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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묵상➁-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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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5장5-6절 ❚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타성 그리고 욕망❚
생선장수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정원을 가꾸며 꽃을 파는 동생네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동생네 집에 들어섰을 때, 그의 손에는 생선을 다 팔고 난 빈 통이 들려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동생은 모처럼 찾아온 형님을 위해서 꽃이 가득한 방에 잠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꽃향기가 가득한 그 방안에서 이상하게도 형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형을 보고 동생이 근심스럽게 말했습니다.
“형님. 왜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잠을 못 이루십니까? 뭐 불편한 거라도 있습니까?”
“글쎄 말이다. 나도 모르겠네, 아마 이 방안의 꽃향기가 잠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내 생선 통을 좀 가져다주겠나?”
동생이 생선 빈 통을 가져다주자, 형님은 빈 통에 남아있던 비린내 나는 물을 꽃 위에 뿌려 사방에서 생선 비린내를 풍기게 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눕더니, 이내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욕망은 마치 생선 비린내와 같습니다. 오늘 세상은 이 비린내로 등천을 합니다만 사람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 비린내에 젖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과 욕망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초기교회에서도 물질과 관련된 욕망의 문제가 대두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개역)]이라 했습니다. 이 욕망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냥 주어진 현실에 안주해서 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타성이란 오랫동안 변화나 새로움을 꾀하지 않아 굳어버린 습관을 가리킵니다. 꽃향기를 거부하며 생선 비린내에 젖어 사는 이야기 속의 형님처럼 말입니다.
❚인생의 겨울은 주님을 만날 때❚
내 안의 욕망이 습(習)이 될 때는 누구나 타성에 빠지게 만듭니다. 타성을 만들고 있는-이 비린내 나는 일상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비상한 뭔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변화의 길을 가로막는 모든 타성을 털어내고 <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지>하는 영적인 자의식을 새롭게 가다듬게 해주시는 거룩한 기회이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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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베데스다의 연못에서 지내던 38년 된 병자이야기 가운데 한부분입니다. 그는 자기 노력이나 수고로는 결코 자신의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못하는 그 인생의-이것을 <습(習)>이라고도 합니다. 이 <습>이 그 불우한 사내를 타성에 빠지게 했습니다. 타성은 현실에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냥 불우한 현실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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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간의 사정이 이러다보니 38년 된 이 병자는 베데스다에서 희망을 찾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면서도 과감하게 그 자리를 털고 떠나지 못했습니다. 인생의 수렁인 줄 알면서도 헛된 희망에 중독이 되어 도박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도박꾼들처럼, 그도 베데스다를 기웃거리며 인생을 낭비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본문은 그 인생을 주님께서 찾아가셨다고 전합니다.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요5:6)] 주님은 다 아십니다. 38년 된 병자는 일어서서 걸어가는 것이 그 생애의 열망이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으냐?> 왜 물으셨을까요? 주님의 그 질문은 38년 된 그를 일상에서 끌어 올려 그 자신을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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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된 병자는 자신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요5:7)] 정말 필요할 때-물이 움직일 때-아무도/그 누구도-내 곁에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현실은 처절한 절망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주님께서 그에게 임하셨고,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던 절망의 사면초가는 그가 영적으로 우리 주님을 만나는 기회였습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던 그 꽁꽁 얼어붙은 그의 삶의 자리는 바로 주님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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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의 영성으로 보자면, 우리 모두는 38년 된 그 병자들과 다름없습니다. 베데스다의 그 사내는 몸이 먼저 병들었지만,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 병들었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으로 병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병들고, 또 영적으로 병들었습니다. 또 부부관계의 애정이나, 재물에 대한 욕망이나 자녀에 대한 집착이나, 이성에 대해서, 혹은 교만이나 자기의(自己義)나 그 무엇이든지 우리는 누구나 하나 혹은 그 이상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 <낫고 싶으냐?>하신 그 질문은 오늘 이런 우리에게 던지는 대림절 질문입니다.
