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서 주화론과 주전론 사이를 파고 든 겨울추위는 혹독했다.
무능한 정권의 수장 인조는 싸움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농성'만 하다
45일만에 삼전도로 내려왔다. 그것도 청나라 죄수 옷을 입고서.
맨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여진족 대장 홍타이지에게 당한 능욕은 참담 굴욕 그 자체였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바닥에 박는(삼배구고두례) 의식으로 패전국의 예를 갖추었다.
청나라는 전승의 대가로 무려 60만 명에 달하는 백성을 청국으로 끌고 갔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로잡힌 부녀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다.
어찌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1638년 <인조실록>의 사관은 비분강개한다.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다. 억지로 다시 합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전쟁은 굴욕적으로 끝났지만 전후의 상처는 조선 여성들에게 쓰리게 파고들었다.
엄청난 수의 여인들이 오랑케 청으로 볼모로 잡혀가 곤욕을 치렀다.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도 그 사이에 끼어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비어고(備禦考)>에서 “청나라로 간 사람은 60만명이 넘는다”고 기록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의 포로가 된 자가 반이 넘고 각 진영 안에는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나라군이 채찍으로 휘두르며 몰아갔다.”(<연려실기술>)
그렇게 끌려간 사람 중 일부는 몸값을 치르고 조선으로 귀환했다.
사대부들은 이렇게 돌아온 아녀자들을 ‘환향녀(還鄕女)’로 멸시했다.
끝내는 그들에게 죽음을 강요했다.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재가(再嫁)한 여성의 자식들처럼 취급해 관직에 등용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전후에 포로로 끌려가서 당한 일은 재가(再嫁)와는 다른 경우라고
임금을 설득해 그들을 지켜준 인물이 있었으니,그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다.
이경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현실을 망각한 명분보다 인륜을 택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코자 노력했던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641년 전란의 시대를 산 선비답게 국가와 고난을 함께 한 이경석은
이사(貳師)가 되어 청나라의 인질로 잡혀 간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으로 가서 세자를 보필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당시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신축해 심양관(瀋陽館)이라 불렀다.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인조도 청나라와 직접 접촉을 꺼렸으므로 양국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차지였다.
소현세자는 양국의 접점 지역에서 양국의 직접적인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중국 조선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그 대사였던 셈이다.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세자빈 강빈도 소현세자 못지않은 수완가였다.
심양관의 안살림을 맡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했다.
이렇게 생산된 곡식은 심양관 살림에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도 원수인 청인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세자 밑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니,강빈의 이 농업정책은 일거양득의 양책이었다.
강빈은 이렇게 수확한 곡식을 청의 진기한 물건들과 맞바꿔 차액을 남겼다.
또한 조선 사신들이 가져오는 인삼 등을 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심옥이 한번 벌어지면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청 관리들은 막대한 뇌물을 받고서야 못 이기는 체 심옥을 종결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금을 마련한 것은 모두 강빈의 수완이었다.
이들은 심양으로 끌려온 조선백성들 특히 아녀자들을 '속환시장'에서 돈으로 구해서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그 속환정책에 심혈을 쏟았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끌려왔던 심양관.
많은 여성들에게 청에서 구출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다.그들이 바로 환향녀(還鄕女)다.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환향녀(還鄕女)는 온갖 능멸과 고초를 겪었다.
그들은 ‘화냥년’으로 정절을 지키지 못한 부정한 여인으로 멸시와 냉대를 받았다.
그 환향녀에게는 가슴 저미는 한 많은 사연이 참 많다.
환향녀(還鄕女)의 아픔과 한이 절절이 밴 사연이다.
1638년 3월11일 신풍 부원군 장유(張維)가 예조에 단자(單子), 즉 진정서를 보낸다.
“제 외아들(장선징)의 처가 청나라 군에 잡혔다가 속환(贖還·몸값을 주고 귀국)했습니다.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습니다. 이제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때 마침 그와 반대 입장의 상소도 함께 올라왔다.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의 진정서였다.
“제 딸이 청군에 사로잡혔다가 속환됐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합니다. 원통해 못살겠습니다.”
누구는 며느리가 이른바 ‘환향녀’이므로 아들과의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진정서를 올리고,
누구는 사위라는 작자가 환향녀가 된 자기 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겠다니 원통하다고 호소한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예조도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사로잡혀 갔다온 사족의 부녀자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조정의 의논을 거쳐야 피차 난처하지 않을 겁니다.”
공론이 시작됐다. 그러나 좌의정 최명길은 단호한 어조로 ‘이혼 및 재혼 불가론’을 펼쳤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도 진실을 밝히지 못한 여인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렵혔다고 볼 수 있습니까.”
사실 최명길의 주장에는 명백한 근거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도 똑같은 쟁론이 벌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이혼 및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과 견줄 수 없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조야첨재·朝野僉載>)
이같은 선조의 예에 따라 인조 임금도 최명길의 손을 들어주었다.
포로 송환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정상 한계가 있어 백성들은 사비로 포로를 데려와야 했다.
