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세계유산(남한만 한정)은 7개 입니다.
창덕궁(서울), 수원화성(경기 수원), 석굴암/불국사(경북 경주), 해인사장경판전(경남 합천), 종묘(서울), 경주역사유적지구(경북 경주), 고인돌유적(전북 고창, 전남 화순, 인천 강화)
<< 자 료 >>
문화재청홈페이지 ( http://www.cha.go.kr/korea/index.action ) 문화재지식정보센터 ( http://www.cha.go.kr/cultural_info/infoMainList.action )
문화재청 사이트에 문화재지식정보센터를 클릭하시면 위쪽에 세계유산 이란 곳이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우리나라가 선정된 세계 유산이 있습니다.
* 위에는 설명이고, 아래는 선정기준입니다.
세계유산 (World Heritage) ?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파괴의 위험에 처한 유산의 복구 및 보호활동 등을 통하여 보편적 인류 유산의 파괴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고,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를 위한 국제적 협력 및 각 나라별 유산 보호활동을 고무하기 위함.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Ⅳ)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불국사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자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국사의 높이 8.2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높이 10.4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Ⅳ)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Ⅳ), (Ⅵ)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Ⅵ)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이 있는 유산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와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그 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제를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으로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때 처음 짓고 세조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일무 등의 춤을 춘다.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으며,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Ⅳ)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鮑石亭)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鷄林),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시설인 첨성대(瞻星臺)등이 있다.
대능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반도를 천년이상 지배한 신라왕조의 수도로 남산을 포함한 경주 주변에 한국의 건축물과 불교 발달에 있어 중요한 많은 유적과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고인돌유적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일종으로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피라미드(Pyramid), 오벨리스크(Obelisk)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창·화순·강화고인돌유적(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은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유럽, 중국, 일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창고인돌유적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일대에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고창지석묘군(사적 제391호) 고창지석묘군(사적 제391호)
화순고인돌유적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상태가 좋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화순 효산리 및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제410호)
화순 효산리 및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제410호)
강화고인돌유적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 내가지석묘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6호) 강화 대산리고인돌 (인천광역시기념물 제31호) 강화 부근리점골지석묘 (인천광역시기념물 제32호)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Ⅲ)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 추 신 > 직접 들어가보시면, 물론 추가설명이 더 있고 사진자료와 VR(동영상자료), 그림지도 등이 있습니다. 기타 문화재와 관련된 숙제도 문화재청을 이용하시는 것 추천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모두 7개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있다. 창덕궁, 수원 화성,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이밖에, 몇 년전 설악산을 자연유산으로 지정할려고 했으나,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이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현재 제주도의 주상절리를 자연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작업이 활발하다.
경주 -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1995년 지정), Gyeongju Historic Areas (2000년 지정)
불국사의 정원
불국사 전경
하나의 도시에 2개가 지정된 경우는 비엔나, 로마, 티볼리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매우 특이한 경우로 프랑스의 랭스나 모젤, 라인계곡 등이 있다. 이렇듯, 경주는 세계문명과 문화의 흐름에서 손가락에 드는 매우 중요한 도시인 것이다.
경주에 진입하면 도시가 매우 편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제주도를 방문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니 경주와 제주도는 모두 특별법에 의해서 쉽게 개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경주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 건축시에 문화재청에 신고를 해야하고, 제주도는 지하수관리와 고도제한으로 인하여 경주와 제주도를 방문할 때 시야를 헤치지 않기에 아늑하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두 도시 모두 보문단지와 중문단지로 숙박과 위락시설을 집중한 것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나온 완숙함일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경주와 제주는 자전거로 어느 정도 여행이 가능하다는 점 또한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 전경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
간혹, 서울을 떠나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풍경이나 도시들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 결국에는 경주와 제주도로 압축되는 것도 두 도시가 지닌 독특한 매력, 즉 체계적인 개발을 따른 아늑함과 완숙함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불국사는 약간 위락지 분위기로 변한다. 석굴암 역시 밀리는 사람들 틈에서 스쳐가며 보아야 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의 여행이라면 경주의 남산 산행을 권하고 싶다.
천마총 (멀리 보이는 산이 남산)
삼릉에서 시작하여 석불좌상 - 삼층석탑 - 마애여래좌상 - 용장마을로 내려오는 코스는 운이 좋다면, 중간 중간에서 자원 봉사자나 관광안내원으로 부터 남산의 석불과 마애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 아무리 사전에 정보를 많이 취하고 자료를 수집하더라도 막상 문화재를 접하면 어디에서 부터 이해를 하고 무엇을 자세히 봐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패키지 여행을 대단히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혼자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면, 패키지 여행 뒤를 따라 다니며 귀동냥에 의존하는 경우도 무시하지 못한다. 혼자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숲을 보는 여행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 문화재에 숨어있는 (사실이던, 사실이 아닌 전설이던) 작은 나무들을 놓치는 것을 보면 결코 자유여행이 최선은 아니다.
