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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한말 황실, 왼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엄씨.덕혜옹주.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인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 형제, 민영환의 사위)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육상궁(毓祥宮)
유상궁은 원래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봉사하는 사당이었다. 1908년에 저경궁 · 대빈궁 · 연우궁 · 선희궁 · 경우궁이 합사되어 6궁으로 불렸으며, 1929년에 덕안궁이 경내로 옮겨와 7궁이 되었다.
죄인들(우편엽서)
이 사진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풍속 사진엽서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엽서는
관광 기념용 사진엽서 가운데 한 장이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되었던 '상품'이다.
국민소학독본
구한말 조선 왕실이 편찬한 계몽 교과서. 당시 조선 왕실은 개화를 적극 추진 부국강병을 최우선의 국가적 과제로 설정하였는데 이를 신민에게 알리기 위해 교과서류를 편찬하여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고 부국강병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경복궁과 육조거리
숭실학교 수업모습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풍속 사진. 회식(우편엽서)
‘조선 풍속’엽서에 실린 사진 중 상당수는 스튜디오에서 조선인 모델을 고용해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무대 배경에는 서구식 장식물이 등장하고 조선인 모델들은 촬영자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 풍속 이미지로 팔려나갔다.
혜화문(동소문)과 성곽
남대문(숭례문)
도성(인왕산 곡성)
마패
한말 대신 박영효, 윤치호
홍지문 문루와 탕춘대성,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궁녀들, 조선말 대한제국때는 궁녀들도 정식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헌종비 명헌왕후 홍씨전에있던 조하서 상궁은 숙명여학교까지 다녔다.
서광범, 1882년에 박영효와 같이 일본에 가서 그 곳의 문물을 둘러보고
개화파가 되어 1894년 갑신 정변에 참가한다. 김홍집을 총리로 하는 내각의
법부대신을 거쳐 주미공사에 부임하지만 일찍 생을 마감한다.
숭례문(남대문) 입구 풍경
북한산성 행궁, 전란 등 비상시 왕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행궁이다.
한말 훈장과 학동들
서울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뒤에 보이는 다리가 수표교.
서울은 지형적으로 북쪽에 산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하천들은 도심을 흘러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성 안을 흐르는 하천들은 청계천을 비롯하여 중학천 등이 있었다.
일본정부 칙사로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왼쪽)와 한국 주재 일본군 사령관(오른쪽)
1905.11.29 경성역
강화도 초지진 포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졌다.
한말 인력거
1869년경에 일본인 다카야마 고스케(高山幸助) 등이 서양마차를 본떠 만들었으며, 한국에는 1894년(고종 31),
하나야마(花山)라는 일본인이 10대의 인력거를 수입해 들여와 영업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최초의 인력거꾼은 모두 일본인이었다가 점차 한국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인력거는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도시에
급속히 보급되어 가마를 대신하는 중산층 이상의 교통수단으로 번성을 누렸다.
감고당(感古堂, 현 안국동 덕성여고 자리)
조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영조가 감고당 편액을 내렸고, 명성황후가 책봉되기 이전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한말 대구의서문시장
서문시장의 장터역사는 조선 중기부터이다. 옛이름인 '대구장'은 원래 대구성 북문밖에 자리잡은 소규모의 장이던 것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물자조달 기능이 활발해 졌고 1669(현종10년)조우도로 분리되어 있던 경상도가 통합되어 '경상감영' (현재 중앙공원 자리)이 설치되면서 대구의 경제적 위치와 더불어 성장했다. 대구장은 북문 밖에서 서문 밖(현재 동산파출소 자리)으로 이전했는데 평양,강경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에 꼽힐 만큼 유명하다.
한말 한성의 싸전거리
창덕궁
창덕궁(昌德宮)은 태종때 지어진 궁궐로 임진왜란 이후 대규모 중건 하였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 경복궁에 비해 조금 작은 궁궐로 인정전을 비롯해
선정전과 후원인 금원 등 다수의 전각이 잘 보존되어 있다.
포도대장 (1890)
포도청은 1895년 경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조선왕조의 경찰기관이다
1892 창경궁과 홍화문
창경궁(昌慶宮)은 1484년(성종 15)때 지은 궁궐로 정전(正殿)인 명정전 을 비롯 많은 전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된 뒤에도 몇 차례의 화재를 겪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전각은 임난 후에 재건한 명정전과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등 외전과, 1834년(순조 34) 다시 지은 숭문당·함인전·환경전·경춘전·통명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 등의 내전이 있다.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제가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고 1910년(융희 4)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꿨으나, 1983년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으로 복원되었다.
1909년, 전주 - 신흥학교 수업 광경(위)과 안창호가 설립(1907년)한 평양대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서울의 천변(川邊)마을 풍경
도성 안에만 172개의 다리가 있었다는 기록이 말하듯 서울은 작은개천이 많았다.
이런 개천의 물들은 청계천으로 흐름이 합쳐지고 종국에는 한강에 다다른다.
개항이후 근대식교육을 받고있는 선비들의 모습(1903년)
개울에서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는 모습
별기군 병사, 구 한말에 신식군대를 도입하였다.
시 '진달래 꽃'으로 유명한 영변 약산의 풍경, 기암괴석과 노송이 잘 어우리는 명승이다.
평민들의 다양한 모습들, 색안경을 낀 이도 있고 남정네가 애도 보는 진풍경이다.
남대문에서 바라본 풍경
활쏘기를 하는 여인들
출처: 호시탐탐
첫댓글 아름다운 풍경이네요.
오...왠지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없어 신기하네요..저 때에 제가 살진 않았지만 왠지 익숙하고 정겨운 느낌이예요. 그렇지만은 않았겠지만 한가하고 여유있어 보이는 모습들....중간에 일본 아저씨들은 정말..... 저 일본 사람이 담긴 사진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네요..
서문시장은 아직도 크답니다 항상 북적북적
다른 유리건판 사진도 보고싶네요 올려주시면 감사 감사^0^
조선말기... 그게 구한말인데... 아닌가요?
조선말기 맞는거 같은데요?
그리운 추억으로 담겨진 모습이 느껴지네요
위에 박영효하고 윤치오의 사진이 뒤바뀐듯 하네요...^^ 확인함 해보세요
여인들도 활쏘기를 했었군요~그래서 울나라가 양궁에 강한건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