1인당 25~30냥, 비싸게는 150~250냥을 주고 데려 왔다고 한다.
양반가에서는 가족을 하루빨리 데려오기 위해 비싼 가격을 경쟁적으로 제시했다.
포로 가격은 1500냥까지 치솟았다. 당시 농촌의 하루 품삯이 한 냥이었다.
포로 가격이 오르자 가난한 백성들은 잡혀간 가족을 데려 올 수 없어 눈물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가족이 데려오지 못한 포로들은 청의 수도 심양에서 공개 매매가 이루어져 청나라 사람들에게 노예나 첩으로 팔려 갔다.
“청인들이 남녀 인질들을 모아놓으니 수만명이 됐다. 모자가 상봉하고 형제가 서로 만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심양일기>)
인질 1인당 몸값을 천차만별이었다.
양국간 교섭에 따른 1인당 몸값은 은(銀) 25~30냥이었다.실제로는 1인당 100~250냥에 이르렀다.
일부 사대부 집안이 비공식적인 인맥을 통해 자신의 가족들을 빼오려 했기 때문에 몸값이 폭등했다.
영의정 김류가 첩의 딸을 구하기 위해 용골대에게 은 1000냥을 불렀고, 병조의 사령 신성회는 600냥을 냈다.
영중추부사 이성구는 무려 은 1500냥을 지불했다. 이 사건은 큰 물의를 빚었다.
몸값을 높인 죄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조선인 출신의 청국 통역관인 정명수에게 온갖 모욕을 받아가면서까지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것이었다.
“대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똥구멍에서 나온 소리보다 못합니다.”
<병자록> ‘잡기난후사(雜記亂後事)’에 나오는 정명수가 이성구를 모욕하는 대목이다.
그래도 이성구는 이 말을 모욕이라 여기지 않고 졍명수에게 신신당부했다.
“내 아들이 심양에 곧 갈테니 잘 봐달라”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 젊은 여인이 20만 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오랑캐 노비의 자녀를 이르는 <호로자식>으로 천대하는 등 큰 사회적 후유증을 남겼다.
여자의 정절을 중시했던 사대부 양반들은 돌아온 부인을 반기지 않았고 양반들의 이혼 신청이 줄을 이었다.
귀국하는 환향녀들이 홍제천 등 조정이 지명한 이른바 회절강(回節江)에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를 잊게 했다.
그만큼 ‘환향녀’ 문제는 컸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양반들은 이런저런 핑게를 대며 이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무능하여 자신들의 여인을 지키지 못했다.
오히려 여인들이 몸을 더렵혔다는 사실에만 분노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지금의 거사가 종사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인조반정 지휘부가 창덕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광해군의 왕비 유 씨는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렀다.
왕비 유 씨의 독기어린 일갈이 훗날 어떤 미래를 암시하는지 아마도 반정 세력들은 몰랐던 것 같다.
조선이 그토록 섬겼던 천자의 나라 명은 오랑캐 후금에게 밀려 요동을 내주고 수세에 몰렸다.
명은 조선을 이용해 후금을 막아보려고 몸부림쳤지만 광해군의 교묘한 중립으로 묘수를 찾기 어려웠다.
이때 마침 인조반정이 일어나준 것이다. 명은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인조를 이용해 후금을 견제하는 전략에 매진했다.
인조반정 세력에게 즉시 사신을 파견해 체면을 세워주고 왕조를 인정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대신 은과 인삼을 싹쓸이해 명에 바치게 함으로서 나라의 곶간을 바닥까지 긁어냈다. 사람들의 고통과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후 우왕좌왕하던 인조정권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자초해 후손들에게 찢어버리고 싶은 역사를 물려줬다.
인조가 가까스로 이괄의 난을 진압한 뒤 도성에서 민초들이 불렀던 상시가(傷時歌)다.
상시가는 백성들이 고단한 시절을 한탄하는 노래다
아. 너희 훈신들이여
잘난 척 하지 마라
그들의 집에 살고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
그들의 말을 타며
또 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
너희들과 그들이
돌아 보건데 무엇이 다른가.
백헌 이경석은 병자호란 때는 주화파(主和派)로 실리를 추구한 인물이다.
심양에서는 인질로 간 소현세자를 곁에서 지키며 끌려온 백성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열중한 것으로 전한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더욱 민생과 국가재건을 논의할 때마다 군비의 확충과
양병(養兵)보다도 민생회복의 위선을 강조했다. 그 방책으로 균부와 휼민책을 역설 실행토록 하였다.
이경석은 정묘, 병자호란 전후의 어려운 대청외교를 숭명의리(崇明義理)에 바탕을 둔 명분론에만 얽매이지 않고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실리론을 주장하면서 병자호란 이후의 국가보위와
경제회복에 진력하였다. 또한 국정운영에서의 최대 역점을 당색제거에 두고 난후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 자신도 사관한 후 조정에서 정론을 펼 때는 고사하고 공사간에 남과 교류할 때에 조차도 한번도 당론과
당색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