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시작된 듯한 유월도 중순을 넘어 막바지를 향해 뚜벅 뚜벅 걷고 있다. “덥다 더워” 주위에서 흔하게 듣는 말이 되어 버렸지만 더위를 그냥 기온이 올라 무덥고 짜증스러운 날씨의 변화쯤으로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자연이라고 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네 인간이 차지하는 범위가 갈수록 넓어져 그 흐름조차 바꾸려 들지만 제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류도 결국 자연의 숭고한 흐름은 거역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덥고 뜨거운 날이 있기에 왕성한 생명력의 번식과 더불어 풍요로운 자연의 혜택이 돌아오는 이유에서다. 이번 주에는 강원도 정선 땅에 위치한 가리왕산(1561M)에 가는 날이다. 지리산 종주로 말미암아 2주를 건너뛰고 참석하기 때문인지 다른 일요 당일 산행과는 달리 기다림과 설레임을 동반한 잔잔한 긴장감이 제법 짜릿한 기분이 들게 해준다. 경인 산악회에 뿌리를 내리고 집중적으로 동행한지도 어언 일년이 가까워온다. 계양산에만 올라가도 수없이 붙어있는 여타 많은 산악회 홍보 전단지를 접하곤 하지만 굳이 경인을 고집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첫째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오가는 버스 안에서는 조용히 휴식과 함께 사색에 잠길 수 있어 좋다. 둘째 비록 짧은 산행 경력이지만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고 웃을 수 있는 동지들이 있어 좋다. 셋째 그 어느 곳보다도 깔끔하고 수준 높은 홈피 운영과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있어 좋다. 어쨌든 달리는 차안은 오늘도 조용하고 간간히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가 달큰한 느낌으로 귓가에 전해진다. <달리는 청송의 풍경>
오늘따라 유별나게 차에 오르자마자 시작하여 내리는 순간까지 시간만 나면 잠을 잔듯하다. 가끔 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니 제법 한뼘 이상 자란 벼들이 짙은 녹색으로 이미 단단히 뿌리 내림을 마치고 힘차게 자양분을 빨아올리며 풍요로운 결실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그 위로 눈이 부시도록 흰 한 쌍의 백로가 커다란 날개를 미동도 하지 않고 바람을 타고 날고 있다. 올 여름도 이렇게 점점 깊이 들어가고 있는 듯 하다. 오전 9시 50분 청송을 가득 채우고 달려온 경인의 산우님들은 가리왕산 장구목이골 입구에 우르르 하차한다.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가득 덮여있고 얼핏 팔뚝으로 물방울 몇 개가 떨어진 듯하지만 비는 내릴 것 같지는 않다. 바람은 잔잔하여 조금은 후덥지근한 느낌이 들지만 뜨거운 햇볕이 내리 쪼이지 않아 그만하길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한쪽에서는 버스의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내느라 분주하고 벌써 준비를 마친 팀들은 선두 이정빈 대장님을 필두로 벌써 짙푸른 녹음으로 치장한 가리왕산의 품으로 접어들고 있다. 잠깐 늘 같이 하던 일행과 같이 할까 생각하다 그냥 특별한 결정 없이 줄줄이 이어지는 대열에 합류한다. 등로 좌측으로는 시원한 계곡물 소리가 들리고 그다지 험하지 않은 등로는 바위가 적당하게 섞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이어진다. 계곡이 있어 습한 기후 때문인지 바위에는 짙은 이끼가 끼여 있어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원시적 풍경이 기분 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가리왕산의 원시림>
이번 산행의 테마는 야생화 트래킹 이라 하여 특별히 그간 별로 관심을 갖지 않던 작은 꽃들이 어떤 모습으로 피어 있나 예의 주시하며 걷는다. 이미 시작 무럽 500고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다지 많이 오르지 않았는데도 깊은 고산에 흔하게 자생하는 고사리과 식물인 듯한 야생식물이 우선 일행을 반기듯 커다란 잎새를 활짝 펼치고 있다 잎 사이에 흰색으로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통 알수가 없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앞서가던 선두도 놓치고 이제는 혼자가 되어 아름다운 새소리와 시원한 계곡물소리가 화음을 이루는 울창한 숲길을 그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고 있다.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자 이제는 계곡물 소리가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들리고 수풀사이로 얼핏 보이는 계곡은 이끼를 잔뜩 덮고 있는 바위 틈새로 누가 보든 말들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가쁘던 호흡도 무겁던 다리도 이제는 이완이 다 되었는지 평상으로 돌아오고 속도를 내면 힘들겠지만 오늘은 적당한 속도로 유지하며 홀로 산행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 하여 여유있는 마음으로 한걸음 두걸음 오른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들이 이제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뚝뚝’ 떨어지고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차겁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약50여분 오르자 갑자기 등로가 바위 너덜길로 바뀐다. 자연적 상태라고 보기에는 너무 질서 정연한 모습이 인간의 손때를 연상하게 하지만 알 수는 없다.
