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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의 DNA-1
송기태 선교사
선교적 DNA의 인식
DNA는 생명체가 계속해서 재생산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에 생명체 내에 DNA가 존재하지 않거나 왜곡된다면 자연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동일한 원리로 교회 공동체 내에도 이러한 DNA가존재한다. 모든 교회에서 성령, 예배, 봉사, 선교 등이 이러한 DNA로서 작용하고 있다. 선교적 교회가 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DNA는 분명히 있다. 오늘날 세계 선교에 있어서 핵심 역량을 발휘해야 할 교회들 대부분이 선교적 교회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교회 내에 이러한 선교적 DNA가 존재하지 않거나 활성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분명히 안디옥 교회는 선교적 DNA가 있었던 교회였다. 아니 예루살렘 교회에도 선교적 DNA는 있었다. 차이가 있었다면 안디옥 교회는 그 DNA를 인식했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전통에 갇혀서 그 DNA를 발견하지 못했고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세계 선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안디옥 교회로부터 선교적인 DNA를 배워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비선교적 DNA
이스라엘 지역에 있었던 교회는 아직도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던 ‘유대교적 기독교’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행 21:20).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교회에는 이방인들이 합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우리는 할례의 문제가 구원에 결정적인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2000년 후의 관점으로 봄으로 별 어려움이 없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이스라엘 지역에 개척된 교회들은 기독교가 범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데 상당한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한국 교회에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는 한인들에 의해 해외에 개척된 교회들조차 교회 이름에 대부분 ‘한인교회’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는 한민족이 아닌 사람들은 이 교회에 올 수 없다, 내지는 오지 않은 것이 좋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론적으로 맞지 않는 개념이다.
이런 개념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위배된다. 교회는 모든 사회계층을 포함하며 모든 민족을 구원으로 이끌어야 하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곳이다. 교회가 한 민족을 위한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만을 위한 교회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될 것이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교회론 때문에 교회에 선교적 DNA가 형성되기 어려운 것이다. 교회가 내부에 선교적 DNA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결코 외적인 선교적 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이면서 지금은 기독교에서 별로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예루살렘 교회의 비성경적이며 비선교적 교회론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안디옥 교회의 선교적 DNA
안디옥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이방 지역에 세워진 교회였다. 더더욱 의미가 깊은 것은 이 교회가 요즘의 선교 신학에서 말하는 토착적 자생교회(Indigenous Church)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로 자치, 자전, 자립 했던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는 그 근본 구성부터가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랐다.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인구는 50여만 명으로 각 나라에서 온 다민족 도시였다. 누가는 안디옥 교회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교회임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엔과 및 사울이라.”(행 13:1).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이었고 검다는 뜻을 지닌 니게르(시므온)는 아프리카 출신인 것으로 보이며 구레네의 루기오는 북아프리카 출신이었다. 마나엔은 헤롯의 형제였고 바울은 다소 출신이었다. 안디옥 교회는 분명 다민족 지도자들과 성도들로 구성된 다민족 교회였다. 사실 이러한 다민족 교회는 안디옥 교회만이 아니라 바울이 개척한 대부분의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다민족 교회였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교회들을 향한 서신에서 하나 됨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롬 1:16; 엡 2:18; 골 3:11) 안디옥 교회는 교회 안에 선교적 DNA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선교는 민족을 뛰어넘어서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한계는 민족을 넘어서는 나누지도 않고 함께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아무 대가없이 민족과 민족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한다. 안디옥 교회는 다민족이 하나가 됨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했던 안디옥의 시민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존경과 감탄의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안디옥 시민들이 기독교의 교리 자체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민족을 뛰어넘어 사랑하는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의 삶을 일반 사회에서 인정했기 때문이다. 선교는 단일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타문화의 코드가 익숙하게 되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2 - 사도적 교회
