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사랑 나라사랑
-〈1부〉 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⑶ 쌀의 생태경제학
무한가치 창출 … 국가존립 좌우
*김성훈 중앙대 교수
-서울대 농업경제학과 졸업
-미국 하와이대 경제학 박사
-우리쌀지키기 범국민대책회의 집행위원장
-농림부장관
-경실련 공동대표(현)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1998년과 2001년 두차례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발굴
돼 세계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금은 오창과학산업단지가 들어선 충북 청
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충북대·단국대·서울시립대, 그리고 지질자원연구원 등 4
개 기관이 참여한 고고학 조사단이 고대(古代)형 볍씨 18립과 유사벼 41립 등 59립
을 발견한 것이다. 유전자 분석결과 대부분의 볍씨가 오늘날 한반도에서 재배되고
있는 볍씨의 원형인 순화된 자포니카 계통임이 밝혀졌다.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인
정받는 미국 지오크론시험소(GX)가 측정한 연대는 1만2,500~1만3,920년 전으로 거슬
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진 중국 후난성 옥첨암 동
굴 유적의 1만1,000년 전 것보다도 최소 1,500년에서 3,000년을 더 앞선 것이다. 이
는 고고학적으로 우리나라가 순화벼(Domesticated Rice)의 원조지역이었음을 입증한
다.
벼농사란 원래 생태학적으로 여름철 강우량이 집중돼 홍수피해가 우심하고, 고온다
습하여 잡초가 무성히 자라는 아시아 몬순지대에서 진화·발달한 환경생태형 농업이
다. 이 때문에 지금도 세계 쌀 생산량의 92가 아시아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전통
적으로 아시아 주민들의 주식이 돼왔다.
쌀이 주식이 아닌 나라인 미국·호주·스페인 등에서 지난 세기부터서야 상업적으
로 재배되기 시작했으나 주로 수출용 또는 가공용으로 재배되고 있다. 이들 나라의
쌀 생산방식은 생태학적으로 볼 때 여름철 몬순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겨울비
나 눈 녹은 물을 인공적으로 저수해 이용하고 있다. 이른바 인위적 관개와 기계화
농법 및 대량 화학물질의 투입에 의존하는 반생태적·반환경적 농법이다.
아시아 몬순지역 나라의 벼농사는 본질적으로 여름철 고온다습의 생태계와 자연환경
에 적응하며 자연조건을 보전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안전한 식품을 공급하는 것이
특징이다. 잡초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논농사가 중심이었다. 논의 저수기능은 홍수
와 산사태를 막아주고, 벼의 생육과정에서 대기와 수질이 정화되고, 지하수를 함양
하는 등 벼농사는 국토의 정원사로서 푸른 공간과 생태계를 지켜준다. 벼농사가 있
음으로 인해 전국 방방곡곡에 마을(지역사회)이 형성됐고 국토의 균형발전이 가능했
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경우 세종대왕 때 지은 〈농가월령가〉의 가사 내용처럼 4계
절 12달 24소시와 얽힌 겨레의 생활리듬이 주로 논농사와 관련됐으며 이들이 우리
전통문화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이러한 무형의 공적자산을 세계무역기구는 일컬어
농업의 비교역적 공익기능(Non-Trade Concerns), 또는 다원적 공익기능
(Multifunctionality)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세
계관(Sustainable Society), 즉 지속가능한 성장과 소비, 농업의 대표적인 사례가
다름 아닌 벼농사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6·25) 이후 무분별한 미국 잉여농산물의 수입과 시장개방정책
으로 인해 목화·조·수수·옥수수·밀·녹두·팥·콩·감자·고구마 등 토지 조방
적 농업이 이 땅에서 차례로 사라져 갔다. 벼농사만은 대안이 없는 환경 생태계적
메커니즘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그 중요성에 변함이 없다. 자연생태계의 섭리가 그
러하며 그에 적응하여 살아온 우리 고유의 생산·생활·문화 양식이 그러하다. 최
근 신흥개발도시(예:파주·용인·안양 등)지역에 때 아닌 홍수피해가 빈번해진 배경
이라든지, 중국의 양쯔강이 해를 걸러 큰 물난리를 겪게 된 원인이 인근의 산과 들
과 논밭이 도시산업용으로 전용된 데 기인한다.
이렇듯 벼농사는 경제와 환경생태계의 조화로운 관계가 그 성립 발전의 기본조건이
다. 벼농사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아시아적 가족농 체계의 형성·발전에도 큰 관련
이 있다. 모내기와 벼베기, 물관리 작업에 있어 두레와 마을 등 공동체가 형성됐
다. 이같은 생태적 가치와 경제사회적 연관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난마처럼 얽힌
국제통상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없다.
