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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구자라트')의 아마다바드')에 있는 의학협회에서 강연한 내용
사랑하는 그대들,
인간은 질병이다. 인간은 질병에 걸리지만 인간 자체도 질병이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독특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인간의 행운이며
인간의 불행이기도 하다.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나
근심, 긴장, 질병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상태 자체가
인간을 성장하게 만들었고 진화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질병은
현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질병은 인간을 역동적으로 만들었으며 활동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이것은 인간의 달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초조하고, 불행하며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외하면 어떤 동물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들을 미치게
하지 않는 한, 동물들은 스스로 미치지 않으며 신경과민이 되지도 않는다.
정글 속에 있는 동물들은 미치지 않지만 서커스단의 동물들은 미치게 된다.
정글 속에서 사는 돌물들은 변태가 되지 않지만 동물원에서
사는 동물들은 변태가 되고 만다. 어떤 동물도 자살을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자살을 한다.
인간이라는 질병을 치료하고 이해하기 위해 이제까지 두 가지 방법이
시도되어 왔다 하나는 의학이고 다른 하나는 명상이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학은 인간의 질병을 개별하므로
고찰한다는 것을 알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의학은 :
신체의 각 부분에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명상은 인간 자체를 질병으로 여긴다.
명상은 바로 인간의 인격(personality)을 질병으로 여긴다.
의학에서는 질병이 인간에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질병이 인간의 외부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견해 차이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며, 의학 역시 "질병을 치료하지 말고 환자를 치료하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것은 질병이 다름 아닌 환자 자신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질병들도 그 자체의 개체성과 특성이 있다.
만일 내가 결핵을 앓고 있고 그대 또한 결핵을 앓고 있다 해도 우리는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결핵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른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결핵을 치료한 방법이 그대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근원은 질병이 아니라 환자에게 있는 것이다.
의학은 인간의 질병을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명상은
인간을 깊은 내면에서부터 이해한다. 다시 말해 의학은 인간의 건강을
내부에서 가져오려 하지만, 명상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를 건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의학이 없다면 명상은 완전할 수 없다. 명상이 없다면
의학도 완전할 수 없다. 인간은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을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학적인 오류다
수천년 동안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별개의 실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한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인간은 오직 영혼뿐이라고 생각하여 육체를 등한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명상은 발달할 수 있었지만 의학은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학은 학문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육체가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부 사람들은 인간을 그저
육체로만 간주하여 영혼을 등한시하였다. 이들은 의학에서 많은 연구와
발전을 이루었지만 명상 쪽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인간은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다. 나는 이것도 언어학적인 오류라고 말한다.
인간이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별도의 두
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같은 기둥의 양쪽 끝이다. 인간을 제대로 통찰한다면 인간이
육체와 영혼을 합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정신-
육체(psycho-somatic)이거나 육체-정신(.iomato-psychic)이다. 혹은
마음-몸(mind-body)이거나 몸-다음(body-mind)이다.
나는 영혼 중에서 감각기관이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 육체이며, 육체
중에서 감각기관이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이 영혼이라고 정의한다.
비가시적인 육체가 영혼이며, 가시적인 영혼이 육체다. 육체와 영혼은 서로
다른 두 개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체가 아니다 그들은 같은
실체가 서로 다른 진동상태에 있는 것이다.
육체와 영혼이 두 개라는 개념은 인류에게 막대한 해를 끼쳤다.
우리는 항상 '둘'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한다. 예전에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가 별개라는 관점에서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가 분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물질이 에너지라고 말한다. 과거의 용어를 사용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질이 에너지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한 쪽에서 보면 물질로 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에너지로 보이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들은 둘이 아니다. 이것들은 같은 실체가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육체와 영혼도 같은 실체의 양극(兩極)이다. 질병은
양극 중 어디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질병은 육체에서 시작하여 영혼에
이를 수 있다. 사실 육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진동은 영혼에서
느껴진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육체적으로 완치된 후에도 여전히
아프다고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질병은 육체를 떠났다. 의사는 아무 ?
병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환자는 여전히 아프다고 느끼며, 다 나았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다양한 조사와 검사 결과 임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환자는 계속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환자는 의사들을 무척 괴롭힌다. 왜냐하면 모든 검사 결과가
질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병이 없다는 것이 건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은 그 자체로 긍정적(Positive)인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무이다.
질병이 없다는 것은 단지 부정적(negative)인 상태일 뿐이다
가령 우리는 가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시가 없다는 것은 단지 가시의 부재(不在)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꽃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의학은 아직 건강이 무엇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의학은 단지 질병이
무엇인지 밝혀 내려고 노력해 왔다. 의학자에게 질병에 대해 물어 본다면
그는 어떤 정의를 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는 거긱말을 할 것이다. 그는 질병이 없을 때 거기 남아 있는 것이
건강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기만이지 정의(定義)가 아니다.
어떻게 건강을 질병과 연관지어 정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꽃을 가시와 연관지어, 삶을 죽음과 연관지어, 빛을 어둠과 연관지어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남자를 여자와 연관지어 정의하는 것과 같으며
혹은 여자를 남자와 연관지어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의학은 아직까지 건강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다. 의학은 단지 질병이
무엇인지만을 말해 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의학은
모든 것을 표면에서 파악하며 판지 육체에 나타난 것만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표면에서는 질병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은 오직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힌두어의 스와스티아(swasthya)라는 말은 정말 훌륭하다.
영어의 '건강(health)'이라는 말은 스와스티아와 동의어가 아니다.
'건강(health)'은 '치료(healing)'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질병과도
관련된 개념이다. 건강은 '치료되었다(healed)'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은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사람을 의미한다.
스와스티아는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와스티아는 자기 자신
속에 정착한 사람, 자기 자신에 도달한 사람을 의미한다. 스와스티아는
자기 자신 속에서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사란을 의미한다. 이것이
스와스티아가 건강과 다른 점이다. 사실 세상의 어느 언어에도 스와스티아에
비견될 만한 단어는 없다. 세상의 언어에는 '질병(disease)' 혹은
'질병없음(nodisease)'이라는 말들의 동의어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와스티아의 개념은 바로 질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질병이 없다는 것은 스와스티아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스와스티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다른 극(極)에서
온 어떤 것, 내면에서 온 어떤 것이 필요하다. 비록 질병이 표면에서
시작되더라도 그 진동은 영혼에까지 울려 퍼진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다고 가정해 보자 돌이 수면에 떨어지면 그
곳에서는 소요7'1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생긴 파문(波紋)은 돌이
떨어지지 않은 호수의 저쪽 기슭에까지 이른다. 이와 유사하게 육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파문은 영혼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임상의학이
단지 육체만 치료한다면 저쪽 기슭에 도달한 파문들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호수에 돌을 던지고 돌이 떨어진 곳에만 집풍한다면
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 파문들은 어떻게 될까?
일단 사람이 질병에 걸리면 그 진동은 영혼 속으로 들어간다. 종존
육체가 치료를 받아 완쾌된 다음에도 질병이 존속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질병이 존속하는 것은 그 진동이 환자의 가장 깊은 존재에까지 메아리
쳤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학도 아직까지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명상이 없다면 의학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질병은 치료할 수 있지만 환자를 치료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질병만 치료되고 환자는 치료되지 않아서 환자가 항상 다시
찾아온다면 의사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다!
질병은 반대극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이 존재하는 상태 속에
이미 질병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이미 많은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식으로 질병애 걸리거나
초조해하지 않으며 긴장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동물도
마음 속에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는
개다. 개는 다른 것이 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아직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개에게 개 이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개는 동등하게 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어떤 인간에게 인간 이하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동물은 완전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인간은 완전해지기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 이런 불완전한 상태가 인간의 질병이다. 인간이 24시간
내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자가 되더라도
단지 괴로움의 수준만 바뀔 뿐, 괴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은 결코 부자가 가지고 있는 근심을 가질 수 없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최소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즉,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자의 근심에는 합당한 근거가 없다. 부자는
자신이 근심하는 이유조차 정확히 모른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근심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유가 있다면 안심할 수 있고 위안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유를 제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근심이 생긴다면 문제는 커진다.
가난한 국가들은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부유해지는 날
부유한 나라도 나름대로의 고통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인류가 가난한 자의 고통이 아니라 부유한 자의 고통을 선택하기를 바란다.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문제라면 부유한 자의 고통을 선택하는것이
더 낫다. 그러나 그때 초조해지는 정도는 더 심해질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불안과 근심은 세계의 어느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것보다 크다. 비록 어느 사회도 미국만큼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을 보면 환멸이 최초로 고개를 든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처음으로 환상이 깨져 버린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근심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미국에서 밝혀졌다. 인간 자신이 바로 근심이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근심거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인격은 끊임없이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요구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날이 갈수록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가 이미 성취한 것은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아직 엎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니체는 어느 책에선가 인간은 두 개의 불가능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
라고 말했다 인간은 항상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고 하며, 항상 완전해
지려고 한다. 모든 종교가 탄생한 것은 바로 완전해지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한때 지구상에는 성직자가 의사이기도 하던, 즉 종교 지도자가 의사
이기도 하던 때가 있었다. 한 사람이 성직자이면서 의사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같은 상황을 다시 맞이하게 된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단지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의사가 성직자를 겸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육체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졌고, 아울러 육체가 완전히 건강하다
해도 이런저런 문제가 증가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면에
존재하는, 육체와는 다른 측면에 존재하는 질병을 처음으로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기관 역시 원인을 필요로 한다. 만일 다리에 가시가 박히면
그제서야 우리는 다리를 느끼게 된다. 가시가 다리를 찌르지 않는 한
우리는 다리를 의식하지 못한다. 다리에 가시가 박히면 그 사람의
영혼은 화살처럼 다리를 향하게 되고, 자연히 다리에만 관심을 쏟게 된다.
그러나 다리에서 가시가 제거되면 우리는 또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된다.
비록 허기가 채워지고, 좋은 옷을 입고, 집이 잘 정돈되어 있고
원하던 아내를 얻는다 해도-세상에 이보다 더한 불행은 없지만
-그대는 또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될 것이다. 자기가 원하던 아내를
얻은 사람의 고통은 끝이 없다. 원하던 아내를 얻지 못한다면 최소한
희망 속에서 약간의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하던 아내를
얻게 되면 그것마저도 잃게 된다.
정신병원에 관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정신병원을 방문했다.
병원장은 그에게 병실을 구경시켜 주었다. 어느 독방 앞에서 그가
원장에게 물었다. "이 환자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자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얻지 못해
미쳤습니다 " 다른 독방에서는 한 환자가 창살을 두드리고, 가슴을 치며
머리털을 잡아뽑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자
원장은, 이 사람은 아까 그 사람이 얻지 못한 여자를 얻었는데 그래서
미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한 첫번째 사람은
미쳤으면서도 그녀의 사진을 가슴에 지닌 채 행복해했지만, 두번째 사람은
창살에 머리를 부딪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한 연인들은
참으로 다행이다!
사실 우리는 얻지 못한 것을 희망하며 그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희망하던 것을 성취하게 되면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면서
의사가 인간의 육체적 문제를 해결하면 그날부터 그는 다음
차원의 일을 떠맡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 인간은 내면의 질병을 자각할 것이다. 처음으로 그는 내면의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며 표면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도 정상이 아님을 알고 의아해할 것이다.
인도의 24명의 티르탕카라(tirthankara)"'가 모두 왕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붓다도 왕자였고 라마')와 크리슈나")도 모두 왕족
출신이다. 이들에게는 윽체 차원의 불안은 사라졌다. 그러나 내면에서의
불안이 시작된 것이다.
의학은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도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질병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간이라는 질병은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질병이다. 인간이라는 질병은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질병이다. 인간이라는 질병은 그가 얻은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며, 그가 얻지 못한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질병이다.
인간이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다른 모든 질병은
의사들이 치료를 하고 의학이 치료를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이 특별한
질병은 오직 명상으로만 치료가 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의 내면을
분해하고 내면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날, 의학은 완전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해하기로는 우리의 내면에 앉아 있는 병든 자가 육체 차원의
수많은 질병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육체가 아플 때마다 그 진동, 그 파문은 영혼에서도 ~
느껴진다. 이와 유사하게, 영혼이 병든다면 그 파문은 육체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세상에 그토록 많은 치료법이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병리학(病理學)"이 진정한 학문이라면 수천 가지나 되는 치료법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질병은 수천 가지나 되므로 그런 일도
가능한 것이다. 어떤 질병들은 역증요법(逆症療法)"'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하여 표면으로 옮겨온 질병들은 역증요법이
소용이 없다. 표면에서 시작하여 내면으로 들어간 질병들은 역증요법이
매우 효과적이다. 내면에서 표면으로 옮겨온 질병들은 결코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육체에 나타났을 뿐이다. 이런
질병들의 기원은 항상 정신 속에 있거나, 혹은 그보다 더 깊은 영혼 속에
있다.
만일 누군가가 정신 속에 질병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어떤 임상적인
약물로도 구제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해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약물이 작용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약물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반드시 어떤 해를 끼치게 되어 있다. 아무 약효가
없는 약만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 가령, 동종요법(同種療法)")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동종요법은 아무 약효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종요법은 효과가 있다. 동종요법은 약효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효과를 본다는 것과 약효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것은
두 개의 독립된 현상이다. 누군가가 정신 차원에서 질병을 만들어 내고
있고 그래서 어떤 플라시보(placebo)가 필요하다면, 그는 효과를
보게 된다. 그에게는 플라시보가 필요하며, 위안이 필요하다. 그에게는
자신이 아픈 것이 아니라 단지 아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이런 확신은 탁발승의 유골이나 신성한 갠지스 강물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플라시보라고 부르는 위약(僞藥)에 데한 실험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만일 열 명의 사람이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그 중의
세 명은 역증요법으로 치료받고, 다른 세 명은 동종요법으로, 나머지
세 명은 자연요법(自然療法))으로 치료받고 있다면, 흥미있는 결과가
발생한다. 이 세 요법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비율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 비율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곰곰이 쟁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내가 보기엔 역증요법만이 과학적인 치료법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비과학적인 면이 있으므로 과학적인 치료법만으로는 효과를 얻기 힘들다.
