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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은 굽이 굽이 흘러 남한강과 한몸이 되고 (정선 - 신동)
코스 총길이 (43k)
진부터미널 - 용탄마을 - 광하매표소 - 수미 (정선초교 가수분교장) - 가탄
9k 3k 9k 3k
마을 - 예미초교 고성분교장 - 동강매표소 - 고성터널입구 삼거리 - 신동
10k 1k 3k 5k
삼거리
또 다시 정선이다. 나는 이번 국토종단 도보여행의 출발점을 정선으로 정했다. 국토종단도보여행은 해남 땅끝마을에서 출발하여 통일전망대에 도착하거나 그 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그런 정석을 거부하고 정선을 남북 출발점으로 정했다. 정선은 웬지 나를 끌어당기는 그 무슨 마력이 있다. 대학 1학년 때인 1978년 가을에 내가 발길 가는대로 찾아간 곳도 정선 구절리 탄광촌이었다.
올 1월에 정선에서 시작한 나의 도보여행은 5월 3일에 통일전망대 검문소에서 북쪽 일정을 마쳤다. 그동안 주말 일정이 너무 바빠 두 달 반 가량의 공백기가 있었다. 주말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여정이기 때문에 진행이 더딘 것도 있고, 주말에 무슨 일이 생기면 못가게 되는 것이다. 이제 드디어 해남을 향해 남행을 시작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벌써 저기 지리산까지는 통과한 셈이다.
동서울에서 아침 7시 10분에 출발하여 11시 30분에 도착했다. 이거 저거 먹거리를 준비해서 출발하니 12시가 다 되었다. 지난 1월 처음 정선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뿌려댔었다.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한참동안이나 고민했었다. 내가 그날 포기했으면 오늘 여기에 서있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저지른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그런 거 같다. 더디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소걸음처럼 내디딘 노고가 나를 통일전망대를 거쳐 다시 정선에 오게 만든 것이다.
오늘은 햇빛이 쨍쨍 내리쬔다. 터미널 화장실에 들러 장갑과 모자에 물을 흠뻑 적신다. 이번 1박 2일 일정은 정선시외버스터미널을 출발하여 조양강과 동강을 따라 신동까지 가는 길이다. 대강 43킬로가 되는 거리다. 여름 여정은 처음인데, 차라리 겨울이 더 나은 것 같다. 난 추위는 참아도 더위는 못참는 체질이라 이렇게 무더위에 길을 따라 수십 킬로씩 걷는 일은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영상 40-50를 넘나드는 실크로드 구간을 한여름에 걸으려면 이 정도 날씨는 참아내야 한다. 돈황, 하미, 투르판, 쿠처, 카스, 호탄,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클라마칸사막, 천산산맥, 곤륜산맥, 코카서스산맥 등등. 내가 그런 곳을 걷는 것만 상상해도 가슴이 설렌다.
평창으로 가는 43번 국도를 타지 않고 강 건너에 있어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구길을 따라 용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보여행자의 최대의 적은 바로 차다. 우리나라의 도로는 이미 차량들이 점령한지 오래여서 그 길을 걷는 인간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리는 더 멀지만 구길을 택한 것이다. 강가의 밭에 농부들은 보이지 않고 고추, 감자, 옥수수 등 농작물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마도 올 고추 가격은 폭락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고추들이 저렇게 많이 열린 걸 보면. 개량종이라서 그런지 고춧대는 별로 크지도 않은데, 고추는 얼핏 보아도 20-30개씩 달린 것 같다. 옥수수도 장하게 잘 자랐다. 대풍년이다. 저 농작물을 날마다 바라보는 농부들은 얼마나 배가 부를까. 바라만보아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9킬로쯤 걸어 용탄에 다다랐다. 온 몸은 벌써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다. 강을 따라 걷는 길은 나무 그늘도 드물어서 말 그대로 온 몸을 땡볕에 드러낸채 걸을 수 밖에 도리가 없다. 한 시간쯤 지나 나무 그늘이 있어서 쉬어 가려고 그늘로 기어들었다. 마침 길 위쪽으로 평상이 놓여 있고 마을 어른 네 분이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고 있다.
