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원로의원 천운당(天雲堂) 상원(尙遠) 대종사(大宗師)는 호남불교를 일으킨 개척자이며 현대 도심포교, 불교교육, 복지의 물꼬를 트고 방향을 정립한 선각자였다. 스님은 한국불교 정화 후 ‘도제양성’, ‘포교’, ‘역경’이라는 종단 3대 지표를 수립한 직후인 1960년대 말부터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가장 취약하던 호남 지역에서 이를 실천에 옮긴 수행자였다. 시민들을 위해 부처님 가르침을 담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천막 법당을 지어 아이들을 위한 법회를 열기도 했다.
젊은 날에는 당대 최고 스님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고, 일생을 선원과 토굴에서 가행정진하는 등 부처님의 제자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생을 살았다. 스님은 엄하면서도 자상하고 말없는 가운데 큰 가르침을 내린 참 스승이었다.
1932년 1월1일 전북 고창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해방이 되던 해 소학교를 졸업했다. 완고한 할아버지는 신학문을 부정하고 한학을 고집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부러웠던 스님은 서울로 도망쳐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새벽에 집을 떠났다가 마침 길에서 비구니 스님을 만나 내장사로 가게 됐다. 그 때가 16살이었다. 내장사에서의 첫 새벽 스님은 도량석으로 울려 퍼지던 ‘화엄경 약찬게’의 청아하면서도 절절한 염불소리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날 스님의 평생 길을 제시해준 박한영 스님을 만났다.
당시 팔순의 노스님은 소년의 사연을 듣고 절에서 글을 배우면 중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스님은 그 때부터 한영 스님의 시자로 절집 생활을 시작했다. 노스님의 공양상을 챙기고, 측간으로 모시며 목욕을 시켜드리는 일 등 고된 시봉을 하면서 아침․저녁 예불과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금봉·진응과 함께 근대불교 3대 강백으로 추앙받는 한영 스님은 뛰어난 불교학자이자 선사였으며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이자 불교개혁가였다. 또 포교의 중요성을 간파해 이를 널리 펼친 선각자였다. 한영 스님의 이 같은 수행과 불교관, 미래를 읽는 혜안은 알게 모르게 어린 시자에게 전수돼 후일 호남불교 중흥의 주역을 담당케 한 것이다.
내장사 생활 1년 만에 한영 스님이 입적하자 그 후 월정사로 옮겨 은사인 지암 이종욱 스님(1884~1969)을 만나 계를 받았다. 12년을 모신 이종욱 스님은 천운 스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무소유의 삶과 포교도 모두 스승에게서 받은 가르침이다. 스승은 젊은 천운 스님에게 “포교하는 사람은 감투 쓰면 안된다. 무소유로 살아라. 여자관계 철두철미하라”는 세 가지를 간곡히 부탁했다. 은사스님 역시 엄하지만 자비로운 분이었다. 천운스님은 생전에 은사스님에 대해 “여든이 넘어서 마흔이 넘은 제자를 비행기 태우며 놀 정도로 허물이 없고 자비로운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제자들의 기억에는 은사스님이 바로 노스님과 다름없는 선지식이었던 셈이다. 어릴 적 어른들을 잘 모셔 사랑을 받았던 어린 시자는 여든이 넘은 노스님이 되어서도 여전히 천진성을 잃지 않고 어린이들과 함께 놀았으니 평생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셨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친일로 오해받은 사정을 풀기 위해 천운 스님은 지암 스님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평전을 내며 은사스님의 위업을 널리 선양하는데 앞장섰다. 이를 통해 자칫 왜곡 될 뻔 했던 불교계의 항일 독립운동사 한 페이지를 열었으니, 모두가 천운 스님의 열정이 일궈낸 성과다.