벼농사가 환경보전에 기여하는 공익적 효과는 그 중 계량화가 가능한 것만 추산해
봐도 대략 쌀 생산액 10조원의 2~3배에 달한다. 농림부·농촌진흥청 등의 보수적인
계측만으로도 무려 13조4,000여억원이나 된다. 이는 우리나라 논 면적의 두배인 일
본의 35조원에 비해 적게 평가된 금액이다. 수치의 차이야 어떻든, 우리 국민들이
미국 소비자보다 3배 이상을 기꺼이 지불하는 국내산 쌀값 안에는 이같은 공익적 환
경효과에 대한 값이 포함돼 있는 셈이다. 팔고 사는 상품으로서의 쌀값만 가지고 경
쟁력을 따지는 상업적 계산법은 장사꾼이나 할 짓이다.
정부 일각과 일부 개방론자들이 말하는 우리 쌀값이 미국 및 중국 쌀보다 3~5배가
비싸다는 관변자료는 벼농사가 가지는 무형의 공익적 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 비
교생산비론적 계산법이다. 필자가 지난 1년간 현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미 두나
라간의 단순비교 생산비 차이는 약 3.2배이지만, 공익적 기능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에서 벼농사를 지어 소비하는 것이 국익에 훨씬 유리하다.
더욱이 단위면적당 칼로리와 영양소가 쌀보다 높은 주식 농산물은 아시아 몬순지역
에서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인류 건강의 적신호인 콜레스테롤 함량이 가장 적은
주식이 바로 쌀이다. 최근 잇달은 연구결과를 보면 쌀밥이 밀가루 음식보다 훨씬 질
병 방지 효과가 높다. 말하자면 좁은 국토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장 건강하게 부
양할 수 있는 생산성과 영양가가 가장 높은 식품이 바로 쌀인 것이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좁은 땅덩어리 한반도에서만 지난 5,000년동안 7,000만 인구로
늘어났고 한민족이 옮겨가 사는 곳곳마다 벼농사를 일궈 왔다. 오늘날 세계에서 인
구밀도가 세번째(평야면적 기준으로는 첫번째)로 높은 민족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
다.
첨단 과학문명과 문화·예술이 지배하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매년 줄어들긴 하지
만 1인당 쌀 소비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다. 쌀이 바로 우리 국민
의 피(혈)와 살(육)과 정신(혼)을 형성해왔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매년 30만~40만명의 이농인구로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권 인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체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부산·인천·대구·광주 등 대도시 역
시 과밀인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농민에 의한 대도시 함락’ 현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농민이야 벼농사를 그만두고 도시로 이주하면 그만이다. 그 순간 도시영세
민으로 전락해 각종 도시·환경·사회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농업문제가 도시문제
로 무대를 바꾸어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그 피해는 도시 주민과
국가와 우리 후손들이 감당할 문제다.
일반적으로 이농에 따른 도시의 사회적 인구 팽창은 도시의 주택문제를 비롯한 상하
수도·교통·환경·문화·교육·복지 시설에 대한 추가 수요를 촉발해 더 많은 사회
비용지출을 초래한다. 특히 극심한 도시공해와 범죄문제, 그리고 환경파괴를 불러들
인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농에 따른 추가적인 도시투자 소요비용은 농촌
에 그대로 살게 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무려 17배나 더 많이 든다. 바꿔 말해 8 수
준에 불과한 현단계의 농업인구가 계속해서 이농할 경우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훨씬 더 큰 비용이 든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쌀로 대표되는 농업·농민·농촌 문제에 대한 범국민적 지지는 역사
적 당위성과 필연성을 가진다. 쌀 농업은 7,000만 우리 겨레와 나라의 성립 및 유
지 발전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농촌·농업
이 황폐해지면 그만큼 환경생태계의 도시 오염처리 용량이 감소한다. 한번 파괴된
농지와 그 환경용량은 그 성능을 다시 복원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안
전한 식품을 공급할 능력도 불가역적으로 훼손당한다.