“안녕하세요. 여기 동네 이름이 무엇인가요?”
“용탄입니더. 그런데 이 땡볕에 어디를 그렇게 걸어서 가시누.”
“동강 따라 영월까지 가는 길입니다.”
“왜 걸으시우?”
“통일전망대에서 해남까지 도보여행 중입니다.”
“아 그렇구먼. 참 고생허시네.”
“동네가 참 멋있습니다.”
“정선에서도 알아주는 곳이라오. 우리 동네가.”
어르신들이 앉아 있는 평상 위로는 포도나무가 덮여 있고, 가지가지마다 청포도 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바로 옆에 서있는 복숭아나무에도 덜 자란 복숭아가 탐스럽게 달려있다. 내가 서있는 길가 쪽으로는 참살구나무가 잘 익은 살구를 달고 있다. 내가 살구가 참 잘 익었다고 하자 먹어보라고 세 개를 따서 손에 쥐어 주신다.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치웠다. 참살구라서 씨알도 굵고 적당하게 시콤달콤한 것이 맛도 좋다. 파키스탄 북부에 자리잡은 장수촌으로 유명한 훈자마을에 가면 이렇게 맛있는 살구를 맛볼 수 있겠지.
이런 여름 과일을 보면 마흔일곱의 젊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난다. 과일나무를 유난히 좋아하였던 그 양반은 우리 남새밭에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심고 정성스레 가꾸었다.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포도나무, 밤나무, 감나무, 파리똥나무 등등. 자두나무는 몇 개 밖에 열리지 않았지만 씨알이 아이들 주먹만큼 큼지막했다. 어머니는 여름날이 다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 때까지 손도 못대게 했다가 우리들 가을소풍 때 하나씩 도시락에 넣어 주었다. 가을까지 농익은 그 자두의 달콤한 맛이 지금도 내 혀에 아스라이 배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해 여름에 우리 포도는 유난히도 풍년이었다. 포도가 얼마나 많이 열렸던지 내가 지금도 기억할 정도다. 동네 어른들은 “이 집은 주인은 가고 과일만 풍년이네”라면서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
용탄교를 건너고 꽤 가파른 고개를 넘으니 동강 광하탐방안내소가 나온다. 한 분은 사무실 안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고, 한 분은 안내소 옆에 있는 밭에서 풀을 뽑고 있다.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을 이용했다. 그 바로 아래에는 래프팅회사가 자리잡고 있다. 토요일인데도 몇 팀이 안된다. 아마도 일요일부터 강원지역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서 유람객들이 뜸한 것 같다. 래프팅을 타고 영월까지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불가능하단다. 여기서는 가산리까지만 갈 수 있고, 영월까지 가려면 미탄까지 나가야한다고 일러준다. 고무보트에 배낭을 싣고, 물길 가는대로 내 맡기어 영월까지 흘러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번 물어본 것이다.
옛날에는 이 지역의 많은 뗏목꾼들이 뗏목을 타고 남한강을 따라 서울까지 가서 아름드리 나무를 팔았다고 한다. 고생고생해서 번 돈을 객주집 색시들에게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로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조선말 대원군 시절 경복궁을 지을 때도 아름드리 뗏목들이 무수히 이 동강을 따라 한양으로 한양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대학 1학년 때 내가 정선군 북면 여량리 아우라지에 가서 그 마을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다.