비가 오면 물이 흘렀음직한 계곡 길 이리저리 나딩구는 바위를 하나둘 타고 오르는 등로의 친구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새들이다. 온갖 잡념 과 근심이 어디 있었냐하는 듯이 영롱하고 청아하기 그지없는 새소리에 모두 밀려 사라진 듯 머릿속도 시원하고 깨끗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사진에 새소리를 찍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려 장구목이골 임도에 올라선다. 무슨 용도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인간들이 자연을 훼손한 아픈 상처인 듯 하여 마음이 아프다. 바위에 걸터앉아 자라는 늙은 나무의 뿌리가 오늘따라 가슴에 깊숙이 들어와 박힌다. 살기 위해 땅으로 뻗어야 하는데 바위가 가로 막고 있고 이리저리 구불구불 찾아 헤매다 결국은 상황을 극복해내고야 마는 말없이 묵묵한 저 나무의 함성, 그걸 조금 이나마 들었던 것일까
울창한 거목과 극성스런 잡목들이 하늘을 온통 가렸건만 그 밑 그늘진 응달에 한 떨기 야생화가 파리한 모습으로 바람에 하늘거려 가련한 생각도 들지만 또한 순수하고 고결한 성품이 잔잔히 흘러나온다.
누가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그들대로의 방식대로 살아가기에 잠시 스쳐 지나는 객으로써는 그렇게 바라보다 문득 한 웅큼 웬지 모를 슬픔과 그리움이 밀려와 잠시 콧날이 시큰함을 느낀다.
단아한 모습이 마치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여인네의 그윽한 향기를 느끼게 해주는 백작약을 만난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땅만 바라보기에 굳이 밑으로 들어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 그 속 깊은 아름다움에 잠시 망연자실 하다가 서둘러 셔터를 누른다.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울까 장미의 화려함도 좋지만 순수하고 거의 치장하지 않은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렇게 오늘도 가리왕산의 품에서 전생 어디에선가는 만나 인연을 엮었을지도 모르는 나무와 야생화 그리고 이름모를 수많은 꽃들과 행복한 대화를 이어간다.
어찌하여 이나무는 이리도 구불구불 우여곡절이 많은 것일까 이따금씩 지나는 등산객들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며 이나무는 무슨 사연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
출발한지 두 시간 여 만에 능선에 올라선다. 오른쪽으로 10여분만 가면 가리왕산 정상에 오를수 있다. 오르는 길 중간쯤에서 앞서 갔던 선두팀들을 만난다. 혼자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오르다 이렇게 동료들을 만나니 이또한 즐거운이 아닐수 없어 환한 웃음으로 서로 화답을 하고 드디어 가리왕산 정상에 섰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송신탑이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고 사방으로 시원한 풍경이 고산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비록 습하고 더운 기온에 의한 연무로 인해 멀리까지 바라볼 수는 없지만 늘 정상에 서면 그 무거운 짐을 다 벗고 난 후의 개운함처럼 날아갈 듯한 상쾌함이 온몸을 짜릿하게 적셔온다.