역증요법만이 인간의 육체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룬다 그러나
역증요법만으로는 모든 질병을 100퍼센트 치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면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조적이며 투사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역증요법이 듣지 않는 사람은 비과학적인 이유 때문에
앓고 있는 것이다. 비과학적인 이유 때문에 앓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대는 과학적인 치료법과 비과학적인
치료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과학적인 질병과
비과학적인 질병이 있다고 말한다. 비과학적인 질병이란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질병에 걸리는 것을 뜻한다. 정신에서 시작해서 육체에 나타나는
모든 질병은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치료될 수 없다.
나는 장님이 된 젊은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가 장님이 된 것은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은 손상되지 않았다 안구 전문가들은
그녀의 눈이 정상이며 그녀가 모든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누구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불길 속으로 안내한다면 그녀는 불길 속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벽에 머리를 부딪혀 다치곤 하였다. 그녀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질병은 의사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나에게 데려왔고 나는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의 가족이 그 사람을 보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계속해서 묻자 그녀는 이 세상에서
그녀의 연인말고는 어느 누구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연인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보지 않겠다는 이 결심‥‥‥ 그리고 결심이 그 전도로
강하다면 심리적으로 눈은 장님이 된다. 눈은 장님이 되어 어떤 것도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해부해 보아도 이런 사실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눈의 해부학적인 구조는 정상이겠지만,
보는 메커니즘은 기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눈 뒤에 있던 보는 자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매일 경험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육체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육체 속에 현존해 있는 동안에만
작용한다.
다리에 상처를 입은 채 하키를 하고 있는 어린 소년을 생각해 보자,
그는 피를 흘리고 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데 30분 뒤에 경기가 끝나면 그는 자신의 다리를 보고 언제
다쳤느냐고 고함을 치며 묻기 시작한다. 통증이 심해진 것이다. 이제
그가 다친 지 30분이 지났다. 그는 다리를 다쳤으며, 다리에 있는 감각
메커니즘은 완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외냐하면 30분 뒤에 그에게
통증을 알려준 것은 감각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리의
통증은 왜 좀더 일찍 전달되지 않았을까? 그의 관심은 다리에 있지 않고
경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다리를 인식할 수 없었다. 다리는 계속해서 그에게 정보를 주었고
-근육과 신경이 경련을 일으켰음에 틀림없다-가능한 모든 창구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거나
혹은 다른 홋에 있었다. 그는 부재(不在)중이었으며 현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30분 뒤에 되돌아왔을 때, 다리에 상처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그녀의 가족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었다. 나는 그녀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자 부분적인 자살, 즉 눈의 자살을 한 것이라고
가족에게 말해 주었다. 부분적인 자살을 한 것말고는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녀의 연인을 만나게 하라. 가족들은 말했다
그것이 눈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일단 그렇게 해 보라고 했다.
그녀가 연인을 만나도 되고, 연인이 5시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문 앞에 가서 기다렸다. 그녀의 눈은 정상이 된 것이다!
이것은 허위가 아니다. 최면술의 실험들은 이것이 허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일 깊은 최면에 빠진 사람에게
조약돌을 쥐어 주고 그것이 뜨거운 석탄 조각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타다 남은 불씨를 쥐고 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는 조약돌을 집어던지고 불에 데었다고 울부짖으며
소리칠 것이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실제로
물집까지 생길 것이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불타는 석탄을 쥐고
있다는 상상만으로 손에 물집이 생겼다면 육체 차원에서 이 물집을 치료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물집은 마음의 차원에서 치료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한쪽 면만을 고려했기 때문에 육체에 침범한 질병들을
서서히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음에서 기인하는 질병들은
증가하였다. 오늘날에는 과학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최소한 50퍼센트의 질병이 마음에서 생긴다는 사실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마음의 질병에 걸리려면,
먼저 강한 마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아직 95퍼센트의 질병이
육체에서 생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마음에서 생기는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
마음에서 생기는 질병은 보통 내면에서 시작하여 표면으로 번져 나온다.
이것들은 표면으로 나오는 질병이다 그러나 육체에서 시작하는 질병은
안으로 들어가는 질병이다. 정신에서 기인한 질병이 육체에 발현
(發顯)한 것을 치료하려 한다면 질병은 즉시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정신에서 기인한 질병이 한두 군데 혹은 두세 군데에서 나타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의사들은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사들은 질병을 여러 가지 형태로 늘려 놓은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한 군데를 통해서 나을 수 있는 것이 이제
여러 군데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엉뚱한 곳에 댐을 쌓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명상은 인간의 다른 측면을 치료한다. 약물은 물질에
의존하며 그 화학적 구조에 의존하지만, 명상은 의식(意識)에 의존한다.
비록 사람들은 명상에 사용되는 알약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그런
알약은 없다. LSDI')나 메스칼린(mescalin)'), 마리화나(marijLlana)") 등
수천 가지의 것들이 시도되었다. 명상을 위한 알약을 만들려는 수많은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알약은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런 알약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치 육체 차원에서만 치료를
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낡은 고집일 뿐이다. 정신이 내면에서
병들었어도 우리는 표면만 치료할 뿐, 결코 내면을 치료하려고 하지 않는다.
메스칼린이나 LSD 같은 마약은 내면이 건강하다는 환상을 줄 뿐,
실제로 내면을 건강하게 하지는 못한다. 어떤 화학 물질을 통해서도
인간의 내면 깊숙한 존재 속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화학 물질의 효과는 약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접근 방식은 덜 중요해진다.
내면에서는 비물질적인 접근 방식, 혹은 정신적인 접근 방식이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편견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의사라는
직업은 세상에서 가장 인습적인 직업 중 하나이다. 교수와 의사는
인습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그들은 여간해서는 낡은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아마도 매우 당연한
이유일 것이다. 의사나 교수가 낡은 생각을 버리고 융통성을 갖게 된다면
그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만일 사물들이 고정되어 있다면
그들은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개념들이 불확실하거나
유동적인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변함이 없다면 그들은 가르치는 동안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들조차도 교수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큼의 확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수는 자기가 말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직업상 이런 종류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은 인습적이 된다.
교사들은 점차 인습적이 된다. 이것은 커다란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교육은 가장 인습적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이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사들이 발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대학에는 수많은 교수들이 있지만 발명이나
발견은 대학 밖의 사람들에 의해 이구어진다. 노벨상 수상자의 70퍼센트
이상이 대학 밖의 사람들이다.
인습으로 가득 차 있는 또 다른 직업이 의사라는 직업이다. 거기에도
역시 직업적인 이유가 있다. 의사들은 매우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환자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의사들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환자는 죽고 단지 생각만 남을 것이다. 의사들이 매우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이론을 실습하며, 매번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다면 거기에도
역시 위험이 따른다. 의사는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며,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은 주로 과거의 지식에 의존한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매일 즉석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과거의 지식에 의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업(醫療業)은 의학적 연구에 비해 30년이나 뒤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환자들이 불필요하게 죽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시도되지 못하는 것들이 곧 시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직업적인 위험 요소이다. 그리고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
가운데 몇 가지는 그들 내면에 매우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인간보다 약을 더 신뢰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식(意
識)보다 화학을 더 신뢰하며, 의식보다 화학을 더 중요시한다 이런 태도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화학에 더 많은 중요성이 부여될 때
의식에 대해서는 아무 실험도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예를 몇 가지 들려줄 테니 아이디어를 얻기 바란다.
아이를 낳을 때 산고(産苦) 없이 출산하는 것, 즉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오래된 과제였다. 물론 성직자들은
고통 없이 아이를 낳는 것에 반대한다. 사실 성직자들은 세상에서 고통과
근심이 사라진다는 생각 자체에 반대한다.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지면
그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직업은 의미를 잃게 된다
세상에 고통과 근심과 불행이 있다면 그때는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 고통이 없다면 아마 신조차도 완전히 무시될 것이다
사람들은 거의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 속에 있을 때에만
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항상 고통 없는 분만에 반대해 왔다.
그들은 출산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출산의 고통은 없어져야 한다. 출산의 고통이 신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떤 신도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의사는 고통 없는 출산을 위해 약물을 투여하거나
마취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의사들이 취하는 이런 조치는 산모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여자들
스스로도 이것을 시행해 왔다‥‥‥
75퍼센트의 아이들이 밤에 태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낮에는 산모도
매우 활동적이며 깨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일이 어렵다. 잠들어
있을 때 산모는 좀더 이완되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기 수월한 것이다.
밤에는 산모도 잠을 자며 좀더 이완되어 있다. 그래서 75퍼센트의
아이들은 태양이 떠 있을 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 산모는 아이가 태어나려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장애를 만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는 나중에도 많은 장애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산모는 장애를 만들기 시작한다.
의사들이 취하는 조치 중의 하나는 약물을 투여해서 산모의 육체를
잠잘 때처럼 이완시키는 것이다. 이런 조치가 취해지고 있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의식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에 대한 신뢰가 계속 줄어들면 의식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로젬(Lotem)이라는 의사는 인간의 의식을 신뢰했다. 그래서 수천 건의
무통 분만을 유도해 냈다. 이 방법은 산모의 의식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산모는 출산시에 명상적으로, 의식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가 출산에 대항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출산을 환영하게 해야 한다.
출산의 고통은 아이의 탄생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산모가 아이의 탄생에 저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산모는 아이의 탄생과
관련된 신체의 모든 메커니즘을 위축시키려고 한다. 출산의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서 생긴 이 저항이 아이의 탄생을 막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테어나려고 할 때, 두 사람 사이에는 난투가 벌어진다.
산모와 아이 사이에는 커다란 충돌이 생긴다. 이런 싸움 때문에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이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싸움과 저항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산모의 저항을 해결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산모에게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 상태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는
진정한 의미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
이유가 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아이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사실은 두 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태어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의 여자가
어머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무의식 상태에서 태어나면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가 일그러진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태어나지 않고 단지 유모만 남게 될 것이다.
나는 화학 물질이나 다른 피상적인 방법으로 산모를 진정시켜서 아이를
출산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산모는 분만하는 동안 충분히
의식적이어야 한다. 바로 그 의식 속에서 어머니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 사실을 통감한다면 산모의 의식은 분만에 대비해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산모는 명상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
명상은 산모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산모가 저항하거나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모는 분만 과정에 협조해야 한다
마치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바람이 불듯이, 낙엽이 떨어지듯이
산모는 자기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에 완전히 협조해야 한다. 만일
산모가 분만시에 완전히 협조하고, 저항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명상적으로 완전히 빠져들 수 있다면, 고통 없는 출산이 가능하다. 고통은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 이 방법을 이용한 많은
실험들이 행해졌다. 앞으로 산모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파급효과는 상당히 클 것이다.
첫째, 우리는 처음 대할 때부터 고통을 주는 일이나 사람에게는 나쁜
감정을 갖기 시작한다. 처음 만날 때부터 싸우게 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적의(敵意)를 갖게 된다. 이것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
처음부터 마찰을 일으켰던 사람과는 협조라는 교량을 만들기가 어렵다.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산모가 아이를 낳는 데
협조할 수 있고, 충분한 각성 속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여기 흥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말은 들어 왔지만 '출산의 행복'이라는 말은 결코 들어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모가
풍분히 협조한다면 '출산의 행복'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통 없는 탄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탄생에 찬성하는 것이다.
의학의 도움으로는 기껏해야 고통 없는 탄생을 이를 수 있을 뿐, 결코
행복한 탄생을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의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행복한 탄생을 이를 수 있다 그리고 탄생의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산모와 아이 사이에 의식적인 내면의 연결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면으로부터도 무엇인가가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한 가지 실례에 불과하다. 질병에 걸릴 때마다 우리는
단지 표면에서만 질병과 싸우려고 한다. 문제는 환자가 내면에서도
정말 질병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사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질병은 환자가 자초(自招)한 것일
가능성도 많다. 사실 환자가 자초한 질병의 수는 많다. 제 스스로 찾아오는
질병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질병은 환자가 자초한 것이다. 물론 질병이
찾아오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그 질병을 초대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이 세상에 있는 어느 사회에서도 성교와 아이의 탄생 사이에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없었다 거기에는 아홉 달이라는 긴 시간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원인과 결과를 서로 연결
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교가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굳이 그 둘을 연결시켜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인간이 아홉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지금 아이의 탄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질병과 관련해서도 일어난다.
우리는 종종 질병을 초대하지만 질병은 나중에야 찾아온다. 그 둘
사이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우리는 둘 사이에서 어떤 연결 고리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파산 직전에 놓였던 한 남자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시장이나 상점에 가기를 두려워했다. 거리를 걷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어느 날 그는 욕실에서 나오다가 넘어져서 그만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온갖 방법으로 치료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반신불수가 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반신불수가 되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혹은 그가 반신불수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는지 아닌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 그는 반신불수에 대해서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혹은 그의 무의식에서
그는 시장이나 상점이나 거리에 나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것이 첫번째다.
둘째, 그는 사람들이 덜 적대적이기를 바랐다. 그는 사람들이 동정심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이제 육체가 그를 도와 줄 것이다. 육체는
항상 그림자처럼 마음을 따른다. 육체는 항상 마음을 도와 준다. 그리고
마음은 항상 모든 조치를 취해 준다. 사실 우리는 마음이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대가 하루 종일 굶었다면 마음의
배려에 의해 밤에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마음은 꿈속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는 하루 종일 굶었으므로 틀림없이 시장할 것이다.