이렇듯 쌀문제는 단순히 시장경제 원리나 통상정책 차원에서 풀 수 없는 다양한 공
익기능과 관련돼 있다. 환경효과 이외에도 식량안보 문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의 안
전한 식생활 확보, 지역사회 보전과 국토의 균형개발 문제,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
의 계승 발전, 아름다운 녹색경관유지 기능 등을 감안할 때, 벼농사를 지키는 문제
는 고차원의 다원방정식으로 풀어야 할 경세(經世)정책의 대상이다. 당대의 쌀 정책
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더 무서운 영향
을 미친다는 생태환경적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공동기획
·FAO한국협회
후원 : 농림부·농협·농업기반공사· 대산농촌문화재단
농민신문[최종편집 : 200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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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사랑 나라사랑
-〈1부〉 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⑷ 쌀과 주권
‘식량안보’ 국가미래와 직결(누락/보완분)
*이광훈 경향신문 논설고문
-고려대 국문과 졸업
-월간 〈세대〉지 편집장·발행인
-경향신문 편집국장·출판국장·논설주간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이사장
신병훈련소 시절, 교관이 오후 일과를 시작하면서 훈련병들에게 맨 먼저 던지는 질
문은 ‘밥들 다 먹었는가’였다. 훈련병들의 ‘예’라는 우렁찬 대답이 나오면 또
‘얼마나 먹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육군정량을 먹었습니다’라는 모범답안을
듣고서야 비로소 오후 교육이 시작되곤 했다. 이처럼 교관들이 교육을 시작하기 전
에 반드시 식사여부를 챙기는 것은 훈련병들을 잘 먹이는 것이야말로 강군(强軍)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강한 군대는 부대의 전투력이나 기강 못지않게 병사 한사람 한사람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재우는 데서 시작된다. 군량미를 1종으로 분류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의식주 중에서도 병사를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비단 군대뿐만
이 아니라 국가경영도 국민들의 의식주를 얼마나 풍요하게 해주느냐에 따라 성패가
엇갈리게 마련이다.
얼마 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북한정권을 비판하면서 ‘국민을 굶기는 정권’이라
는 표현을 썼다. 국민의 의식주도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하면서 무슨 핵개발이냐는
뜻이 담긴 비아냥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인 장기독재라는 정치적 과오에도 불
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국민들의 가슴 속에 향수(鄕愁)로 살아있는 것은 그가 역사
상 처음으로 국민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는 해마다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겨야 했고 그때마다 신문에는 ‘절량농가’니
‘세궁민’이니 하는 단어가 등장하곤 했다.
일본 식민통치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2년의 우리나라 쌀 생산량은 약 2,500만섬이
었다. 물론 남북한을 합친 생산량이었다. 그 쌀의 절반은 수확하는 즉시 군산·목
포 등의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그러니까 결국 1,000만섬이 조금 넘는
쌀에다 잡곡으로 2,600만명의 국민이 생계를 꾸려나갔다는 얘기다. 남한만의 연간
쌀 생산량이 4,000만섬을 넘나들고 그나마 쌀 소비량이 줄어들면서 정부양곡창고에
‘고미(古米)’니 ‘고고미(古古米)’니 해서 묵은 쌀이 누적되는 요즘과는 격세지
감이 있다.
이처럼 쌀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꾸준히 품종개량을 하고 영농기술을 발
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농촌의 많은 사람들은 통일벼가 처음 보급돼 쌀 수확
을 혁명적으로 늘렸던 때의 감격을 기억하고 있다. 문제는 쌀 생산량은 늘어났는 데
도 식생활이 바뀌면서 쌀 소비량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만 해도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32.4㎏이었다.
1980년대 전반까지 해마다 1㎏씩 줄어들던 쌀 소비량이 198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2
㎏씩 줄어들었고 1990년대에 들어와선 매년 3㎏씩 감소했다. 2000년의 1인당 쌀 소
비량은 1999년보다 3.4㎏이 줄어들어 93.6㎏(농촌 139.9㎏, 비농가 89.2㎏)였다.
쌀 소비량이 이처럼 줄면서 밀을 비롯한 육류, 과일 등의 소비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국민들의 식생활 패턴이 점차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식생활은 물론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쌀의 비중이 낮아지면서 ‘쌀의 가
치’도 그만큼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추세이기도 하다. 고려시
대 이후 쌀은 우리 민족의 주곡(主穀)으로 자리잡았으며 모든 재화와 부를 가늠하
는 기준이자 물가를 측정하는 잣대였다. 토지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연간 쌀 수확량
이 부자의 기준이었다.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그리고
한세대 전까지만 해도 급료의 기준은 쌀이었다.
얼마 전 1950년대에 활동했던 문화 예술인들의 월 수입을 밝힌 자료가 공개되어 화
제가 된 적이 있다. 1955년 당시 가장 수입이 좋았던 문화예술가는 만화 ‘코주부’
로 유명했던 김용환 화백이었다. 김화백의 한달 수입은 10만환으로 쌀 10가마값이었
다. 그 뒤를 이어 소설가 정비석씨와 김래성씨가 쌀 7가마값으로 2위였고 시인 노천
명씨는 쌀 한가마값인 1만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폐가치는 쌀 몇가마에 해당
되느냐로 따지곤 했다.