첨성대 야경
여행에 대한 몇가지 오해가 있는데, 여행서적의 바이블로 통하는 론리플래닛의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혼자서 여행을 하면 100을, 둘이서 여행을 하면 50을, 셋이서 여행을 하면 33을 배운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동의 하지 않고 '혼자서 여행을 하면 고독을, 둘이서 여행을 하면 배려를, 셋이서 여행을 하면 인내를 배운다'고 정의하고 싶다. 또 다른 것으로 개인 자유여행이 패키지 여행보다 수준이 높다는 착각이다. 여행을 어느 관점에서 볼 것이가에 따라 다르지만, 반드시 자유여행이 패키지 여행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는 할 수 없다. 유럽에서 내가 만났던 거의 모든 한국인 대학생들은 오히려 패키지 여행을 따라 왔어야 했다. 그들은 한달 동안 계속해서 유럽의 비슷 비슷한 교회와 미술관을 보면서, 그게 그거이고 따라서 자신에게는 스위스의 어느 작은 마을이 가장 좋았다는 점으로 여행의 목적을 합리화 한다. 세계사, 건축, 미술학도가 아니라면 로마나 루브르박물관를 이해하기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어로 편집된 '3일 만에 끝내는 프랑어'의 1장 10 여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가이드 (현지인이던, 한국인이던, 무선안내방송기기이던)를 통하는 것을 적극 권하고 싶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일부분은 아직도 채색이 남아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은 해발 468m의 금오산과 494m의 고위산인 까닭에 쉽게 산책하듯 볼 수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신라인들의 신앙지이고 영험한 산으로 절터가 146곳, 석불과 마애불이 118체, 석탑과 폐탑이 96기 이를만큼 볼거리가 곳곳에 펼쳐있고 40여개의 골짜기와 등성이가 있기 때문에 등산화는 필수이다. 남산 전체를 돌아보는데는 크게 3개의 코스가 있기 때문에 하루에 하나씩 약 2박 3일 정도를 예상하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다.
남산에 하루나 이틀을 투자하고, 남는 시간에는 안압지, 반월성, 계림, 첨성대, 대릉원(천마총), 그리고 경주 국립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자동차의 경우는 반드시 한곳에 주차하고 도보를 이용하여 둘러보는 것이 좋다. 이 지역은 일몰후에도 너무 화려하지 않은 야경이 매우 운치가 있기 때문에 남산을 둘러본 후에 저녁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안압지 야경
한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왜 경주 패스 (Pass)와 같은 1일 티켓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매번 유적지를 입장할때 마다 일일이 계산을 해야 하는 점이 무척 번거롭다. 1일 - 1만원, 3일 - 2만원 정도로 경주패스가 나온다면 전체적으로는 좀 더 많은 입장 수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실제로 포석정이나 첨성대 같은 경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황당한 느낌을 받는다.
서출지
석굴암, 불국사 각각 성인 입장료 4000원과 주차료 2000원으로 최소 1만원의 비용이 든다. 4인 가족으로 경주 전체를 관람하면 약 10만원 가량을 예상해야 한다. 혼자서 이번 여행 7일 동안 모두 70만원을 지출하였다. 휘발유와 고속도로 이용료, 숙박, 식사, 관람료. 모든 것이 서유럽의 평균보다 같거나 더 비쌌다. 화폐 가치가 많이 하락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해인사 -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1995년 지정)
대장경의 원래 뜻은 범어인 트리피타카(TRIPITAKA)가 말해주듯 ‘세 개의 광주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담은 율(律),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놓은 론(論), 이 세 가지 큰 광주리를 합쳐 대장경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경전 일체를 총괄하는 것이기에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한다. (자료 출처 : 해인사 (http://www.haeinsa.or.kr/tripitaka/tripitaka_2.html))
해인사 전경
최근에 읽은 책, [잭 웨더포드의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는 고려대장경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데 몇가지 인용할 만한 내용이 있다. 유목민, 즉 몽고족은 수천년에 걸쳐 고삐, 재갈, 안장 깔개 등을 이용하여 말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처럼 엄청난 에너지원을 자신의 것으로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언제나 농경문화를 습격하고 약탈하는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특히, 등자(말을 탔을때 두발을 디디는 도구)는 매우 혁신적인 발명으로 등자를 디딛기 때문에 창으로 찌를 때 마치 땅 바닥에서와 같이 안정된 힘으로 버틸 수 있고, 더욱이 말의 속도를 감안하면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또한, 안장의 경우는 자유롭게 몸을 비틀고 돌리면서 어느 방향으로나 안정적으로 활을 쏠 수 도 있게 되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이들은 서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터키, 페르시아, 중국, 인도 어느 나라든지 정복하였는데, 일본의 경우는 섬이기 때문에, 서유럽의 경우는 울창한 숲 때문에 기병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유목민은 매우 놀랄만한 통신술을 갖추고 있었다. 매 50 킬로미터 마다 역참을 두어 파발을 이용하여 하루에 500 킬로미터라는 놀라운 속도가 가능했고(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함), 팍스몽골리안 동안에는 핀란드에서 베트남까지 사상최대의 제국을 다스렸고, 이 기간에 여자아이가 머리에 금을 이고 영토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도 괴롭히지 않을 정도로 잘 재편된 행정조직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에는 몽골족, 즉 기마민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종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만큼 강력했던 것이고, 그들이 정벌하는 지역에서는 매우 강력한 제도가 효율적으로 이용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도읍을 강화로 옮겨 피난 와중에 오직 불심의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무력함을 이해할 수 있다.
