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 단상
늦가을, ‘환영, 대통령 방문’이라는 대형현수막이 펄럭이는 경주보문단지의 특급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아내와 둘이서 초청받은 문화탐방행사를 마치고 배정받은 객실은 아들이 사는 24평 아파트보다 넓었다. 안온한 분위기에서 달콤한 잠을 잤지만 눈을 뜨니 평소와 같은 5시였다. 곤히 자는 아내를 방해할까봐 화장실 불을 이용해 옷을 입고 로비로 내려갔다. 조간신문을 대충 들쳐보고는 호수를 따라 걷는 산책로가 매혹적이라고 하여 신발 끈을 조였다.
후문을 나서니,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인사를 한다. 아마도 일교차가 심한 11월이라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만나는가보다. 노천온천에 들른 것 같은 환상적인 풍경이 언제 적보고 이제야 보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해가 뜨기 전에 바라보는 물안개가 약간은 을씨년스러우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든다.
오른쪽으로 호수를 끼고 왼쪽으로는 세계적인 호텔체인들이 화려하게 장식한 조명을 바라보며 걷고 있자니, 두 명의 여인이 “오하요오 고자이마스”라며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다. 일어가 가능하지만 의도적으로 “안녕하세요.”했다.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이웃이다. 기술제휴를 맺고 있는 사장 집에 초대받았을 때, 꿇어앉은 자세로 생선을 발라주던 사모님의 정성이랑, 간이주점에서 술 한 잔하고 어깨동무해서 목청껏 팝송을 불렀던 늦은 밤의 정겨움과 가족개개인의 안부와 더불어 조그마한 선물을 건네던 세심함에는 혀를 내둘렀다. 로열티를 물어야하는 그들의 기술력과 주차장을 빼곡히 채운 자가용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감정이고 그들은 일본인이아니라 일본X이었다. 초등학교 때, 국시는 ‘반공방일’이었다. 북한괴뢰군은 온몸이 빨개서 빨갱인 줄 알았고 일본은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한 원흉이라 배웠다. 단체관람영화는 대개 독립군을 미화한 영화였는데, 일본경찰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동포가 개가 천선하여 일본순사에게 총부리를 겨눌 때 흥분하고 환호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산책하기에 좋도록 구간마다 특색 있는 바닥으로 장식한데다 잘 가꾸어진 화단과 나무의자, 조각상들이 눈에 띄어 긴 의자에 양팔을 뻗어 걸치고 휴식을 취했다. 가까이에서는 서양인이 호텔과 어우러진 광경을 찍느라 연신 셔터를 누른다. 팔백팔십만 명이 넘는 외국인을 끌어들인 저력은 무었일까? 대학생이었던 60년대 중반, 유엔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북한보다도 못한 최빈국인 6등급이었다. 그 뒤 박통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대기업에 입사해서는 세끼를 사내에서 해결하며 15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두 번을 쉬려면 부장에게 사유서를 제출하여 승낙을 받아야했다. 그 덕으로 보통사람이었던 나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자가용에다 골프까지 치게 되었으니, 짧은 기간에 이렇게 발전한 나라가 또 있을까?
요의를 느껴 주위를 들러보니 저 앞에 아담하게 지어놓은 청기와 화장실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만 하더라도 세상에 내놓을 명품 중에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유럽여행 때의 불편함이 고개를 든다. 화장실이 무료인 식당에서 한 방울이라도 더 짜내려고 노력을 했지만 버스로 2시간정도 가다보면 다시 화장실이 그립다. 정차하기 바쁘게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1유로를 들고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섰다. 화장지가 없어 불편한데다 여성들은 출발시간을 맞추느라 종종걸음을 쳐야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화장실은 3박자가 맞는다. 1키로 정도 간격으로 나타나는 편의성, 깜직한 액자가 반겨주는 청결한 내부, 화장지까지 비치하고도 어딜 가나 무료.
가던 길을 되돌아오니 아내는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중? 7시가 조금 넘었네. (碧草.2011.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