그러나 궁전에서 열리는 잔치에 참석하라: 그대는 꿈속에서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마음은 육체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조치를 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속에서 보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마련한 대용품이다. 낮에 할 수
없었던 것을 밤에 하는 것이다. 마음이 모든 조치를 취해 준다. 가령
밤에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마음이 알람을 울려 줄 것이다 마음은
꿈속에서 그대를 화장실에 보낼 것이다. 그래서 방광의 긴장을 덜
느낄 것이다. 그대는 화장실에 다녀왔으므로 모든 것이 편안하다고 느낄 것이다.
수면이 방해받지 않도록 마음이 조치를 취한 것이다. 마음은
그대의 욕망이 충족되도록 하루 종일 조치를 취한다.
이 남자는 반신불수가 되어 쓰러졌다. 이제 우리는 그의 반신불수를
치료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치료는 사실 그에게 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반신불수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병을 부른 것이다. 그의 반신불수를 치료하더라도 그는 두번째나 세번째
혹은 네번째 질병에 걸릴 것이다. 그는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질병으로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쓰러지자마자
그는 모든 상황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는 자신이
비관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변명거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제 그는 채권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가 어떻게 당신 돈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보지 못합니까?" 사실 채권자는 돈을 달라고 하기가
부끄러울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를 돌보고 아이들은 시중을 들고
그럴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이 그를 만나러 올 것이고,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가 질병에 걸리기 전에는 결코 그에게 사랑을 』
보여 주지 앉는다. 그러니 사랑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질병에 걸려야 한다.
여자들이 항상 질병에 걸리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사랑을 받을 슥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리 남편들을 집에 잡아 둘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남편을 집에 잡아 둘 수 없지만 질병은
남편을 잡아 둘 수 있다. 일단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이것이 마음 속에
새겨진다면, 우리는 동정을 받고 싶을 때마다 질병에 걸리게 된다. 사슬
아픈 사람에게 동정심을 럴여 주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동정심을 통해
그의 질병에 어떤 낼새가 더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헐한 일이다. 그대는 단지 그를 치료해야 할 뿐이다.
반신불수가 된 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기껏해야 』
그로 하여글 질병의 종류만 계속 바꾸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질병에
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깊은 자기암시일 뿐이다
이 남자의 반신불수는 그 기원(起源)이 정신 속에 있는 것이다
반신불수가 된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두 해 동안
반신불수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일어설 수도 없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불이 나자 가족이 모두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자기 그들은
이 남자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남자가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남자는 앉아 있지도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때 그의 가족이 그가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 남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는 사람들을 놀린 것이 아니다.
그의 질병은 육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환자의 질병이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할 때 환자는 그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 말은
환자가 불필요하게 죄병을 앓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아프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사람은 없다. 질병에 걸리는 데에는 정신적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육체가 질병에 걸리는 이유만큼이나 중요하다. 혹은 그
보다도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실제로 육체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가 비록 실수로라도 어떤 환자에게
그가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질병에 걸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의사의
잘못이다. 환자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의사에게
씁쓸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태도를 갖지 못한다.
만일 내가 다리를 다쳤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동정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이 아프다면 사람들은 마치 내가 무슨 잘못이나
한 것처럼 그것이 정신적인 질병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내가 다리를
다쳤다면 나는 동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을
앓고 있다면 그것이 마치 내 잘못인 양, 나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마음에서 기인하는 질병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의사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의사들은 단지 육체에서 기인하는 질병에 대한 치료법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들은
의사의 치료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질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그는 이런 질병이 가신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그대에게 다른 타입의 의사를 찾아보라고 조언해 주어야 한다.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은 먼저 내면을 치료한 이후에
표면을 치료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명상은 안에서 바깥으로 치료해 나가는 방법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붓다를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철학자입니까? 아니면 사색가입니까? 아니면 성자 혹은
요기(yogi)입니까?"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단지 치료하는
사람, 즉 의사일 뿐이다. "
붓다의 이 대답은 정말로 경이롭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단지
치료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면의 질병에 대해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
그대와 이야기하고 있다.
육체에서 기인한 질병을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으므로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에 대해서도 무슨 조치를 취해아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날,
우리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
우리는 의학과 명상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 간격을 메우는 데 의학보다 더 도움이 되는 학문은 없다.
화학은 아직 종교에 가까워질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물리학과
수학도 아직은 종교에 가까워질 이유가 없다. 수학은 종교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수학이 종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대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수학이 종교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수학은 그
게임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다. 수학은 단지 게임일 뿐,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생명을 다루고 있다.
아마 처음으로 종교와 과학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은
의사일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은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문명이
발달하고 이해력이 있는 나라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다.
의사들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jung))')은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근본적으로 종교가 없어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그는 의사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지적이다. 만일 환자들에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면 그들은 다시 건강해질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은 알아둘 만하다. 삶이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되면‥‥‥
서른다섯 살까지는 오르막길이나 그 이후의 삶은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된다.
서른다섯이 삶의 절정이데-. 그러므로 서른다섯 살까지는 명상에서
가치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까지는 육체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마 이 단계에서의 모든 질병은 육체의
질병일 것이다. 그러나 서른다섯 살 이후의 질병은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제 삶은 죽음을 향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성장할 때
그것은 외부로 확장된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에는 안으로 수축한다.
노년기는 안으로 수축해야 하는 시기이다.
노인들의 모든 질병은 대부분 죽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아무개가 이런저런 질병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개가
죽음 때문에 질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질병에 걸리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는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며 질병에 걸리기 시작한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내일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질병에 걸릴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이다. 체온이나 혈압, 맥박 등 모든 검사 결과가 정상이다.
청진기로도 아무 이상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일 죽게
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릴 것이다. 24시간 안에
걸릴 수도 없는 수많은 질병에 걸릴 것이다.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는 모든 질병에 대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이다. 그는 질병에 저항하기를 그만둔 것이다.
그는 죽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내면에서 모든 질병에 대해 보호막을
만들어 주던 의식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이제 그는 죽을 준비가 되었으므로
질병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은퇴한 사람들이 일찍 죽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퇴하려는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 은퇴한
사람들은 5년이나 6년 정도 일찍 죽는다. 일흔 살에 죽을 사람은 예슨
다섯 살에, 여든 살에 죽을 사람은 일흔다섯 살에 죽을 것이다. 은퇴하고
있는 10년이나 15년의 세월은 죽음을 준비하는 데 소비될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삶에서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거리에서도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가 사무실에 있을 때는 달랐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경제 원칙에 의해서 움직인다. 사무실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으며
이제 사람들은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계속 인사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그를 잊을 것이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단는다. 그는 뿌리째 뽑힌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자식들도 자기 아내들과
극장에 가기 바쁘다. 전에는 그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갑자기 그는 나약해지며 죽음에 대해 완전히 열려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언제 내면에서 건강해지는가?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내면 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는 때이다. 보통 우리는 내면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느낌은 손이나 다리, 머리, 가슴 등 모두 육체와
관련된 것이다. 거기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없다 우리의 모든
자각은 집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집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만일 내일 집이 무너진다면
나는 내가 무너진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생각 자체가 나에게
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단지 집에 거주하고 있을 뿐이며, 비록 집이
무너져도 나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그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명상을 하지 않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명상의 첫번째 의미는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 속에 있는 동안, 의식은 항상 다른 것을 자각한다. 의식은 결코
의식 자체를 자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홀로 앉아 있을 때 졸음을 느끼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고 있다면
깨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어두운 방에 홀로 있으면 졸음이
올 것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므로 의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면 잠자는 것말고 무엇을 하겠는가?
달리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이 홀로 있다면, 잠이 그대를 엄습할 것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잠과 명상이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같고,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라. 잠은 홀로 있지만 혼수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명상은 홀로 있지만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홀로 있을 때 그대 자신을 자각할 수 있다.
어느 날 붓다와 함께 앉아 있던 사람이 발을 흔들고 있었다. 붓다가
그에게 물었다. "왜 발을 흔들고 있는가?"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괘념치 마십시오. 단지 발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발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
붓다가 말했다. "발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
그렇다면 그 발은 누구의 발인가? 그대의 발인가?"
그 남자가 말했다. "그것은 제 발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까? 어서 하시던 말씀을 계속해 주십시오."
붓다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무의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발의 움직임을 자각』하도록 하라.
그러면 두 줄기의 각성이 생길 것이다. 그대는 발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주시자도 자각하게 될 것이다. "
자각은 항상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밖으로 진행하고 다른 하나는
내면을 관통한다. 그러므로 명상의 기본은 육체와 자신을 동시에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이 생기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의학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한다면
인간이라는 질병을 결코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을 연장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
사람들은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죽음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의학이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킨 나라에서 어떤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는가?
바로 안락사를 위한 울동이다. 노인들은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헌법에 명시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그들을 병원에 묶어
둘 뿐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산소 탱크에 넣어서 끝없이 살아 있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를 계속 살아 있게 할 수 있지만 그런 삶은 죽음보다도
못하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산소 탱크에
연결된 채, 거꾸로 혹은 다른 이상한 자세로 병원에 누워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금세기 말이면 세상에 있는 모든 문명국이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헌법상의 인권으로 갖게 될 것이다. 당사자의 요청을 무시하고
그를 계속 살아 있게 할 권리가 의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킴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다.
인간을 좀더 건강하게 하는 것 역시, 그를 좀더 행복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는 결코 죽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런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명상은 이런 불멸성, 즉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오직 껍데기만이 죽을 뿐이다. 그대는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육체를 돌봄으로써 육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 그대의 문 앞에 와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자각해야 한다. 이렇게 내면을 이해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내면에서의 명상과 표면에서의 치료를 통해 의학은 완전한 학문이 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명상과 의학은 같은 과학의 양극(兩極)이다. 그러나
아직 연결 고리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서히 명상과 의학은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주요 병원에서는 최면술사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최면은 명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걸음 다가선 것이다 최소한 인간의 의식에 대해 무엇인가가
행해져야 하며, 육체를 치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현재는 최면술사가 병원에 들어갔으므로 다음에는 사원(寺院)이 병원에
들어갈 것이다. 아마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면술사 다음으로는
모든 병원이 요가과(yoga科)나 명상과(冥想科)를 신설할 것이다. 사실
그래야 한다. 그때 우리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육체는 의사들이 돌볼 것이고, 마음은 심리학자들이 돌볼 것이며, 영혼은
요가나 명상이 돌볼 것이다.
병원이 인간을 전체로서 받아들이고 전체로서 치료하는 날, 그날은 인류에게
환희의 날이 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그날이 빨리 올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사랑과 침묵으로 나의 이야기를 경청해 쿤 그대들에게 감사하다.
끝으로 그대들 모두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신에게 인사드린다. 나의 인사를
받아 주기를·
오쇼
園 譯註
1) 구자라트(GLliarat◎ 인도의 서해안에 있는 주(州).
2) 아마다따드(Ahmadabacl) : 子자라트 주(州)의 주요 도시로 서인도에서는
봄베이 다음가는 대도시다.
3) 임상의학(臨床醫學, clinical medicine) · 직접 환자와 접촉하면서 진료하는
의학의 한 부문. 의학은 기초의학·사회의학 임살의학으호 대별된다.
4) 티르탕카라(tirthankara) :자이나교에서, 윤회라는 삶의 흐름을 건너는 데
성공한 후 다른 사람들이 따를 길을 만든 구원자를 가리키는 말. 자이나교
신앙에 따르면 각각의 우주적 주기마다 24명의 티르탕카라가 나타난다고 한다.
티르탕카라는 회화나 조각에서는 카요트사르가(kayotsarga ' 육신으로부터의 해탈)
라고 알려진 부동의 자세로 서 있거나, 사자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형상은 종종 근리석 또는 그
밖에 매우 반들반들한 돌이나 금속에 새겨지는데, 그 차가운 느낌을 주는 표면은
일상세계에 대한 냉엄한 초연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티르탕카라들은
완벽한 존재이므로 상징적인 색깔이나 표상을 제외하고는 서로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5) 라마(Rama) :가장 널리 숭앙받는 힌두교 신들 중의 하나로 무용(武勇)과
미덕의 화신. 인도 전승(傳承)에 따르면 세 명의 라마(파라슈라마·발라라마·
라마찬드라)가 나오지만, 라마라는 이름은 주신(主神)인 비슈누의 일곱번째
화신인 라마찬드라를 주로 가리킨다. 라마는 고대 인도의 영웅으로서 뒤에는
신격화 되었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6) 크리슈나(Krishhna) 인도의 신들?가운데 가장 널리 숭배되고 사랑받는 신의
하나. 최고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고 힌두교 비슈누 신의 여덟번째 아바타라
(avatars)로 숭배되기도 한다. 박티(bhakti)를 강조하는 수많은 종파들이
크리슈나를
중심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오랜 세월 시 ·음악·회화 등의
분야에서 풍부한 종교적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가장 널리 알려진 크리슈나의 모습은
청년 크리슈나가 그를 흠모하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피리를 부는 모습이다.
7) 병리학(病理學, pathology)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질병 발생의 기전
(機轉), 시간 경과에 따른 장기(臟器)조직의 변화를 육안적 ·조직학적으로
관찰하며, 아울러 기능적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 궁극적으로 질병의 본태를 밝히고,
시간의 경과에 따르는 형태학적 ·기능적 변화를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8) 역증요법 .치료하려는 질환과 전혀 반대의 증상을
일으키는 약제를 쓰는 치료법. 이증요법(異症療法)이라고도 한다.
9) 동종요법(同種療法, homeopathy) : 19세기에 널리 쓰인 치료법의 하나로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치료한다(like cures like)"는 원칙에 기초하여,
건강한 사람에겐 투여했을 경우 어떤 질병이 나타나는 약물을, 그와 같은 질병에
걸렸을 때에 소량씩 투여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동종질환동종치료
(同種疾患同種治療法)떼 기초한 이 치료체계는 1796년 독일의 의사 사무
하네만이 도입했다. 이 치료법의 기본 요점은 첫째, 건강한 사람에게서 그 병
비슷한 증상을 일으키는 약물이나 치료법이 질병치료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둘째 특절 약물이 치료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사람에게서
그 효과가 '증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동종요법의 또 다른 특징은 용량론이다.
