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은 형태에 따라 단릉․ 쌍릉․ 합장릉(合葬陵)․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 삼연릉(三連陵)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왕릉의 구조는 대체적으로 위 그림과 같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특이한 경우도 있다. 또한 왕릉에 설치된 석물은 병풍석․ 난간석․고석․문무석인․소전대․예감등이며 시대에 따라, 왕에 따라 차이가 있다.
왕릉은 영혼의 공간인 능침공간과 인간의 제례공간으로 나뉘며, 각각 구분하여 순서대로 설명합니다.
1. 곡장(曲墻)
조선 왕릉의 큰 특징의 하나는 곡장이 있다는 것이다. 곡장은 묘의 뒤와 양옆으로 친 담장으로, 동‧서․북면이 막히고 남면이 열려 있으며 풍수적으로 살기를 띈 바람이 봉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곡장은조선시대에 왕릉과 왕족의 묘인 원(園)에만 설치가 허락되었다. 민묘는 주로 흙으로 내성[날개, 활개]을 쌓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2. 석호와 석양
동물석상(動物石像)은 중국 후한 때 부터 후장(厚葬)의 풍습에 따라 묘를 수호한다는 뜻에서 짐승을 조각하여 묘 앞이나 둘레에 세웠다. 중국왕릉에는 주로 사자상을 세우고, 조선왕릉에는 석호(호석)와 석양(양석)을 세웠다. 또는 석호는 경호를 담당하는 무반내시, 석양은 문반내시라는 의미도 있다. 보통 네쌍을 설치한다.
3. 병풍석
봉분 둘레를 화강암 판석으로 둘러싼 구조의 석물이며, 태조부터 문종까지 병풍석이 있으나,세조 이후의 왕릉에는 세조의 어명으로 병풍석은 설치한 왕릉과 설치하지 않은 왕릉이 혼재한다.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의 목릉(동구릉)과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 왕릉은 사후에도 외적의 침입을 받지 말라는 의미로 병풍석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임금 중 후기의 정조와 함께 “풍수”에 능한 임금인 세조는 자신이 빨리 흙으로 돌아가서 후손들에게 복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묘제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석실 형태를 쓰지 말고 회를 다지는 방식이라든가 병풍석을 쓰면 자연으로 늦게 돌아가니 병풍석을 쓰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병풍석 외면은 조선 초기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연꽃 문양을 양각하기도 했으나,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의 영향으로 십이지신상등의 다른 문양으로 바뀐다.
4. 망주석
영혼이 자기의 묘를 찾아오는 안내 역할을 한다. 어느 시기부터 나타난 석물임은 명확치 않으나, 신라의 괘릉과 흥덕왕릉에 보이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능원(陵園)은 말 할 것도 없고 일반 사대부의 묘에도 예외없이 망주석이 세워졌다. 망주석은 크게 대석(臺石)과 기둥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인 모습은 횃불을 연상시키고, 기둥의 윗 부분에 세호(細虎)를 양각했다. 잘 모르는 민초들은 다람쥐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꼬리부분을 과장해서 크게 만들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처음에는 망주석을 능을 장식하는 석물로 여겪으나, 세호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지키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맞다고 여겨지며 세호의 방향이 한쪽은 올라가고, 한 쪽은 내려가는 모양인 점도 이해가 된다고 여겨진다. 망주석의 윗부분은 연꽃 모양인 점으로 미루어 불교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5. 혼유석(魂遊石)
혼유석(魂遊石)은 한자 뜻 그대로 영혼이 나와 놀게 하기 위해 설치하는데, 봉분이 하나일 때는 봉분 앞에 놓이며, 쌍분인 경우에는 왕릉은 봉분 앞에 각각, 민묘의 경우는 중앙 정면에 하나만 설치한다. 간혹 혼유석을 상석이라고 표현한 책이 있는데 절대로 잘못된 것이다. 왕릉의 공간 중 제례를 지내는 공간은 정자각 또는 일자각이며, 봉분이 있는 능침공간은 인간들이 올라가서는 안되는 영혼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 곳에 상석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상석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혼유석을 괴고 있는 북 모양의 석물을 고석(鼓石)이라 부른다. 민초들은 호박돌이라고 표현하는데. 고석은 보통 4개이다. 동구릉에 있는 태조 건원릉의 고석은 특이하게 5개이다. 고석의 4면에는 어두문이나 귀면(鬼面)이 양각되어 있고 상하면에는 기하학적 문양을 새긴다. 이는 조선왕릉이 횡혈식으로 석실릉의 출입구를 무서운 형상의 귀면들이 지키고 있는 형상이다.
6. 장명등
묘 앞쪽인 남면 중앙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설치한 석물로 유교의 법도에 따라 세운 것이 아니라 불교의 영향이 많았던 고려시대의 풍습이 조선시대로 이어진 것이다. “군주남면”이라는 원칙에 의해 설치되어 장명등의 뚫린 부분인 화창으로 방향을 보면 정남향인 경우가 많다.
참고로 풍수에는 “절대향과 상대향”이 있다. 예를 들어 경복궁은 “군주남면”이 맞으나, 창덕궁의 실제 방향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군주가 보는 방향을 남쪽으로 간주한다”라는 “상대향”개념으로 건조한 것이다.
7. 문석인과 무석인
문·무석인상은 봉분의 좌우 양쪽으로 한 쌍씩 배치하는데, 왕릉의 경우는 문인과 무인석상을 함께 배치해 만조백관의 하례를 받는 형식을 취한다. 문석인은 홀(笏, 제사 절차를 기록한 문서)을 가슴 앞쪽에 양손으로 잡고, 무석인상은 칼을 집고 서 있는 형태다.
무석인은 추존왕릉에는 없다. 그 이유는 추존왕은 생전에 병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무석인의 크기는 후기에 와서 작아지는데 특히 숙종은 백성들의 고생을 염려하여 석인을 작게 만들라는 어명을 내리기도 했다. 동구릉의 선조 목릉의 석인과 서오릉의 숙종 명릉의 문무석인 크기를 비교해 보면 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8. 산신석
위 그림에는 없지만 능침공간을 바라보면서 정자각에 가까운 우측하단에 산신석이 있다. 산신의 서열은 인간 위에 있지만, 왕 밑의 서열이므로 산신석의 위치가 아래에 위치한다.
이번은 여기까지, 다음에 제례공간인 정자각부터 금천교까지 설명드립니다.
제례 공간은 앞부분 금천교부터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