송기태 선교사
교회의 사도성의 회복
주님의 교회는 네 가지특성인 거룩성, 보편성, 유일성, 사도성이 전통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 교회의 사도성은 대표적으로 소외되어온 교회론의 요소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밝히고 있다 (엡 2:20). 이는 하워드 스나이더가 말하는 것처럼 교회의 본질 중에 사도성과 이에 대한 예언성이 분명히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사도성은 ‘보내심을 받은 교회’로서의 특성을 말할 수 있다. 또한 보내심에는 그 특별한 목적과 그에 따른 활동들이 뒤 따르게 된다. 교회의 특징인 거룩성, 보편성, 유일성 등이 교회의 정적이고 내적인 특성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사도성은 교회의 외부를 향한 활동적인 특성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의 사도성이 약화되면 교회가 사회 공동체(Social Community)에 대한 관심과 활동도 당연히 줄어들게 된다.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졌던 초대교회는 분명히 이러한 교회의 사도성이 활발히 나타났었다. 21세기의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사도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현대 교회의 구조
개신교는 종교 개혁 이후에도 가톨릭교회에서 몇 가지의 구원교리를 새롭게 했지만 그 형태는 대부분 지속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구조이다. 사도적인 교회론과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현대 교회가 목사 중심의 교회 구조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 중심의 교회는 목양 중심의 교회로 나타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에베소서에서는 교회의 대표적인 은사를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로 열거하고 있다 (엡4:11).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은사가 다 발휘될 때 교회가 온전해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엡 4:12, 13). 현대 교회에 사도적 특징이 약화된 이유 중 결정적인 것이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다른 세 가지 형태의 은사자들의 활동이 저조할 수 밖에 없는 구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성 회복을 위한 구조
교회의 사도성 회복을 위해서는 사도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특별히 교회의 선교 위원회는 사도성을 발휘하기 위한 적절한 구조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부서들이 교회 내부의 활동을 위한 부서이지만 선교 위원회는 교회바깥의 커뮤니티를 위한 부서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교회에 사도적 은사를 가진 은사자가 이러한 선교 위원회를 운영하면 좋을 것이다. 전도의 은사자들과 함께 국내 선교와 해외 선교를 함께 운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선교 위원회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Key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교회의 부흥은 커뮤니티를 향한 활동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위원회는 지역 사회와 미복음화된 세계를 향한 부흥의 배출구와도 같다.
사도적 교회의 활성화
사도적 교회는 양방향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국내의 교회들이 사도적 교회로서 내부의 시스템을 보완하는 리엔지니어링측면이 하나이며 선교 현장에서 개척되는 교회들도 처음부터 사도적인 교회를 염두에 두고 그 DNA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성도들의 제자화는 필수적이다. 옥한흠 목사가 역설하는 것처럼 제자화는 교회의 사도성을 반영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국내의 교회들이 사도성을 회복하고 사도적인 구조를 가질 때 이러한 교회들이 선교적 교회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해외에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되는 교회들은 더더욱 사도적 본질과 기능을 발휘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회들은 국내에서 리모델링되는 교회들보다 훨씬 더 선교적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많다. 이미 선교계에서는 해외 선교사들만의 역량만으로는 세계 선교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국인 선교사 개발 운동을 펼치고 있다. 선교지에 사도적 교회를 세운다는 것도 이러한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 보다 더 강력하게 선교지에서 자생적 교회가 또 다른 자생적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개척 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결론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한국 선교사들은 질적인 면이나 그 활동적인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은 결국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나 질적인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교회가 계속해서 해가지지 않는 선교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본국의 교회들이 사도적 기능을 보강하는 선교적 교회로 발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당회만큼이나 중요성을 갖는 선교 위원회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또한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사도적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 개척한 교회를 현지 지도력에 이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들의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어서 더 많은 교회 개척과 미전도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선교적 교회로까지 만들어야 한다. 사도성이 왕성하게 나타나는 교회! 21세기에 세계선교를 완성하기 위한 가슴 벅찬 비전이 될 것이다.