동종요법 전문가들은 의약품이 매우 소량 투여되어도 작용한다고 믿는다.
20세기에 들어서 동종요법은 의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호응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특히 질병의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질병의 원인을 밝혀 내려는 연구에는
소홀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10) 플라시보(placebo) 약리작용을 갖지 않았거나 가졌더라도 직접적인
결과보다는 심리적인 효과를 목적으로 환자에게 약을 투여하는 것으로, 가약
또는 위약이라고도 한다. 플라시보는 라틴어의 placere(위로하다
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보통 유당(乳糖, lactose)을 많이 사용한다.
11) 자연요법(自然療法, n剡uropathy) ·공기 태양열 ·물·온천 · 열 등 」
연계의 물질이나 환경을 치료에 응용하는 물리요법을 말한다. 화학요법이나
침술요법 등을 위주로 하는 현대 임상의학과는 대립적인 면이 있는 요법으로
의료 및 건강법의 보조적인 부분이다.
12) LSD(IYEergic aclll rliethylamlde) : 맥각(麥角 , e.1:of) 알칼로이드(alka
1()irA)의 일종인 리세르그산 디에칠아미드의 약칭으로, 리세르기드라고도 한다
1,SH는 입을 통해 20mg만 섭퓌해도 중추신경계 및 말초신경계의 기능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물체의 윤곽은 파도치듯 찌부러져 보이고, 주위으
사람 또한 이살하게 보이며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객채의 변화로 전환되어,
마치 깐화결을 늘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색채나 형대가 변화한다. LSD를 연용하면
점차 효과가 저하되는 네성이 생긴다. 사람에 따라서는 LSD 섭취에
치해 장기간에 걸쳐 펑신병(17sych(),tis) 증상이 출철하는 일도 있다.
13) 메스칼린(mescaline) :선인장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구슬선인장의 일종인
로포포라(Lophophora williamsii)의 꽃머리 페요테(peyote)에 들어 있는
마취성 알칼로이드의 하나. 페요테는 선인장의 혹 위에 생긴 단추 모양의 것인 데
메스칼린 등의 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를 함유하고 있다. 이 성분은 진해
(鎭咳) ·진통 작용이 있으나 대마(大麻)처럼 명정( drunkenness) ·망상을
일으키며 구토 현기증 동공산대(瞳孔散大)를 일으키기도 한다. 중독되면
다채로운 색채가 나타나는 환시나 음악이 들리는 것 같은 환청 등이 나타난다.
14) 마리화나(marijuana) : 칸나비노이드(cannabinoide) · 하시시(hashish) -
대마(大麻)라고도 한다. 인도대마초(Cannabis sativa roar indicts)의 잎 꽃·
줄기를 말린 것으로, 옛날부터 아시아에서 끽연 등의 기호품이나 치료약으로
사용되어 왔다. 끽연 등의 수단으로 마리화나를 사용하면 도취상태가 되고,
비현실감·기분좋음·환각·망상 불온(不穩), 사고의 혼란, 공간 및 시간 감각
의 왜곡 등 정신변용(精神變容)을 초래하게 된다.
15) 칼 구스타프 응(Carl Gusta.·Jung, 1875∼1961) :스위스의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영향을 받아 분석심리학을 세웠으며 외향성
·내향성 성격, 원형(原型) 등의 개념을 제시하였고, 개인의 무의식 속에
역사적 배경을 가진 집단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 애들러 등과
함께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였으나 리비도에 대한 프로이트와의 의견대립으로
탈퇴한 후 치료와 저작에 전념하였다. 주요 저서로 (:리비도의 변전과
상징기, (:심리적 유형3, (:무의식의 심리학:) 등이 있다.
제1장
건강의 정의
최근에 스승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초목(草木)처럼 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음 또한 축제가 될 수 있는 삶의 예술(art of living)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인간은 삶을 성취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을 성취하고
안 하고는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인간은 삯을 놓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숨쉬고, 먹고, 늙고, 무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은 삶이 아니다. 이것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70년에 결친 점진적인
죽음일 뿐이다. 그대 주위에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렇게
서서히 죽어 가므로 그대 또한 그들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모든 것을 배운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의미하는 '삯'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단지 나이를 먹는 것이 삶은 아니다. 삶은 성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어느 동물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오직 극소수만이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성장은 매 순간 삶의 원칙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대는 내면의 불멸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대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단지
옷을 갈아입거나 집을 바꾸거나 형태를 바꾸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무 것도 죽지 않으며, 아무 것도 죽을 수 없다.
죽음은 가장 큰 환상이다.
성장하는 것을 보려면 나무를 지켜보라 나무는 성장함에 따라 그 뿌리가
더 깊이 내려간다 거기에는 균형이 있다. 나무가 더 높이 자랄수록
뿌리는 더 깊이 내려간다. 뿌리가 작은 나무는 40여 미터의 높이로
자랄 수 없다. 작은 뿌리는 그렇게 큰 나무를 지탱할 수 없다. 삶에 있어서
성장은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에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명상이 삶의 첫번째 원칙이다. 다른 모든 것은 두번째 일이다.
그리고 유년 시절은 최적기(最適期)이다. 가이를 먹음에 따라 그대는
무덤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명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명상은 불멸성 속으로, 영원성 속으로, 신성
(神性)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아직 지식이나
종교나 교육 혹은 기타의 쓰레기를 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명상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는 순진무구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순진무구함은 무지라고 비난받는다. 무지와 순진무구함은 유사하긴 하지만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무지 역시 순진무구함과 마찬가지로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간과해
온 커다란 차이가 있다. 슨진무구함은 박학한 것은 아니지만 박학해하려고도
하지도 않는다. 순진무구함은 그 자체로 충만해 있으며 완전히 :
비워져 있다‥‥
삶의 예술에서 첫번째 단계는 무지와 순진무구함 사이에 경계선을 ÷
짖는 일이다. 순진무구함은 지지되어야 하며 보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현인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발견한 위대한 보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인들은 자신들이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다시
태어났다고 말해 왔다‥‥‥
삶을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순진무구함이라는 첫번째 원칙을
회복하라. 지식을 떨쳐 버리고 종교와 경전과 이론과 철학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다시 태어나서 순진무구해지라. 이것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 내라. 그대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닌 것,
빌려온 것, 전통과 인습에서 온 것, 부모나 선생이나 대학 등 남으로부터
이어진 모든 것을 버리라. 그 모든 것을 제거하라. 다시 한번 단순해지고
다시 한번 어린아이가 되라. 이런 기적은 명상을 통해 가능하다.
명상은 진정한 존재만 남기고 그대의 것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잘라낸다.
명상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그래서 바람 부는 태양 아래 =
홀로 벌거벗고 서 있게 한다 마치 그대가 지구상에 내려온 첫번째
사람인 것처럼.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발견해야 하고
구도자가 되어야 하고, 순례를 떠나야 하는 사람처럼.
삶의 두번째 원칙은 순례이다. 삶은 찾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삶』
이것 혹은 저것이 되려 하거나 혹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되는
야심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를 찾기 위한 탐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것은 매운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누군가가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가 되려는 것은 영혼의 병이다. 존재(being)가 그대이며,
그대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 삶의 시작이다. 그때 매 순간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며 매 순간 기쁨이 생긴다. 그리고 새로운 신비가 문을
열며, 그대 속에 새로운 사랑이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전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자비와 미(美)와 선(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이 그대 속에서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작은 풀잎에서도 엄청난 중요성을 발견할 만큼 민감해진다.
그대의 감수성은 작은 풀잎조차도 존재계에서 가장 큰 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줄 것이다. 그 작은 풀잎이 없다면 존재계는 지금보다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풀잎은 독특하며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작은 풀잎도 자신의 개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감수성은 그대에게 새로운 우정을, 나무와 새와 동물과의
우정을, 그리고 산과 강과 대양과 별과의 우정을 선사할 것이다.
사랑이 자라나고 우정이 성장함에 따라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대가 민감해짐에 라라 삶은 더욱 커진다. 삶은 작은 연못이 아니다.
삶은 대양같이 광활하다. 삶은 그대와 그대의 아내, 그대의 아이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삶은 결코 한정된 것이 아니다. 존재계 전체가 그대의
가족이 된다. 존재계 전체가 그대의 가족이 되지 않는다면 그대는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수백만 가지 방법으로
연결된 광활한 대륙이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이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작아질 것이다.
명상은 감수성을 가져다 주며, 그대가 이 세상에 속한다는 크나큰 느낌을
가져다 준다. 이 세상은 우리의 세상이다. 별들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존재계에 속한다. 우리는
존재계의 일부이며 존재계의 십장이다.
둘째로, 명상은 거대한 침묵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잡다한 지식은
모두 사라졌으며 지식의 일부인 사념들 역시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기 엄청난 침묵이 있고, 그대는 놀란다. 이 침묵이야말로 유일한
음악이다. 모든 음악은 어떻게든 이 침묵을 표현하려는 노력일 꾼이다.
고대 동양의 선지자들은 모든 위대한 음악, 시, 춤, 그림, 조각 등』
예술이 모두 명상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이런 예술들은
순례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불가지(不可知)의 것들을 알려진 것들의 세계로 가져오기 위한 노력이었다.
단지 순례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선물인 것이다.
어쩌면 노래가 존재의 근원을 찾으려는 욕망을 부추길지도 모르며
어쩌면 조각이 그런 욕망을 부추길지도 모른다.
이 다음에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의 사원에 가게 되면 그저 고요히
앉아서 조각을 바라보라‥‥‥ 그 조각은, 그것을 바라보면 침묵에 잠기게끔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상의 조각이지 결코 고타마 붓다나
마하비라와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대양 같은 상태에서 육체는 특정한 자세를 취한다. 그대 자신에게서도
그런 것을 관찰했겠지만 자각하지는 못했다. 화가 날 때 육체가
특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화가 날 때 그대는 손을
펴고 있을 수 없다. 화가 날 때에는 주먹을 쥔다 화가 날 때 그대는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감정에는 육체의
특별한 자세가 뒤따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내면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지나간 세대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수세기 동안 어떤
비밀스런 과학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책이나 언어를 통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침묵이나 명상, 평화같이 좀더 내면 깊이 들어가는
어떤 것을 통해서였다 그대의 침묵이 성장함에 따라 우정과 사랑도 성장하고
삶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춤이 되고 기쁨이 되며 축제가
된다.
왜 전세계에 걸쳐 모든 문명과 모든 사회에는 일 년에 며칠씩 축제
기간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며칠간의 축제는 단지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모든 사회가 그대의 삶에서 축제를 빼앗아가고서
그대에게 아무 보상도 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삶은 문명을 위험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명은 약간의 보상을 해 주어서 그대가
완전히 불행과 슬픔에 빠졌다고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보상은
가짜다.
그렇지만 그대의 내면세계에서는 지속적인 빛과 노레와 기쁨이 가능하다.
사회는, 그대에게 보상을 해 주지 않으면 억압된 것이 폭발하여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느낄 때에만 보상을 해 준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 사회는 그대의 억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진정한 축제가 아니며, 진정한 축제가 될 수도 없다.
진정한 축제는 그대의 삶으로부터 와야 하며, 그대의 삶 속으로 와야 한다.
진정한 축제는 미리 날짜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1월 1일에
축제를 벌이겠다고 미리 정해 놓는 것은 진정한 축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대는 일 년 내내 불행하게 지내다가 11월 1일이 되면
갑자기 불행에서 빠져나와 춤을 춘다. 그렇다면 그대의 불행이 가짜거나
11월 1일의 축제는 가짜다. 둘 다 진실일 수는 없다. 그리고 11월 1일이 지나면
그대는 다시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며, 모든 사람이
불행과 근심 속으로 되돌아간다
삶은 지속적인 축제가 되어야 하며, 일 년 내내 계속되는 빛들의
향연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성장할 수 있고 꽃필 수 있다.
사소한 일들도 축제로 변형시키라‥‥‥‥ 그대는 모든 것을 통해 그대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거기에는 그대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그때 삶은
지속적인 축제가 된다.
비록 몸이 아파 침대에 누워 있다 해도 그대는 침대에 누워 있는
간들을 아름다움과 기쁨의 순간으로, 휴양과 휴식의 순간으로, 명상의
순간으로, 음악이나 시를 듣는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프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사무실에 있는데 그대는 침대에 )
누워서 왕처럼 휴식하고 있으므로 행복하게 여겨야 한다. 누군가가 그를
위해 차를 준비하고, 사모바르(samovar)')는 노래를 부르며,
친구는 그대를 위해 피리를 불어 준다. 이런 것이 어떤 약보다도 더 중요하다.
아플 때는 의사를 부르라,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약은 없기 때문이다
그대 주위에 아름다움과 음악과 시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라.
제 분위기보다 더 잘 낫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약은 가장 낮은 차원의 치료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망각한 듯 하다.
그래서 약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우울하고 슬퍼진다.
마치 사무실에서 누리고 있던 커다란 기쁨을 잃은 듯이! 그러나 사무실에 %
있을 때에도 그대는 불행했었다. 단지 하루 사무실에 나가지 않았는데도
그대는 여전히 불행에 매달린다. 그대는 불행을 놓아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만들라, 최악의 것에서 최상의 것을 만들어 내라.
이것이 내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삶의 모든 순간과
삶의 모든 상황을 아름다움과 사랑과 기쁨으로 만드는 데 보냈다면
그의 죽음은 그가 전 생애 동안 노력한 것의 궁극적인 절정이 될 것이다.
