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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하순 강화도로 문화유적답사를 다녀왔다. 우리고장 전주와 관련이 깊은 정족산성에 들러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왜난 때 보관했던 사고를 둘러보고, 강화역사관에 들러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문화유산해설사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내 자신이 전북사람이라는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안의와 손홍록의 행적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임진왜란에 앞서 우리나라에는 4본의 왕조실록이 있었다. 서울의 춘추관과 전주·충주·성주사고 등에 보관되어 왔으나 성주사고의 실록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 실화로 없어졌고, 서울의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소장된 실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기에 불에 타서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유일하게 남게 되었다. 이 또한 전란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정읍 태인의 산골에 묻혀 살던 선비 안의(安義, 1529∼1596)와 손홍록(孫弘祿, 1537∼1610)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실록을 구하고자, 1592년 6월 3일 가동(家?) 10여명을 이끌고 전주로 달려왔다. 당시 도성에는 관찰사는 전쟁에 나가고 전주부사는 병으로 사망한때였으며, 어진을 담당하는 참봉 오희길·유인 등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실록이 위급한 상황임에도 사고를 담당하는 부사의 사망으로 실록을 옮기는 것을 결정하는데도 19일이나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옮기게 된 실록과 본조문기가 30여태(?)요, 고려사 기문과 전적 등이 20여태 분량이었는데, 1차로 정읍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기게 된다. 그때부터 강화로 옮길 때 까지 1년여 간을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을 지키기 위하여 교대로 수직(守直)하는데, 이때의 상황을 안의일기(安義日記)로 전해 내려오는 난중일기인 임진기사(壬辰記事)를 통해 알아보자.
1592년 6월 23일에 내장산에 옮겨진 실록과 어진은 1593년 7월 9일에 정읍을 출발하여 태인(7.11)→이성(폐현, 7.12)→익산(7.13)→용안(7.14)→임천(부여 7.15)→은산(7.16)→정산(청양 7.17)→온양(7.18)→아산(7.19)→수원 가소을 오지리(7.20)→남양 다발리(7.21)→인천 곤도 오이리(7.22)→부평(7.23)→강화부(7.24)에 도착한다. 8월 8일에 강서현에서 두 의사가 연명으로 중흥육책(中興六策)을 봉정(奉呈)하고나서 8월23일에 안의와 손홍록은 별제(別提, 종6품)를 제수 받는다. 그러나 안의는 고령으로 일년여에 걸쳐서 풍천노숙하는 수직(守直)으로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사망하였고, 손홍록은 그 후에도 안의의 수복(守僕) 한준과 함께 실록과 어진을 뱃길로 백령도와 광도, 청천강을 거슬러 안주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에 옮겨놓는다.
이처럼 안의와 손홍록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을 모시면서 하루고 거르지 않고 교대로 수직을 하였고, 강화를 거쳐 묘향산에 옮길 때까지의 제반경비도 그들이 부담하였다하니 그들이 아니었던들 전주에 있던 실록은 정유재란의 전화로 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신록에도 들지 못하고 실록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찾아낼 수 없다. 이는 당시 관리들의 왕실중심의 사관(史觀)으로 관의 무능을 은폐하고 편파적 사관에서 민간의 공로를 묵살하려는 처사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안의와 손홍록은 같은 태인 출신으로 당대 거유로 실학자로서 우국충정을 교육이념으로 삼았던 일재 이항(李恒)의 문하로, 의병장 김천일·김재민·변사정 등 임진왜란을 이겨내는데 선봉에 나섰던 인물들과 같은 문인이었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논하기에 앞서, 잘못된 우리 지역사부터 바로잡을 수 있도록 새로운 사관에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여 여러 잘못된 자료와 뒤틀린 역사를 정사(正史)의 위치에 바로 놓아야할 것이다.
/이용엽 동국진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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