그러나 국가경제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졌다고 해서 지난 수천년을 이어온
주곡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도령(稻靈)신앙’
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쌀을 주곡으로 삼는 모든 나라들이 그렇듯 우리도 예로부
터 쌀을 단순한 곡식으로 여기기보다는 영혼을 담은 신성한 존재로 섬겨왔다. 새로
태어난 아기와 산모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기원할 때도 삼신상에는 흰 쌀밥과 미역국
을 올렸다. 우리 조상들이 밥풀 하나 쌀 한톨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던 것은 쌀을 겨
레의 혼이 담긴 신성한 곡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동안 쌀 품종이 다양해지고 국민들의 식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쌀 소비량이 줄어들
고 쌀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밥
보다는 빵이나 피자, 햄버거같은 패스트푸드를 즐겨 먹으면서 식생활에서 차지하는
쌀의 비중도 낮아지고 있다. 쌀의 소비패턴도 양(量)에서 질(質) 위주로 바뀌고 있
다. 이젠 각 자치단체에서 고유의 상표를 붙인 쌀을 생산하는가 하면 아예 재배 단
계에서부터 특수한 농법을 쓰는 기능성 쌀까지 나오고 있다.
쌀이 부족해서 잡곡을 먹었던 옛날과는 달리 이젠 건강을 위해서 또는 다이어트를
위해 일부러 잡곡을 찾아먹는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젊은 세대들은 아예 밥보다는
빵이나 피자, 햄버거같은 패스트푸드를 더 즐겨찾고 있다. 쌀이 흔해지면서 집집마
다 쌀가마니와 연탄을 쌓아놓고 일가친척들이 모여 대규모로 김장을 담그던 월동(越
冬)준비도 이젠 사라진 풍경이 되었다. 이에 따라 보릿고개라는 말도 사라졌고 옛날
에는 좀처럼 먹기 힘들었던 고기나 생선, 야채의 소비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국민들
의 의식주가 그만큼 풍요해지고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식생활에서 쌀의 비중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쌀이 가지는 안보적·주권적 의미
까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쌀시장이 개방되면서 외국의 값싼 쌀을 정식으로 수입
할 수 있게 되자 일부 식자들은 상대적으로 생산비가 많이드는 국산쌀을 고집할 게
아니라 우리가 소비하는 쌀을 전량 외국에서 수입해다 먹는것이 경제적으로이득이
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몇년마다 한번씩 닥치는 석유파동에서 보
듯이 자원을 외국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나
라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어도 식량문제를 국가가 깊숙이 개입해서 관리하는 것도 식
량이 가지는 안보적 주권적 중요성 때문이다. 일찍이 농업보호정책을 바꿔 곡물의
수입을 자유화하는 이른바 자유방임적 식량정책을 썻던 영국도 제1차세계대전을 계
기로 농업보호정책에 의한 식량자급정책을 더욱 강화한 적이 있다. 이러한 추세는
기상이변으로 세계적인 식량부족 사태가 올 경우에는 안보상의 이유로 식량의 무기
화를 꾀하는 나라가 늘면서 돈을 주고도 식량을 사지 못하는 사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잘못된 토지정책이나 농업정책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거나
집권세력이 실각하는 경우가 많다. 고려왕조가 이성계 역성(易姓)혁명으로 무너진
것은 토지개혁의 실패 때문이었다. 그런가하면 1956년 구 소련의 말렌코프 수상은
농업정책의 실패로 수상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말렌코프의 농
업정책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후루시초프 제1서기 역시 1964년 농업정책의 실패 때
문에 실각했다는 점이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자유무역협정(FTA)의 확산으로 쌀 수입창구를 언제까지
나 닫아둘 수만 없는 것이 시대적 추세이긴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 쌀, 우리 농산물
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라의 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보릿
고개를 겨우 넘긴 처지에 식량이 남아돌고 쌀 소비가 줄어든다고 해서 우리 겨레가
가꾸어온 쌀에 대한 가치관이나 안보적 의미를 도외시하는 것은 외침의 위협이 줄어
들었다고 해서 국방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쌀이 나라의 주권
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식량을 남에게 의존하는 것은 바로 나라의 주권과 안보를 남
에게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농민신문[최종편집 : 200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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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사랑 나라사랑
-〈1부〉 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⑸ 쌀의 정치경제론
쌀농업, 국민생존을 위한 필수조건
*김성훈 중앙대 교수
-서울대 농업경제학과 졸업
-미국 하와이대 경제학 박사
-우리쌀지키기 범국민대책회의 집행위원장
-농림부장관
-경실련 공동대표(현)
우리나라 쌀문제는 곧 농업·농촌·농민 문제와 직결된다. 쌀정책 여하에 따라 그
사활이 달려있다. 이 땅에 천민 상업자본주의가 물밀듯이 들어오기 이전까지만 해
도 쌀은 우리 겨레의 피요 살이요 혼이었다. 농사는 하늘 아래 땅 위의 가장 근본
이 되는 대업(農者天下之大本)이었으며, 하늘(天時)과 땅(地利)과 사람(人和)의 3재
가 어울려야 나라가 올바로 경영된다는 믿음이 확고하였다.