그의 마지막 끝마무리는‥‥‥ 그의 죽음은 매일 있는 평범한 죽음과는 달리
결코 추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죽음이 추하다면 그것은 그대의
전 생애가 헛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평화롭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죽음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옛 친구들과 옛 세상에게 즐겁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어떤 비극도 있어서는 안된다‥‥
명상과 함께 시작하라. 그러면 그대 속에서 침묵과 고요와 축복과
감수성이 자랄 것이다 그리고 명상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것을 삶으로 가져오라.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라. 나누어진 모든 것은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거기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픔의 눈물은
흘릴 필요가 없다. 아마 기쁨의 눈물은 있겠지만 슬픔의 눈물은 없을 것이다.
약과 명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명상(meditation)'이라는 말과 '약(medicine)'이라는 말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약은 육체를 치료하는 것을 의미하고 명상은 영혼을
치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둘 다 치료하는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치유(healing)'라는 말과 '전체(whole)'
라는 말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치유된다는 것은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전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라는 말에는 다른 의미가
하나 더 함축되어 있다. '신성하다(holy)'는 말도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이다. 치유(healing), 전체(whole) , 신성하다(holy)는 말은 그
어원이 다르지 않다.
명상은 그대를 치유하고, 그대를 전체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전체가
되는 것은 신성해지는 것이다.
신성함은 어떤 종교나 교회에 속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신성함은 단지 그대가 내면에서 전체이며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아무 것도 놓치지 않는다. 그대는 가득 채워져 있다. 그대는 존재가
원하는 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대는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종교는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며, 명상이 그 길이다. 명상의 ·
제 역할은 가능한 한 깊이 그대를 의식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의 몸은 외부적인 것이 되며 마음조차도 외부적인 것이 된다. 가슴은 존재의
중심에 매우 가까이 있지만 가슴조차도 외부적인 것이 된다. 몸과
마음과 가슴, 이 세 가지가 외부적인 것으로 보일 때 그대는 존재의 중심에
도달한 것이다.
중심에 도달하는 일은 모든 것을 변형시키는 엄청난 폭발이다.
그는 결코 이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 그대는 몸이
단지 외부의 껍질이며, 마음은 조금 더 안쪽에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중심이???아니며, 가슴은 조금 더 안쪽에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대의
익숙한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몸이나 마음이나
가슴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대는 처음으로 결정화(結晶化)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대는 예전처럼 미지근한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전에 알지 못했던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음은 몸이나 마음이나 가슴에게
일어날 뿐, 그대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대는 영원하다. 그대는 항상 여기에 있어 왔다. 그리고 항상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대는 여러 형태로, 궁극적으로는 아무 형태도 없는
상태로 항상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대는 파괴되지 않는다.
파괴될 수가 없다. 이런 자각이 그대로부터 두려움을 몰아낸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자유가 찾아오고 사랑이 찾아온다. 이제 그대는 나누어 줄 수 있다.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다. 이제 그대는 엄청난 샌명수의 원천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명상은 그대를 전체로 만들어 주며 신성하게 만들어 준다. 명상은
그대를 고갈되지 않는 원천으로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대는 배고프고
목마르고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다 그대는
빛이 된다‥‥‥ 명상은 그대 존재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신도 필요 없고,
교리문답서도 필요 없으면, 신성한 책도 필요 없다 아무도 기독교인이
되거나 유태교인이 되거나 힌두교인이 될 필요가 없다. 이런 것은 순전히
란센스다. 필요한 것은 중심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명상은 중심을
찾는 가장 간단한 길이다.
명상은 그대를 전체로 만들어 주며,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명상은 세상의 모든 영적인 빈곤을 없앨 수 있을 정도로 그대를 풍요롭게
해 준다. 영적인 빈곤이야말로 진정한 빈곤이다
의식주의 빈곤은 과학이나 기술에 의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이나 기술은 그대에게 축복을 줄 수 없다. 축복은 과학이나 기술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더라도
평화나 고요, 침묵, 엑스터시를 얻지 못한다면 그대는 여전히 빈곤할 것이다.
사실 그대는 전보다 더 많은 빈곤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대조가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황금 궁전에 살고 있지만 자신이 거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의 내면이 황금 궁전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그대는 내면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는 단지 공허할 뿐이다.
인류가 더욱 지성적이 되고 더욱 성숙해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랑들이
삶은 의미가 없다고, 삶은 단지 우발적인 것이라고, 삶을 지속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양의 현대 철학들은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자살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면의 세계를 모른 채 바깥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면 자살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일 것이다.
명상은 내면을 풍요롭게 해 준다. 그때 자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대가 자신을 파괴하려 해도 그럴 방법이 없다. 그대의 존재는 파괴될 수 없다.
이런 불멸성을 앎으로써 그대는 죽음과 질병과 노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런 것들은 왔다가 가지만 그대는 건드려지지 않은 체
상처입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내면의 건강은 모든 질병을 넘어서 있다.
내면의 건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
의학이나 생리학, 심리학은 단지 인간의 표면만을 다루므로 아주
미숙하다. 이런 학문들은 인간의 중심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학문들은 마음이나 죽음을 넘어선 의식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신비가들이 의식의 중심을 발견하기 위해 행한 엄청난
노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거나, 편견을 갖고 있다.
생리학자나 의사의 진단은 그들의 시야가 별로 포괄적이지 못한 까닭으로
완전히 잘못된 것일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인간을 단지 물질로만
이해한다. 그리고 마음은 물질의 부산물, 혹은 물질을 넘어서지 못하는
그림자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없으며
영원히 남아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성인들을 절망에
빠트리는 인간의 자화상을 만들어 왔다. 그들은 의식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하므로 그들의 접근 방식은 과학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접근 방식은 종교적 정치적인 광신자들의 접근 방식처럼 미신적인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의식이라는 내면의 하늘을 탄험해서 그것이 백일몽 같은 것이며
실체가 아니라 단지 그림자라는 것을 발견하지 않는 한,
의식을 부인할 권리가 없다.
과학은 인간의 의식을 탐험하지 않았다. 단지 가정해 왔을 뿐이다.
마치 신이나 천국이나 지옥이 종교 세계의 미신이듯이, 유물론은 단지
가설일 뿐이며 과학 세계의 미신일 뿐이다.
과학은 아직 숲수한 학문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아직 순진무구하지 않으며, 편견을 버리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조건화(conditioning)"를 버리고 진리와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당신은 서양 의학이 인간을 전체적인 유기체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 , 인간은 아픈 부분만 치료해서는 안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좀더 섞명해 주시겠습니까?
가령, 그대에게 두통이 있다고 해 보자. 서양의 의사들은 그대에게
아스피린을 줄 것이다. 아스피린은 치료제가 아닌다. 아스피린은
단지 증상을 자각하지 못하게 해 줄 뿐이다. 그것은 두통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두통을 느끼지 못하거1 해 줄 뿐이다. 아스피린은
그대를 교란시킨다. 두통은 그대로 있지만 그대는 더 이상 두통을 자각하지 못한다.
아스피린이 일종의 망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왜 두통이 생기는 걸까? 일반적으로 의학은 이 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그대가 의사를 찾아간다면 의사는 왜 그대에게 두통이
생겼는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두통이 있다! 의사에게 두통은
간단한 것이다. "두통이 있으니 이 약을 드시오. 그러면 두통이
사라질 것이오." 두통은 사라지겠지만 다음날 그대는 소화장애를 일으킬 것이다.
이제 다른 증상이 생긴 것이다.
인간은 하나이며 전체다. 인간은 유기적인 통합체다, 그대는 문제를
한 쪽으로 제껴 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다른 곳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물론 한 쪽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튀어나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튀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밀려난 문제는 또 다른 곳으로 밀려날 수 있다. 인간에게는 공간이 많으므로
그대는 계속해서 문제를 이곳저곳으로 떠밀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대는 점점 더 병약해질 것이다. 그리고 가끔-
매우 사소한 질병이 커다란 질병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가령 두통이
복통,요통이 찾아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통증이 찾아오는 즉시
약을 복용해서 통증을 멈추게 한다면 ‥‥ 몇 년 동안 중단하지 않고
이렇게 질병을 억제한다면, 어느 날 모든 질병이 한데 모여서 더욱
조직적인 방법으로 그 자신을 표현할 것이다. 그것은 암이 될 수: 있다.
한데 모인 질병은 마치 폭발하듯이 그 자신을 표현할 것이다.
왜 우리는 아직까지 암 치료제를 발견하지 못했는가? 아마 암은 인간이
억제한 모든 질병이 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간단한 질병을 억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암은 간단한 질병이 아니다.
암은 매우 복합적인 질병이다. 암은 모든 질병이 손을 맞잡고
한 데 모여서 전체적으로 발병한 것이다. 모든 질병이 모여서 군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대를 공격한다. 이런 이유로 암에는 약이 소용없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암 치료제를 발견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암은 새로운 질병이다. 원시 사회에는 암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
원시 사회에는 암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원시인들은 질병을 억압하지
않았으며, 질병을 억압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암은 바로 그대의 ?
신체 조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대가 억압하지 않았다면 반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작은 일들이 생겼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질병에 대한 종교적인 태도는 증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근원을 찾는 것이다.
나는 인것을 '붓다들의 심리학(psycholog? of the budclhas)'
이라고 부른다. 두통은 질병이 아니다. 사실 두통은 근원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몸의 신호다. 그러니 근원으로 달려가라!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찾아내라. 머리는 단지 위험신호를 줄 뿐이며,
경종을 울려 줄 뿐이다. "육체에 귀를 기울이라. 뭔가 잘못되고 있다.
그대는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으며, 육체의 조화를 깨는 일을 하고 있다.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두통이 계솥해서 그대에게
경종을 울려 줄 것이다. "
두통은 질병이 아니다. 두통은 그대의 적이 아니다. 두통은 그대의 친구다.
두통은 그대에게 봉사하고 있다. 그대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뭔가
잘못되고 있을 때 육체가 경종을 울려 주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고치는 대신 그대는 경종을 꺼 버린다. 그대는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이 의학이나
정신요법에서 행하고 있는 소위 '대증요법(對症療法)'")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것을 놓치는 이유다. 본질적인 것은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음에 두통이 생기거든 실험적으로 간단한 명상법을 시도해 보라.
그런 다음 좀더 큰 질병이나 병적인 증세에 대해서도 이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두통이 있을 때 작은 실험을 해 보라. 조용히 앉아서 두통을 주시하고
두통을 들여다보라. 그러나 적을 바라보듯이 들여다보지는 말라.
적을 바라보듯이 들여다본다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피할 것이다.
아무도 적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누구나 적을 피하려고 한다.
두통을 친구처럼 바라보라. 두통은 그대의 친구이며 그대에게
봉사하고 있다. 두통은 "뭔가 잘못되었으니 한번 들여다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조용히 앉아서 두통을 멈추려고 생각하지 말고 들여다보라.
두통을 없애 버리려는 욕망이나 갈등, 투쟁, 적의를 갖지 말고 그저
두통을 들여다보라. 단지 두통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라,
만일 내면의 메시지가 있다면 두통이 그것을 전할 수 있도록 주시하라.
두통은 암호로 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조용히 지켜본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지켜보면 세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첫째, 두통을 주시할수록 두통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런
당황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두통이 더 심해진다면 주시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 두통은 더 심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두통을
피해 왔기 때문이다 두통은 머리 속에 있었지만 그대는 두통을
피해 왔다. 그대는 아스피린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두통을 억압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두통을 들여다볼 때 억압이 사라진다. 그래서 두통은
본래의 통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솜마개로 귀를 틀어막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그때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릴 것이다.
첫째, 두통은 더 심해진다 두통이 더 심해진다면 그대는 제대로
주시하고 있는 것이므로 만족해도 좋다. 두통이 더 심해지지 않는다면
아직 두통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아직도 두통을 피하고 있다.
두통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두통은 더 심해질 것이다. 이것이 두통을
관찰하고 있다는 첫번째 신호다.
둘째, 두통 부위는 바늘 끝처럼 작아질 것이다. 그것은 넓게 퍼지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그대는 "머리 전체가 아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머리 전체가 아픈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통은
단지 작은 부위에만 있다. 이것 역시 그대가 두통을 좀더 깊이 주시하고
있다는 신호다. 통증이 널리 퍼져 있다는 느낌은 속임수다 이것은
통증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통증이 한 군데에서 느껴지면 그것은 더 ·
심해진다. 그래서 그대는 머리 전체가 아프며 통증이 머리 전체에 퍼져 :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통증은 어느 부위에서도 그다지 심하지
않게 느껴진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거짓을 만들어 낸다.
두통을 주시하라. 그러면 두번째 단계로 두통 부위가 점점 작아질 것이다.
그러다가 두통 부위가 바늘 끝처럼 굉장히 예리해지며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대는 결코 머리에서 그런 통증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통증은 매우 좁은 부위에 한정되어 있다.
계속해서 그 지점을 들여다보라.
이제 가장 중요한 세번째 일이 일어난다. 두통이 한 군데 집중되어
매우 심해졌을 때 계속해서 주시하면 두통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시가 완벽할 때 두통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두통이 사라질 때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얼핏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두통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대의 주시가 더 이상 예민하지 않고
집중되어 있지 않다면 두통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대가 정말로
주시하고 있을 때 두통은 사라질 것이다. 두통이 사라질 때 그 뒤에 숨어
있던 원인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두통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통의 원인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들이다.
그러나 매번 같은 경종이 울린다. 왜냐하면 경보 체계는 단순하기 떼문이다.
육체에는 많은 경보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원인에 대해서도
같은 경종이 울린다. 최근에 그대는 분노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대는 분노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때 마치 계시처럼, 분노가
거기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동안 지녀 왔던 모든
분노를 보게 될 것이다‥‥‥ 마치 그대 안의 고름처럼. 이제 분노는
너무 많이 쌓여서 분출되기를 바라고 있다. 분노는 카타르시스(정화)를
필요로 한다. 정화(淨化)하라! 그러면 즉시 두통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스피린이나 다른 어떤 조치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분노가 사라지면 아스피린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질의 안락함이 있을 것이다. 아스피린은 두통을 억압할 뿐이다.
