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4일 일정으로 서안(西安)에 있는 화산(華山)과 태백산(太白山) 트레킹을 떠난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중국 5악의 한 곳인 화산에 올라 절경을 둘러보고 내년 초 아내와 계획중인 키나발루 등정에 앞서 3,767m의 태백산을 오르면서 고소적응을 하며 몸상태도 테스트 해보기 위해서다.
인천공항을 9시 15분에 이륙한 OZ 319 아시아나 항공기는 정확하게 세 시간 삼십 분 만에 시안(西安)에 도착하니 잿빛 구름이 하늘을 반 쯤 가리고 있는 상태인데 그나마 오늘은 서안날씨 치고는 좋은 날에 속하며 일년 중 이만한 날도 그리 흔하지 않는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서안은 중국 중부에 위치한 산시성(陝西省. 섬서성)의 성도이며 면적은 9,983 제곱Km, 2000년 인구 825만 명에 이르는 중국의 6대 古都이자 4대 교육도시로 고대로 부터 중국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유서깊은 도시이다.
공항구내에 있는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오늘은 화청지와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관광하기 위해 전용버스에 올라 이동하는 중에 조선족 가이드로 부터 서안과 섬서성에 관한 역사와 지역에 관한 설명을 듣는다.
섬서성은 1998년 서부도시화공사로 본격적인 개발이 되기 시작했으며 동서로 진경산맥이, 남북으로 북산산맥이 뻗어있고 북쪽은 황토산으로, 남쪽은 산악지대이며, 중앙은 분지로 되어 있고 중국 물류의 중심지라고 한다.
섬서성은 옥수수와 밀이 많이 재배되고 있으며 면적은 205,600제곱Km, 인구는 약 4,700만 명에 이르고 1100년 동안 73대 황제가 통치했고 72개의 황제무덤이 산재해 있는데 진시황릉을 포함하여 2기의 무덤만이 도굴을 당하지 않고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약 50분을 달려 화청궁(華淸宮)에 도착했다. 화청궁은 진시황 때 돌을 깎아 집을 만들어 명신들의 온천지로 이용되기 시작했는데 唐 천보원년(742) 현종이 못(池)을 만들고 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총애하던 양귀비와 로맨스를 즐겼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유명하다.
화청궁은 서안 동쪽 약 35Km 여산(驪山) 기슭에 있으며 6門, 10殿, 4樓, 3閣, 5湯으로 이루어져 있다.
唐,淸시대에는 풍만한 여체가 미인의 조건이었다는데 부조의 여인들 모두 넉넉한 모습이다.
화청지 전경과 뒤로 보이는 여산의 모습. 여산 정상까지는 케이블 카가 운행되고 있었다.
대추나무에 접붙여진 감나무가 고운 단풍으로 단장하고 우리를 맞이한다.
거목의 석류나무도 보인다.
양귀비 像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즈를 취하더라! 양귀비는 당현종의 며느리로 수왕의 아내였으나 현종은 아내가 죽자 며느리를 자기의 妃로 만들고 貴妃의 칭호를 내렸다.
우리나라에서 미인을 일컬을 때 `양귀비 같다'라고 하지만 양귀비는 몸이 풍만하고 암내가 심하게 나서 목욕을 자주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요사이 양귀비 같다고 하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가이드가 일러준다.
중국의 미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성어로 `폐월수화지모(閉月羞花之貌), 침어낙안지용(沈魚落雁之容)' 이라는 말이 있는데 고금을 통해 미인이었던 초선이, 양귀비, 서시, 왕소군 등 4명의 절세가인을 일컫는 것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貂蟬)이가 저녁에 정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우자 그 아비인 왕윤(王允)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라고 하여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는 어느 날 화원에서 꽃을 바라보며 무의식 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리니 그 꽃이 부끄러워 꽃잎을 말아 올렸는데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렸다'고 하여 양귀비를 羞花라고 부른다.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서시(西施)가 강변을 거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모습을 비추자 헤엄치던 물고기가 넋을 잃고 강바닥으로 가라 앉으니 그 후로 서시의 아름다운 미모를 침어(沈魚)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이 집을 떠나며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에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아들었다가 왕소군의 미모에 날개짓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하여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양귀비의 전용 목욕탕이다.
날아갈 듯 날렵한 누각은 양귀비가 목욕을 마치고 나와 여산을 바라보며 머리를 말리던 곳이라고 하니 자연바람에 건조시켜 어깨위로 보드랍게 흘러 내리는 머리결은 양귀비의 미모에 화룡점정이 되어 당현종의 숨을 멎게 했을 것이다.
양귀비가 목욕하던 온천수가 지금도 솟아나고 있었다.
당태종이 목욕하던 성진탕이다. 현종은 연화탕에서, 양귀비는 해당탕에서, 주방 하인들은 상식탕에서 목욕했다.
영화를 누리던 양귀비는 모든 것을 세상에 버려두고 안록산의 란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화청지를 나와 진시황릉으로 향한다.
진시황릉 입구에 도착했다. 줄지어 선 노점상들의 호객으로 주변이 어수선하다.
진시황은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BC 259년에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했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인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는데 BC 210년까지 사는 동안 중국을 통일하는 등 가장 뛰어난 봉건제왕일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적인 봉건제국의 창조자였다.
