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퀴즈로 시작하자. '조방 앞' '고관 입구' '교통부 사거리'의 공통점은? 그 뜻이나 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더라도 부산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음직한 것들이다. 먼저 조방(朝紡)은 조선방직주식회사의 줄임말로, 1917년 일제강점기 부산 동구 범일동 일대에 8만 평의 규모로 설립된 조선 최대의 근대적 면방직 공장을 일컫는다. 조방은 1968년 철거되어 현재 그 모습을 눈으로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건물이 있던 일대(현 평화시장, 자유시장, 현대백화점 부산점, 부산은행 본점)를 부르는 '조방 앞'이나 조방낙지, 조방돼지국밥 같은 음식점 상호로 여전히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불리고 있다.
'고관 입구'와 '교통부 사거리'도 이와 유사하다. 1607년 조선은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두모포(현 부산 동구청과 수정시장 일대)에 왜관을 설치했다. 이후 늘어나는 물자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좁았던 부지와 대형 무역선이 정박하기 어려웠던 지리적 문제 때문에 초량왜관(현 용두산 공원 주변)으로 이관했고, 두모포 왜관은 고관(古館) 또는 구관(舊館)으로 불리다 고관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고관의 건물은 문자 그대로 구관이 되었지만 '고관 입구'라는 이름은 여전히 버스 정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구에 한때 극장 많았던 이유 뭘까
피란민·공장노동자 대거 유입 때문
조선방직·삼화고무 등 경공업 요람지
'노동의 공장'서 보낸 고단한 하루
'꿈의 공장'인 극장서 스트레스 해소
70년대 후반부터 섬유산업 쇠퇴
노동자들 떠나며 극장도 사양길 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에 임시수도가 들어섰을 때 지금의 범천동과 범일동의 경계인 범곡 교차로 부근에 교통부 청사가 자리했다. 올해로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났어도 그 상흔은 고스란히 남아 있듯이, 사람들에겐 여전히 '교통부 사거리'라는 명칭이 입과 귀에 익다. 이렇듯 부산 동구에 있었던 조방, 고관, 교통부의 모습은 세상에서 고개를 돌린 지 오래지만 그 이름만은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여전히 건재하다.
■동구, 중구에서 해운대구로의 이행기 부산 동구의 보림극장도 이와 마찬가지다. 교통부 사거리를 지나는 버스를 타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보림극장이라는 이름은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봐도 극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고관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고관으로 갈 수 없는 것처럼, 보림극장 정류소에서 내려도 더 이상 영화를 볼 수는 없다. 보림극장은 이제 인근의 버스 정류소 이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고, 극장의 건물은 현재 마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장은 사라졌지만 극장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나의 사물이 그 형체와 기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호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중요함을 반증한다. 조방, 교통부, 고관이라는 한국사의 주요한 상징물들이 여전히 이름 불리고 있듯이, 보림극장이라는 명칭도 부산영화의 역사지도에서 하나의 좌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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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현재 대형마트로 활용되고 있는 보림극장 모습. 부산일보 DB |
동구는 중구에서 해운대구로 이동하는 부산영화사의 이행기를 차지한다.
동구의 극장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활동사진 상설관인 초량좌(초량동, 1914~1917년)를 시작으로 유락관(좌천동, 1921~1932년), 대생좌(초량동, 이후 중앙극장으로 개명, 1930~1980년), 대화관(수정동, 이후 동서극장으로 개명, 1942~1981년)이 세워졌고 광복을 전후로 조일영화극장(범일동, 이후 삼일극장으로 개명, 1944~2006년), 수정극장(수정동, 1957~1971년), 대도극장(초량동, 1958~1978년), 초량극장(초량동, 1958~1971년), 삼성극장(범일동, 1959~2011년), 천보극장(초량동, 1960~1979년), 보림극장(범일동, 1955~1968년에 범일동으로 이전~2007) 등이 자리 잡았다. 1910년대부터 들어선 동구의 극장은 1940~1950년대에 그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고, 1960년대에 부흥기를 맞이한다.
