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用器)와 관련 있는 작가에 대해 조사를 한다? 작가에 대한 선택에 앞서 용기(用器)에 대해 토론한 적 있다. '기(器)를 단순한 그릇이라고 한다면 용기(用器)는 사람이 사용하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기(器)가 용기(用器)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인가', 또 '기(器)와 용기(用器)에 대해서 어떤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가' 등의 많은 논쟁을 했다. 그래서 기(器)와 용기(用器)의 사전적 의미를 통해 구분하여 정의를 내려보고자 하였으나 단순한 사전적 의미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결과 용기(用器)와 관련 있는 작가 중심으로 연구를 하기로 하였다. 연구 과제는 케네스 프라이스, 리차드 노킨, 아르네 오세, 루디 오티오, 도미모토 겐키치, 윤광조, 웨인 히비 중에 무작위로 선정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작가에 대해 분류해 보는 것이다. 7명 작가들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에 대한 내용보다는 한 작가의 작업을 중심으로 분류하는 것이 개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고 할 수 있겠다. 수업을 통하여 작가에 대한 조사를 하며 계속 수정, 보완하였다. 나는 도미모토 겐키치에 대해 조사했다. 처음 몇 가지 자료를 보았을 때 작가의 작업을 분류하기에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작가에 대한 약력, 배경, 작가의 작품, 주변인물 등을 조사하면서 도미모토 겐키치에 대한 애착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제작한 많은 작품 속에서 그의 작업 성향을 알 수 있었고 상세한 부분을 카테고리로 나누어 정리함으로 작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도미모토 겐키치는 라쿠에 관심이 많았고 라쿠를 접하는 것은 그가 도예를 하는데 영향이 컸다. 라쿠를 하면서 가마 기술을 습득하고 색에 대한 욕구를 가진다. 색채자기는 도미모토 겐키치의 작품에서 라쿠에 뒤지지 않을 만큼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음으로 시작하였고 지금의 현대도예를 하는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이다. 색채자기는 그의 작품에서 상당수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미모토의 라쿠 작업보다는 색채자기를 통해 그의 작업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사실 당시 일본도예를 보면 라쿠소성은 본인의 의지보다 단순한 관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색채자기는 라쿠에서 발연된 것이므로 그에게 더 큰 가치가 있다. 색채자기에 나타난 형태, 크기, 색, 제작방법을 비롯한 그가 도예가로 불리게 된 계기와 주변 인물에 대해 언급하고 그의 활동한 시기의 도예를 통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Ⅱ.본론
1. 삶과 주변인물
도미모토 겐키치는, 1886년 6월 5일 현재의 나라현 이코마군 안도촌에서 태어나 1963년 6월 8일날 도쿄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년기를 살펴보면 어릴 적부터 인체를 드로잉하는 것을 즐겼고, 17세에 일본 미술원에서 열린 나라 회화전에서 벽령당 벽화를 묘사해 입선을 수상하기도 했다. 1904년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하여 건축과 실내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1906년 학교 과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국립 런던 예술대학(Central School of Art in London)에 입학했다. 이곳에 머무르며 졸업 후 1909년, 윌리엄 모리스(주1)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윌리엄 모리스의 작업장에서 일한 적도 있다. 1910년 귀국 후 이 시기에 버나드 리치(주2)와 가까워졌다. 그때 겐키치는 버나드 리치가 6대 오가타 가와야마(겐자)에게 라쿠를 배웠을 때에, 리치의 통역을 하기 위해 동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도예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평가를 받은 도예가인 영국인 버나드 리치는 그와 50년의 친구이다. 그는 리치에게 일본과 도예의 역사 등 도예 전반적인 것에 대해 해석해 주기도 하였다. 