그의 이름은 정(政)이었고 진나라 31대 왕이었으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여 조정(趙政)이라고도 불리는데 어떤 황제도 하지 못했던 화폐의 통일, 도량형의 통일, 문자의 통일을 이루는 눈부신 업적을 이루기도 했지만 불로불사의 열망이 컸고, 책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생매장해 죽이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질러 수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진시황릉은 서안 동쪽 35Km 쯤 떨어진 여산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의 높이는 약 115m로 정방형에 가까웠으나 2,200餘 년의 풍우와 침습, 인위적인 훼손으로 현재는 봉토의 높이가 76m이고 동서폭이 345m, 남북 길이가 350m로 현존하는 중국 고대 제왕의 묘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진시황은 사사여생(事死如生)이라는 중국 전통사상을 믿고 13살에 등극하자 여산 기슭에 본인의 무덤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대규모 공사를 추진했는데 38년에 걸쳐 노예와 죄수 등 인력 70만 명 이상을 동원해 이집트의 피라밋을 능가하는 무덤을 건설하였다.
무덤 안에는 진귀한 진주와 보물로 가득찼으며 고분의 인어 기름으로 만든 등잔불이 켜져 있고, 많은 무기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수시로 도적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며 천정에는 보석과 명주를 장식하여 천체의 별들을 상징하였다.
바닥에는 백종(百種), 오악(五岳), 구주(九州)의 지리형태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부어 흐르는 강과 하천을 상징하였으며 수은 위에는 금으로 만든 꿩을 띄웠고 진시황이 죽어 이곳에 매장되자 후궁들을 모조리 생매장하였으며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장 직후에 능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가서 매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생죽음을 당했다.
벽돌계단을 통해 진시황의 무덤에 오르면서 생매장 당한 원혼들의 넋두리와 그의 거친 숨결을 느끼며 천하를 호령하던 권력과 부귀영화도 순간을 머물다 사라지는 아침이슬과 같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깨닫는다.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져 있는 병마용으로 향한다. 1974년 봄 서안시 임동구 안채향 서양촌에 살고 있는 양씨(楊氏) 형제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병마용은 2,200餘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고대제국의 신화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병마용갱은 1974년 1호 갱에 이어 2호, 3호 갱이 차례로 발견되어 2만 제곱m에 이르는 갱내에 실제 크기의 도용(陶涌)과 도마(陶馬)가 약 8,000점 매장되어 있었고 100餘 대의 나무 전차에는 보병과 기병, 궁노수, 어수(馭手), 사령기관 등 여러 병종을 포함한 방대한 군사 집단이 찌를 듯한 기세로 중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정예부대를 상징하고 있다.
전 프랑스 대통령 시라크는 1978년 병마용을 참관 후 `피라미드를 보지 않았다면 진정 이집트를 여행한 것이 아니며 병마용을 보지 않고는 결코 중국을 여행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제 세계7대 불가사의에 병마용을 추가하여 8대 불가사의가 존재한다고 했다.
병마용으로 들어서는 진입로의 조형물.
진시황 병마용박물관 출입문.
둥그런 병마용박물관 1호갱의 외면.
각을 세운 병마용박물관 2호갱의 외면.
병마용박물관 종합전시청의 외면.
세개의 병마용갱 중 가장 규모가 큰 1호갱은 길이가 230m, 넓이가 62m, 총 면적 14,260 제곱m로 약 6,000점의 도용과 도마 및 40여 점의 전차가 장방형으로 진열, 설치되어 있다.
3호갱은 1호갱에서 북서쪽으로 25m, 2호갱에서 동쪽으로 120m 떨어져 있는데 약 500제곱m의 면적에 도용 66점과 사마고차(駟馬鼓車) 1승이 출토되고 있다. 세개의 갱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지만 옛날의 군막, 오늘날의 사령부를 보호하는 경비부대에 해당한다.
2호갱은 1호갱의 북동쪽에서 약 20m 떨어져 있는데 동서의 길이 124m, 남북 98m, 면적 약 6,000제곱m로 현재 발굴이 진행 중에 있는데 각종 무사용 90여 점, 전차용 말이 350여 마리, 기병용 말이 116마리, 나무 전차 89승이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시실에는 발굴된 도용을 전시하고 있는데 신분에 따라 장군용, 군리용(軍吏俑), 무사용 등 몇 개의 등급으로 나뉘며 의복과 장신구 표정과 자세가 다르다.
종합전시관으로 들어선다.
고대와 현대의 조화라는 주제로 만들어 졌다는 조형물이 전시실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진시황릉 청동 거마 발굴현장이 유리관 속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다섯 번의 전국 순찰을 했는데 매번 그 의장대와 마차의 행렬이 위풍당당하고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1980년 12월에 진시황릉 봉토 서쪽에서 20m 떨어진 곳에서 출토된 청동거마가 그 의문을 풀어주기에 충분한데 이것은 1호 청동거마로 지금까지 발견된 거마 중 가장 크고 장식이 제일 화려하며 구조가 매우 완벽하다.
종합 전시관을 나오며 이번 여행을 같이 하게된 일행들과 함께 선다. 병마용은 종장갱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진시황릉 주변에는 여러 개의 종장갱이 산재해 있다.
병마용갱 관람을 마치고 먼지를 일으키며 컴컴한 도로를 두어 시간 남짓 달려 화산호텔에 도착해 식사를 마치고 내일 화산을 오를 때 필요한 과일을 준비하고 일찌기 잠을 청했다.
여행일시: 2009. 10. 24(토요일 여행 1일차) 여행지역: 화청지, 진시황릉, 병마용갱. 여행날씨: 대체로 맑음. |
출처: 우보(愚步, 牛步) 원문보기 글쓴이: 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