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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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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흉탄에 돌아간 [저] 자신도…피해자입니다”
-전 한나라당 대표 박*혜
1. 정의와 고통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 특히 위안부 문제 등에 자성(自省)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교과서와 글,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지식인들을 비난하는 데에 쓰여왔고, 또 지금도 쓰인다. 그것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정의는 ‘자유주의사관 연구회’의 이론적 지주인 도쿄대 교수 후지오카 노부가츠(藤岡信勝)가 내린 것으로서 이에 따르면 자학사관이란 “자국민을 인류사에 유례없는 잔학 무도한 인간집단으로 꾸며, 자국사를 악마적 소행의 연속으로 그”리고, “자국에 채찍질하고, 저주하고, 욕하고, 규탄”[1]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학사관을 비판하는 이들은 고통에 반대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고통을 일반화, 상대화할 뿐이다.
우치다 타츠루(內田樹)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일본사회에 대해 쓴 일련의 에세이집들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주목 받고 있는 대중적인 지식인이다. 특히 지난 10월말 한국어로도 번역된 최근작 <하류지향>(2007)은 동경대 구내 서점에서 한 때 판매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2] 하루 평균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그의 개인 블로그(http://blog.tatsuru.com)의 누적 방문자 수는 천만을 넘어선지 오래다.
하지만 타츠루는 사실 현대 유럽, 특히 프랑스 철학 전공자이고, 무엇보다 마사토 고다(合田正人)와 함께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를 일본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장본인이다.[3]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무거운 철학적 저술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다. 타츠루가 2001년에 펴낸 <망설임의 윤리학(ためらいの倫理学)>에는 “정의와 자애”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 글은 종군위안부 문제와- 우리나라에도 몇몇 저서가 번역/소개된 바 있는- 우에노 치즈코, 가토 노리히로, 그리고 타카하시 테츠야 사이의 논쟁에 대한 짧은 논평으로 쓰여진 것이다. 타자의 고통과 이에 대한 주체의 무한책임을 설파하고, 철학보다 윤리가 선행한다고 외쳤던 유대계 철학자의 글을 이미 1980년대 중반에 꼼꼼하게 번역하고 상세한 역주까지 달았던 타츠루는 그러한 윤리적 식견을 가지고 이 글 후반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분명히 당신들은 ‘불의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해 상상력을 종횡으로 발휘해 왔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휘두르는 ‘정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했는지. 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한 적이 과연 있었을까. 당신들의 ‘정의의 논법’에 의해 ‘적’이 된 사람. 당신들에게 ‘프티부르주아 급진주의자’, ‘남성중심주의자’ 또는 ‘근대주의자’라고 지명되어 온 사람(내 얘기지만)의 아픔에 대해서 는 어떨까. (뭐 아무래도 좋지만).”[4]
타카하시 테츠야에 의하면 여기서 “당신들”이라고 호명되는 대상은 소위 ‘자학사관’을 옹호한다고 기술되는 일군의 학자들, 특히 자신과
타츠루의 칼럼은 “올바르지만 불행하고 슬픈 사상보다는, 올바르지 않아도 해피한 사상 쪽이 나는 좋다”는 문장으로 끝나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혹은 우리의 내기는 타츠루가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벤담(혹은 밀)의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는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무지나 오해의 소치가 아니라 그의 철학의 내적 논리를 따를 때 생겨나는 논리적 결론(중 매우 근본적인 것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내파(內破)시킬 만큼의 파괴력을 지닌 것이라는 것이다. [6] 이 짧은 글이 그런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리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환기하면서 그저 지금은, 조용히 묻기로 하자. 도대체,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2. 고통과 공동체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쾌락주의(hedonism)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최대 행복의 원칙(greatest happiness principle)”이라고 불리는 공리주의의 유명한 정식은 여기서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이 주는 즐거움에는 정작 그 정식의 고안자인 벤담(Jeremy Bentham)이 쾌락보다 고통을 더 근원적이라고 보았다는 사실을 위한 자리가 없다. 인간은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벤담이 보기에- 데리다의 표현을 시대착오적으로 적용하면- 더 이상 해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피해야 하는 것, 그것은 고통이다. 고통은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과 즐거움 혹은 행복은 양립 불가능하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고통이 없는 곳에 있는 것이다. 인간과 관련된 옳고 그름, 즉 선과 악, 그리고 인과관계와 같은 문제들은 벤담이 보기에 결국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싫은 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원칙(?)위에 서 있(었)다. “자연은 인간을 고통과 즐거움이라는 두 주권자의 통치 아래 두었다”고 쓰면서 벤담이 염두에 두었던 인간이란 결국 (그렇고)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밀(John Stuart Mill)은 <공리주의 Utilitarianism>에서 이러한 벤담의 가르침을 보다 말쑥하게 다듬어 내놓는다.