그러한 우리 농업이 이른바 ‘수출주도의 공업화 전략’이 추진되면서부터 값싼 해
외농산물이 과다하게 도입됐으며, 농촌경제는 만성적인 침체현상에 시달려야 했고
목화·밀·옥수수·잡곡 농사들이 사라져갔다. 그나마 벼농사는 1980년대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쌀 수출물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 간신히 연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될 무렵쯤 미국의 중·단립종 쌀 생산이 크게 늘
어나면서 수출여력이 커짐에 따라 유일한 소비국인 일본과 한국 그리고 일부 중화권
이 큰 표적시장으로 부각됐다. 쌀을 주식으로 삼지 않은 나라들이 자국의 수출용 쌀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태생적으로 쌀을 주식으로 삼아온 국가들에 억지로 수출용
쌀 전량을 떠맡으라고 윽박지른 형상이 다름 아닌 ‘2004 쌀 재협상’이며 도하개발
아젠다 협상인 것이다.
문제는 미국정부를 앞세운 극소수 다국적기업들과 쌀 관련협회 및 국회의원들의 맹
렬한 외교공세는 일찍부터 예상되었던 행태라 하더라도, 정작 이 땅의 생명농업을
감싸 안아야 할 국내 재계와 언론 그리고 일부 정부 지도층들이 목전의 이익에 팔
려 이에 가세, 한국 농업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상업자본의 내
외 호응현상이 우루과이라운드 때는 물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 때 더욱 두드
러지고 있다. 마치 농업부문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걸림돌인양 몰아붙인 이들 매판
세력이야말로 절대다수 국민의 생존권과 후손들의 앞날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미
국과 케언즈그룹들이 세계 식량위기를 극복하려면 농산물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어야
한다는 기상천외의 논리를 주창하면, 이들 국내 주류세력은 맞장구친다. 마치 우루
과이라운드 때의 망령들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이 우리나라의 여론주도층
임은 물을 나위가 없다.
세계에서 단일 쌀농장으로 최대규모였던 현대 서산농장이 국제경쟁을 이겨내지 못하
고 3년전 토지공사에 팔렸다. 인근 농가들에 분양되었던 주변농지마저 목하 농지규
제 완화 바람을 틈타 300평씩 쪼개져 투기상품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도하 각 신문엔 정부의 농지규제완화 방침안을 마치 확정된 계획인양 버젓이 인용하
는 대문짝만한 광고가 연일 지면을 수놓고 있다. 6㏊ 농가 7만호를 육성해 규모화하
겠다고 ‘농정 원년’까지 선포한 정부당국을 빗대어 조롱하듯 호객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바다를 막고 논을 일구느라 들어간 투자비(땅값)와 인건비·자재비 등을 생산비에
반영할 경우 도저히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측의 변명이었다. 그
래서 전용해달라고 로비했었다. 땅값이 우리나라의 10분의 1도 안되는 미국 벼농사
나 땅을 국가로부터 거저 빌리다시피 농사짓는 중국하고는 가격경쟁이 되지 않는다
는 것이다.
실제 토지용역비가 생산비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한국 농업의 특수상황은 규
모화에 의한 국제경쟁력 향상 노력을 무참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소규모 가족농
의 특성을 살린 친환경농법에 의한 품질 및 안전성 면에서의 경쟁력 강화가 중요하
다. 저농지가격·저임금 체계하의 대기업적 쌀 수출공세에 맞서는 전략은 첫째도 둘
째도 품질 및 안전성 확보이며, 가족농의 소득안전망을 보장하는 뒷받침이 중요하
다. 그 다음이 유통 및 가공분야에서의 생산농민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한 추가적인
소득증대 방안이다.