❚죽비를 내리치는 대림절 은총❚
<낫고 싶으냐?> 이 질문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내 속을 완전하게 꿰뚫으시는 질문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 수고로 자신을 다스릴 수 없었던 베데스다의 38년 된 그 병자는 오늘 나 자신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가 주님을 만나서 온전히 주님의 거룩하신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생을 괴롭히던 고질병으로부터 완전하게 회복 되었습니다. 그 병자처럼.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가며 죄악의 비린내에 절은 우리도 온전한 믿음의 자녀로 회복될 수 있기 위해서 대림절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최고의 은총은 우리가 주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축복의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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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님을 몰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욕망의 비린내에 익숙하게 젖어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압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서로 차원이 다른가를 설명하려면 많은 말이 필요하지만, 설령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믿음의 언어를 알아들을 귀가 없으면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욕망의 비린내가 타성이 되면 꽃향기조차도 불편해집니다. 그런데 세상은 주님의 자녀들도 타성에 젖게 만듭니다.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침묵하시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룩한 능력을 상실했을 때, 우리 삶은 아무런 저항이나 가책 없이 비린 세상의 욕망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런 타성에 젖어 살아가던 이들에게 대림절은 번쩍 정신이 들도록 죽비로 내리치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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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을 살아가며 요즘 저는 겨울나무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합니다. 계절의 흐름으로 보면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에 들어섰다 할 수 있습니다. 서서히 날씨도 사나운 한 겨울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자연은 이미 겨울 한가운데 들어앉았습니다. 봄/여름/가을, 철마다 색깔을 달리하며 꽉 차있던 들판은 텅 비어있습니다. 텅빈 들판을 보면 겨울은 근본을 묵상하는 계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겨울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자신의 근본에 충실하게 천착하는 계절입니다. 겨울이면 나무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생명의 근원인 땅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기 위해서 겨울나무는 스스로 자신의 전부처럼 보이던 잎사귀와 꽃과 열매를 다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아무 것도 걸친 것이 없는 몸으로 침묵하는 겨울나무-이 때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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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깨고 다시 서는 것을 비상이라고 합니다. 나무에게 겨울은 분명 비상한 계절입니다. 일상과 비상의 차이는 타성의 유무가 아닌가 합니다. 쉬 타성에 젖는 것이 일상(日常)이라면 타성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나를 다그치고 고무시키는 때가 비상(非常)입니다. 비상은 때로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지만, 아픔과 고통 때문에-감사하게도-정신 줄을 온전하게 잡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리 비상한 계절에 겨울나무는 아픔과 고난의 세월을 견디기 위하여 깊은 침묵에 잠겨야 했습니다. 나무에게 겨울은 자신을 비우고, 욕망을 멈추고, 모든 활동을 접은 채 오로지 자연의 섭리에 순명하는 계절입니다.
❚인생의 거름을 만드는 은총의 때❚
우리가 살아가며 혹독하게 겪는 인생의 시련을 흔히 겨울에 비교합니다. 그런데 외면하고 싶고 피하고 싶은 이 사나운 시련에 대해서 성경말씀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약1:2)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벧전4:12-13)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고난 앞에서 성경말씀은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고백은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받아들이기는 더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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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고난과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DNA에는 본래 <희생>이 뭔가를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시련에 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재물이 만물을 재는 척도가 되어있는 우리 사회는 이익이 최고의 가치요 진리라서 사람들은 늘 편리를 쫒아 살아가게끔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이 비린 세상이 진리라고 품고 있는 것들을 죄다 단칼에 잘라버립니다. 유난히 시련이 컸고 고난이 모질었던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개정개역)]고 고백합니다. 욥의 삶을 아는 우리로서는, 이 고백은 정말 여상치 않은 고백임을 잘 압니다. 욥이 한 말이기에 이 고백은 보석처럼 더 빛나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욥의 입을 통해서 고난과 시련에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저는 욥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유난히 인생의 겨울이 극성스러웠던 그도 그 시련의 날을 빛나게 하는 보석같은 깨달음(각-覺)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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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로 볼 때, 대부분 우리는 한해가 열리는 계절을 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력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대림절은 만물이 다시 생명운동을 시작하는 봄이 아니고 왜? 겨울일까를 묵상합니다. 왕성한 생명운동만 생각하면 한해살이의 시작은 계절적으로 봄이 적격입니다. 봄은 생명이 풍성한 계절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거듭나고 질적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이를 테면-다시 거듭나기 위해서는 침묵의 계절/안식의 계절인 겨울이 적격입니다. 봄이 밖으로 왕성하게 성장하는 계절이라면 겨울은 안으로 성숙해지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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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픔만큼 성장합니다. 아픔의 신비입니다. 아픔은 밖으로 향하던 눈길을 내 안에 집중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혹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의 탐욕과 욕망 그리고 안목의 정욕에 흔들리며 비린 삶을 살아가던 내 속의 타성이 눈을 뜨도록 해주시는-인생의 시련과 아픔은 변장을 하고 찾아온 하나님의 축복이 확실합니다. 모든 아픔은 익으면 좋은 거름이 됩니다. 아픔 많은 겨울은 인생의 거름을 만드는 은총의 계절입니다. 인생의 사나운 시련은 내가 나를 새롭게 만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봄이 아닌 사납게 추운 계절에 대림절을 두셨을 겁니다.