“행위는 그것이 행복을 신장시키는 것에 비례해 옳은 것이며 불행을 만들어내는 한 옳지 못하다. 행복이란 즐거움, 즉 고통의 부재를 뜻하며 불행이란 고통, 즉 즐거움의 상실을 뜻한다.”[7]
“쾌락과 고통을 초월하는 진리(Truth)”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만큼 “우스운” 일은 없다[8]고 쓸 때 로티는 바로 이러한 공리주의의 20세기 적자로 자신을 천명했던 것인데,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로티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저술이라고 고백하는 <우연성, 아이러니, 그리고 연대성>의 처음과 끝이 고통에 대한 언급으로 열고 닫힌다는 사실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 받고 계십니까(Are you suffering)?”라고 묻는다. 왜 하필 고통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로티가- 듀이와 함께-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로 꼽았던 밀, 특히 그의 <공리주의>가 Fraser’s Magazine에 연재되었던 것과 같은 해 썼던 <대의정부에 대한 고찰(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을- 조금이라도- 읽어야 한다. 여기서 밀은 대의 정부의 존재와 운용에 필수적인 조건으로 “동료(라는) 감정(fellow-feeling)”을 제시하는데, 이는 그것 없이는 “덕과 지성을 함양한 개인들”이 “자유로운 기관”, 특히 대의정부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동료 감정(fellow-feeling)이 없는 사람들, 특히 서로 다른 언어를 읽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의정부의 운용에 필요한 통일된 공론(united public opinion)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9]
이 구절에서 드러나는 밀은 공동체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순진한 의미의 개인주의자도, 그렇다고 일체의 공동체주의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세계시민주의자(cosmopolitan)도 아닌, “자유주의적 민족/국가주의자(liberal nationalist)”로서의 밀이다[10]. 로티의 (실용주의적) 정치론은 그가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혹은 “인간적 연대”라고 부르는 개념에서 정점에 이르는데, 이 “연대”는 “타자를 [나처럼 혹은 나와 함께] 고통 받는 동료(fellow sufferers)로 여기는 상상력”[11]에, 한 마디로 “공통된 위험(common danger)”[12]에 전적으로 기댄다. 오직 고통만이 연대(solidarity)를 가능케 한다.[13] 보다 노골적으로 로티는 그러한 유토피아란 “자신의 세계가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는 공통의 이기적인 희망(common selfish hope)”을 나누는 것이라고 얘기한다.[14] 이러한 로티의 정의는 다시 “모욕당할 수 있는 존재”란 의미에서(만) “도덕적 주체”로 정의되는 “사람(person)”이라는 개념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재서술(redescription)”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오직 피해자로서만, 우리는 “우리”라는 것, 로티의 유토피아론이 서 있는 궁극의 토대에 새겨져 있는 것은, 바로 이 전언인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미국의 흑인 청년들에 기울이는 관심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도 같은 인류이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강조하는 레비나스 혹은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들이나, 그들의 책에 여전히 혹해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 일부 대학원생들이라면 그렇게 대답했을 지 모른다고 로티는 비아냥댄다.[15] 그러나 자신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볼 때 답은 간단하다. 미국인들은 흑인들이 “자신과 같은 미국인(our fellow Americans)”이기 때문에 돕는다. 이 설명이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더 설득력이 있다”[16]고 그는 말한다. 칸트를 따라 세계시민주의라는 이상(ideal)에 가까이 가려고 애쓰느니 “우리가 가장 후회하는 과거의 부분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일이라는 것이다.[17] 차라리 “솔직하게 자민족중심주의적인 게 낫다”[18]는 그의 유명한 전언은 이렇게 탄생한다.