스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활약하는 한편, 군승이 없는 군에서 불교모임을 이끌며 군내 포교를 담당하기도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은사스님이 입적한 뒤 천운 스님은 조계산 토굴, 도갑사·대흥사·선운사 선원 등에서 10여 년간 참선을 했다. 특히 스님은 고창 선운사 도솔암에서 처음 선방을 열어 4년 묵언정진을 했다. 당시 스님으로는 처음으로 목에 ‘묵언패’를 걸고 정진해 이후 묵언정진하는 수좌들의 길잡이가 됐다. 당신 공부를 하는 한편 화엄사 주지를 맡아 가람을 일신하고 정진대중을 외호하는 등 이후 포교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토굴과 선원 등지에서 가행 정진하던 스님은 스스로 깨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불법을 널리 펴고 제대로 된 제자를 키워 한국 불교의 미래를 밝히겠다는 원력을 갖고 상무대 근처 허허벌판에 천막을 치고 향림사를 열었다. 이때가 1971년이었다. 스님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고 가는 길’이라는 포교지를 만들어 나누어주며 불법을 알렸다. 천막포교당을 세우고 불교 전단지를 배포하는 포교 방법이 서울과 수도권에 등장한 것은 이보다 10여년 뒤였으니 스님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짐작케 한다.
스님은 포교를 시작하면서 신도들의 시주를 갚는 길을 고민하며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학교를 가지 못해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 길을 터주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한 쉼터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 아픈 사람을 위한 문병이었다. 스님은 이 세 가지 원칙을 그대로 실천했다. 스님의 교육열이 강해 향림사에서 학기 초 등록금만 1억 원을 넘게 지불했다. 장애인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다 아예 장애인복지관을 만들었으며, 아픈 사람을 마음 놓고 치료하기 위해 한 때 병원을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돈은 모두 스님이 전국의 대중들과 만나 법문하고 절 살림을 아껴 모은 소중한 정재였다. 스님은 향림사에서 찬불가를 보급하고 어린이·중고생 법회를 열었다. 또 수련회를 개최했다. 이 모든 것이 현대 한국불교 포교사에서 신기원으로 기록되는 사건들이다.
호남불교를 중흥한 스님은 1990년 후반부터는 대흥사에 머물며 사찰을 중창하고 후학들을 제접했다. 주지를 거쳐 조실을 맡아 스님은 남도의 문화와 정취를 통해 사람들의 심성을 맑히고 보다 차원 높은 불교를 전파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대 까지 스님의 관심은 불교를 알리고 체계를 잡는데 집중했다면 이후 대흥사를 통해서는 내용을 채우고 문화로서 불교를 선양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서산대사 의발이 보존된 사찰로 13대 강사와 13대 종사를 배출한 조계종의 종원(宗元) 사찰로 불리는 대흥사는 한동안 침체했지만 천운 스님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승풍을 드높이게 됐다.
스님이 포교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분야는 신도교육이었다. 새 신도에게 기초 교리강좌는 물론이고 광주불교대학과 광주불교대학원을 설립해 신도를 교육하는 한편, 포교사 육성에 힘을 기울여 전국포교사단 광주․전남지단의 활성화와 함께 향림사를 호남지역 포교전진기지로 만들었다. 또 전남지방경찰청 경승실장과 광주교도소 교화위원회 불교회장 소임을 맡아 경찰 및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펼쳐 사회의 어두운 곳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비추는 역할도 수행해 왔다.
복지포교분야에 역점을 둔 스님은 1983년 향림유치원, 1994년 향림사어린이집, 1996년 해남 한듬어린이집을 설립해 운영하는 등 복지를 겸한 어린이 포교와 함께 1992년에는 광주시로부터 우산사회복지관을 위탁받아 모범적인 운영으로 지역사회에서 불교위상을 높여왔다. 이외에도 인근 군부대들을 중심으로 군포교에도 관심을 가져 많은 군불자를 배출했으며, 종립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직을 맡아 교육사업에도 헌신했다. 또 향림사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 생활 속의 불교를 실현하기도 했다. 이후 광주불교대학, 대학원, 향림출판사 등을 세워 향림사를 호남 포교의 중심처로 세웠다.
이 같은 스님의 노력에 힘입어 침체에 빠져 있던 호남불교는 중흥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향림사에서 스님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스님과 재가자들이 호남불교를 일으키는데 앞장서고 정광중고에서 배출된 청년불자들이 불교를 위해 헌신하면서 호남불교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1994년에는 불교광주방송이 설립되고 1996년에는 광주지역 2000여 학생이 참가한 대규모수계법회가 열려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스님의 이 같은 공을 종단에서도 인정해 두 차례 포교대상을 수상 했다. 또 2001년 조계종 사회복지대상 특별상, 2002년엔 제1회 전국 교정인의 날 국민포장을 품수했다.