내려오는 길에는 성철스님의 부도탑이 있는데, 청빈한 삶과는 아이러니 하게 너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후세 사람들이 큰 뜻을 기리기 위함이겠으나... 해인사 성보박물관의 10세기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목조회랑조사상은 꼭 한번 관람하기 바란다.
고창/화순 - 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 (2000년 지정)
고창은 복분자, 풍천장어, 그리고 선운사로 우리에게 유명하다. 고창과 화순이 외국인들에게 어필할 수는 없을까 ? 외국인 뿐만 아니라, 고창과 화순의 고인돌은 우리들에게도 당분간 매우 힘들 것 같다. 첫째,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보존해야 할 문화적 의의는 있으나 피라미드, 오벨리스크, 스톤헤지와 비교할 때 그 규모가 너무 작다. 둘째, 둘째, 사유지와 뒤섞여 일반 무덤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있고 관리가 미흡하여 일반인이 얼핏보면 산에서 흘러내린 돌 무더기 더미에 지나지 않는 점이 아쉽다. 세째, 인프라가 부족하여 찾아가는 길이 너무 어렵고 주변도시들이 특징이 없어 라스코, 알타미라, 베젤레의 벽화처럼 미술사적인 의의가 없어 고고학자를 제외하면 찾아가지 않을 듯 하다.
화순 고인돌 군락
현재, 고창은 고인돌 보다는 선운사/복분자에 무게를 두고 있고, 화순은 다른 특별한 것이 없어 고인돌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중이다. 그러나, 사후체험이라고 목관을 만들어 들어가서 누워보게 한 것, 청동기 시대를 마치 원시시대로 표현한 것 등 고인돌공원 안내도와는 너무도 다른 부실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금 만 더 신경쓴다면 보성 녹차밭 못지 않게 개발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거입니다 도움 되셧 길..... |
내용출처 : 본인작성
해인사 장경판전
문화유산 가야산 국립공원에 자리잡은 불교사찰. 지금은 약 250명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가장 방대하고 위대한 경전인 팔만대장경의 보관장소이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대구 서쪽, 부산 북서쪽의 해인사
의의 대승불교의 삼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전한 판본의 보관처
역사
802년 승려 순응과 이정이 절을 세움
1009~1031년 고려 현종 때 첫번째 팔만대장경판의 제작
1087년 팔만대장경 완성
1236~1251년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된 팔만대장경을 고종 때 다시 제작함
1398년 이후 한양의 지천사(支天寺)에서 판본을 보관함
1488년 장경판전 완공
1592, 1597년 왜란
1817년 해인사 화재
1928년 대웅전 중건
1940년 상성각 중건
1967년 명부전 중건
11세기 초반에 고려의 지배자는 불경 인쇄를 위해 경판의 제작을 명했다. 부처의 힘을 빌려 북방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어책의 하나였던 이 과업은 수십년 후에야 완성되었다. 하지만 원래의 기원은 실현되지 못했으니, 1232년 몽골의 침략 때 경판은 화염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조정은 서울 서쪽에 강화도로 피신해 버렸던 것이다. 몽골의 침략이 있고 몇 년 뒤 그곳에서 다시 16년의 대 역사를 통해 두번째로 경판이 제작되었다.
해인사는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했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가야산의 숲 속에 거의 1200년 동안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해인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는데, 왕비의 병이 기적같이 나은일 때문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왕비가 등창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왕은 초당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2명의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실로 등창부위를 묶고 그 한 끝을 나무에 묶었다. 그리고 왕비의 병석 옆에서 밤새도록 염불을 했는데, 날이 새자 기적갔이 왕비는 나았고 나무는 말라 죽었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왕이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했다.
지금은 예불자나 방문객들 앞에 새로운 기적이 놓여있으니,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바로 그것이다. 산벚나무와 들배나무로 만든 8만 1258개의 경판 양면에는 당시 통용되던 한자로 불경이 새겨져 있다. 한 면에 322자, 따라서 경판하나에 644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를 8만 1258과 곱하면 5233만 152자가 된다. 물론 모두 뒤집어 새긴 것이다!
이 천 년의 걸작은 처음에 밝힌 것처럼 두 번 제작되었다! 판이 갈라지거나 휘는 것을 막기 위해 우선 나무를 가공해야 했다. 통나무를 3년간 바닷물에 담갔다가 같은 크기의 판으로 잘랐다. 그 뒤에 이것들을 다시 소금물에 완전히 담가 끓였다가 조심스럽게 그늘에 말렸다. 그러고 나서 판의 결을 매끄럽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위에 글자를 쓰고 파내기 시작했다. 목판을 팠던 이들은 한 자씩 새길 때마다 꼭 부처에게 예를 표했다.