❚대림절과 두 가지 약속❚
사7:14)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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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의 근거가 되는 이 말씀은 첫 번째 약속입니다. 첫 번째 약속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속의 사역에 대한 언약입니다. 언약은 쌍방 간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래된 첫 번째 약속의 말씀(구약-舊約)은 믿고 기다리는 백성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임하시는지도 상세하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약속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약속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언의 말씀대로 모진 수난을 당하신 다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 이후 다시 재림주로 오시겠다는 약속을 이미 수난이 있기 이전부터 하셨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부활 승천하고 난 다음 천사는 승천하신 주님을 사람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두 번째 약속의 핵심 내용입니다.
요14:1-3)◎"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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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10-11)예수께서 떠나가실 때에,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첫 번째 약속은 이미 성취된 약속입니다. 2천 년 전 성탄절이 바로 그 약속이역사에 성취된 때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도 이루어지는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렇게 약속으로 본 대림절은-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대림절은 이미 오신 아기 예수가 아닌. 다시 오실 주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대림절에는 반드시 다시 오시겠다는 주님의 거룩한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며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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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待臨)은 기다림(待)과 임(臨)함이 함께 작용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편의 <기다림>과 주님의 <임하심>이 함께 상호작용하여 우리가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로 온전함을 회복하게 해주시는 대림절은 축복의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의 약속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 나를 내어 드려야 주어집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가 시간을 내어 놓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감히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회개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실 것이요,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내리치는 죽비처럼 우리 양심과 영혼을 따갑게 내리치며 꾸짖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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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주님이 오신 2000년 전 성탄절에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겸손하시어 몸을 낮추시고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몸을 낮추어 역사에 오신 주님 앞에서 나를 헤아립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가지런한 것처럼 꾸미고 있지만, 오늘 내 삶에는 생선 비린내처럼 세상 욕망이 혼돈의 내 삶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의 연못가에서 주님을 만난 38년 된 병자는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내 삶은 주님을 만나야만 하고, 나는 주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주님께서 오시는 날-당신의 거룩한 자녀들인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서 병든 자신을 회복한 38년 된 환자처럼 우리 그렇게 당신을 만나기를 사모합니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38년 된 소망 없는 그 병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내게도 주님 오시옵소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거들며❚
대림절 셋째주일입니다. 우리는 기다려야하고, 주님께서는 오셔야 합니다. 기다림과 오심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길-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거들며(同役) 구원의 역사를 지어가시는 길이 대림절 길입니다. 그 길에서 주님과 우리가 만나 함께 동행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 투명하게 내 마음속의 생각까지도 다 헤아리시는 주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자녀 된 내 온전함이 회복되기 위해서-대림절 주님 앞에 나를 세워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고, 최고의 은총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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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의 가능성을 지고 살아갑니다. 대림절은 하나님의 자녀로 축복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뭔 하자가 없는지 점고를 하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주님을 만나도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늘 내 믿음과 영성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38년 된 병자처럼 오늘도 내가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허기지게 살아가고 있음을 다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감싸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의 그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가도 그 문제를 온전하게 회복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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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림절의 길을 갈 때는 늘 주님께로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회개할지 내 회개의 제목을 다 알 고 있습니다. 내 회개를 통해서 주님은 내 삶과 생각과 언행을 아름다운 향기로 지어 가십니다. 그리하시도록 주께 내 삶을 돌이키고 회개하여 늘 말씀에 거하면서, 주께 순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8년 된 베데스다의 병자를 회복시켜주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대림절을 맞아 주님의 자녀로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 믿음과 영성도 회복시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대림절 길을 가며 내 삶이 <주님! 내게도 오시옵소서!>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을 부르고 찾는 기도를 올리는 <마음이 가난한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에 대림절의 축복이 넘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
뉴욕대학 부속병원 재활센터 입구에 걸려있는 기도문은 대림절묵상에 깊이를 더해줍니다. 이 기도를 함께 드리면서 대림절의 진정한 의미를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설교자 •회중 ❙다같이>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더니,
•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 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어 성공을 구했더니,
•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 내 맘 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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