버나드 리치는 2년에 걸쳐서 주로 영국 디자인 표현의 연구를 하고 판화, 염직, 목공예 등을 하고 도예이외의 다채로운 표현활동을 통하여 알려져 있던 도미모토 겐키치를 '도예가'라고 칭했다. 가와야마의 제자로 들어간 겐키치를 버나드 리치는 "라쿠를 즐겨하는 제자이다" 라고 말한다. 겐키치의 도기창작은 라쿠에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라쿠는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소성 하였다. 모양이나 문자 등을 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고 손으로 작업하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보여지는 사례였다. 미국에서는 현대도예의 유행기법의 하나로 라쿠가 인기를 모으고 있으나 고온에서 소성되고 있다. 라쿠를 기록한 버나드 리치와 교류했지만 겐키치에 의해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13년에 그는 버나드 리치와 함께 '7代 가와야마'의 칭호를 받는다. 그는 1913년 고향인 안도지방에 1915년 최초로 라쿠가마를 세웠다. 이 가마는 보통의 가마보다 내화벽돌의 구조가 강한 불에 연기가 견디게 설계되었다. 그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도자기 표면에 의도하지 않은 표현이 나타나게 하는 기법이다. 가마를 만들기 시작하여 2년 후의 1917년경에는 도기 제작이 시도되었다. 이 가마에서는 색회유나 청자유, 철화를 넣은 것 같은 도기(도판 1)가 나온다. 가마의 규모를 보면 작품을 넣는 방은 2실(등요식)로써 개인 가마로 쓰기에 넓으나, 한층 더 벽돌을 쌓아 큰 규모로 제작하여 그의 작업에 대한 욕심을 보여준다. 라쿠가마에서 만족하지 못한 그는 일본가마(야키가마)를 만들게 된다. 야키가마는 고화도 소성이 가능한 가마로서 유약이 높은 온도에서 녹으며 청자유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야키가마는 소지가 도기질이 아닌 석기질이나 자기처럼 보여진다. 1910년-1920년경,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이전의 다자인 패턴에서 벗어난 창조적인 작업을 하게 된다. 그의 백자표현에서는 의도하는 형태표현과 유약이 일체감을 이루도록 하였다. 그의 기술은 백자제작을 가능하게 하였고, 다음 단계로 발전하여 색채자기가 전개되었다. 30세경부터 본격화한 도기에서 자기를 병행시킨 그는 도예작업에서 1936년 부터 2년에 걸쳐 색채자기 중심에 들어섰다. 그것은 화려한 표현을 구사하여 40년대 후반까지 금은채의 회부가 전개되었다. 그리고, <시가카바>의 동인들인 버나드 리치, 이와이 간지로, 하마다 쇼지(주3), 야나기 무네요시 등을 만나 친교를 나누었다. 1926년부터 1946년까지는, 토쿄 소시가야에서, 백자항아리나 접시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제작했다. 1955년 도미모토 겐키치는 일본 민예작가로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도미모토 겐키치는, 하마다 쇼지, 버나드 리치 등과 함께 민예 운동에 참가하고 있던 작가의 한 사람이다. 젊었을 때, 장식을 공부한 도미모토 겐키치는 뛰어난 도안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모양으로부터 모양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것을 신조로 해, 과거의 전통적인 작품의 모양을 그대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자연의 초목을 직접 그림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새로운 모양을 차례차례 창조했다. 원래 민예라고 하는 것은 생활과 가까운 공예로, 개성을 억제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미모토 겐키치는 「민예에서도 작가라고 하는 이상 개성이 없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2. 당시 일본 도예와 영향
일본에서 현대적 개념의 도예운동이 시작된 것은 1948년이다. 그 해 5월 교토(京都)일원에서 활동하던 젊은 도예가들이 도예에 있어서의 새로운 형식추구라는 목표 아래 첫 그룹전을 열고 그 해 7월 야기가즈오(八木一夫)(주4), 야마다 히카루(山田光), 스즈끼 오사무(鈴木治)등이 모여 쇼데이샤(走泥社)를 결성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일본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전쟁을 마무리 지은 직후로서 일본사회 전체가 패전의 충격 속에서 극심한 공황과 혼돈을 겪으며 기존의 가치 질서가 근본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때였다. 