그렇다면 과연 부처의 도움이 있었을까? 어떤 판들은 재차 처리되고 다듬어져야 하지 않았을까? 어떤 한자는 62획이 넘는 것도 있어서 실수를 할 가능성은 늘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판에서도 오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일단 한자에 통달해 있다는 것을 전재하고, 누군가 지금 이 경판을 읽는다고 하자. 경판 하나를 읽는 데 하루가 걸린다고 치면 평생 읽어도 다 읽을 수 없다. 적어도 223년은 걸릴 것이다.
왜구로 인해 해안은 늘 불안했기 때문에 경판은 14세기 말에 내륙 깊숙한 곳으로 옮겨졌다. 균형을 잡아가며 머리에 경판을 하나씩 이고 나른 비구니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의 장경판전이 완성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그 후로 해인사에는 7번이나 화재가 났었지만, 장경판전은 늘 화를 면했다. 한국전쟁 당시 나무에 새겨진 부처의 가르침은 다시 한번 화염에 휩싸일 운명에 처했다. 북한군은 해인사 지역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해인사를 폭파하라는 명령은 무시되었고, 다행히 경판이 다시 파괴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부처의 설법과 교단 계율 및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삼장경(三藏經)은 극동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보전될 수 있었다. -클라우스 레티히-
석굴암과 불국사
문화유산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 백운교와 청운교, 극락전과 종루 등이 유명한 사찰이다. 석굴암은 3.5m높이의 좌상인 본존불이 39인의 관음보살과 10인의 제자에게 둘러쌓여 있는 인공 석굴이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경주 남동쪽 토함산 기슭과 인근
등록 1995년
의의 종교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동아시아 건축 문화의 걸작
역사
528 또는 535년 불국사 창건
751~774년 불국사 재창건 및 석굴암 건립
1913~1915년 일제 식민 시대 때 비전문적인 보수작업
1959년 불국사 본전 중건
1962~1964년 공간이 본래 지녔던 이미지를 복원하기 위해 입구를 유리벽으로 막는 등 전문적이 석굴암 복원 작업
종묘
문화유산 왕족의 신위와 공자를 모신 곳으로 이곳에서 제례악이 연주되고 제사가 거행되었다. 왕가의 무덤도 있다. 길게 뻗은 영령전, 신하들의 공로를 기리는 공신당, 제사예물을 넣어두는 향대청 등이 있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서울
등록 1995년
의의 왕실과 공자를 모시던 현존 최고(最古)의 묘
역사
1392~1910년 조선왕조 통치기
1394년 종묘 건축
1418~1450년 세종 때 영령전 건축
1967년 영조 사망 이후 마지막으로 왕실의 위폐를 모심
1971년 제례의식 재도입
수원 화성
문화유산 잘 보존된 6km길이의 성벽과 4대문(창룡문, 장안문, 화서문, 팔달문)이 있는 '꽃의 성'. 포루, 치성이라 불리는 망루와 중앙이 비어 있는 망루라는 뜻의 '공신돈' 등이 유명하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수원
등록 1997년
의의 근대(18세기) 극동 지방의 방어용 건축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역사
1776~1800년 정조 통치 기간
1796~1801년 성곽축조
1950~1953년 한국전쟁 동안 파괴
1975~1979년 치밀한 공사 계획과 공사 재료 목록, 또 어떤 건축 기술 등을 사용했는지 수록되어 있는 640쪽에 달하는 건축 보고서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
창덕궁
문화유산 화려한 정문 돈화문과 국내 건물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추정되는 명정전, 본래 왕실 구성원만 출입할 수 있었던 비원 등으로 이루어진 왕궁이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서울
등록 1997년
의의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던 15세기 극동지역 건축문화와 정원 조형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탁월한 유적
역사
1405년 태조 이성계의 여름 별궁. 근처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에 이어 제 2의 궁으로 건축
1485년 세종 때 궁전 정비
1592년 화재로 인해 부분적으로 소실
1611년 재건
1872년 제 2의 궁이라는 지위 상실
1907년 복원
경주 역사 지구
문화유산 경주는 신라 천 년(기원전 57~기원후 935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로 고대국가의 역사 유적과 유물, 불교 유적 등이 산재되어 있다. 신라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서 신라 왕경(王京)의 규모와 찬란했던 도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이곳은 유산의 성격에 따라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 미술의 보고인 남산 지구, 천 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 지구, 고분과 왕릉이 있는 대릉원 지구, 신라 불교의 정수를 담고 있는 황룡사 지구, 경주 방어의 거점이었던 산성 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 문화재가 포함되어있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등록 2000년
역사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이라는 나라를 세움
65년 국호를 계림으로 고침
307년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도가 됨
935년 고려가 신라를 합병하면서 처음으로 경주로 불림
940년 대도독부로 승격
987년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이름이 바뀌고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됨