일반적으로 로티는 “공동체주의자”(communitarian)로 쉽게 구분되지만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 근저에는 사실 “고통”이 놓여있다. 어떤 의미에서 “고통의 철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수 있을 그의 철학적 견해에 대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민족주의를 포함하는 광의의 차원에서 정의되는- 공동체주의와 공리주의의 관계를 재정의할 수 있게 해준다.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민족 공동체를 기본 단위로 하는 집단적 쾌락주의(collective hedonism)이다.[19] 하지만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공동체가 “해방”이 아니라 “관용의 증대와 고통의 감소”[20]를 목표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로티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희망(social hope)”이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3. 공동체의 바깥
그러나 만약 “[당신도] 고통 받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누군가 “예. 바로 당신 나라 때문에요”라고 대답한다면 로티는 뭐라고 대답할까? 이러한 사고실험은 공리주의가 약속하는 “공리(公利)”가 결국 한 나라의- 외적이고 내적인- 국경선[21] 안쪽에서만 분배된다(고 공표된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정의에 내포된 공리주의의 팽창주의는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것이라는 환상을 끊임 없이 제공하는데 그것이 현실화된 것이 다름 아닌 제국주의이다. 문명화의 이익을 함께 공유하길 원하는, 인자하고 자애로운 이미지의 식민주의. 일제식민지 시대에 근대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식민지 근대 사학론”이 물을 대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근대/공리주의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공리주의는…세계에 대한 전체주의적인 개념”[22]이라는 쟈끄-알렝 밀레르의 언급 역시 이렇게 “끊임없고 보편적인 [이익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공리주의의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촌(global village)”이란 어휘는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지구”촌”은 하나의 “촌(락)”이 아니고, 세계”시”민의 터전인 지구는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국경선은 지구표면과 일치하지 않는다. 로티도 지적했듯이 하나의 공동체는 그 팽창의 끝자락에서도, 즉 최대다수가 최대행복을 누릴 때에도 여전히 내부자들만의 것일 뿐이다. 정의상 미국은 인류와 등치 될 수 없다. “인류”란 그 정의상 공동체(community)가 아닌 것이다. 로티철학의 문제는 이에 대한 모든 문제제기를 철학적인 차원에서는 칸트적인 것으로, 문예사조적 차원에서는 낭만주의적인 것으로,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숭고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이라는 슬로건으로 압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공동체”를 폐쇄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그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 로티가 그를 자신과 가장 비슷한 종류의 “자유주의자”로 분류했다는 실상은 잠시 잊고- 하버마스를 보라!) 또 그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보편적인 인권 개념에 근거해 근대적인 계몽적 이성의 힘을 복권시키고 해방의 기획을 다시 불러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보기에 “공동체주의”에는 “정의(Justice)”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티는 묻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가 보기에 정의란 세계시민주의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loyalty)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보다 커다란 공동체, 그러나 인류는 아닌, 다시 말해 지금의 것보다는 큰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일 뿐이다.[23] 다시 말하지만 이는 인류라는 공동체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삼는 것인데, 그것의 궁극적인 함의란 결국 보편적이고 완벽한 정의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는 오히려 정의(Justice)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끊임없이 “재서술”하고 고통을 경감시키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 로티의 견해이다. (그런 의미에서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그의 철학을 실천한, 진정한 의미에서 실용주의적인 한국의 로티주의자는 “자신도 희생자”라고 외쳤던 박*혜 대표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서라도 “인류”의 고결한 보편성을 지키겠다는 이들이 또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싸움이 힘든 것은 그러나 “인류”라는 대상이 너무 크거나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상대가 조지 W. 부시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Civilization)을 위협하는 “악의 축”의 “괴수”로 사형당한 사담 후세인의 죄목은 “반인류범죄”(crime against humanity)였다. 