선교적교회3-글로벌 교회
송기태 선교사
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제는 교회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며 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선포한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마 4:1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계속해서 가르치셨으며 심지어는 부활 이후에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도 이 개념을 가르치셨다 (행 1:3).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으며 그 완성을 위한 임무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 (Agent)라고 한다. 이 대리자에게 맡겨진 임무(Missions)는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케 하는 일이다 (고후 5:19-21).
글로벌 교회
보편적 교회(The Catholic Church) 혹은 우주적인 교회(The Universal Church)는 지역 교회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온 세상의 밭을 바라보게 한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 (Agent)이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Missional)이다. 지역 교회가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제사장 나라로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출 19:5,6). 이 부르심은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부여된 것이며 신약에 와서는 그 임무가 교회로 전가되며 발전되었다 (벧전 2:9). 신약의 교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것처럼 ‘모든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막 11:17). 따라서 지역 교회는 본질적으로 글로벌(Global)한 DNA를 가지고 있다.
글로벌 교회의 오는 선교
이런 점에서 교회는 그 자체가 글로벌 교회가 되어야 한다. 글로벌 교회는 지역에 존재하지만 그 구성원들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는다. 글로벌 기업이 상품 판매에 민족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모든 민족이 구원받게 하는 예배가 있는 곳이 글로벌 교회이다. 이 교회는 국수주의적인 교회(Ethno-Centric Church)의 배타성을 벗어버린 교회이다. 국내에 있는 타민족을 교회로 오게 하려는 의지가 없으면서 어떻게 해외에 온전한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 가능한가? 한국 사회에서 190개국에서 온 외국인의 숫자가 100만을 향해서 치닫고 있다. 또한 국제결혼이 11.9%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 한국에서는 쉽게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언어와 의료의 필요 때문에 교회를 스스로 찾아오기까지 한다. 이러한 기회를 저버린다면 교회가 갖는 보편성은 그 본질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해외의 디아스포라의 교회들은 더 많은 미전도 종족들과 접촉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주님께서는 한국 내에 있는 교회들과 디아스포라 교회들에게 공히 글로벌 교회로서의 초청을 하고 계신 것이다.
글로벌 교회의 가는 선교
글로벌 교회는 마땅히 가는 선교에도 힘을 기울인다. 왜냐하면 미전도 종족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 28:19). 가는 선교는 오는 선교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에너지와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들이 가는 선교를 하기 전에 오는 선교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업이 내수 시장을 먼저 경험하고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는 원리와도 같다. 그러나 가는 선교에서 전략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집중화의 원리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민족에 집중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도 열매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한 교회가 한 민족에 10년 정도를 집중한다면 분명히 교회 개척과 지역사회 변혁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도 국내에서 오는 선교를 통하여 그 미전도 종족들의 개인적인 변화와 그들의 공동체 (Community) 변화를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교회의 가는 선교는 지역 교회에서 경험하는 민족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총체적 선교가 연장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글로벌 교회는 국내에서 해외 선교를 위한 대부분의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교사들이 선교 전략을 새롭게 연구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역 교회가 이런 타문화 사역의 경험이 아주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글로벌 교회는 분명히 본질적이며 선교적이며 전략적이다.
결론
한국 선교사의 파송 숫자가 세계 제 2위가 되면서 그 역할과 책임에 대한 부담이 커지고 있으며 또한 선교 전략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눈을 들어서 지역 교회의 선교적 요소와 기회를 살핀다면 ‘전방 개척 선교’에 대한 보다 더 명확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는 선교의 전후방이 따로 없는 글로벌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로벌 시대 (Global Village Era)에 글로벌 교회에 대한 도전은 아주 시기적절한 주님의 계시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 근처에 있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추수할 밭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같이 이미 미전도 종족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시대적 선교를 감당하기 위해서 오늘날 지역 교회가 글로벌 교회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갖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러한 글로벌 교회는 한 개의 미전도 종족을 위한 예배와 공동체를 교회 안에 신설할 것이며 그의 연장선으로 그들의 민족들이 살고 있는 고향에 그들을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