스님은 향림사에서 아이들 교육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면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스님은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부처님을 키우는 일”이라며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공부하며 자라도록 보살폈다. 스님에게 아이들은 부처며 화두였다. 아이들의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 생전 스님의 말씀이었다. 스님은 힘닿는 대로 상급 학교에 진학시키는 등 뒷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줄 뿐 특별히 강요하는 것도 없었다.
유난히 말썽을 피우는 아이가 있으면 행동이 달라질 때까지 스님 방에서 재우며 키웠다. 40년 동안 이렇게 스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150여 명에 이른다. 대부분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라 제 몫을 다하며 이 중 20여 명은 출가수행자가 되어 스승의 뒤를 이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며 한국불교를 지키는 동량이 되었다.
스님은 수행자로서 철저한 모범을 보이되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말없는 가운데 깨우침을 주어 더 크게 깨닫도록 경책하는 방식이 스님의 지도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종을 조장하는 것도 아니다. 말을 하지 않되 자발적으로 깨달아 실천토록 하는 것이 스님의 훈계법이다. 스님은 평소에 엄하고 까다롭지만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계율을 어겼을 때 스승으로서 꾸짖음을 내릴 뿐 결코 상좌나 재가자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으로 인해 불편할까봐 여행을 가거나 성지순례를 가더라도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거나 말없이 따르던 분이었다.
스님은 또 엄격하면서도 유머가 넘치는 분이었다. 수행자로서 혹은 종단의 큰 스님으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이를 만나면 젊은이의 말로,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의 눈으로 사람을 대했다. 이 때문에 엄격하다는 소문에 잔뜩 겁을 먹은 재가자들은 스님의 우스갯소리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금세 마음이 풀어져 편안하게 대했다고 스님을 만난 이들은 한 결 같이 입을 모은다.
스님은 또 평생 무소유의 정신을 따랐다. 스님은 생전에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은 간단한 일인데 너무 욕심이 많아 제대로 못 보는 것”이라며 수행자뿐 아니라 재가자들에게 욕심 없는 삶을 강조했다. 스님은 당신은 아끼고 아껴 쓰고 아무것도 갖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베푸는 자비보살이었다. 무엇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자상하게 챙겼다. 향림사에서 일하는 재가 불자 47명의 직원 자녀 교육비 일체를 절에서 부담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천운 스님의 법문은 쉬우면서 직설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은 늘 불교의 연기 사상에 입각하면서 누구나 생활과 삶 속에서 지켜야할 윤리와 원칙을 갖고 불교를 설명하고 가르침을 내렸다. 늘 화내지 말고 남의 말 잘 듣고 험담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수행이라며, 남 탓 하지 말고 스스로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잘 다스리도록 했다. 스님은 철저한 수행자였으며 부처님의 올곧은 제자였다.
출가한 이래 조석예불 드리는 것을 거른 적이 없으며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6시까지 참선하고 예불 모시고 좌선, 염불, 다라니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6시 15분에 아침 공양을 마치고 1시간 동안 포행을 하고 나면 줄지어 기다리는 신도들을 만나 친절히 상담했으며 점심공양 후에는 광주불교대학, 사무실, 복지관, 정광학원, 향림원 등을 돌아보는 생활을 입적 전 까지 어긴 적이 없었다.
스님은 입적을 앞두고도 제자들에게 남긴 유훈에서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면 이게 곧 불교)’라는 부처님의 칠불통게(七佛通偈)를 강조했다. 수행자의 본분을 가장 중요시 여기시던 평생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당부하며 현생에서의 몸을 벗어던졌다.
1056호 [2010년 07월 14일 11:28]
첫댓글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_()_()_()_
광주나 해남 대흥사에 꼭 가서 스님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싶었지만 길상사 지장전에서 108배와 아미타불 염불로서
인사를 올렸다. 단 세번 뵈었지만 어머니를 잃은 것 같은 마음이 자꾸 든다. 다시 오시리라 믿으면서도 스님 고생 많이 하셨으니 극락왕생하시라고 빌었다. 스님 감사합니다. 극락왕생하십시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