유교문화의 본질에 대한 회의와 패전으로 인한 사회적 충격, 경제 공황 등으로 인해 종래의 가치질서와 현실적 삶 사이에 괴리가 깊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문화전반에 걸쳐 다양한 양상으로 반영되었는데 도예에 있어서는 고전적 작업양식인 물레성형과 고화도 소성의 엄격한 규범을 벗어나고자 시도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현대도예는 전후 나라전체가 보다 문화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던 시기의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주5 ) 교토는 에도시대로부터 도예의 전통을 지녀온 지역으로서 1946년경부터 젊은 도예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형식의 도예활동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뚜렷한 방향이 설정되지 않은 채 새로운 규범을 모색하는 과도기적 경향을 드러내는 데 머물렀다. 도미모토 겐키치는 중기부터 말년에는, 이런 도예활동이 발상지인 교토에 이주하여 채색화라고 하는 기법을 이용해 디자인의 작품을 제작했다. 쇼데이샤의 운동 초기에는 용(用)의 기능을 지닌 기(器)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고 다분히 과도기적인 현상을 보였다. 흔히 말하는 도조로서의 도예가 전면적으로 나타난 것은 1955년경이며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계 미국이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의 조각과 교오토 예대 교수였던 쯔지 신도우(什晉堂)의 대담한 테라코타에 의한 추상 조각이었다. 쇼데이샤가 일본 내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전위그룹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동인들의 꾸준한 국제전에서의 수상에 의해서 였다. 전위도예에 대한 관심은 일본 내 젊은 세대에 크게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면서 1951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에 걸쳐 많은 새로운 회원들이 영입되었다. 현대도예가 태동하며 도예는 많은 혼돈이 있었다. 일본에서 현대도예에 대한 움직임이 있었을 때 겐키치는 그 시대에 존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미모토 겐키치의 작업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회적인 상황과 도예의 전개양상에 따라 그의 작업에 변화한 것은 도조의 개념이 확대되며 1940년대에 도예기술의 발달을 들 수 있겠다. 그전의 가마와 유약에 대한 연구는 도조 이외에도 器(기)를 제작하는 도예가 들에게 있어 금의 사용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도미모토 겐키치의 작업 역시 금과 은의 사용을 간과 할 수 없는데 1940년대 이후 문양에서 사용한 것을 두드러지게 볼 수 있다. 겐키치의 경우 자신 스스로 가마를 짓는 열정을 보이며 기술을 습득하였으나, 명치이후 가마채의 내화벽돌을 사용하는 유럽형 가마가 도입되면서 일본 도예는 변화되었다. 대량생산에 의한 기술 혁신이 시작된 것이다.
3. 작품
1)형태와 크기
도미모토 겐키치의 색채자기에서 형태는 주관적 견해가 강하다. 자연에서 비롯된 그의 표현은 원근을 중시하고 있다. 도자기에 나타난 정확하게 나뉜 폭은 수평선을 정확히 등분하여 표현했다고 한다. 타자로 하여금 한 자리에서 앞과 뒤의 원근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도판 2) 작품에 내용을 설명하자면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것을 표면과 표면의 균형을 통해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일정한 규격을 가진 형태의 변화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넓은 수평선을 세 개로 등분하고 같은 치수로 정확한 크기로 나눈 것을 '아름다운 형태'라고 스스로 감탄한다. 접시는 원형 접시는 높이가 낮고 지름이 긴 형태이고 1940년대 이후에는 높이가 높으며 폭이 좁은 접시(도판 3)도 보여진다. 정사각형 접시와 팔각 접시는 좌우가 완전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합은 직육면체의 합, 정육면체의 합, 팔각 합(도판 4) 등이 있다. 항아리는 팔각의 항아리, 구형 항아리에 뚜껑이 있는 것과 뚜껑이 없는 형태가 있는데, 주둥이가 넓고 폭에 비해 높이가 낮다. 팔각 주병 등 형태의 변화가 있다. 크기를 살펴보면, 접시의 경우 폭은 20-30cm 정도이고, 높이는 3cm 안팎이다. 합의 경우 10*16*8(가로*세로*높이)의 비율이 주류를 이루었고 정 사각합의 경우 가로, 세로, 높이의 비율이 1:1:1로 보여진다. 또 높이가 아주 낮으며 윗면의 형태를 강조한 것(도판 5)도 있다. 주병이나 항아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크기가 10-40cm을 넘지 않는다.
