가 전혀 없다, 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트너 지배집단과 대립 왕통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얘깁니다.
초기 고구려도 사실 고고학적 지배층 자체는 부여인과 토착 고조선인들의 연합으로 드러납니다만, 왕통 자체는 어디까지나 부여에서 내려온 부여계 인들이 독점했음을 다시 떠올려야 할 부분입니다. <계속>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오오 흥미롭습니다
근데 질문
초오월계가 문화나 혈통적으로 한데 묶일수 있는 범주임?
춘추전국 내내 치고박던 놈들인데?
전한시대쯤 되면 많이 혼화가 되서 하나로 봐도 무방한것임?
남북한도 열심히 치고박습니다. 고백신도 마찬가지. 오월은 글고 더 가깝습니다. 중원화 진도 및 희성 왕실 유무만 다릅니다.
초오월은 전한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 같은 계열입니다.
@마법의활 남북한의 예시는 뭔가 좀 아닌거 같지만 다른 설명은 ㅇㅋ
사실 중원의 뼈대있는 공경대부님들이야 오월초를 문신한 야만우가우가 정도로 한데로 취급하시지만 이게 들여다보면 자기들끼리도 쫀심 싸움도 심하고 오는 희성을 자랑하고 초는 아예 주 천자를 씹고 그러는 모습들이 많이 보여서 물어봤심.
질문 하나 더
본문중 예시를 든 무덤 양식 이외에도 한반도 월계의 문헌적이나 고고학적 증거들이 더 있음?
@▦무장공비 문헌적으론 없습니다.
@▦무장공비 초오월만 신경쓰지지 말고, 산동을 거쳐 북상하다가 서한 시기인 기원전1세기에 경기도로 유입된 부분에 방점을 찍으셔야 합니다. 이 본문 내용은 축약하고 또 축약한 것이기에 문장 뒷부분을 생략하면 핵심 내러티브 자체가 무너져 버립니다.
@마법의활 물론 오월동주의 월이 결국은 초에 당해서 찌그러지고 서주 일대까지 밀렸다가 멸망한 얘기는 전에도 얘기한적 있으니 기억 나긴 하는데
기원전 300년 경에 망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상당한 집단을 이뤄 한반도까지 흘러 들었다?
(물론 민월이니 동월이니 월의 후손들은 한무제때도 집단을 이루고 정체성 유지하고있었지만....)
참 중간에 뭔일이 있얼을련지 되게 궁금하긴 합니다.
그럼 고고학적 증거가 더 있다면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썰을 풀어주센.
plz~
@▦무장공비 아닙니다. 그 정체성이 오늘날 국가정체성 같은게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이동 과정에서 다른 집단과 상당한 교류를 했다는게 중요합니다. 민월 동월과는 고로 완전 다릅니다. 역사적으로는 마그나 그라이키아를 이룬 그리스 식민운동의 긴 흐름이 가장 비슷합니다.
@▦무장공비 굳이 정체성을 더 따지면 경기도에 유입된 기원전1세기 경에는 서한인들었겠습니다만 그건 낙랑인들도 마찬가지고, 언어나 문화에서 기존 예맥의 그것이 여전히 주류였던걸 보면 정체성은 그렇게 큰 유의미는 없었다고 보입니다. 남이탈리아 로마 시민들은 결국은 다 라틴화되었던 것처럼요. 로먼 이탈리아는 나나미빠들 망상과는 달리 여전히 그리스어를 애호했던 것같지만 그건 그리스어가 동아시아 한자 위상이어서 그랬던 것 같고요.
@▦무장공비 물론 낙랑인들은 흡사 수십년전 남한에서 미국 검머외들 위상이 높았듯 아무래도 한반도 이주지에서 적어도 정치적으론 보다 유리했을 개연성은 있지만요.
@▦무장공비 다시 설명드리지만, 남북한의 예시야 말로 가장 가깝고 완벽한 설명입니다.
고백신, 오월보다도 훨씬 직접적인 강력한 견본이죠.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