1012년 다시 경주로 바뀜
1015년 안동대도호부로 개칭
1031년 동경유수로 환원
1202년 경주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
1219년 동경유수로 다시 환원
1308년 계림부윤으로 바뀜
1413년 다시 경주로 전해짐
1896년 경상북도에 속하게 됨
1931년 경주면에서 읍으로 승격
1955년 경주읍과 주변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
1970년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주개발 사업이 시작되어 유물과 유적 발굴 시작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10대 유적지의 하나로 선정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지역
문화유산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며, 전국적으로 약 3만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은 밀집분포도가 높고 형태가 다양하여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알 수 있고 선사 시대의 문화상과 정신세계, 사회구조, 정치체제 또한 엿볼 수 있어 선사 시대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보존 가치가 높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고창 고인돌 유적은 전라북도 고창군 중림리와 도산리 일대에 동서로 약 1764m범위에 걸쳐 10톤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 442기가 분포되어 있다. 그 형태도 다양하여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이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
문화유산 가야산 국립공원에 자리잡은 불교사찰. 지금은 약 250명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가장 방대하고 위대한 경전인 팔만대장경의 보관장소이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대구 서쪽, 부산 북서쪽의 해인사
의의 대승불교의 삼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전한 판본의 보관처
역사
802년 승려 순응과 이정이 절을 세움
1009~1031년 고려 현종 때 첫번째 팔만대장경판의 제작
1087년 팔만대장경 완성
1236~1251년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된 팔만대장경을 고종 때 다시 제작함
1398년 이후 한양의 지천사(支天寺)에서 판본을 보관함
1488년 장경판전 완공
1592, 1597년 왜란
1817년 해인사 화재
1928년 대웅전 중건
1940년 상성각 중건
1967년 명부전 중건
11세기 초반에 고려의 지배자는 불경 인쇄를 위해 경판의 제작을 명했다. 부처의 힘을 빌려 북방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어책의 하나였던 이 과업은 수십년 후에야 완성되었다. 하지만 원래의 기원은 실현되지 못했으니, 1232년 몽골의 침략 때 경판은 화염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조정은 서울 서쪽에 강화도로 피신해 버렸던 것이다. 몽골의 침략이 있고 몇 년 뒤 그곳에서 다시 16년의 대 역사를 통해 두번째로 경판이 제작되었다.
해인사는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했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가야산의 숲 속에 거의 1200년 동안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해인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는데, 왕비의 병이 기적같이 나은일 때문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왕비가 등창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왕은 초당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2명의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실로 등창부위를 묶고 그 한 끝을 나무에 묶었다. 그리고 왕비의 병석 옆에서 밤새도록 염불을 했는데, 날이 새자 기적갔이 왕비는 나았고 나무는 말라 죽었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왕이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했다.
지금은 예불자나 방문객들 앞에 새로운 기적이 놓여있으니,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바로 그것이다. 산벚나무와 들배나무로 만든 8만 1258개의 경판 양면에는 당시 통용되던 한자로 불경이 새겨져 있다. 한 면에 322자, 따라서 경판하나에 644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를 8만 1258과 곱하면 5233만 152자가 된다. 물론 모두 뒤집어 새긴 것이다!
이 천 년의 걸작은 처음에 밝힌 것처럼 두 번 제작되었다! 판이 갈라지거나 휘는 것을 막기 위해 우선 나무를 가공해야 했다. 통나무를 3년간 바닷물에 담갔다가 같은 크기의 판으로 잘랐다. 그 뒤에 이것들을 다시 소금물에 완전히 담가 끓였다가 조심스럽게 그늘에 말렸다. 그러고 나서 판의 결을 매끄럽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위에 글자를 쓰고 파내기 시작했다. 목판을 팠던 이들은 한 자씩 새길 때마다 꼭 부처에게 예를 표했다.
그렇다면 과연 부처의 도움이 있었을까? 어떤 판들은 재차 처리되고 다듬어져야 하지 않았을까? 어떤 한자는 62획이 넘는 것도 있어서 실수를 할 가능성은 늘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판에서도 오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일단 한자에 통달해 있다는 것을 전재하고, 누군가 지금 이 경판을 읽는다고 하자. 경판 하나를 읽는 데 하루가 걸린다고 치면 평생 읽어도 다 읽을 수 없다. 적어도 223년은 걸릴 것이다.