2)색
소지색은 백자토를 사용한 자기로 흰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순수한 백자로 제작된 경우보다 나중에 색을 사용한 것이 다수이다. 유약의 표현의 경우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초벌 소성 후 문양을 첨가하지 않고 투명유를 시유하여 재벌 소성을 하고, 3차 소성시 유약를 사용하여 문양을 그렸다.(상회) 두 번째, 코발트나 청색 안료의 경우 초벌 후 코발트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후 투명유를 시유하여 재벌 소성 하였고(하회), 3차 소성 시에 나머지의 문양을 그려 넣었다. 세 번째, 빨간 색 바탕에 금과 은을 사용한 문양을 볼 수 있는데, 백자의 소지에 주둥이 부분이나 모서리부분을 제외하고 빨간 색 안료를 사용하여 바탕색(도판 6)을 칠하고 재벌 하거나, 백자에 투명유를 사용한 재벌 소성 후 빨간 색을 사용한 3차 소성을 하여 바탕색을 만든다. 그리고 이 바탕색 위에 금, 은을 사용하여 문양(도판 7)을 그려 한번 더 소성을 한다. 유약은 금이나 은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소성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최초의 야기가마에서는 색이 여러 겹으로 칠해지고 여러 번 다시 소성하였기 때문에 두 개의 싸인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유약 표현은 글자, 자연의 풍경, 자연물, 패턴을 가진 문양 등의 수작업을 통하여 표현된 것들이었다. 글자는 다른 문양과 함께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도판 8) 자연 풍경과 자연물 역시 다른 문양과 표현되었고 접시 중앙에 드로잉으로도 보여진다. 패턴을 가진 문양은 선이나 면의 반복, 꽃, 나비, 과일 등의 자연물을 통해 규칙적인 패턴을 반복적으로 그렸다.(도판 9) 선의 표현 경우 선의 굵기와 색을 변화시켜 일정한 규칙을 가진 선, 서로 직각으로 만나는 체크 무늬의 선, 접시의 외곽부분에 테두리선을 볼 수 있다.(도판 10) 선은 합의 모서리 부분이나 높이 면에서 많이 보여진다. 접시의 테두리는 빨간 색은 바깥쪽, 남색은 안쪽에 그려진 것이 많다. 그러나 60년대 이후의 작업에서는 테두리가 없는 접시가 많다. 면의 표현의 경우 마름모를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육각형의 문양을 만들고, 면을 색의 차이로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자연물을 이용한 패턴화의 경우 네 장의 잎을 가진 꽃, 네 장의 잎 등 마름모 형태와 사각에 맞는 형태로 일정한 간격과 여러 가지 색의 변화 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문양 또한 규칙적 반복을 하고 있다. (도판 11) 문양들은 빨간 색, 파란 색, 노란 색, 녹색, 금과 은 등 강한 원색으로 채색되었다.
3)제작방법
도미모토 겐키치는 주관적인 형태의 해석을 하고 있지만 외적표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유약, 형태, 색의 요소가 결합되어 서로 조화롭게 보여지길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작방법도 중요하였다. 도기제작은 물레 성형을 주로 하였고, 분청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제작에 있어 색과 형태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확한 형태가 필요했다. 그래서 판 성형과 캐스팅을 사용하였다. 물론 항아리의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물레 성형을 하였다.
Ⅲ.결론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감을 주게 하는 작가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에서 그의 위치를 볼 때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일본 민예관에서도 개인 작가의 전시실을 만들려고 오하라총이치로우가 쿠라시키 민예관에 개인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방을 만들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미술관 사정상 될 수 없었다. 현재 민예 작가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오하라 미술관은 총이치로우가 지원을 하여 하마다 쇼지, 버나드 리치, 가와이 겐지로, 도미모토 겐키치 등 네작가를 선택해 공예관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으로 기(器)작업에 대해 흥미가 없기 때문에 器를 하는 작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기피했었다. 도미모토 겐키치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더욱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한국에 있는 자료가 아주 미비하며 작가에 대해 한 두 마디 언급으로는 분류에 대해서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의 자료를 통해 작가를 연구하며 느낀 점이 많다. 지금 현대도예에서 보여지는 작품들은 아주 다양하나 정확한 분류를 하기에는 모호하다. 흔히 쓰는 그릇이라 할 지라도 그것을 작품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정확한 분류를 하기 힘들다. 그러나 작가에 대해 작업과 배경 등의 객관적 자료를 참고하여 연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미흡하지만 당시 겐키치의 작업에 대한 역할을 시대상황과 영향을 준 사람, 그리고 그의 작업에 나타난 표현 등에 비추어 정리하였다. 그가 일본에서 시대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지금 그의 작업에 대해 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도예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만든 작업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의 작업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도미모토 겐키치는 '생각과 작업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도자기를 통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할 때까지 계속 작업을 하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가 일본도예에 준 영향이나 현재의 위치보다 당시 그의 작업에 대한 태도와 작품이 더 애착이 간다.
