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正覺)의 시권(詩卷) 앞머리에 쓰다[題正覺詩卷]〉
낚시질 그만두고 취하여 바위에 누워
물안개 자욱한 강가에서 탁영(濯纓)의 옛 노래 부르노라
평생 자연을 그리도 좋아하더니
늘그막에도 강가에 살고 있네
촌로와 자리나 다투며 지내는 몸이니
은자라 부를 것 없소이다
모래톱에서 웃으며 함께 가리키네
거울 같은 한강수에 또렷한 저 삼각산을
백발의 이 늙은 거사는
사문(斯文)에 노닐고 있는 몸이지만
정각(正覺)은 무엇 하는 사람이길래
이리도 간절히 시를 구하는가
함부로 쓴 오언시(五言詩)
종이 위에 비바람 몰아치는 듯하네
가지고 가 남에게 보이지 마시게
이제부터 문 닫고 숨어 살려 하나니
*취하여 바위에 누워: 원문의 ‘취석(醉石)’은 도연명이 취하여 누워 잤던 바위로서, 여산(廬山)의 명승지 중 하나.
*탁영(濯纓)의 옛 노래: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말로서,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란 구절이 나온다.
*은자라 부를 것 없소이다: 원문의 ‘하의(荷衣)’는 연잎으로 만든 옷인데, 전설 속 은자들이 입었다는 옷을 가리킴.
*종이 위에: 원문의 ‘계등(溪藤)’은 섬계등(剡溪藤) 즉 섬계지(剡溪紙)를 가리킴. 섬계지는 절강성 섬계(剡溪)의 등나무로 만든 이름난 종이.
醉石罷垂釣 취석파수조
煙波歌濯纓 연파가탁영
平生水雲癖 평생수운벽
暮年江海情 모년강해정
野老與爭席 야로여쟁석
荷衣休道名 하의휴도명
沙頭笑相指 사두소상지
三角鏡中明 삼각경중명
白髮老居士 백발노거사
遊戲於斯文 유희어사문
覺也何爲者 각야하위자
求詩辭意勤 구시사의근
胡寫五字詩 호사오자시
溪藤風雨飜 계등풍우번
持歸愼勿播 지귀신물파
從今深閉門 종금심폐문
-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아계유고(鵝溪遺稿)』 권4 노량록(露梁錄), 〈정각(正覺)의 시권(詩卷) 앞머리에 쓰다[題正覺詩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