왜구로 인해 해안은 늘 불안했기 때문에 경판은 14세기 말에 내륙 깊숙한 곳으로 옮겨졌다. 균형을 잡아가며 머리에 경판을 하나씩 이고 나른 비구니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의 장경판전이 완성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그 후로 해인사에는 7번이나 화재가 났었지만, 장경판전은 늘 화를 면했다. 한국전쟁 당시 나무에 새겨진 부처의 가르침은 다시 한번 화염에 휩싸일 운명에 처했다. 북한군은 해인사 지역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해인사를 폭파하라는 명령은 무시되었고, 다행히 경판이 다시 파괴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부처의 설법과 교단 계율 및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삼장경(三藏經)은 극동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보전될 수 있었다. -클라우스 레티히-
석굴암과 불국사
문화유산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 백운교와 청운교, 극락전과 종루 등이 유명한 사찰이다. 석굴암은 3.5m높이의 좌상인 본존불이 39인의 관음보살과 10인의 제자에게 둘러쌓여 있는 인공 석굴이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경주 남동쪽 토함산 기슭과 인근
등록 1995년
의의 종교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동아시아 건축 문화의 걸작
역사
528 또는 535년 불국사 창건
751~774년 불국사 재창건 및 석굴암 건립
1913~1915년 일제 식민 시대 때 비전문적인 보수작업
1959년 불국사 본전 중건
1962~1964년 공간이 본래 지녔던 이미지를 복원하기 위해 입구를 유리벽으로 막는 등 전문적이 석굴암 복원 작업
종묘
문화유산 왕족의 신위와 공자를 모신 곳으로 이곳에서 제례악이 연주되고 제사가 거행되었다. 왕가의 무덤도 있다. 길게 뻗은 영령전, 신하들의 공로를 기리는 공신당, 제사예물을 넣어두는 향대청 등이 있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서울
등록 1995년
의의 왕실과 공자를 모시던 현존 최고(最古)의 묘
역사
1392~1910년 조선왕조 통치기
1394년 종묘 건축
1418~1450년 세종 때 영령전 건축
1967년 영조 사망 이후 마지막으로 왕실의 위폐를 모심
1971년 제례의식 재도입
수원 화성
문화유산 잘 보존된 6km길이의 성벽과 4대문(창룡문, 장안문, 화서문, 팔달문)이 있는 '꽃의 성'. 포루, 치성이라 불리는 망루와 중앙이 비어 있는 망루라는 뜻의 '공신돈' 등이 유명하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수원
등록 1997년
의의 근대(18세기) 극동 지방의 방어용 건축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역사
1776~1800년 정조 통치 기간
1796~1801년 성곽축조
1950~1953년 한국전쟁 동안 파괴
1975~1979년 치밀한 공사 계획과 공사 재료 목록, 또 어떤 건축 기술 등을 사용했는지 수록되어 있는 640쪽에 달하는 건축 보고서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
창덕궁
문화유산 화려한 정문 돈화문과 국내 건물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추정되는 명정전, 본래 왕실 구성원만 출입할 수 있었던 비원 등으로 이루어진 왕궁이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서울
등록 1997년
의의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던 15세기 극동지역 건축문화와 정원 조형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탁월한 유적
역사
1405년 태조 이성계의 여름 별궁. 근처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에 이어 제 2의 궁으로 건축
1485년 세종 때 궁전 정비
1592년 화재로 인해 부분적으로 소실
1611년 재건
1872년 제 2의 궁이라는 지위 상실
1907년 복원
경주 역사 지구
문화유산 경주는 신라 천 년(기원전 57~기원후 935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로 고대국가의 역사 유적과 유물, 불교 유적 등이 산재되어 있다. 신라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서 신라 왕경(王京)의 규모와 찬란했던 도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이곳은 유산의 성격에 따라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 미술의 보고인 남산 지구, 천 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 지구, 고분과 왕릉이 있는 대릉원 지구, 신라 불교의 정수를 담고 있는 황룡사 지구, 경주 방어의 거점이었던 산성 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 문화재가 포함되어있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등록 2000년
역사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이라는 나라를 세움
65년 국호를 계림으로 고침
307년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도가 됨
935년 고려가 신라를 합병하면서 처음으로 경주로 불림
940년 대도독부로 승격
987년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이름이 바뀌고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됨
1012년 다시 경주로 바뀜
1015년 안동대도호부로 개칭
1031년 동경유수로 환원
1202년 경주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
1219년 동경유수로 다시 환원
1308년 계림부윤으로 바뀜
1413년 다시 경주로 전해짐
1896년 경상북도에 속하게 됨
1931년 경주면에서 읍으로 승격
1955년 경주읍과 주변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
1970년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주개발 사업이 시작되어 유물과 유적 발굴 시작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10대 유적지의 하나로 선정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지역
문화유산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며, 전국적으로 약 3만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은 밀집분포도가 높고 형태가 다양하여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알 수 있고 선사 시대의 문화상과 정신세계, 사회구조, 정치체제 또한 엿볼 수 있어 선사 시대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보존 가치가 높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고창 고인돌 유적은 전라북도 고창군 중림리와 도산리 일대에 동서로 약 1764m범위에 걸쳐 10톤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 442기가 분포되어 있다. 그 형태도 다양하여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이 있다.
화순 고인돌 유적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km에 걸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상태가 좋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 기술과 축조, 운반 방법 등을 알 수 있다.
강화 고인돌 유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120여 기 정도가 분포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 분포 지역의 평균 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200m까지 분포되어 있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남도 화순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등록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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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 도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UNESCO WORLD HERITAGE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를 설명하겠습니다.
1.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3.불국사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자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국사의 높이 8.2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높이 10.4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4.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5.경주 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鮑石亭)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鷄林),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시설인 첨성대(瞻星臺)등이 있다.
대능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6. 고인돌유적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일종으로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피라미드(Pyramid), 오벨리스크(Obelisk)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창·화순·강화고인돌유적(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은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유럽, 중국, 일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고창고인돌유적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일대에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고창지석묘군(사적 제391호)
2)화순고인돌유적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상태가 좋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화순 효산리 및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제410호)
3)강화고인돌유적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Ⅳ)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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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이다.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은 그때까지 사용되던 한자가 우리말과 구조가 다른 중국어의 표기를 위한 문자체계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배워 사용할 수 없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여 세종 25년(1443)에 우리말의 표기에 적합한 문자체계를 완성하고 "훈민정음"이라 명명하였다.