강을 따라 걷는 분위기와 천을 따라 걷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강을 따라 가는 길은 주변 경치가 스케일은 웅장한 반면에 아기자기한 맛이 없고 그저 밋밋하다. 천을 따라 가는 길은 규모는 아담해도 운치가 있고 감칠 맛이 있다. 물도 천이 훨씬 맑고 깨끗하다. 냇가에 발을 담그고 물놀이도 즐길 수 있다. 강은 수영 자체가 불가능하다. 내린천과 동강을 비교해보면 그걸 알 수 있다. 동강은 내려가는 내내 ‘수영금지’ 경고판이 서 있어서 물가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레저관광사업도 래프팅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 그래서 괜찮은 숙박시설이나 음식점 등이 내린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우기라 그런지 미산계곡의 수정처럼 맑은 물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온통 황토물이었다.
귤암리를 거쳐 가수리에 있는 정선초교 가수분교에서 오늘 여정을 멈춘다. 어느덧 오후 다섯 시다. 지금까지 다섯 시간을 걸은 것이다. 여기까지의 동강은 소문이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아름답지는 않다. 정선 읍내에서 여기까지 래프팅 말고는 별다른 관광레저시설도 발달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소풍객들이 물가에 나갈 수도 없고, 물놀이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적고, 그러다보니 이들 내방객을 위한 서비스시설도 별로 발달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시설에 누가 선뜻 투자를 하겠는가?
가수분교는 동쪽에서 내려오는 지장천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작은 산 밑에 아담한 건물이 딱 한 채 서 있다. 운동장에는 열 명 정도의 어른과 아이들이 어울려 공놀이를 즐기고 있다. 처음엔 그 어른들이 학교선생님인줄 알고 인사를 했더니, 자기들도 여기 놀러온 외지인이란다. 교무실이나 현관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사람 인기척이 없다. 분교라서 주말에는 아무도 숙직을 하지 않나? 할 수 없이 불법으로 텐트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숙직선생님 허락을 맡고 텐트를 치려고 했으나 선생님이 아무도 없으니 방법이 없다.
운동장 한 쪽에 수백 년은 된 듯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다. 자갈도 깔려 있어서 텐트를 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내 생각으로 저 정도로 울창한 나무면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비 맞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시행착오였다. 야외에서 텐트 치는 기본 원칙을 망각한 것이다. 나는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3시 반이다. 텐트 위로 빗물이 ‘후두둑 후두둑’ 사정없이 떨어진다. 일기예보대로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다행히 텐트가 품질이 좋은 것이어서 비는 한방울도 텐트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역시 비싼 값을 하는구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내 텐트는 몽벨(mont bell) 제품이다.
폭풍우는 아침까지 계속 휘몰아쳤다. 어떻게 할 것인가. 비가 그칠 때까지 텐트 안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비를 맞지 않는 곳으로 옮길 것인가. 밖으로 나와서 대피할 만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내 눈에 들어오는 곳은 학교 현관 밖에 없다. 사실 어제 밤에도 저기에 텐트를 치고 싶었으나, 학교 얼굴인 현관 앞에 떡하니 텐트를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대비가 전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현관 앞으로 철수하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텐트 안에서 배낭에 짐을 정리하여 넣고 하나씩 하나씩 현관 앞으로 옮겼다. 마지막으로 비를 맞으면서 텐트를 정리하여 옮겼다.
‘텐트 칠 때는 비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라.’ 이번 트래킹을 하면서 내가 터득한 법칙이다. 그러면 밤새 비나 눈이 내려도 텐트가 젖지 않아 다음 날 이용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텐트는 한번 젖으면 말리지 않는 이상 다시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텐트가 얼어버리는 겨울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나는 어제 밤에 바로 이 원칙을 간과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현관 앞에 앉아서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두 번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 빗속에 길을 나설 것인가, 아니면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계속 기다리다간 동강의 특성상 물이 급속도로 불어나 며칠 동안 동강에 갇힐 가능성이 높다. 떠나자니 동강의 수위 상태를 몰라서 불안했다. 수돗가에서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먹고 강가로 나가 보았다. 다행히 강물 수위는 아직 그렇게 많이 높아지지는 않았다. 어제 저녁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차들도 한두 대씩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출발하자. 강물이 넘쳐 길이 막히면 거기서 머무르자.