다시 능선 삼거리에 오니 올라와 쉬고 있는 잔비님 나누리님 병아리님 대진씨 그리고 그 외 많은 산우님들을 만난다. 잠시 정상에 오른 다른 일행들을 기다리다 앞서간 선두팀과 합류하여 식사할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오늘이 두 번째 나왔다고 하는 산우님과 함께 빠른 속도로 중봉을 향해 걷는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듯 걷다 오늘도 머리 위를 보지 못해 그만 가로 질러 있는 나무에 부딪치고 만다. 원래 헤딩은 산주막 형님이 전공인데 그간 몇몇 군데를 잘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이 오늘도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말았다. 거의 중봉에 다와 갈 무렵 식사를 거의 마친 선두팀을 만나 그 옆에 자리를 깔고 곧 올 다음 팀들을 기다리는데 도무지 올 생각을 안 해 그냥 우리끼리 식사하기로 한다. 배고프던 참에 이분 저분이 꺼내 놓은 음식들을 시원한 슬러쉬 막걸리를 반주삼아 체면 염치 가릴 것 없이 먹어치우고 디져트로 참외까지 대접받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풍요로운 느낌이 든다. 땀이 식으니 추워서 더 그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곧바로 하산길로 접어든다. 식사하고 잠깐 내려오다 또 바위에 걸터앉아 자라는 소나무를 만난다. 이상하게 가리왕산에는 바위에 걸터앉아 자라는 나무들이 많은 것 같고 기이하게 생긴 나무들도 상당히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리막길은 울창한 숲사이로 비교적 편안하게 이어진다.
식사후 40여분만에 어도원임도 도착하여 임도를 지나 철책이 쳐진 철문사이를 통해 숙암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가끔 급경사길도 있지만 이렇듯 편안하고 호젓한 오솔길을 만나면 으레껏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활엽수가 울창한 숲을 지나자 이제는 하늘을 찌를 듯 빼곡하게 자라는 울창한 침엽수림을 만난다. 산림욕은 침엽수림이 발달한 곳이 좋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윽한 솔향과 함께 풍겨오는 싱그러운 공기가 온몸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모든 노폐물을 말끔히 청소해 주는듯한 느낌이 든다.
간벌인지 아니면 개발을 위한 벌채인지 수 많은 나무를 베어 놓은 곳을 지난다. 갑자기 기온이 후끈하고 올라간 듯한 느낌이 든다. 잘만 키우면 나무도 큰 재원이 될 수 있음을 실감해 본다.
1시간 10분정도 내려오니 계곡이 나오고 나무로 만든 다리위에 먼저 출발한 선두팀이 족탕을 즐기고 있다. 후끈한 열기에 휩싸인 발을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계곡물에 담그기만 해도 온몸에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한데 게다가 등물까지 하고 옷도 바꾸어 입으니 상쾌하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숙암리 마을에 거의 내려와 길옆 잡초 사이에 너무도 아름다운 한 떨기 꽃을 만난다.
한 뼘도 채 안되는 줄기에 선명한 색깔로 동전만한 크기로 피어있는 야생화 인위적 요소가 가미되어 품종 개량된 수 많은 상업적 꽃과는 다른 원시적 아름다움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그저 바라보고만 간다.
숙암리 부락 한 농가의 마당 옆에 새빨간 장미가 한무더기 피어있다. 비록 야생화 트래킹이란 테마로 이루어진 산행이지만 정열적으로 아름다운 장미 앞에 발길이 머무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내려와 갈증을 한 사발 탁배기로 풀려했는데 이곳은 사람의 통행이 적은 탓인지 식당이 없어 근처 상점에서 멸치 꽁댕이를 고추장에 찍어 안주삼아 마셔야 했다. 그래도 봉평 메밀꽃 막걸리는 그 맛이 참으로 일품이였다. 이름모를 꽃들과 함께한 가리왕산 산행 그다지 힘들지 않게 이어진 즐거운 산행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