세종 28년(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하였는데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였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한 귀중본이다.
세종은 새로 만든 새문자에 대하여 창제의 목적을 밝힌 서문과 새문자 하나 하나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예시하고 설명한 글을 짓고,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용례를 짓도록하여 책을 만들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공표하였다.
이 책에는 세종어제 서문과 훈민정음 음가 및 운용법을 밝힌 예의편이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합자해, 용자례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자기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문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한글과 같이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이미 존재한 문자에서 직접으로 영향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하게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은 유례가 없었던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이 책에서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해서는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어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이 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로 제정한 것이나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주는 것은 이 책의 문화사적 의의를 나타낸다.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훈민정음, 곧 한글은 창제당시 28자로 오늘날에는 24자만 사용되는데, 한국어를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배우기와 사용하기에도 편리한 문자체계이다. 문자체계 자체로도 독창적이며 과학적이라고 인정되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이 책은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의 8학자가 집필한 것으로 훈민정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세종이 지은 것으로 책의 본문에 해당된다.
본문의 내용은 새문자를 창제한 목적을 천명한 훈민정음 서문과, 새문자 28자를 초성 11자로 나누어 차례로 예시하고 설명한 다음에 이들을 결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예구로 되어 있다.
제2부는 세종의 명령에 따라 젊은 학자들이 지은 본문에 대한 주석이다. 그것은 새문자의 제작원리를 설명한 제자해, 음절 두음을 표기하는 자음 17자를 설명한 초성해, 모음 11자를 설명한 중성해, 음절말지음을 설명한 종성해, 초성·중성·종성이 결합하여 음절을 표기하는 방법을 설명한 합자해, 새문자로서 단어를 표기한 예를 보인 용자례의 6장으로 나뉜다. 끝에는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이 붙어있다.
훈민정음은 전체 분량이 본문 4장, 주석과 정인지의 서문 29장으로 된 33장에 지나지 않으나, 이론 전체가 정연하고 서술이 과학적인 내용의 책이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은 현대의 세계 언어학자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훈민정음을 서지학적으로 살펴보면 본체가 33장, 표지가 2장으로 된 책인데, 세로 32.3cm,가로 20cm의 크기로 되어 있다. 장정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5침안으로 된 선장본이다. 책의 크기가 당시 중국과 일본의 책들보다 크다. 이 책은 유려한 글씨로 정교하게 새긴 목판으로 인쇄되어 있다. 사용된 종이나 먹도 우수하여 한국의 15세기 출판문화의 우수함이 드러나 있다. 책장은 각기 2면이 인쇄되어 있는데, 인쇄된 1면의 크기는 세로 23.3cm, 가로 16.5cm이다. 이 책에는 구두점과 성조 표시의 구너점이 사용되어 있다. 세종이 창제한 새 글자는 오늘날까지 자형이 조금씩 변화되어 왔으나 이 책의 자형이 가장 초기의 모습이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실제 편술까지의 편수 간행작업을 직접하였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실록의 편찬은 다음 국왕 즉위한 후 실록청을 개설하고 관계관을 배치하여 편찬하였으며 사초는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하였다.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고의 실록들이 병화에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책만 남아 있다. 적상산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198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함께 보관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및 태백산본을 분리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실록편찬시 이용되는 자료는정부 기관에서의 보고 문서 등을 정리해 둔 춘추관시정기, 전왕 재위시의 사관들이 작성해 둔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일성록 등 정부 주요기관의 기록과 개인의 문집 등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들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동시에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 그리고 기밀사무 등을 직필(直筆)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법(史法)이 매우 엄하여 사관이외에는 아무도 볼수가 없었으며,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까지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세계적 기록유산으로서의 의의......................................................
첫째, 조선왕조실록은 25대 군주의 실록이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기에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실록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도 296년간에 걸친 실록에 불과하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세계적인 역사서이다.
일본의 삼대실록(三代實錄)은 빈약한 것이고, 남원조(南院朝)의 대남실록(大南實錄)은 548권으로 편성되었다. 중국의 황명실록(皇明實錄)은 2,964권으로 된 대질이나 권수만 많을 뿐이지 기록내용은 소략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총 6,400만 자인데 대해 황명실록은 총 1,600만자에 불과하다.
셋째로, 조선왕조실록은 내용이 다양하여 가히 백과전서적 실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 생활로부터 천문, 지리, 음악, 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나 천문현상과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종합사서요,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담겨져 있는 민족문화서인 것이다.
넷째,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記述)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관료였다.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다.
다섯째로, 활자로 인쇄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인 것이다.
조선은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를 가장 앞서 실용한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활자개량에 힘쓰고, 각종 도서를 간행해 온 전통이 있었다.
여섯째, 조선말기까지 이들 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온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보기 힘든 일이다.