지금 세계 쌀 시장은 우리 국민이 잘 먹지 않는 안남미 계통이 85를 점유하고, 나머
지 15 정도가 중·단립종 자포니카 계통이다. 자포니카 쌀의 연간 세계무역량은 미
국·중국·호주 등 모두 합쳐봐야 200여만t에 불과하다. 인디카 계통의 장립종 쌀
수출량 2,400여만t에 비해 그 10분의 1도 채 안된다. 게다가 자포니카 쌀 생산지역
은 대부분 물 부족현상과 기상조건의 불안정성 때문에 더 이상 증산의 여지가 크지
않다. 특히 중국 역시 급격한 산업화와 고도경제성장의 여파로 최근 경작지가 급격
히 줄어들어 1998년의 9,000만㏊에서 2002년 7,600만㏊에 불과하다. 올해부터 연간
3,000만~5,000만t의 식량을 세계시장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자포니카 쌀만은 아직 동북지역에서 여력이 남아돌아 해외로 수출되고 있지
만 점차 중국 전체의 곡물수급 불균형현상의 영향을 받게 될 전망이다. 그래서 쌀값
은 올해 세계작황과 재고량이 조금 나빠지자 지난해의 1t당 281달러짜리가 그 두배
인 567달러로 치솟았다. 앞으로 우리나라 쌀 농가가 무너져 내릴 경우 어렵지 않게
지금의 다섯배까진 거뜬히 치솟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연간 500만t 이상의 쌀이 있어야 국민수요를 충당할 수 있다. 북
한의 수요까지 감안할 경우 최소한 600만t은 있어야 한다. 쌀 시장이 완전히 개방
될 경우 땅값을 포함한 쌀 생산비가 미국보다 3.2배, 중국보다는 5배 이상이 높은
우리 쌀농가들은 무참히 쓰러질 것이 뻔하다. 이때 세계적으로 수입가능한 중·단립
종 자포니카 쌀, 전량을 우리가 수입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국내 쌀 수요를 메
우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나머지 5분의 3은 안남미로 수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실제 일본과 대만, 한국의 쌀 의무수입량(MMA)을 빼면 앞으로 미국이 추가
로 우리나라에 공급할 수 있는 자포니카 쌀 수출 여력은 기껏해야 30만~40만t이 될
까 말까이다. 또다시 현금을 주고도 원하는 수량을 제때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닥
쳐올지 모른다. 이같은 현상은 1973년 세계식량파동 때와 1980년 흉작 때 이미 경험
한 바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의 증가와 쌀 소비량의 감소로 인해 도시 소비자 가계에
서 쌀값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소비자 한사람이 하루 한끼 식사
에 지출하는 쌀값이 200원이 될까 말까이다. 하루 평균 지출액이 600여원에 불과하
다. 가구당 쌀값이 도시가계에 차지하는 비중은 1.8도 되지 않는다. 이제 쌀은 더
이상 도시 소비자의 노임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임금재가 아니다. 껌 한통값에 불과
한 것이 쌀값이다. 그러나 도시소비자들이 공짜로 누리고 있는 벼농사의 생태환경
적 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아직도 미숙한 논객들만이 벼농사의 국제 비교생산비
론을 들먹이며 장사꾼의 셈법을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는 1994년 우량농지를 보존한다는 허황한 명분 아래 절대농지(65)제도를 폐지하
여 농업진흥지역(48)으로 지정하는 농지법을 개정했고 국토이용관리법을 고쳐 비진
흥지역농지(52)를 몽땅 건교부 소관하에 맡겨 손쉽게 비농업용으로 전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1995년 이후 전국토의 난개발 현상과 토지투기 행위는 상습화되
었다. 어느새 전국의 농경지는 지난 10년 사이 20여만㏊가 콘크리트 바닥으로 바뀌
었다. 양곡자급률은 27로 떨어졌고 쌀 자급률도 97 선에 머물고 있다. 기타곡물의
자급률은 모두 합쳐봐야 5도 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매년 150만~200만t
에 달하는 구조적인 식량부족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도 현재 서울 등 대도시 주변의 농지와 산지 7할 이상은 이미 비농업적 투기
대기자들에 의해 편법·불법으로 소유되고 있다. 이러한 때 도시자본을 농촌에 끌어
들이기 위해 추가적인 농지규제 완화, 그것도 진흥지역마저 풀겠다는 신농지정책은
한마디로 농업포기정책이며 벼농사 죽이기나 다름없다. 논면적 80만㏊면 쌀 자급에
족하다는 어느 연구소의 왜곡 편향된 용역보고서는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도외시한
한반도·한민족의 사활이 달린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이쯤해서 우리는 과연 벼농사가 우리 겨레와 나라의 존립 발전에 있어 최소한의 필
수조건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국민적 합의를 확인해보아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와 세계무역기구(WTO)마저 인정하는 농업의 환경생태학적 공익기능의 중요성
에 비추어 국민적 합의만 이룬다면, 이를 실현·실천할 정책 개발은 비교적 수월한
기술적 사안에 불과하다. 문제는 정부의 쌀 자급정책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지, 이
를 현행 세계무역기구 체제 아래에서 어떻게 관철할 것인가의 방법은 얼마든지 길
이 열려있다. 지금 미국·유럽연합 등 선진국들은 자국의 주요 농축산업을 지키기
위해 국민적 합의 아래 농가 소득 및 재정안정 지원을 최우선적으로 집행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논리는 힉스의 ‘보상의 원리’와 롤스의 ‘격차해소의 원리’
다. 자유시장경제 체제 아래 어떤 정책의 결과, 크게 혜택받는 쪽과 크게 피해를 받
는 쪽이 생기면 공평한 소득분배가 이뤄지도록 정부가 적극 배려해야 한다는 원칙이
다.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 문제야말로 바로 이같은 원칙이 바로 서야 한다. 농
가의 사유재산인 농지전용 억제와 농업의 다양한 공익적 기능에 대한 소득 보상수단
으로서 직불제가 더욱 강화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원 : 농림부·농협·농업기반공사 ·대산농촌문화재단
공동기획
·FAO한국협회
농민신문 [최종편집 : 200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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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사랑 나라사랑
- 〈1부〉 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⑹ 쌀과 민족문화
민족정체성 담긴 전통문화의 ‘핵’
*주강현 한국민속연구소장
-경희대 대학원 문학박사
-경희대 전임강사(현)
-문화관광부 문화재전문위원(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등 민속학 관련 서적 30여권 저술
‘우리 문화 속의 쌀 문화’를 가려내기보다는 ‘우리 문화 속에서 쌀 문화 아닌
것’을 고르는 편이 한결 쉽겠다. 우리 문화 속에서 쌀 문화 아닌 것이 없다는 뜻에
서다. 농경 문화, 농민 문화 같은 말 속에는 쌀 문화의 중요성이 함축돼 있다. 우리
에게 쌀은 단순한 식량 이전에 ‘민족의 문화적 감정’ 같은 가슴 뭉클한 그 무엇
이 아닐까.