내 선택은 옳았다. 아침 7시 50분에 출발했는데, 오후 2시까지 비는 계속 내렸다. 정말이지 이렇게 장대비이면서 끈질긴 비는 처음이다. 어서 빨리 동강을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걸음을 재촉한다. 도로는 이미 산 쪽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빗물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도로가 낮은 곳은 수위가 도로 30센티 정도 아래까지 차올랐다. 이런 도로는 국도나 지방도가 아니고 간선도로라서 배수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산에서 내려오는 빗물이 그대로 도로 위를 지나서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발목까지 빠지는 물속으로 수레를 밀고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강물보다는 절벽이 언제 무너져 내릴 지 몰라 그게 더 불안하다.
백운산을 지나 나래소에 와서야 동강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강을 따라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져 동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이제 안심이다. 절벽이 상당히 높은 나래소에서 동강은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거기서부터 어라연까지 동강의 절경은 계속된다.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래소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맑은 날의 동강 풍경은 그저 그랬지만 비 내리는 날 안개에 쌓인 동강의 경치는 장대천의 산수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말 몽환적인 분위기에 순식간에 변하는 변화무쌍한 천재화가의 붓놀림 같았다.
이번 코스의 최대 난관은 고성고개를 통과하는 것이다. 지도에서 살펴보면 고성고개는 600-620미터 정도 되어 강원도 고개 치고는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올라가는 쪽의 경사가 매우 가팔라서 상당히 높아 보인다. 비는 계속 장대비다. 7-8부 능선까지 헉헉거리면서 올라갔을 때, 고성터널이 있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표지판에는 이 터널은 겨울철에 상수원 수송용으로 이용되어 4월 1일부터 11월 말까지는 차량통행이 불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차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지나다닌다. 터널 입구까지 약 500미터는 정말 경사가 가팔랐다.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어가기 위해 길가에 앉았다. 쏟아지는 빗속에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본다. 시원하다. 빗방울이 이렇게 시원했던가? 장대비가 수없이 얼굴에 부딪친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맨 얼굴로 비를 맞는 것이. 아마 어릴 때 경험한 이후로는 처음인 거 같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내가 이런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한참이나 그렇게 비를 맞고 있었다. 기분이 참 좋아진다. 오랜만에 맛보는 상쾌한 느낌이다.
그러다 고개를 내려 우연히 경사진 아스팔트 표면을 보았다. 거기에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장대비가 내리면서 아스팔트 위에 부딪치자 수많은 물방울이 튀면서 밑으로 흘러 내려간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수 많은 군중들이 뭐라고 으악대면서 길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이응로 화백의 <군무>가 연상되었다. 그 그림은 수많은 사람들이 화폭을 가득 매우고 팔을 들어 뭐라고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마 이화백이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그 그림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넉놓고 비와 놀다가 다시 고개를 올라가기 시작한다. 겨우 겨우 터널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낭패란 말인가. 터널은 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만한 작은 터널이었다. 저 멀리 아스라이 맞은 편 입구가 희미하게 보인다. 차가 한 쪽에서 출발하면 다른 편에서는 기다렸다가 그 차가 통과한 다음에 출발한다. 한참동안 고민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문제는 터널 안에서 차를 만났을 때 피할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터널 폭이 좁았던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터널을 포기했다. 가까운 곳으로 질러 가려다 더 고생을 하게 되었다. 고개로 올라갔으면 벌써 정상을 넘어섰겠다. 나 자신에 대해서 정말 화가 났다. 이런 사실을 미리 표지판에 경고하지 않은 정선군청에도 화가 치밀었다. “관광도시 좋아하네. 아직 멀었다 이 양반들아.”