선왕의 실록편찬사업이 끝나면 최종원고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각지 깊은 산중에 소재하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왔다.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 함)은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등의 사전부(史傳部)의 여러 불서(佛書)를 섭렵하고 역대의 여러 불조사(諸佛祖師)의 게(偈), 송(頌), 찬(讚), 가(歌), 명(銘), 서(書), 법어(法語), 문답(問答) 중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것만을 초록(抄錄)하여 찬술(撰述)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는 수신오도(修身悟道)의 명귀에서 채록한 것으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直視)하면,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본서는 우리나라의 학승(學僧)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학습서인 것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찬자(撰者)인 백운화상(白雲和尙)은 백운이 그의 호이며, 법명(法名)은 경한(景閑)이다.고려 충렬왕 24년(1289)에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출생하여, 공민왕 23년(1374)에 여주(驪州)의 취암사(鷲巖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신 분이다.
화상은 어려서 출가하여 불학(佛學)을 익히고 수도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후에 백운화상은 중국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의 석옥청공(石屋淸珙)화상으로부터 직접 심법(心法)을 전수 받았으며, 인도의 지공(指空) 화상에서도 직접 법(法)을 물어 도(道)를 깨달았던 것이다. 귀국한 뒤에는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1301∼1382)나 혜근 나옹화상(惠勤懶翁和尙, 1320∼1376)과 더불어 대선사(大禪師)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 해주(海州)의 안국사(安國寺)에서 11년 동안이나 선림(禪林)의 정업(精業)에 전력하였고, 뒤에는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후학들을 계도(啓導)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이 해외로 유출된 경위는 조선시대 고종때 주한 불란서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한바 있는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간 장서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그후 골동품수집가였던 앙리베베르(Henry Vever)에게 넘어갔으며 그가 1950년에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하권은 3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장은 없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고 있다.
흥덕사(興德寺)의 창건년대와 규모는 알수 없으나, 「불조직지심체요절」하권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그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것이다.
그러나 흥덕사지의 위치를 확인할수 없던 중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북[靑銅禁口]과 청동불발(靑銅佛鉢)에 "西原府 興德寺(서원부 흥덕사;서원은 신라때 청주의 이름)"라는 글자(名文)가 음각되어 있어 이곳이 바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흥덕사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 책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는데, 인쇄술을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교정을 쉽게 하여 주었고 이 모든 것은 책의 신속한 생산에 공헌하였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먹, 즉 기름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이 혁신한 실용적인 활판 인쇄술은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승정원일기
승정원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1623년(인조1) 3월부터 1894년(고종31) 6월까지 272년간 승정원에서 처리한 국정 기록과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규장각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1910년(융희 4)까지 총 3,243책의 기록이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이며, 또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1999.4.9)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내용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실의 기록으로 계품(啓稟), 전지(傳旨), 청패(請牌), 청추(請推), 정사(呈辭), 상소(上疏), 선유(宣諭), 전교(傳敎)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기재 방식을 보면 한 달을 기준으로 책머리에 월간 경연상황, 내전(內殿)의 동향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승정원의 관리 및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실태를 표시하고 마지막에 승정원의 업무현황, 왕 및 내전의 문안, 승정원의 인사관계(人事關係) 등의 내용을 실었다.
「승정원일기」는 일기식으로 한달에 1책씩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후기로 올수록 내용이 많아져 한 달에 2책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조선 건국 초부터 정리되었으나 조선전기분(朝鮮前期分)은 임진왜란 등의 병화(兵火)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는 3,243책만이 남아 있으며, 국사(國史)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군사 등 모든 학문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다.
그 사료적 가치는 중국의 「중국 25사」(3,386책, 약 4,000만자) 및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888책, 5,400만자)보다 더 방대한 세계 최대의 연대 기록물(총 3,243책, 글자수 2억4천250만자)이며, 「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승정원 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등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조선시대 1차 사료인 것이다. 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의 일기 내용은 일제에 의한 내정 간섭기 궁중기록이므로 조선왕(황제)의 결제를 요하는 사건과 기타 궁중의 비화를 기록한 것이므로 근대사 연구의 1차 기본 사료가 된다.
또한 17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일기로 300년간의 국문학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국문학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288년간 매일의 날씨 정보를 기록한 것으로서 특히「조선왕조실록」의 날짜는 60갑자로만 표기되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환산하는 데 많은 혼란을 겪고 있으나 「승정원 일기」는 60갑자와 수시력역법의 일자를 동시에 표기하고 있어 역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회 내부로부터 자생적인 천주교 수용이 민중들 사이에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승정원일기」 원본은 보존을 위하여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영인본 승정원일기」(국사편찬위원회 1961∼1977 간행)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철종2년(1851)부터 순종융희4년(1910)까지의 일기 필사본은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향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영인본 전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으로 일부 제공하고있다.
*2003.5 月 현재 탈초영인본 141책중 1~28책 : 인조원년 3월~숙종 46년 6월
화순 고인돌 유적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km에 걸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상태가 좋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 기술과 축조, 운반 방법 등을 알 수 있다.
강화 고인돌 유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120여 기 정도가 분포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 분포 지역의 평균 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200m까지 분포되어 있다.
대륙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
위치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남도 화순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등록 200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