분노는 내면에 남아 있지만 폭력이 그대의 내면을 쉽쓸고 다닌다. 그것은
단지 경종을 껐을 뿐, 내면에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더
이상 경종이 울리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분노는 더욱 축적될 것이다 그것은 궤양이 될
잎인 결핵이 될 순도 있다. 어느 날 그것은 암이 될 수도 있다.
괴양의 분노가 쌓이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육체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육체는 아프기 시작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육체와 마음을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실체로 생각하지 말라.
육체와 마음은 둘이 아니다. 인간은 몸-마음(body-mind)이며 정신-◎
(p,jycho-somatic) 이다.
명상중에 무엇을 하든지 끊임없이 깨어 있고, 의식하며, 자각하라,
싫증을 느낀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통증에 주의를 집중하라. 주의야말로
모든 것을 잘라 버리는 위대한 검(劍)이다. 그대는 그저 통증을 지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명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
그대는 몸에서 여러 가지 이상을 느낀다·. 다리가 마비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팔이 가려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직접 보면 개미는 없을 것이다.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을 뿐, 실제로 개미가 기어가는 것인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리가 마비되고 있을 때 주시하라. 모든
의식을 다리에 쏟으라. 가려움을 느낄 때 긁지 말라. 긁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주의력을 집중하라. 눈을 뜨지 말라. 주의력을 내면으로
돌리고 주시하며 기다리라. 몇 초 안에 가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주시하라. 복부나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더라도
주시하라. 명상중에는 육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이런 통증이 생기는 것이다.
명상은 육체의 화학 구조를 바꾸어 놓는다. 이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육체는 혼돈 속에 있게 된다. 때로는 위장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많은 감정을 위에 억압해 놓았는데 이제 억압된 것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속이 메스껍고 토하고 싶을 것이다.
때로는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이 뇌의 구조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다 보면 그대는 정말로 혼돈 속에 있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곧 안정될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은 모든 것이
불안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머리의 통증을 지켜보고 주시하라.
주시자가 되라. 그대가 행위자라는 것을 잊으라. 그러면 서서히 모든 것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 아름답고 너무 우아해서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할 것이다. 머리에서 통증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통증을 일으켰던 에너지를 주시하는 동안 사라지면서
동일한 에너지가 기쁨으로 변한다. 그 에너지는 똑같은 것이다.
통증과 즐거움은 같은 에너지의 두 차원이다. 그대가 조용히 앉아서
산만함에 주의를 기울이면 산만함은 사라진다. 그리고 모든 산만함이
사라졌을 때, 그대는 문득 몸이 모두 사라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오쇼는 통증을 주시하는 방법이 또 하나의 광신(狂信)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매일 명상을 하는 중에 아픔이나 통증, 구토 등의 불쾌한 육체적
증상이 3∼4일 이상 지속된다면 마조히스트(masochist)가 될 필요가 없다.
즉시 의사의 조언을 받으라. 이것은 오쇼의 모든 명상법에 적용된다.
당신이 이해하기에 .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진전한 건강은 내면에서, 주체(,iubje班ivity) 속에서, 의식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의식은 탄생과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의식은
시원하다. 의식 속에서 건강하다는 것은 첫째 깨어 있는 것, 둘째 조화를
이루는 것, 셋째 엑스터시 속에 있는 것, 넷째 자비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네 가지가 충족되면 내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산야스는
이 네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 산야스는 그대를 좀더 깨어
있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명상법은 그대를 좀더 깨우기 위한 1이며
그대를 형이상학적인 잠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춤이나 노래, 환희는 그대가 좀더 조화를 이루게 만들 것이다.
거기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춤만 남는 순간이 있다. 그 춤은 순간 속에서
그대는 조화를 느낄 것이다. 노래하는 자가 완전히 잊혀지고 노래만이
남을 때, 거기 '나'라고 하는 중심이 없어진다. -'나'는 완전히
존재한다. 그대가 흐름 속에 있을 때, 그 흐르는 의식은 조화롭다.
깨어 있고 조화를 이루면 엑스터시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긴다.
엑스터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인 기쁨이다. 엑스터시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적당하지 않다. 그대가 엑스터시에 도달한다면, 혹은 기쁨의
궁극적인 절정을 맛본다면 자비는 당연한 결과로서 따라올 것이다.
그대가 궁극적인 기쁨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쁨을 나누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대는 기쁨을 나누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기쁨이 흘러넘치기 시작하며, 그대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기쁨이 저절로 흘러넘치는 것이다.
이 네 가지가 내면의 건강을 이루는 기둥이다. 내면의 건강을 얻으며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권리다. 우리는 그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
건강이란 무엇인가? 먼저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통 의사에게
건강의 정의를 물어 보면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 없는 상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부정적인 것이다. 건강을 질병과 관련지어
정의해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건강은 긍정적인 것이며,
긍정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질병은 부정적인 것이다 건강이 우리의 본성이며
질병은 본성에 침벙한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을 질병과
관련지어 정의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주인을 손님과 괄련지어 정의해야 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건강은 우리와 공존하고 있지만 질병은 가끔 찾아오는 펏이다. 건강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 함께 있어 왔지만 질병은 피상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의사에게 건강의 의미를 물어 보면 '건강은 질병이 없는 상태'
라고만 말할 것이다.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이런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건강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긍정적인 정의에, 창조적인 건강이란 개념
해석에 도달할 수 있을까?
파라켈수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내면의 조화(inner harmony)'
상태를 알지 못하는 한, 기껏해야 우리는 질병으로부터 3.대를 구제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내면의 조화가 건강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질병으로부터 그대를 구해 내면 그대는 즉시 다른 질병에
걸릴 것이다. 왜냐하면 내면의 조화에 대해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내면의 조화다. "'
건강은 오직 한 종류만 있을 뿐이다. 건강에는 어떤 형용사를 붙일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건강이 어떠십리까?':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아주
건강합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는 "어떤 종류의 건강입니까?" 하고
묻지 않는다. 만일 그가 "어떤 종류의 건강입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는 "단순히 건강입니다! 건강은 건강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으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느낌, 이 행복한 느낌이 바로 건강입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건강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가? 아니다. 오직 건강함(healthiness)이
라는 한 종류만이 있다. 그러나 질병의 종류는 수백만 개나 된다.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진리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거짓은
수백만 개나 된다. 거짓은 그대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원하는
만큼의 거짓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질병도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는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잘못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잘못된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건강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같은 것이다. 항상 새롭기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건강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동시에 가장 새롭고
가장 최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5천 년 전에 누군가가 건강했고 지금 그대가 건강하다면 거기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는 그대와 피부색이 다르고 그대의 언어를
못한다. 그리고 5천 년이 지났다. 그러나 누군가가 건강했다면 그가
누구였는지, 그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피부색이 어떠했는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혹은 젊은 사람이었는지 늙은 사람이었는지는 모르더라도
최소한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다. 즉, 그는 건강했다는 것이다.
그대는 건강이라는 그 느낌을 체험할 수 있다. 그에 대해서 다른 것은-
가령 그가 아름다운지 추한지 혹은 키가 큰지 작은지는-알 필요도 없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 즉 그는 건강했고
그대도 건강하다는 사실에서 일치한다. 한 가지 체험은 똑같다.
그러나 질병은‥‥‥ 매일 새로운 질병이 생긴다 이미 수백만 종류으
질병이 존재하지만 인간은 앞으로도 더 많은 질병을 만들어 낼 것이다.
건강하다고 느낄 때 그대는 결코 의사를 찾아가지 않는다. 그대는
보름 동안 나는 건강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의사를 찾아가겠는가?
실제로 고대 중국에서는 기억해 둘 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아마
그런 일은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중국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아이디어 중 하나는‥‥ 실행에 옮겨져서 수세기
동안 효력을 발휘했다. 그 아이디어란,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고쳐 준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건강하게 지켜 준 대가로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의사가 질병을 고쳐 준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의사는 그대가 계속 아파야 돈을 벌게 될 것이다. 의사는 그대가
더 자주 아플수록 좋아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플수록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사의 마음에는 갈등이 생길 것이다
먼저 그대는 의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역할이 사람들을 건강하게 지켜
주는 것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대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신의 역할은 사람들의 수명과 원기와 젊음을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젊고 건강하며 아무도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의사들은 굶어죽을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건강하다면 그때는 의사들이
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겠는가?
의사의 기득권이 그가 배워 온 의사로서의 철학에 상충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사람들이 계속 아플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플 수록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한 가지 이상한 일을 보게 된다.
가난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부자보다 더 빨리 회복퇴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더 빨리 회복되는가? 왜냐하면 의사가
그를 빨리 내쫓아 버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사상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을 건강하게
지켜 준 대가로 의사에게 월급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달 내내 건강했다면 의사에게 일정량의 돈을 지불한다. 그러면
그가 질병에 걸렸다면 의사의 월급은 삭감된다
처음에는 매우 이상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세계에서 이와 정반대로
하고 있기 래문이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매우 논리적이고 분별있는 것이다.
공자는 매우 분별있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주치의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해 준 대가로서가 아니라, 건강을
지켜 준 대가로 주치의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다가 질병에 :
걸리면 치료비나 그 외의 모든 비용은 의사가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
의사의 월급도 삭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사가 그를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방식이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의사나 환자 모두에게 대단히 좋은 것이었다. 의사들은 너무 많은 1을
하지 않아서 좋았고, 환자들은 의사의 수입이 자신들의 건강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어서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의사는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흥미가 없었다. 대신에 사람들의 건강을 위하여 걷기나 수영
그 밖의 운동을 하도록 처방을 내렸다. 공자의 영향력이 지속되던 수세기
동안, 중국은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나라였을 것이다.
서양 사회는 이제까지 존재했던 것 중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의료체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매년 수조원의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방 같은 분야에서는 실제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보다 더 많이 아픈 것 같습니다. 건강이란 무엇입니까?
서양 의학은 인간을 자연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개체로 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범한 가장 커다란 잘못 중 하나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의 건강이란 다름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서양 의학은 인간을 기계처럼 보고 있다. 그래서 기계 수리공이 성공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서양 의학은 성공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유기적인 개체다. 아픈 부분만 치료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아픈 부분은 단지 전체 신체조직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상에 불과하다. 아픈 부분은 단지 그곳이 가장 약한 곳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대는 아픈 부분을 치료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제 질병은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질병이 아픈 부분을 통해 표현되는 것을 막았으므로
그대는 질병을 더 강하게 만든 것이다 그대는 인간이 전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건강하든지 질병을 앓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다.
그 중간은 없다. 인간은 전체적인 유기체로 다뤄져야 한다.
확실한 이해를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침술(鍼術)은 약 7천 년 전에 중국에서 우연히 시작되었다. 한 사냥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화살을 쏘았는데, 무심코 지나가던 사람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화살이 다리에 박힌게 되었다. 그 사람은 평생 편두통을
앓아 왔는데 화살이 다리에 박히는 순간 편두통이 사라졌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도 이런 일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침술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완전한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침술사에게 가서 "제 눈에 문제가 있습니다. " 혹은 "머리나
간에 이상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면 그는 눈이나 머리나 간에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대라는 하나의 유기체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는 전체로서의 그대를 치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아픈
부분만 치료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침술은 인간의 육체에 7백 군데의 포인트(poirlt)·)가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 있는 생체전기적 현상이다. 인간의 육체는
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생체전기(bio-electricity)라고 부른다.
이 생체전기는 몸에 7백 군데의 포인트를 가지고 있으며, 각 포인트는
멀리 떨어진 신체의 어떤 부위와 연관이 있다. 그래서 화살이 생체전기가
흐르는 포인트 중 머리와 연관이 있는 곳에 박히자 편두통이 사라진 것이다.
침술은 보다 전체론")적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간을 기계로 여길 때 그대는 인간을 부분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가령 손이 아프다면 그대는 단지 손을 치료할 뿐, 그 손이 속해 있는
육체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인간을 기계로 보는 것은 인간을
부분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부분적으로는 성공하겠지만 그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왜냐하면 약이나 수술 등에 의해 손으로
발현되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던 질병이 다른 곳에서 더 악화된 형태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학이 눈두시게 발달하고 외과학이
대단한 학문이 되었지만 인간은 이전보다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딜레마는 당연한 현상이다. 인간은 전체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유기적 개체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서양 의학은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한다. 서양 의학은 그대가 몸-마음(body-mind):
구조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대를 하나의 기계로
여긴다. 그래서 그대의 눈은 교체될 수 있으며, 팔이나 다리도 교체될 수 있으며
조만간에 뇌도 교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죽어 가고 있을 때 그의 뇌를 꺼내서
이식을 한다면, 가령 폴란드인 교황의 두개골 속에 이식을 한다면 교황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될 것이라고 생같하는가? 뇌는 단지 육체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는 폴란드인과 아인슈타인 사이의 잡종이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 현재 그는 완전한 폴란드인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교황인지 물리학자인지-모르는 림보(limbo)"' 상태에 처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수혈도 하고, 신체의 일부를 다른 것으로 교체하기도 하며
인공 심장까지 나와 있다 인공 심장을 가진 사람은 진짜 심장을
가진 사람과 같을 수 없다. 인공 심장을 가진 사람은 사랑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을 한다 해도 마음(mind)을 통해 사랑을 할 것이다.
나는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식으로 사랑을 할 것이다.
이것은 가슴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심장이
없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거의 5천 년 전에 의학이 발생했다. 그대가 알면 놀라겠지만
5천 년 혹은 7천 년 전에 씌어진 경전 속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수술법이 동양의 위대한 외과 의사 중의 한 사람인 수쉬루트
(Sushrut).))에 의해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고대 의학은
사장(死藏)되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그대에게 인식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왜 발달된 학문이 사장되었는가? 그것은 수술법이 인간을 기계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파괴하기보다는 수술법을 포기한 것이다.