쌀이 얼마나 민족적 품격과 정서를 지니고 있는가는 신앙사적인 측면에서 잘 규명된
다. 우리 선조들은 햇곡식을 지으면 가장 잘 생긴 벼이삭을 골라 묶어 기둥이나 대
문위에 걸고 다음해 풍년을 기원했다. 가을 추수 후에는 부루단지나 삼신바가지 등
에 햇곡을 담아 집안 신께 인사드렸다. 아기를 낳으면 삼신바가지의 쌀을 퍼서 밥
을 짓고 짚을 깔고 삼신에게 제를 올린 후에 산모가 먹었다. 생명 탄생의 순간을 삼
신의 쌀로 맞이한 것이다.
마을 공동체 신앙에서 보자면 당산제나 도당제, 골메기 서낭제 등은 두말할 것 없
이 오곡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볏짚으로 왼새끼를 꼬아 벽사하고 줄을 꼬아
암줄, 수줄을 만들어 남녀 줄다리기를 행한다. 남녀간의 성적 유감 주술을 통해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온다’는 믿음은 벼농사의 풍요를 구가하는 공동체 문화의
표상이기도 하다. 민족 신앙에 쌀과 연계된 것이 많음은 그만큼 쌀 문화가 본질적
인 것이라는 말을 의미한다. 어느 민족에게나 신앙이야말로 가장 원형적인 문화를
표징하며, 부루 신앙 같은 곡령 신앙은 상고대 고조선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쌀 문화는 두레 같은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냈다. 논농사는 개인의 노동으로는 해결
될 수 없었다. 물을 확보하기 위한 집단적인 수리관행, 공동의 농지정리나 논농사,
추수 등은 모두 공동체성을 요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레’다. 직파 농법에
서 모내기 농법으로 전화되면서 생산력의 증강이 초래됐다. 조선 후기의 농업 생산
력의 증대는 이앙법의 보급으로 촉진된 것이다. 이앙법은 대신 초벌·두벌·세벌 김
매기 노동을 요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두레 같은 집단 노동체가 필요했으니,
두레의 탄생은 바로 쌀 문화에서 필연적이었다. 영좌·좌상·총각대방 등의 서열을
정하고 공동체적으로 노동하고 함께 휴식을 취하는 전형적인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냈다.
두레는 단순한 노동 조직으로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연희 조직으로도 기능하였으
니 풍물의 탄생이 그것이다. 과거에도 두드리는 악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
나 두레 풍물같이 한몸으로 움직이고 잘 조직된 연행패를 갖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
나 두레 농사의 보급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퍼져 있을 뿐더
러 한국의 전통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풍물이 손꼽히는 것은 그만큼 문
화적 보편성에서 중심체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논농사는 다양한 민요도 창조했
다. 모내기 소리, 논매기 소리, 타작 소리 등 다양한 일 관련 노래를 통해 음주가무
하면서 노동하는 신명의 음악을 창조하였다.
쌀 문화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풍습 가운데 하나로 농경 세시풍속을 꼽을 수 있다.
농사의 시작과 끝은 자연의 순환과 더불어 완결된다. 모든 세시풍속에는 농사짓는
농사력의 순리가 잘 반영돼 있다. 음력으로 정초를 지내면 대보름까지 즐거운 민속
놀이들이 펼쳐진다. 대개의 민속놀이에는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대보름에 볏가릿대를 세웠다가 2월1일에는 이를 쓰러뜨려 풍흉을 점친다.
청명·곡우 등의 절기마다 각각의 논농사를 위해 반드시 준비해야 할 절차가 있다.
조선 후기의 〈농가월령가〉에는 각각의 농부마다 마땅히 절기에 따라 해야할 일과
게으름 펴서는 안될 일을 적시하고 있다.