침해 받는 “인류”의 “권리” 보호를 적극적으로 옹호/장려하는 21세기의 “도덕적 제국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성과 도덕의 내파를 가장 스펙타클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미국과) 로티의 독창적 업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반복에 가까운 것이다.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기도 했던 “똘레랑스”라는 표현을 예로 들어보자. 그 표현의 좌파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똘레랑스”는 “제국주의”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란 “똘레랑스”를 만들어내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용인(tolerate)”하는 체제이다. 선구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을 옹호하고 사회주의를 역사의 대세로 여겨 지지까지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 자신이 근무했던 동인도회사의 사업을 밀이 모순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그의 사회주의 이해가 얕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차이를 용인(tolerate)하는 것, 즉 “똘레랑스”로서의 문명의 가치를 그 어떤 것보다도 위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동인도회사는, 폭정에 신음하며 아직 법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비문명화된 사람(people)들을 위해 때로는 물리적인 힘을 통해서라도 “강제(impose)”될 수 있는 지고의 가치, 즉 “똘레랑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1]
[2] 책을 읽은 한 일본 작가가 “일본은 20년 내에 쓸모 없어지게 된다”고 탄식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젊은이들이여 서로 폐를 끼쳐라!” <조선일보>
[3] 레비나스의 일본 수용사와 그 현황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Yasuhiko Murakami et Mao Naka, « Dans une culture sans Dieu. Lévinas au Japon », Cahiers d’études lévinassiennes, n°4, 2005, p. 409-438. 참고로 타츠루는 지젝이 편집한 <당신이 히치콕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 그러나 라깡에게 묻기를 두려워했던 것>(1992)을 지난 2005년 일어로 공역했고, 몇 권의 독자적인 영화 이론/철학서를 내기도 했다.
[5]
[6] 물론 레비나스주의자라면 이는 분명한 오해라고 목소리를 높였겠지만 다시 얘기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미 상당부분 쓰여진 상태인데, 다른 기회를 빌어 소개할 예정이다.
[7] John Stuart Mill, Utilitarianism, 2nd edition, ed. and Introduction by George Sher (
[8] Richard Rorty, Essays on Heidegger and other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9] Collected Works of John Stuart Mill Vol. XIX: Essays on Politics and Society Part II (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ed. John M. Robson, Introduction by Alexander Brady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77); John Skorupski, Why Read Mill Today? (
[10] Why Real Mill Today?.
[11] Richard Rorty,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 (Cambridge, New York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12] CIS.
[13] CIS. “내가 얘기하는 유토피아에서의 인간적 연대(human solidarity)는…[철학적] 탐구나 [추상적인] 상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함께 고통 받는 이들(fellow sufferers)로 볼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CIS.
[14] CIS.
[15]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ed. Chantal Mouffe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6).
[16] CIS.
[17] Richard Rorty, “Response to Jürgen Habermas,” in Rorty and His Critics, ed. Robert B. Brandom (Blackwell, 2000).
[18] Essays on Heidegger and Others.
[19] Slavoj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을 참조하라.
[20] Richard Rorty, Objectivity, Relativism, and Truth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21] ‘내적 국경(innere Grenze)’이라는 표현은 물론 피히테의 것이다. 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해서는 발리바르의 논문이 필수적이다. Etienne Balibar, “Fichte and the Internal Border: On Addresses to the German Nation,” in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trans. James Swenson (New York: Routledge, 1994). 내적 국경과 시민권의 관계를 재일 한국/조선인들의 상황에 적용한 것으로는 다음을 보라.
[22] Jacques-Alain Miller, “Jeremy Bentham’s Panoptic Device,” trans. Richard Miller, October 41 (Summer 1987).
