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연령-2
할머니들은 밥을 지을 때는 꼭 잡곡을 조금은 섞는데 왜냐하면 나랏님(임금님) 수랏상에는 이밥이어서 평민은 똑같이 먹을 수가 없다고 스스로 차별화 하니 충성심이 내포된 짓이다.
결혼식 때 신부가 입는 원삼(圓衫)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색동의 비단(silk)옷이고 수의인데 할머님의 것은 환갑 때 실크로 만들어 3번 예식장에서 신부가 빌려서 입으면 좋다고 하여 빌려준 후 보관하다가 35년 후에 사용했다.
내가 격은 초례를 올릴때 홀기(예식때 순서를 적은 글)를 부르는데
첫 번째의 “서동부서(壻東婦西)” 란 말은 남자는 동쪽, 여자는 서쪽에 위치하라는 말이고,
두 번째의 “북향재배(北向再拜)!”라고 하는 것은 북쪽에 위치한 서울의 임금님께 2번 절하여 결혼신고를 하는 셈이다.
옛날에 과년(瓜年; 과를 세로로 쪼개면 八八이되어 16세; 손작의 시에 나옴, 어쩌면 過年이 아닐까?)한 처녀들은 비록 흰옷 일지라도 빨간 갑사(甲紗)로 댕기를 매다가 결혼을 하면 쪽을 찌고 남자들도 결혼을 하면 댕기풀이를 하여 상투를 틀어 올리게 되는데(20세 남자를 약관; 弱冠) 총각들이 땋은 머리채(대마묶음에 비유)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것은 매일 감지 않아서 닳지 않아서 길다.
지금은 값싼 인조가발이지만 70년대 초 미국에 사는 교포 한분이 박대통령에게 간접적으로 고하여 머리체로 만든 가발수출을 하여 거액을 번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인조 가발을 값싸게 파는 미 공급 상점(Beauty Supplies)이 많이 있다.
워싱턴시의 자연사 박물관에는 5.2m길이의 머리채를 진열해 놓았는데(25년 전 이곳에 있든 것은 1m가 더 짧았다)자라는 데로 물로 씻지 아니하고 친친 감아서 보관한 것이니 이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으며 젊을 때는 머리카락이 굵지만 늙은 후에는 머리카락이 가늘어 진다는 것을 이곳에서 볼수가 있다.
지금은 없어 졌지만 결혼을 하는 날 초례상에는 ‘눈요기’ 로 여러 가지의 과일과 떡을 고이지만은 실제의 요기음식으로는 메밀묵을 먹는데 계를 조직하여 그날은 여러 집으로부터 고리짝(고리버들로 엮어 만든 용기)이나 함지(나무로 만든 4각형 용기)에 가득한 묵이 계군으로부터 여러 지게로 들어오게 된다.
함지를 약 85도정도가 되는 지게위에다가 얹어면 딱들어 맞는다.
엊그제는 아는 할머니께서 순 도토리묵을 만들어오셨는데 조금 떫은것이 흠이었는데 탄닌이 철분흡수를 방해한다고하여 나는 먹지를 않았다.
수양버들 회초리로 만든 후에 결혼식장에서 남의것과 구별하려고
이름을 써 놓았다.
잔칫집에 참석한사람들 중에 헌고무신을 신고가서 남의 새 백고무신과 바꿔서 신고 나오는 나쁜사람도 있었다.
묵에 얽긴 이야기로 3별초 반군두목인 배중손의 부하들이 제주도를 마지막으로 1273년 몽고군에게 패하게 되는데 그들은 삼별초를 도왔던 제주도 사람들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독성이 있는 메밀씨앗을 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냉면을 만들어 먹으면서 동치미나 무 깍뚜기를 넣어서 메밀과 무의 찰떡궁합을 이용 중화시켜 먹는 지혜를 이용하는 바람에 이때부터 결혼 후 찰떡궁합으로 오래 살라는 뜻으로 먹게 했다는 구전(口傳)도 있다.
묵 은 힘이 없는 음식이니 ‘묵사발 됐다,’ 는 말이 있는데 일본어로 묵을 곤약구라 하니 일제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싸울적에
‘네놈 곤약구를 만들어 버리갰다!.’라고 말했다.
묵은 상온에 보관이 가능하며 반찬이 필요 없이 양념간장만 있으면 되니 많은 잔치나 초상을 칠때 하객을 대접 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제주도란 말끝에 생각나는 것은 벌꿀을 나나리청이라 하는데 나나리는 벌이고 청은 꿀을 뜻하며 육지에서는 묽은 엿을 ‘만든 꿀’ 이라는 뜻으로 조청(造淸)이 되지만 어감이 좋지 않아 보제수(菩堤樹)를 보리수라 하듯 ‘조청’을 즙청(汁淸)으로 부른다고 어머니께서 말씀 하셨다.
1898년 단발령이 내려서 상투가 없어지고 혼인 허용이 남자 17세, 여자 15세로 정하여 졌지만 당장 시행이 되지는 않은 것은 1920년에 시작된 동양척식회사의 수탈방법인 공출 때문에 먹고살기가 힘들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인 것 같다.
속담에 ‘3일 굶어 월장(越牆)안하는 사람 없다’ 는 말이 있으며 월장이란 ‘담을 넘는다’는 말인데 이웃동내로 원정도둑을 하여 벼나 마늘 같은 것을 훔치기도 했으니 극빈자가 아니면 도둑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고 개를 키우는데 하루 2끼만 누룽지 같은 것을 주고 정월 대보름날은 아예 굶겨서 ‘개 보름 쉬듯 한다.’ 는 속담이 나왔다.
나의 부모님께서도 십리 안쪽의 면식이 전연 없는 혼인이셨는데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 동네로 본인의 선택권이 없이 혼인을 하니 기차구경 한번 못해보고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전쟁 후부터는 교통의 발달로 자연히 원거리 혼인이 이루어지는데 수레가 있어서 탔다 하면 100㎞속도의 기동성을 가지는 현세에 살지라도 바쁘기는 예나지금이나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