단오라는 명절이 가능한 것은 단오를 전후해 모내기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정신없
이 모내기를 하고 나서 단오에 잠시 숨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내 세벌 김매
기에 돌입해 눈코 뜰 새 없이 한여름을 보낸다. 두레의 논매기를 통해 민요·풍물
등이 선보이는 철이기도 하다.
칠석이 오면 ‘어정 칠월, 건들 팔월’이라 하여 모처럼 세벌 김매기를 끝낸 가정에
서는 휴식을 취하게 된다. 칠석놀이, 백중놀이 등이 벌어지는데 특히나 백중은 ‘머
슴들의 명절’로 일꾼들이 노는 날이다. ‘농민 해방의 대축제’같은 여름철 휴한기
의 대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추석이란 두말할 것 없이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햇
곡식을 거둬들여 하늘과 조상에게 천신하는 날이다. 시월의 상달고사나 조상들에게
올리는 시제사도 결국은 한해 농사를 마감하고 햇곡으로 천신하면서 인사올렸던 풍
습에서 비롯됐다.
농사가 끝나면 가마니 짜기나 농기구 만들기, 새끼 꼬기, 멍석 짜기 등으로 긴긴 겨
울밤을 보냈다. 이들 농기구의 대부분이 볏짚으로 만들어졌음은 주목할 만하다. 쌀
문화에 창조적이고 유쾌한 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한국사는 기본적으로 쌀을 매개
로 한 투쟁, 즉 농지를 점령한 권력과 민중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
선 후기로 말하자면 지주 전호제에 따른 지주와 소작농의 갈등이 늘 매개됐다. 일제
시대에도 이들 사이의 갈등은 보다 첨예화해 쌀을 생산하는 계급과 이를 착취하는
계급간의 갈등이 지속됐다. 토지를 점유하고 여기서 생산된 쌀을 분배하는 문제에
관한 지주·소작농의 갈등은 한국사에서 매우 오랜 관습이었다. 이에 따라 머슴 풍
습이나 일꾼 풍습 등의 다양한 문화들이 탄생했다. 이들 머슴, 일꾼들이 창조한 문
화가 앞에서 말한 두레 등의 풍습이다.
쌀 문화는 필연적으로 물을 요구했으며, 물을 점유하기 위한 싸움도 흔했다. ‘물
싸움에는 부모 형제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했
다. 가뭄이 지속되면 모를 낼 수가 없었다.
수리 안전답이 부족하고 대부분 하늘만 쳐다보는 봉천지기(천수답)농사를 짓고 있
는 처지에서 가뭄이 들면 기우제라도 지내야 했다. 국가적으로도 기우제를 지냈으
며, 각 지방 관아에서도 지냈다. 마을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다양한 방식의 기우제
를 통하여 비를 기원했다. 여성들이 전면에 나서서 비를 기원하는 풍습도 생겨났
다. 이같이 물을 요구하는 풍습에서 기우제 같은 독특한 쌀 문화가 탄생했다.
흉년이 들면 국가적인 방책이 마련돼야 했다. 의창·사창 등의 창고를 만들어 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웠다. 하지만 이들 제도를 악용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이
들이 많아져서 삼정이 문란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예로부터 중요한 세금은 쌀로
받았다. 그래서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곳곳에 창고를 짓고 배를 건조했다. 세곡
운반선은 멀리 경상도 남쪽으로부터 전라도, 충청도 할 것 없이 전국에서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남한강에도 배를 놓아 세곡을 운반하였다. 세곡 운반은 항로 기술과
배 건조 기술의 발전을 도모했다.
민간에서도 쌀을 매개로 한 금융체계가 발달하였다. 쌀계 같은 계를 비롯해 다양한
금융 시스템이 상부상조하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식리계같이 이윤을 추구하
는 계도 존재하였으며, 장리쌀같이 비싼 이자로 쌀을 가져다 먹고 갚아야 하는 풍습
도 생겨났다. 심지어 적은 쌀을 먹고 높은 이율을 몸으로 때워야 하는 경우도 있었
다.
이처럼 쌀을 매개로 한 문화가 긍정적인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농민의 ‘고난
의 행군’과 함께 한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쌀은 우리 민족과 동고동락하면서 민족 문화의 근간을 이뤄왔으니, 가히 쌀
문화란 한국 문화의 원형질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가 떡을 찔
때, 가장 순백의 백설기를 중시하는 것은 쌀로 빚은 최초의 순수한 결정을 신에게
바치던 풍습에서 기인한다. 지금도 풍물 소리는 한민족 가무의 으뜸으로 세계적으로
도 알려져 있으며, 풍물소리에는 농민들의 희로애락의 유장한 역사가 배어 있는 것
이다.
공동기획 ·FAO한국협회
후원 : 농림부·농협·농업기반공사 ·대산농촌문화재단
농민신문 [최종편집 : 2004-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