[23] Richard Rorty, “Justice as a Larger Loyalty,” in Richard Rorty: Critical Dialogues, eds. Matthew Festenstein and Simon Thompson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윤리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공리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ahjabie님과 '멀지 않아서' '저에게는' 다행이군요.
한살림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만, 공리주의에 대해 저와 님의 생각이 만들어내는 공명이 저에게 역시 다행이지 않을 이유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 저희의 생각이 여기에 머무르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 말이 단순한 수사가 아닌 것은 저희가- 아마도 '따로 또 같이'- 갈 길이 멀기 때문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악트>에 기고한- 일종의 '서론'격으로 쓰여진- 글에 이어지는 '본문'에 입성하는 몇 가지 출입구 중 하나입니다. 그런 시작의 발걸음으로 올해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화요논평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제게 숨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어떤 글은 읽다보면, 다른 생각은 전혀 못하고 쓰는이의 생각에만 동조되어 따라가는 글이 있는데, 위 글도 제게는 그렇네요. 읽는 지금으로는요.^^비교될 수 없는 걸 고통이란 이름으로 같이 비교되는 사태를 조우하게 하는 걸 시작으로, 고통없는 상태인 쾌락을 향해가는 공리주의, 피해자로서 우리, 공동체(밖)으로 시선을 이끌고 간 아자비 님 사유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로티는 공동체의 외연이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폭주기관차/ 발자크의 단편 <사라진느>를 미세하게 쪼개 놓았던 <S/Z>에서 바르트는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것(le texte lisible/readerly text)"과 "쓸 수 있는 것(le texte scriptible/writerly text)"의 두 가지 종류로 나눈 적이 있습니다. 후에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푼크툼(punctum)의 대립으로 다시 등장하는 이 짝패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관례적인 독해/논리의 계열(series)과는 다른 궤적을 만들어내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그 중 하나입니다. "다른 생각은 전혀 못하고 쓰는 이의 생각에만 동조되어 따라가는 글"로 묘사된 저의 글은 그렇다면 그 둘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요?
바르트의 대립을 '열린 것'과 '닫힌 것'이라는- 제임슨의 냉소적인 표현을 빌면- 서방의 자유민주사회와 동구의 전체주의사회라는 냉전시대적인 대립으로 이해한다면 제 글은 "파시즘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고발"되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빠가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말썽꾸러기 훈이가 아빠말을 저렇게 잘 듣게 된 것일까요라는 삼성광고의 "열린" 질문이 잘 보여주듯 다양한 가능성이 "독점"적으로 전경화되는 이 시대란 사실 버젼업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란 이래도좋고 저래도 좋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단호한 결정이 촉구하는 "상황"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니까요.
(아, 혹시나하는 기우에서 덧붙이면, 폭주님께서 저보고 "파시스트다!"라고 그러셨다는 게 아니라, 덕분에 이런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정도입니다 ^^) 김상현님/ 일대일 관계(?) 속에서는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짧게 대답드리면 그렇습니다. 특히 미국의 외연이 그렇지요. 원래 어디에서 태어났건 원칙적으로는 누구든 미국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미국 때문에 고통받고 있소"라는 말에 로티가 할 수 있는 대답도 그것입니다. "이민오세요." 다시 말해 "미국인이 되세요." 모든 공동체의 외연은 이론적으로 확대될 수 있고 또 그러는 게 좋지만, 제가 지적한 공동체들 사이의 역학 속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역할을 "필요악"으로 보는 로티의 입장에서 볼 때 "실용주의적"으로 외연의 확장을 권장할만한 공동체란 결국, 미국 뿐인 것이지요. 미국이 싫다면 할 수 없지만, 좋게 말할 때, 그 밖에 있는 것보다는 그 안에 들어오는 게 당신에게도 "실용주의적"일 것이라는 게 로티의 "철학"이 함축하는 메시지입니다...(물론 한국의 "로티주의자들"이 제공하는 "읽을 수 있는" 소개글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다만 로티정도의 철학자에게 그토록 명백해 보이는 이론적 결함이 있다는 게 잘 이해되지는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