500미터쯤 고개를 내려와 오른쪽으로 정상 고갯길을 다시 올라간다. 진즉 이쪽으로 올라갈걸. 더 편하게 가려다 낭패를 당한 꼴이다. 세상살이가 이런 이치가 아닐까? 차량들은 대부분 터널로 다니기 때문에 어쩌다 한두 대 오갈 뿐이었다. 장대비가 계속 내려 아스팔트 도로가 온통 물바다다. 길 위로부터 아래로 빗물이 마치 냇물처럼 흘러 내린다. 이미 12시가 훌쩍 넘어 너무 너무 배가 고프다. 아침 7시쯤 밥을 먹었으니 배고플 때가 되었지. 그동안 비가 계속 내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현금이 없어 식당에도 못들어가고, 비 때문에 배낭을 풀 수도 없었다.
너무 힘들어 쉬어가려고 길가에 수레를 멈추고 앉아 있는데, 맞은 편 도로변에 잘 익은 산딸기가 눈에 번쩍 띈다. 달려가서 정신없이 산딸기를 따먹었다. 수백 개는 따먹은 거 같다. 차를 타고 그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은 그 빗속에서 산딸기를 따먹는 나를 아마도 미친 놈으로 보았을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누나 친구들과 함께 무주구천동에 가서 산딸기를 맛있게 따먹고, 남은 걸로 소주에 담아 민박집에서 만난 어떤 친구와 밤새 술을 마셨던 이후 산딸기를 그렇게 많이 따먹은 건 처음이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고개 정상에 다다랐다. 오른쪽으로 음식점이 하나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으나 인기척이 없다. 개만 혼자서 낯선 방문객을 경계하면서 짖어댈 뿐이었다. 차량들이 터널로 다니면서 고개로 지나가는 차량들이 줄어들어 장사가 안되어 아마도 식당이 망한 거 같다. 비를 피해 나무 밑에서 버너를 꺼내 라면을 끓여 햇반에 말아 먹었다. 오후 2시에 늦은 점심이다. 그 라면조차도 먹지 못하고 꼴꼴 굶을 뻔했다. 라이터가 물에 젖어 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릴없이 배낭 3개를 온통 뒤져 다른 라이터를 찾아 버너에 겨우 불을 붙였다. 버너는 콜맨이라 이런 비바람이 부는 악천후 날씨에도 화력 하나는 끝내준다. 텐트나 버너 등 등산장비가 우수한지 아닌지는 이런 악천후에 시험해보면 된다. 장기 여행을 전문적으로 계획하는 사람들은 장비는 좀 비싸더라도 명품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싸구려 제품은 악천후에 제대로 작동 안될 가능성이 높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개를 내려가는 길은 신나는 시간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무거운 짐을 끌고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트래커들에게 만큼 실감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자전거여행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아마도 드물 것이다. 고개를 올라갈 때는 숨이 턱턱 막히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지만 정상을 지나 고개를 내려갈 때만큼 기분 좋은 일도 드물다. 이런 맛에 참고 힘든 고개를 오르는 것이다. 등산 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즐거움 때문에 힘들게 산에 오를 것이다.
한 시간쯤 고개를 내려가자 신동읍에 닿았다. 지방이 으레 그렇듯이 읍소재지 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길가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주민에게 부탁하자 바로 옆에 있는 자기 집에 가서 일을 보란다. 화장실이 옛날 그대로의 푸세식이다. 쪼그려 앉아서 일을 보는데 모기들이 엉덩이에 사정없이 침을 꽂아댄다. 우리가 양변기를 이용한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불편할까. 인간이란 참 간사한 존재라서 자기가 불과 몇 년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했던 시설이나 방식에 불편해 한다. 우리 시골집에도 이와 똑같은 푸세식 화장실이 몇 년 전까지도 있었는데. 우리가 중국 화장실이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 것과 중국 것은 형님아우 사이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다.
