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1980년 서울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창비, 2007.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내 나쁜 몸이 당신을 기억해
온몸이 그릇이 되어 찰랑대는 시간을 담고
껍데기로 앉아서 당신을 그리다가
조그만 부리로 껍질을 깨다가
나는 정오가 되면 노랗게 부화하지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눈을 감아
감은 눈 속으로 현란하게 흘러가는 당신을
낚아! 채서!
내 기다란 속눈썹 위에 당신을 올려놓고 싶어
내가 깜박이면, 깜박이는 순간 당신은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내 이름을 길게 부르며 작아지겠지?
티끌만큼 당신이 작게 보이는 순간에도
내 이름은 긴 여운을 남기며
싱싱하게 파닥일 거야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내 눈은 깜빡깜빡 당신을 부르고
내 기다란 속눈썹 위에는
당신의 발자국이 찍히고
껍질이 있는 생에게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진 어린 남동생은
흐르는 시간에 침을 뱉으며 놀았다
나는 이따금씩 벌에 쏘였지만, 개의치 않았고
빨래를 개다, 엄마의 양말이 너무 작은 것이
다만 마음에 걸렸다
내 주머니 속에는 아침이 되어도 잠들지 못한
고된 별들이 뿌리를 내렸고
분홍빛 알약이 병약한 그들을 돌봤다
나는 걸어다니는 비명,
고여 있는 작은 웅덩이에 들어가 몰래 웅크리고 있다가
사슴이나 먼지, 혹은 껍질이 있는 생에게
시집가고 싶다
동트기 전 길디긴 진통을 겪고
등에 혹 달린 낙타 한 마리 낳고 싶다
가엾은 당신, 내 멍으로, 푸른 멍으로
기르고 싶다
눈을 감고, 기억을 흔들면
그게 언제였는지
당신 입술을 손가락으로 걷던 날
촘촘히 누운 붉은 계곡 길을 걷던 날들
이미 공기는 퍼렇게 죽어버렸고
별들의 비밀통로도 들통나버렸지만
열두 마리 송아지를 낳고 싶었어, 그때
나는 금방이라도 어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지
젖이 돌고, 배는 자꾸 부풀어 올랐으니까
감은 눈으로만 걷고 싶었지
한낮에는 커튼 사이로 숨어들어가
누군가 혹시 숨겨놓았을까, 빨간 리본 따위를 찾기도 했어
아이스크림처럼 녹고 있는, 꼬리가 긴 내 아기
하지만 커튼은 이유도 없이 쉽게 펄럭였고
수시로 내 허연 허벅지가 아무렇게나 드러났어
수치심에 두 볼에선 발톱이 자라났고
조금씩 딱딱해지는 당신 입술, 만발하는 악취
내 머리칼 끝에선 유리조각이 돋아났어
바람이 내 머리칼을 엎지르면
결이 고운 베개들의 순결한 잠에선
후드득 핏방울도 떨어졌지, 아마
발과 자궁
자궁이 보랏빛 노동을 시작했다
나는 갈라터진 한 덩이 마른 밭이 되었다
질 속에서 막 달아난 새끼 낙타의 등이
싱싱하게 흐느끼며 밤을 깨울 때
이 밤을 지나가는 발은 외롭다
꽃이 아름다운 건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일까?
자궁을 떠받든 채 웅크리고 있는
발은 몸의 바닥이다
몸이 누울 때는 저 혼자 수직을 고집하고
몸이 설 때는 저 혼자 수평을 고집하는
발이, 눈부시게 피어난 발이
자꾸만 딱딱해지고
나는, 보랏빛으로 밑을 씻고 잠든다.
시를 쓴다
고요 속에는
개줄에 목이 묶여 기어가는 아버지와
365일 하혈하는 병든 밤과
부지런히 늪을 짓는 거미가 산다
내 눈 속에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시들,
그 꾸물꾸물, 징그럽게 살아 있는 푸른 독으로 거품이 일고
늙은 어둠은 언제나 나를 방관한다
나는 눈멀고 입술이 봉해진 캄캄한 뱀이다
시간은 내 가랑이 사이로 줄곧 빠져나가고
착한 가난이 내 치맛자락을 흔들어대도
나는 멍든 심장을 쥐고 시를 쓴다
시퍼런 독을 짜내 멍을 키운다
생일
파란 장미를 먹고 얼어버렸으면, 생선가시처럼 희미하고 싶다 나뒹구는 밤을 넘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고 싶다 가서 귀 없는 고흐와 몸 섞고 싶다 진하게, 굵게, 뭉개지도록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발가락이 하나 없었으면ㅡ 생리하는 바다에 투신하고 싶다 울렁이는 푸른 죽음들에게 발목 잡히고 싶다 내 깊은 병(病)을 유리병에 꾹꾹 눌러담아 늙은 아버지에게 선물하고 싶다 수수깡처럼 싱겁게 부러지고 싶다 병아리 다리를 붙잡고 울고 싶다 온몸이 흔들리는 촉수가 되어 하늘에 박히고 싶다
얼음을 주세요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을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몸에 흘러와 머물 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나는 이제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2004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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