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성호 이익을 계승한 실학의 대가다.
1746년 나이 35세 때 안산 첨성촌 성호 가의 성호장으로 이익을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안정복은 중년에 접어든 1757년(나이 46세) 스승에게 ‘순암(順菴)’이라 이름붙인 집의 모양새와
그 뜻을 설명한 다음 그곳에 걸어놓고 죽을 때까지 외우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기문(記文)’과
‘암명(菴銘)’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집의 제도와 모양은 ‘암(菴)’자의 형상에 따라 지었습니다. ‘암(菴)’자를 살펴보면 ‘초(艸)’는 띠풀로 지붕을 이은 것을 뜻하고,
‘일(一)’은 가로지른 대들보를 뜻하고,‘인(人)’은 빙 두른 기둥을 뜻하고, ‘전(电)’은 가운데 기둥 하나를 세우고 네 칸의 방을
이루고 있는 형상입니다.기둥이 두 개이면 여섯 칸이 되고, 기둥이 세 개이면 여덟 칸이 되어 그 쓰임새가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앞쪽의 두 칸은 방으로 만들어 거처하면서 ‘순암(順菴)’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것은 대개 그 글자를 취해 이름을 붙인 것이고,
천하의 모든 일은 오직 순리일 뿐이라는 뜻을 새긴 것입니다.가운데 한 칸은 당(堂)으로 꾸며 일을 보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띠풀로 지붕을 잇고 흙으로 만든 집에서 밭을 갈고 나무를 하고베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시를 외우고 책을 읽고 지냅니다.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당(堂)의 이름을 ‘분의당(分宜堂)’이라고 붙였습니다.
또한 하나의 문을 막아 방으로 꾸미고 이름을 ‘담숙실(湛肅室)’이라고 하였는데, 제사지낼 때 재계(齋戒)하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뒤쪽으로는 세 칸을 넓혀서 기물(器物)을 거두어 저장하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동북쪽의 한 칸은 가묘(家廟)를 봉안하였습니다.선생님께 당기(堂記)와 암명(菴銘)을 얻어 죽을 때까지 마음속으로 외우고 생각할 자료로 삼고자 합니다."
-『순암집』, ‘순암선생연보(順菴先生年譜)’에서-
5월 화요답사 때 찾아갈 순암 안정복의 서재 '이택재(麗澤齋)'이다.
그는 관직에서 은퇴하고 광주시 텃골마을(德谷)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친 곳이다.
'이택(麗澤)'은 〈주역〉에서 유래한 말로, '인접한 두 연못의 물이 물기(水分)를 유지하게 한다는 뜻으로,
벗들이 서로 도와 학문과 덕행을 닦는 일'을 비유한 말이다.
일시:2018년 5월 1일(화) 오전 11시
만나는 곳:지하철 경강선과 신분당선이 만나는 판교역
답사하는 곳:순암 안정복의 생가와 묘역
회비:1만원(밥값)
판교역에서 경강선을 타고 삼동역까지 간다.
삼동역에서 걸어서 15분쯤가면 텃골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입구에 멋들어진 호수가 있고 호수가에는 먹자촌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먹자촌에서 점심을 하고 나면 12시 30분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걸어서 이택재로 이동하여 순암 안정복의 후손으로부터 자세한 안내와 설명을 듣게 된다.
광주 안씨의 600년 세거지 광주 덕곡리 텃골이다. 광주 안씨의 시조는 고려 때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운 안방걸(安邦傑)이다.
입향시조인 그가 정착한 광주 덕곡리 텃골은 태조 왕건에게 받은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준 논밭)이다.
광주 안씨 텃골 안씨는 천곡(泉谷) 안성(安省) 등 청백리 5명을 배출한 대단한 명문가이다.
텃골 안씨들은 조선 전기 개혁적인 사림파로 활동했다. 하지만, 후손들이 갑자사화와 기묘사화로 정치적 시련을 겪기도 했다.
조선중기 문신으로 선조의 매부인 광양군 안황(安滉)이 재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임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호종했다.그는 환도하는 도중에 병으로 순직, 호종공신 2등에 녹훈되면서 불천위 제사를 허락받았다.
인조 때 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제 안응형(安應亨, 1578~1655),조선 후기의 실학자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등을 배출했다.
광주부 경안면 갈마치 영장산 남쪽 산기슭의 의 광주 안씨 선산이다.
사간공 천곡(泉谷) 안성(安省)의 묘이다.
조선조 초에 이름난 승려인 자초선사, 호는 무학이 점찍은 묏자리다.
어느 날 태종이 안성에게 '왜, 공은 죽은 후에 사용할 묏자리는 봐두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안성이 "이미 봐두었습니다"라고 말하자, 태종은 무학대사에게 '그곳에 가서 어떤 자리인지를 알아보라'고 명했다.
무학대사가 현장을 확인하고 나서 "그 묏자리는 나라에서 쓸 묏자리이지, 사가에서 쓸 자리는 아닌듯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태종이 안성에게 "그럼, 그 자리를 날 다오"라고 했다. 이어 무학에게 "내가 받았으니, 대신 안성의 다른 묏자리를 봐줘라"고
명했다.무학이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한 곳을 찾아서 보고했다.
"새로 찾은 자리는 판서 이상 인물은 안 나오고, 천석군도 나오지 않는 자리이고, 나라가 망하면 가문이 망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자리는 좋습니다."
태종이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면 가문은 당연히 망하는 법이니, 그곳으로 정하도록 하라'고 했다.
임금이 신하가 묻힐려고 봐두었던 묏자리를 빼앗은 것이다. 그곳이 지금 태종이 묻혀있는 서울 서초 내곡동 헌인능이다.
무학대사가 대신 안성의 묏자리로 잡아 준 곳이 현재 사간공 안성이 묻혀있는 경기도 광주시 텃골마을 영장산 기슭이라는 이야기다.
천곡(泉谷) 안성(安省, 1351∼1421)은 고려 말 조선초의 문신이다.
그는 태조 1393년에 조선시대 최초의 청백리로 녹선됐다. 태조·정종·태종 등을 섬기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그는 어릴 때 한쪽 눈이 작아서 '소목(少目)'이라 불렸다. 고려 우왕 초 진사시에 합격했을 때 우왕이 이름을 소(少)와 목(目)을
합친 '성(省)'으로 고쳐주었다고 한다.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든가,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고향 함안으로 낙향했다.
안성이 "조상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이고, 나 또한 고려의 신하인데, 어찌 조선의 신하가 될 수 있단 말인가"라며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통곡했다. 주변의 공신과 대신들이 그를 죽이려고 들자 임금이 급히 말리며 "나에게는 역신이나 고려에는 충신이다.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 선비들 중 누가 군주에 충성하겠느냐"고 말렸다.부득이 벼슬에 나간 이후 그는 선정과 덕치를 이루고
청렴을 생활화 했다. 이에 태조 때 조선왕조 처음으로 청백리 제1호로 녹선됐다.
방촌 황희가 안성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몸소 가서 서로 손을 잡고 이별을 고하며 '치자(治者)의 도(道)'를 묻자,
안성이 "우리가 죽은 뒷일은 다만 청렴 '렴(廉)'자 한 자 만을 지킬 뿐"이라고 했다. 이어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으니 마땅히
보답해야 할 것인데'라고 했다. 여기서 그의 청렴함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