수쉬루트의 경전에는 현대의 수술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장 정교한
기구들까지 기술되어 있다. 모든 수술법들, 심지어 뇌 수술에 대해서도
마치 현대의 수술 효과서처럼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7천 년 ‥‥ 적어도 5천 년 전의 일이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팥은 수준의 수술법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들도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문제에 봉착한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잘못을 발견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질병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질병이 없는 사람을 만든다 해도 그 사람이 건강한 것은 아니다.
질병이 없는 상태가 건강은 아니다. 이것은 건강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정의일 뿐이다. 건강은 좀더 긍정적인 의미를 가져야 한다.
건강은 긍정적인 것이며 질병은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정의하고 있다.
건강은 안락함을 느끼는 것이다. 건강은 온 몸이 아무 장애 없이 최고의
상태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대는 안락함을 느낀다.
존재계와 일체감을 느낀다. 이런 일은 수술법을 통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인도는 수술법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혀 새로운 접근 방식인
아천베다(Ayurveda)')를 발전시켰다. 아유르베다는 생명의 과학을 의미한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서양의 의학은 단지 질병을 찾아낼 뿐이다.
그러나 건강은 의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의학은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유르베다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다. 아유르베다는
생명의 과학인다. 아유르베다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도와 준다. 다시 말해 아유르베다는 그대를 건강하게
지켜 주어서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 준다. 동양과 서양의 방식은
인간을 전체성을 가진 영적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기계로 보느냐 하는
데에서 다르다‥‥‥
둘째, 서양 의학은 인간의 면역성을 약화시켜 왔다‥‥‥
진정한 의학은 면역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켜야 한다.
진정한 의학은 그대를 약하게 만들어서 온갖 질병에 걸리기 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강하게 만들어서 어떤 질병과도 싸울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델가도(Delgado)는 동물 실험을 해 오고 있다.
그는 쥐들에게 하루에 먹이를 한 끼만 주면 두 배나 오래 산다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하루에 두 끼를 먹은 쥐들은 수명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음식을 적게 먹이면 수명이 길어지고, 음식을 많이 먹이면
수명이 짧아진 것이다. 이제 그는 하루에 한 끼의 식사로 충분하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 이상은 소화 기관에 부담을 주고, 그로 인해 수명이
단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의학은 그들이 죽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그들이 사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식물인간처럼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모든 전통과 모든 근원을 재고해야 한다. 허용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해
재고찰해야 한다. 그래서 침술이나 아유르베다, 그리스의
의학, 델가도와 그의 연구 내용에 바탕을 둔 완전히 새로운 의학적 접근
방식이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의학적 접근 방식이 나와야 한다. 인간은 다차원적이고 영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거기에 맞는 대접을 해야 한다.
건강은 부정적으로 정치되어서는 안된다. 질병이 없다고 해서 건강한
것은 아니다. 건강을 긍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왜 그동안 건강에 대한 긍정적인 정의가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질병은 객관적이지만 안락하다는 느낌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서양 의학은 그대 안에 어떤 주체(subject)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서양 의학은 단지 육체를 인정할 뿐, 그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의학적 방법들은 하나로 종합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 방법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운영되고 있다. 이 방법들은 하나로 종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에게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고, 그대로 하여금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뇌에 그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뇌를 다루는 외과 의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손이 마비되었을 때 손을 치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대는 손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손을 잘라 내고 기계손을 부착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그 손을 움직일 수 있고
그 손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비된
손은 전혀 쓸모가 없는 죽은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마비된 손은
죽은 것이 아니다. 머리 속에는 손을 조절하는 중추가 있는데 그 중추를
치료해야 한다. 손은 전혀 건드릴 필요가 없다. 중추에 어떤 문제가
있으므로 작동되지 않는 것이다.
조만간 모든 의학이 뇌의 중추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이 중추들이
육체의 모든 것을 조절하고 있다 중추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육체에 그 문제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대는 육체를 치료할 뿐,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현대의 서양 의학은 피상적이다. 그대는 왜 갑자기 손이 마비되었는지
바로 그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뇌의 중추에 어떤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뇌의 중추는 매우 쉽게 치료될 수 있다.
그것은 생체전기의 중추이므로·.
그대가 안락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대의 배터리가
소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는 재충전이 필요하다. 손이 마비되었다면
아마 뇌의 중추에서 전기를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추는 다시
충전될 수 있다. 어떤 약이나 수술도 필요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인간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시대와 문화가 서로 다른
사회에서 인간을 어떻게 치료해 왔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끔
이상한 방법이 효과가 있는 곳에 보치면 그것에 반대하기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질병의 70퍼센트는 단지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사실 질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 때 그대에게 역증요법제를 주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역증요법제는
어떤 식으로든 독성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질병이 있을 때 약을
투여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실제로 질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질병에
걸렸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때는 동종요법이 최선이다 동종
요법은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종요법제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인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동종요법으로 치료되고 있다.
동종요법이 진짜 치료법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가공의 질병에 걸렸다면 그들에게는 가공의 치료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종요법제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아무 질병도 없으면서 질병에 걸렸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다.
동종요법은 이들에게 즉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동종요법은 사람들을
낫게 할 뿐,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다. 동종요법은 가짜 치료법이다.
그러나 가짜로 아픈 사람들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인도의 의사들과 노련한 간호사들은 狂레이나 기타 어떤 의료 장비도
갖고 있지 않다. 심지어 청진기도 갗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심장의
박동을 검사할 뿐이다. 이 방법은 수천 년 동안 완벽한 역할을 해 왔다
그들이 심장의 박동을 검사하는 것은 심장의 박동이 생명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만일 심장의 박동이 완벽하지 않다면 그것은 어떤 조치를
하라는 신호다. 그들은 질병을 치료하기보다는 그대의 심장 박동이
더 조화를 이루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의 치료법은 심장 박』동이
좀더 조화를 이루도록 도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질병은 즉시 사라진다.
이제 그대는 질병이 치료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질병은 단지
폰이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아유르베다에서는 외과학(外科學)을 완전히 버렸다.
과학은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킨다. 신체 조직에 채를 주지 않고 광물이나
약초, 천연물 등으로 모든 것을 쉽게 치료할 수 있는데 왜 불행하게
부작용이 있는 독성 물질을 인간에게 투여하는가?
아마도 의학이 성장하고 발전해 온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독성물질의 작용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질병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의학은 질병을 치료하지만 그것은 독성 물질로 치료를 하는 것이다.
물론 질병은 사라지겠지만 독성은 신체 조직에 낟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독성이 부작용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약초나 광물질 혹은
동종요법제 같은 것이 모두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의학이라는 곯나의 줄기에는 여러 분과(分科)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료인들은 환자를 어느 분과로 보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환자에게
"당신에게는 질병이 없습니다" 하고 말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은 다른 의사를 찾아갈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질병이 있습니다" 하고
하는 의사를 좋아할 것이다.
살려는 의지를 상실한 환자들도 일부 있다. 그때에는 어떤 치료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
이미 죽은 것이다. 단지 장례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살려는 의지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요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다른 치료
방법은 그 후에야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 하나로 종합될 때, 인간은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인간은 최소한 3백 년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인 추종이다. 인간의 육체는 3백 년 동안 계속해서 새롭게
재생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 일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인간이 나이 70에 죽는 것을
보면 그렇다.
여기 증거가 있다‥‥‥ 지긍은 파키스탄의 영토가 된 캐시미르의 한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보통 백오십 살까지 산다. 러시아에도 백오십 살
된 사람들이 많으며, 심지어 백팔십 살이나 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사랑들의 음식과 습관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음식과 습관을 널리 알려아 한다. 러시이히 코카서스 산맥에 살고 있는
』팔십 살이나 된 사람은 아직도 젊은 사람처럼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늙지도 않았다. 그의 음식과 생활 방식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 코카서스에는 나이가 백팔십이나 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정말로 강인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조지프 스탈린1')도 그 지역 출신이며, 조지 구제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엄청나게 강인한 사람들이다.
의학은 완전히 새롭게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지금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속속들이 알려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편견에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그런 일이 가능하다.
오늘날 의학에서는 치료의 주관성(,iLIa◎沆Vit)r)이 논와되고 있습니다.
같은 약이라도 의사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공언하는 의학의 주관성에 대해 말해
주시겠습니까?
인간과 관련해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
무엇이든 어느 정도의 주관성을 인정해야 한다. 같은 약이라도 의사가
쓰면 효과가 달라질 뿐 아니라, 같은 약을 같은 의사가 써도 환자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은 객체(object)가 아니다.
먼저 그데는 '주체(subject)'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돌은 단지
객체일 뿐이다. 돌멩이는 내면(irlteriority)도 없고, 내면성(innerness도 없다.
그대는 돌을 두 개로 쪼갤 수 있다. 그때 두 개의 객체가 생긴다.
그대는 돌을 네 개로 쪼갤 수 있으며 그때에는 네 개의 객체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내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주관성(subjectivity)이란, 인간도 겉으로 볼 때는 다른 객체들인
같이나 죽은 육체, 살아 있는 육체처럼 단지 객관적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 조각은 단순히 객체이며 주관성이 없다.
육체도 한때는 주관적인 현상(phenomeno굿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텅 빈 집일 뿐이다. 집에서 살던 사람이 떠나 버린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조각이나 죽은 육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객체
(objectivity)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
내면의 차원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존재계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다.
세 사람이 같은 질병을 앓고 있을 때, 같은 약이 세 사람 모두에게
효과가 있지는 않다. 한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두번째 사람에게는
단지 반만 효과가 있을 것이며, 세번째 사람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다. 같은 질병을 앓고 있지만 환자의 내면이 다르기 때문이다.
환자의 내면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마 의사는 서로 다른
환자에게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내 친구 중에는 나그푸르(Nagpur)")에서 명성을 날리던 외과 의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대단한 의사이기는 했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결코 수술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수술비는 다른 의사들보다
다섯 배나 많이 청구했다. 그와 함께 머물고 있을 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좀 지나치군. 같은 병을 가지고 다른 의사들이
청구하는 것보다 다섯 배나 많은 돈을 청구하니 말일세."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거둔 많은 성공의 비결이 바로 그걸세.
환자가 다섯 배나 많은 돈을 낼 때는 반드시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지.
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야. 환자들은 다른
곳에서 더 싼값에 수술을 할 수도 있네. 하지만 내게 다섯 배나 많은 돈을 내고
수술을 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수술 비용이야 어떻든 꼭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얘기지. 내가 거둔 성공의 50퍼센트는 살아야겠다는
환자의 결심 때문이네."
환자들 중에는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의사에게
협조할 마음이 없다. 약은 복용하지만 살겠다는 의지는 없다. 오히려 약이
듣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만 자살을 해도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삶에서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서는 이미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약은 그의 내면을 도울 수 없다. 그리고 그의 내면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의사도 거의 손을 쓸 수가 없다. 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 외과 의사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모를 거야. 가끔 나는 완전히 비도덕적인 일을 한다네.
그러나 환자를 돕긴 위해서는 어쩔 수 없네."
내가 물었다. "무슨 말이야?"
"나는 동료 의사들에게 욕을 먹고 있네‥‥‥‥ 그는 나그푸르에 있는
모든 의사들로부터 이렇게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기꾼을
본 적이 없다. "
그의 방식은 대개 이렇다. 환자를 수술실의 수술대 위에 눕힌다.
의사들은 수술 준비를 하고, 간호사들도 대기 상태로 들어가고, 학생들은
위층의 관랄석에서 지켜본다. 그러면 그가 환자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수술 비용을 만 루피1')에 하긴로 합의했지만 그것 갖고는
안되겠소. 당신의 질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단 말입니다.
그러니 2만 루피를 내시오. 그래야 수술을 시작할 것이오. 그게
싫으면 일어나서 나가시오. 더 싼값에 수술을 해 주는 의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오. "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데 환자는 돈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동의할 수 있겠는가? 환자는 승낙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2만 루피를 내겠소. 그러니 제발 살려만 주시오."
그 친구는 내게 말했다. "어느 의사라도 그 환자를 살릴 수 있었을 거야.
그러나 그토록 확신에 차 있을 수는 없었겠지. 그 환자는 2만 루피를
냈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 편에 서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의 내면의
존재가 나를 도와 주게 되지.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네. 그건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물론 만 루피에 수술하기로 했다가 수술실에
누워 있는 환자의 귀에 대고,'2만, 혹은 3만 루피를 내시오. 그게 싫으면
일어서서 나가시오, 나는 병이 그렇게까지 깊이 진행된 줄은 미처 몰랐소.
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데, 이 일은 그동안 쌓아 온 내 명성이
걸린 일이오. 그러니 만 루피에는 수술하지 못하겠소. 나는 인생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소. 성공이 내 규칙이오. 나는 수술에 성공할 수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에만 수술을 하고 있소. 그러니 당신이 결정을 하시오.
나는 시간이 별로 없소. 밖에 다른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니 2분 안에 결정을 하시오. 동의하든지, 아니면 일어나서
나가시오' 하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비도덕적인 일이지. 당연히 그
사람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낼 테니 제발 수술을 시작하시오' 하고 말하지.
그게 불법이고 비도덕적이기는 하지만 비(非) 심리학적이라고는
볼 수 없네."
인간과 관련된 것은 어떤 것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나에게는 의사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무자격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의과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고, 그가
자신의 서명 옆에 적어 넣은 학위는 모두 가짜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가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학위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수천 명의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학위를 가진 의사들을 찾아다니는 데 지쳐 버린 가망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친구는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학위는 없었지만 어떤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병원을
마치 마술의 세계처럼 꾸며 놓았다. 그의 진찰실을 들어서는 순간,
환자들은 놀란다. 그 환자들은 모든 병원을 가 보았었다‥‥‥ 대개가
최후의 수단으로 나의 친구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숨겨진 사실이 아니었으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그를 한 번 보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그의 병원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데, 그 정원을 지나면 그의 사무실이 나온다.