지금은 번화가도 아니고 유동인구도 많이 없는 동구에 이렇게 많은 극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피란민과 공장노동자가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에서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 크게 발달했었다. 동구 일대의 경공업 공장인 조선방직주식회사, 삼화고무(1934~1992년), 국제고무(1953~1990년) 등의 노동자들은 범일·좌천·수정동 일대 산복도로에 대규모로 거주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노동의 공장'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낸 뒤에 '꿈의 공장'인 극장에 우르르 찾아 들어갔다. 1952년 16살 나이로 삼일극장에서 일한 영사기사 최상도 씨는 "공장 퇴근시간이면 극장이 미어터질 듯 만원이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부산일보 2007년 1월 27일자 보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된 일상을 가려 주는 어두컴컴한 극장 좌석에 앉아 웃고 떠들며 잠시나마 즐거워했을 것이다. 극장을 나온 사람들은 교통부 교차로에 있는 돼지국밥집에서 주린 배를 달랬다. 1956년 개업해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할매국밥'은 동구의 역사를 뜨거운 국밥 한 그릇에 담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노포(老鋪)이다.
1970년대 TV가 대중화되고, 한국영화계가 심각한 불황과 제작 침체에 빠지자 극장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된다. 동구의 극장들은 이것 말고도 또 다른 문제에도 직면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고정 관객층의 이탈이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섬유 산업의 쇠퇴로 동구 일대의 공장 노동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가고, 급기야 공장들도 폐업을 하거나 도시 외곽으로 이전한다. 또 부산진구 서면이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2000년대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시대가 시작되며 관객의 이탈은 가속화되었다. 동구 극장들 중 그나마 운영을 계속하던 삼일극장, 삼성극장, 보림극장은 1970~1980년대 단체 관람관과 쇼 극장으로 변화를 시도한다. 구봉서, 배삼룡, 하춘화, 남진, 나훈아 등 당대 인기스타들의 공연을 개최해 짧은 부흥기를 맞이하지만 곧 이본동시 상영관으로 바뀐다.
2000년대까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삼일·삼성·보림극장은 이후 차례로 문을 닫게 된다. 삼일극장은 2006년 범일동 철길 건널목 입체교차로 공사를 위해, 삼성극장은 2011년 도로확장공사로 철거되었다. 보림극장은 여러 업종으로 바뀌다가 지금은 마트로 사용되고 있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년)와 전계수 감독의 '삼거리 극장'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삼일극장은 나운규의 생애를 그린 최무룡 감독의 '나운규의 일생'(1966년)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최무룡은 일제 강점기 시기 단성사와 모습이 비슷했던 삼일극장을 단성사처럼 꾸미고 나운규의 장례식 장면을 촬영했다. 청년 나운규는 중구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영화 속 삼일극장 앞에서의 그의 장례식 장면은 중구에서 이어 온 동구 영화역사의 종언을 애도하는 듯 보인다.
■사라져 가는 것의 목소리를 듣고 이제 보림극장 건물을 제외하면 동구 일대에 영화관이 있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때 거기'에는 있었지만 '지금 여기'에는 없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것들을 그냥 과거의 추억으로 떠올려야만 할까? 김지곤 감독의 '낯선 꿈들'(2008년)과 '오후 3시'(2009년)는 각각 삼일극장과 삼성극장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를 담은 단편 다큐멘터리이다. '낯선 꿈들'의 마지막 장면은 삼일극장이 사라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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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곤 감독의 독립영화 '낯선 꿈들'에서 삼일극장은 바삐 지나는 자동차 불빛 뒤에서 극적으로 사라진다. 영화 장면 캡쳐 |
늦은 저녁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들리고 화면에는 삼일극장과 그 왼쪽으로 삼성극장 그리고 한성기린아파트가 보인다. 그러다 자동차들의 소리는 극장에서 울려 퍼졌을 영화의 사운드로 바뀌고, 삼일극장은 서서히 옅어져 사라지고 그 자리엔 공터만 남아 있다. 여전히 한성기린아파트와 삼성극장은 화면의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삼일극장은 사라지고 그 소리만 울려 퍼진다. 마치 삼일극장의 마지막 비명과도 같이 들린다. 이 소리는 또 어디로 이어져 울리게 될까?
삼일·삼성·보림극장 뒷쪽 산복도로에는 지금 르네상스 사업과 마을 만들기가 한창이다. 산복도로에는 부산시의 재개발 사업과 무관하게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다. 김지곤은 재개발로 인해 자신들의 터전을 떠나는 할머니들을 다룬 '할매-시멘트 정원' 개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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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곤 감독의 독립영화 '낯선 꿈들'에서 삼일극장은 바삐 지나는 자동차 불빛 뒤에서 극적으로 사라진다. 영화 장면 캡쳐 |
영화는 단순히 오락과 산업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지도 그리기'는 과거의 기억과 흔적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사라져 간 것들의 목소리를 되찾고 이곳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기도 하다.
김기만 부산대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sguerrilla@naver.com
후원:부산영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