각주
1)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is)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났던 '공예운동(工藝運動-1856) Art and Crafts Movement'의 중심인물. 공예운동은 1851년 대전 이후 영국에서 제조상품의 질에 대해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고, 민속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제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중세 장인들의 사회적 제도에 대한 향수 어린 관심을 갖게 된 데서 발단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푸긴에게서 피력되어, 러스킨의 저서에서 발견되며, 윌리엄 모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모리스는 먼저 자신의 집(레드하우스)에 건축과 가구에서, 그리고 1861년 모리스 마샬 앤드 포크너 회사를 통해 수공직물, 직조, 가구 등을 생산함으로써 기계시대에 수공업의 부활을 꾀하였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도덕적인 개념의 산물이며, 따라서 기계는 도덕관념이 없으므로 예술을 생산해 낼 수 없다는 러스킨의 생각과는 달리 모리스는 완전히 기계를 배척하진 않았다. 1860년 이후 모리스의 이러한 혁신운동은 많은 건축가와 공예가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80년대에 들어와서는 공예기술의 향상을 위해 '센추리 길드' '아트 워커스 길드' '공예전람협회' 등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그후 공예 운동은 국제적 양식인 아르 누보와 연결되어 해외로 퍼져 나갔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독일에서는 기계와 관련된 용어로 전용되었고, 바우하우스의 설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 버나드리치 (Bernard Howell Leach, 1887-1979) 버나드 리치는 영국인이나 홍콩에서 1887년 태어났으며 홍콩, 싱카폴, 일본 등지에서 보냈고, 10세 때인 1897년 영국으로 돌아와 16세(1903)에 슬레이드 미술학교(Slade School Of Art)의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드로잉에 관심을 보였던 리치는 런던미술학교 (London School Of Art)에서 에칭을 비롯한 본격적인 예술수업을 받았다. 그는 후에 도예에 입문하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던 유학생 다까무라 미쓰다로(高村光太郞)와 친교를 맺으면서 불교와 禪思想(禪은 중국의 선 불교에 기초한 일본식의 불교로서 도교와 불교가 융합된 것) 등 일본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생활과 문화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서적들을 집필한 라프카디오 호온(Hearn.(1850-1904)그리스 태생, 기자생활로 인한 여러 차례의 일본 방문)의 글을 탐독하며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1909년 리치는 일본에 소개되지 않았던 에칭 판화를 가져가서 동경에 정착한다. 그는 겐키치와 함께 작업하며 이때 처음으로 '茶會'를 접하게 되는 데 이때 '라쿠(Raku)도자기'를 감상하면서 도자기에 대한 경외심을 키웠다. 그는 우에노 사쿠라기마치에 첫 가마를 짓고 전시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의 본격적인 도예작업은 야나기의 집이 있는 아비코(我孫子)에 가마와 작업장을 세우면서부터이고, 이 때부터 도예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그 시기에 가와야마에게서 전수 받은 라쿠기법을 서양과 동양을 바탕으로 혼합하여 전혀 다른 것을 창조해 내었는데 일본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 때 하마다 쇼지를 통해 야나기 무네요시를 알게되었는데, 1916년 베이징에서 야나기를 만나 중국 도자기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게 되고 야나기의 권유로 조선을 방문했고 그 계기로 조선 도자기에 대하여 많은 감명을 받고 이 때부터 도자기를 비롯한 민예품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후 리치는 야나기와 함께 벌린 민예운동이 결실을 보기도 전에 일본을 떠나버렸다. 