그는 접수 계원으로 아름다운 여자들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치료법 중의 일부였다. 죽어 가는 사람도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살려는 의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접수 창구를 지나면 환자는 그의
실험실을 지나가야 했다. 실험실을 거쳐 환자를 들어오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환자들에게 자신이 보통 의사가
아님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의 실험실에서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는 아무 소용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많은 시험관과
마스크가 있었으며, 착색된 물이 한 쪽 플라스크에서 다른 플라스크로
이동하고 있어서 마치 위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나서야 환자는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는 결코 평범한 방법으로
맥박을 측정하지 않는다. 환자는 리모컨으로 조정되는 전기 침대에
눕게 된다 침대는 공중으로 부양되고, 환자는 침대에 누운 채 위에
달려 있는 커다란 시험관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전선이 환자의 맥박과
연결되어 있어서 맥박이 뛸 때마다 시험관 속의 물이 출렁이게 된다.
비록 똑같이 심장을 체크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청진기로 측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이 모든 장치들을 보여 줌으로써 환자로 하여금
전문가를 찾아왔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학위도 없었다. 대신 그가 고용한 약사에게 모든
학위가 있었으며 약사가 처방전을 써 주었다. 그는 약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어떤 범죄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결코 약을 처방하지 않았으며 처방전에 서명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은
학위를 가진, 완전히 자격을 갖춘 사람이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
그런 모든 일을 했다는 것과, 자신의 서명 옆에 이상한 학위를 써 넣었다는
것 때문에‥‥‥‥ 하지만 그런 학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 나는 그것이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학위를
실제로 존재하는 대학에서 받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가짜였지만 그 가짜가 도움이 된 것이다.
나는 진찰만 받고도 반쯤은 나아 버린 환자들을 보았다. 진찰실을
나와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 약을 먹지도 않았는데 거의 나은거 같아요.
처방전이 여기 있어요. 이제 약을 사러 갈 거예요."
그러나 그가 이런 일을 했다는 이유로‥‥‥ 이때 나는 법률이 맹목~
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불법적인 일은 결코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있다.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 환자가 더 오래 살게 도와 주는 것이 사람을
속인 것이라면 의료활동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 때문에 의학은 결코 100퍼센트 객관적인 학문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유르베다나 동종요법, 자연요법, 침술 및 그 밖의 많은
의학 유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도움이 된다. 동종요법은
설탕 알약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도움이 된다. 문제는 환자가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자연요법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연요법말고는 어떤 것도 그들을 도울 수 없다. 그러나
자연요법은 질병과 아무 관계가 없다
내가 아는 교수 한 분은 광적으로 자연요법에 빠져 있었다. 어떤 병이든지
그는 배에 머드 팩(mud pack)을 붙이라고 말한다. 나는 단지
즐기기 위해 그를 찾아가곤 했다. 그 방법이 매우 편안했고, 그곳에는
시설도 그리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욕실과 샤워실 ·
나는 아무 어려움 없이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는 지금
심한 편두퐁을 앓고 있습니다. "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배에 머드 팩을 붙이시오.
배에 머드 팩을 붙이는 것은 편두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편두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흙으로 가득 찬 욕조 속에 들어가서 머리만 내놓고 누워 있으면
매우 편안하고 매우 시원하다. 곧 그는 내가 자주 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계속해서 새로운 질병을 가지고 찾아오는군요."
내가 말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요법에 관한 책을
한 권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서 질병을 하나 얻어 가지고 교수님께
오는 것입니다 먼저 책을 읽고 교수님이 어떻게 하나 보려고 오는 것입니다.
제가 받고자 하는 자연요법이 있으면 저는 그 질병을 가지고 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불필요하게 진흙 속에서 30-분씩이나
누워 있겠습니까?"
"나를 속여 왔단 말인가요?"
"교수님을 속인 게 아닙니다. 저는 교수님의 가장 유명한 환자입니다.
대학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교수님을 비웃고 있지만 저는 교수님을 :
지지하는 유일한 파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저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편두통이 사라졌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했다. "맙소사, 이제 내 머리가 아프군. 썩 꺼지시오!"
사람들은 내게 화를 내곤 했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편두통이 사라지기는 커녕
더 심해졌습니다. " 왜냐하면 배를 차갑게 하는 것이 편두통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 중에는 동종요법만이 올바른 치료법이라고 믿는 광적인
동종요법사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모든 치료법은 위험하며 특히 역증요법을
독(毒)이라고 믿고 있다. 동종요법사에게 가면 그는 먼저 그대의 ?
생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병력(病歷)에 대해 물어 볼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단지 두통을 앓고 있을 뿐이다.
동종요법사 한 명이 내가 살고 있는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보러 오실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그 동종요법사에게
모시고 가곤 했다. 동종요법사는 내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버님을
모시고 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아버지는 3대
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조부가
어떤 병이 있었고‥‥‥‥
내가 그에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도 동종요법사입니다. 그분은 문의
근원으로 깊이 파고드는 겁니다 "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단지 두통을
앓고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조부가 앓았던 모든 질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서 부친이 앓았던 모든 질병에 대해서‥‥‥ 그리고 나서야
자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쯤이면
거의 하루가 끝납니다. 다른 환자들은 모두 돌아가고 나는 그분이 어린 시절부터
무슨 질병을 앓았는지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결국
두통을 앓고 계시는 것입니다. "
"내가 '맙소사, 왜 진작 두통을 앓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분은 '당신처럼 나도 동종요법사입니다. 당신에게 완벽한
상태를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겁니다. "
동종요법사들은 먼저 그대가 앓아 온 모든 질병에 대해 묻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질병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대의 삶도 하나로
연결된 전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동종요법사에게는 그대의 머리에 이상이
있든, 다리에 이상이 있든 큰 차이가 없다. 머리나 다리는 같은 육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종요법사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동종요법사는 그대가 어떤 역증요법제를 복용해 왔는지 물어 볼 것이다.
그것이 그대가 앓고 있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역증요법제가 독성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역증요법제가 독성
물질이라는 것은 자연요법사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연요법사들은
역증요법으로부터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단식이나 관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단 그대가 역증요법으로부터 깨끗해지면‥‥
인간은 주관적인 존재다. 환자가 의사를 사랑하면 그때는 물도 약처럼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환자가 의사를 증오하면 어떤 약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환자가 느끼기에 의사가 냉담하다면‥‥‥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냉담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도 인간인데 하루 종일
환자들을 돌봐야 하고, 매일같이 환자는 죽어 가고‥‥‥‥ 그들은
서서히 무감각해지며, 자신들의 감정과 정서와 인간성에 장벽을 쌓는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들이 주는 약은 효과가 없어진다. 그들은 마치
계가 약을 주듯, 거의 로봇 같은 방식으로 약을 준다.
사랑이 있다면 환자는 약을 받을 뿐 아니라 약 주변의 보이지 않는
것도 함께 받는다. 의학은 인간의 주관성과 사랑을 이해해야 하며,
사랑과 약이 환자를 돕는 데 함께 이용될 수 있는 어떤 종합을 이루어 ~야 한다.
의학을 완전히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한 가지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것은 의학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플라시보 요법이라 불리는 새로운 요법이 등장하고 있다 플라시보는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 약이지만 환자에게는 진짜라고 여기게끔 하면서
약을 주어야 한다. 환자만 그 약이 진짜라고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 역시 그 약이 진짜라고 여겨야 한다. 의사의 몸짓이 진실을 폭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도 그 약이 가짜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의사에게 물을 주사하도록 하거나, 혹은 진짜 약의
이름과 상표가 붙어 있는 설탕 알약을 주도록 해야 한다. 의사도 그것을
약으로 알고 있고 환자도 그것을 약으로 알고 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약효 성분이 없는 그 약이 효력을 발휘하여 환자가 치료되는 것이다.
의사가 그것이 약이라고 믿음으로써 환자가 치료될 수 있는 분위기
심리적 효과, 최면술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병원의
전체적인 설비가‥‥‥‥ 환자가 질병이 낫기를 바라고 있을 때 유명한
의사가 약을 주면 틀림없이 효과가 나타난다. 그 약이 진짜든 가짜든
상관이 없다.
진짜 약과 가짜 약이 같은 비율로 효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70퍼센트의 환자가 진짜 약으로 치료된다면 70퍼센트의 환자는
가짜 약으로, 플라시보로 치료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의학계에 커다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실제로는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첫째, 질병이 마음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질병이 나을 것이라고 마음이 확신을 하면
질병이 낫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의 진료비가 그다지
비싸지 않다면 치료 효과가 별로 없는 것이다. 진료비가 비쌀수록 치료
효과는 더 크다. 진료비가 아주 비싸서 그대가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대는 치료 효과를 빨리 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빨리 낫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진료비가 무료일 때 질병이 낫거나 말거나 누가
신경쓰겠는가?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을 내지 않았으니 질병이
나아도 좋고 낫지 않아도 좋다. " 그러나 돈을 냈을 때 그대는 질병이 낫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낫는다!
붓다는 마음이 요술쟁이라고 말했다. 마음은 질병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마음은 온갖 종류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아름다움과 추함, 성공과 실패, 부유함과 가난함‥‥‥ 마음은 계속해서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낸다. 일단 어떤 생각이 그대의 마음에 자리를 잡으면
모든 생명 에너지는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한다. 모든 샐각은
사물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물도 처음에는 단지 생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대는 일종의 최면 속에서 살고 있다. 붓다는 이 최면이
깨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최면을 깨뜨리기 위해 노력한
종교는 없다. 인간은 최면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간은 고통과 즐거움,
탄생과 죽음 등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면 마음이라는 요술쟁이는 사라진다‥‥‥ 그리고
진리만이 남게 된다. 그 진리가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의학적 치료법들-동종요법이나 아유르베다나
술 등-중에서 역증요법을 제외하면 어떤 것도 인간의 육체와 마음에 있는
내면의 자연적인 기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역증요법을 제외하고'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치료법들도 종종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과학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치료법들의
도움 역시 적지 않다. 이들의 도움을 살펴본다면 그것 역시 굉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유르베다나 침술, 동종요법, 자연요법은 전체 사례 가운데 거의 '
70퍼젠트는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그러나 70퍼센트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 이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70퍼센트의 질병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
70퍼센트의 질병은 단지 마음에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약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가짜 약이라도 _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70퍼센트는 적은 비율이 아니므로 나는
이 '치료법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 치료법이
인정되기를 바란다. 70퍼센트는 큰 비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런 70퍼센트의 경우는 역증요법으로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다. 실제로 질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단지 질병에 걸렸다고
믿는 사람들을 역증요법으로 어떻게 치료하겠는가? 역증요법으로1
이런 사람들을 도울 길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30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역증요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다. 30퍼센트의
사람들은 가장 과학적인 접근 방법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70퍼센트의
사람들은 온갖 가짜의, 실제로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미신적인
치료 방법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도 도움이 된다.
가장 과학적인 접근 방법인 역증요법은 자연에 데한 깊은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것은 육체가 자체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자연요법은 역증요법을 비난한다. 역증요법은 환자에게
바이러스를 주사한다. 왜냐하면 역증요법은 몸에 바이러스가 들어
오는 순간 몸이 즉시 항체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몸은 즉시 바이러스와 싸우기 시작한다. 몸은 자체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몸 전체는 바이러스를 파괴하기 위해 즉시 비상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자연요법은 이런 사실을 비난한다. 역증요법이 사람들에게 질병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병을 없애 줄 줄 알았는데 반대로
독이 있는 바이러스를 체내에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요법은 단식으로, 혹은 그대가 믿지 못할 이상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육체를 깨끗이 세척한다. 그러나 자연요벌은 진짜 질병을 앓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도움이 될 뿐이다:"
오쇼의 다이내믹 명상법
다이네믹 명상은 한 시간 동안 진행되며 다섯 단계로 되어 있다. 이 명상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여럿이 모여서 하면 에너지가 더욱 강력해진다. 명상은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라. 명상을
하는 동안 눈은 감고 있어야 하는데, 눈가리개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장은 비워 두는 것이 좋으며 옷은 헐렁하고 편안한 것을 입는 것이 좋다
· 제1단계 : 10분
코를 통해서 빠르게 호흡하라. 강렬하고 혼돈스럽게 호흡하라. 폐 속 깊숙이
호흡하라. 가능한 한 빠르고 깊게 호흡하라. 몸이 굳지 않게 하라. 목과 어깨를
이완시키고 가능한 한 빠르고 깊게 호흡하라. 그대가 호흡 자체가 될 때까지
계속하라. 호흡을 혼돈스럽게 하라(일정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호흡하지 말라). 일단 에너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에 따라 몸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몸이 움직이제 내버려두라. 그리하여 더 많은 에너지가 생기도록
하라. 팔과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내버려두면 더 많은 에너지가 생길 것이다.
에너지가 생기는 것을 느끼라. 1단계에서는 템포를 늦추지 말라.
· 제2단계 : 10분
몸을 따라가라. 몸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표현하게 하라‥‥‥‥ 폭발하듯
몸이 그대를 장악하게 하라. 내던질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내던지라, 완전히
미치라. 노래하고, 소리지르고, 웃고, 외치고, 울고, 점프하고, 흔들고. 춤추고
발로 차고, 그대 자신을 내팽개치라. 어떤 것도 남기지 말라. 온몸을 움직이라.
처음엔 몸을 약간 움직여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마음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라. 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 제3단계 : 10분
어깨와 목을 이완시키고 두 팔을 가능한 한 높이 올리라. 두 팔을 위로 올리고
아랫배에서 나오는 소리로 가능한 한 깊이 후‥‥! 후‥‥! 후‥‥! 하고 외치면서
위로 점프하라.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발뒤꿈치가 땅에 닿게 하라) =
소리가 성 센터를 깊이 두드리게 하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완전히
녹초가 되라.
· 제4단계 : 15분
정지! 어떤 자세를 ..................................
후략...............
뒷 부분은 책을 참조해 주십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