저멀리 농협이 보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현금을 5만원 빼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강원도에서는 현금이 없으면 항상 마음이 불안하다. 오늘 빗속에 점심을 꼴꼴 굶은 것도 현금이 없어서였다. ‘관광강원’이라는 말은 아직까지는 허구다. 관광객을 맞이할 수 있는 인프라는 그런대로 갖추어져 있는데, 이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경춘고속도로는 개통되었는데, 정작 인접도로를 만들지 않아 외래 방문객들의 짜증을 가중시키는 춘천시나 강원도의 처사도 오십보백보다.
어쨌거나 서울이나 영월 가는 차를 타야 하는데 비는 더 억수같이 쏟아진다. 정말 하늘이 발악을 하는 것 같다. 그 비를 맞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교통편을 물어보니 사람마다 다 말이 다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 가는 차는 없고, 영월로 나가야만 했다. 아니면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예미역에 가서 기차를 이용해야 했다.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어가서 여직원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신동에 택시가 두 대 있는데, 한 대는 지금 강원랜드에 가 있고, 한 대는 영월에 영화 보러가서 없단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아가씨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들어보니 택시기사인 것 같았다. 나를 태우러 온단다. 이렇게 고마울수가. 아가씨도 참 친절하다.
10분 쯤 기다리니 택시 한 대가 왔다. 택시기사는 그 비를 다 맞으면서 내 배낭 3개를 택시에 손수 실어 주었다. 길가에 있는 가게에 부탁해서 배낭을 비에 맞지 않게 가게 안에 들여다 놓았던 것이다. 예미역으로 가던 택시기사님이 내 손에 든 만 원 짜리를 보시더니 만원만 받고 영월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하신다. 20킬로가 넘는 거리이지만 가는 길이니까 그렇게 해주겠단다. 아까 영월로 영화를 보러 가다가 농협 아가씨로부터 전화를 받고, 차를 돌려 나를 태우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돈을 더 드린다고 했더니 그냥 됐단다.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천사 같은 분도 만나게 된다. 그 분 이름이 정선군 보디빌딩협회 회장이신 권광수님이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2009년 7월 11 - 12일)
교통
동서울에서 정선행 버스편이 하루 8회 운행되며, 첫차는 7시 10분, 막차는 17시 45분이다.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이 걸린다. 사북이나 태백 방면에서 서울로 가는 일부 버스들이 신동에서 정차하지만 편수가 많지 않으므로 영월로 나가서 서울행 버스를 타는 것이 좋다. 기차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예미역에서 청량리행 기차를 타면 된다.
숙박
정선 읍내와 동강을 따라 가는 도중에 민박이나 펜션이 있다. 동강에 있는 광하, 모평, 귤암리, 가수리, 갈매, 가탄, 하매, 고재벌, 수동, 병평, 점재마을에서 숙박을 할 수 있다.
식당
정선 읍내와 동강 주변에 요기할 만한 식당이 많이 있다. 신동에도 식당이 몇 개 있다.
주변 관광지
이 코스에는 동강 외에는 볼만한 것이 없다. 동강에서 레프팅을 즐기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후기> 이 사진들은 트래킹을 하던 시기인 여름 사진이 아니라 2010년 11월 20일에 다시 가서 찍은 늦가을 사진이다. 당시에는 비가 너무 내려 사진을 몇 컷 밖에 찍을 수가 없었다. 올 여름(2010년 8월)에도 다시 갔었는데, 작년에 찍은 사진이 있는 줄 알고 찍지 않았다. 물도 역시 맑지 않았다. 동강은 가을부터 물이 맑아진다고 한다. 이번에는 제장나루-소사마을-연포-백룡동굴(문희마을)-잔탄나루-문산마을-어라연-섭세마을까지 24킬로미터 구간을 동강을 따라 영월로 나오는 길을 확인해 두었다. 갈수기라 물이 많이 줄어서 강을 따라 트레킹이 가능할 거 같다. 곧 다시 가서 도보로 답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