그는 1920년 하마다 쇼지와 함께 귀국하여 세인트 아이버스(St, Ives) 에서 수공예 길드를 경영하고 있는 혼(Horn)부인의 후원으로 그곳에 정착하여 유럽 최초의 일본식 등요가마를 이용한 라쿠가마를 설립하였다. 그는 동양의 기법을 바탕으로 그 지방의 천연 원료를 이용한 점토와 유약을 개발하였고 고온자기와 라쿠 도자기를 제작함으로써 동양 도자기에 대한 미적 개념과 기법을 영국의 도예계에 전달하였다. 그는 공방을 설립한지 1년 후 독립하여 'Leach Pottery'를 설립하고 그 해 가을 런던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그의 명성을 일본, 영국, 미국에까지 알렸다. 1934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각지를 순회하며 새로운 기술들을 습득하였다. 1940년 그가 출간한 유명한 도서를 보면 당시 도예전문 서적이 없는 상황에서 도예가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예가에게 필요한 기술을 소개하였으며, 동양 도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 서양의 도예가들에게 최초로 동양의 도자기와 미적 가치, 개념들을 소개하였다. 특히 같은 책은 4개국어로 번역되어 10만부 이상 팔려 나갔으며 현재까지 도예가들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도예가들에게 한국, 중국, 일본의 동양 도자의 개념과 가치를 소개하였다. 또한 야나기 무네요시 등과 함께 미국 내에서의 많은 순회강연을 통해 미국 현대도예를 태동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아들 데이비드 리치가 그의 'Leach Pottery'를 운영하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후에는 교육, 강연, 여행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1970년에 시력을 상실하였고 도자기 제작이 불가능해 진 후로 1879년까지 저술 활동에만 주력하였다.
3) 하마다 쇼지 (浜田庄司 1894-1978) 그는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는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갤러리에서 많은 작품들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하마다 쇼지는 16살부터 그의 삶에서 도자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가타 야마에 있는 미카자 갤러 리에서 열린 버나드 리치와 도미모토 겐키치의 작업을 보고 넋을 잃었다. 그것은 그의 도예작업을 변화시켰다. 그는 1918년 버나드 리치를 만났고, 그들은 이 시기에 동양과 서양의 도자기를 접목하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에는 리치가 하마다 쇼지를 영국으로 초청하여 세인트 아이버스(St. Ives)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 곳의 가마는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3개의 방을 가진 가마(등요가마)였다. 그는 리치와 St. Ives와 영국에서 3년을 함께 공부했다. 그 후 1924년 일본에 돌아와 마시코에 정착하여 토치키현에 자신의 공방을 세웠다. 1955년 민예운동의 선구자로서 마시코에서 제작한 도자기들은 과거의 도자기와 비슷한 형태를 가졌으나 사람들에게는 편하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든 작가로 남게 되었다.
4) 야기가즈오(八木一夫 1918-1979) 쇼데이샤운동의 핵심인물. 도예가 八木一艸 의 장남으로 교토에서 출생. 1931년 교토시립미술공예학교 조각과를 졸업. 일본상공부산하 도자기 시험소의 전습생이 됨. 1939년 도교에서 열린 제1회 일본 도조협회전에 출품. 1947년 7월 '일본작도가집단(日本作陶家集團)'을 결성. 1948년 5월 경전 공예부(京展工藝部)에 '금환식(金環蝕)'을 출품. 교오토 시장상을 받음. 7월 청년작도가집단 해산. 스즈끼 오사무, 야마다 히카루 등과 쇼데이샤를 결성.) ,
5)스즈키 겐지(鈴木建二)-1993년 7월 16일부터 8월 22일까지 열렸던 일본 아이치 도자자료관 기획전 "現代の陶藝 1950-1990"의 서문중에서
참고문헌
<버나드 리치의 생애와 작품세계>,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정완, 1984 <세계도자사> 색채문화사 <야나기 무네요시를 중심으로한 민예운동에 관한 연구>.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임미선, 1995. <조선과 그 예술>, 신구출판사, 야나기 무네요시. 1994. <일본의 역사> 1995 <도예의 紋樣(문양)> <소장품에 대한 해설>도록-오하라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