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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하며 이상적인 골짜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쿤밍(곤명)의 여행을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나는 쿤밍(곤명)으로 출발하는 여행 날자가 점점 다가오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오후 4시 여행사측과 인천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미팅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이른 점심을 먹고 오후13:30에 양재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양재역에서 인천 공항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 소요되어서 시간적으로는 여유가 있을 것 같았고 날씨 또한 청명하여 창공을 바라보며 나래를 펴고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원통사 입구
화려하고 빼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 중국인들은 비단과 같은 화려한 의상을 좋아 했듯이 건물 또한 수려하고 화려화였다.
일반적으로 여행정보를 여행 출발 3일 전부터 여행사 측에서 여권과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출발 시간과 주의 사항을 알려주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출발 시간이 다가와도 여행사 측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을 뿐 아니라 여행 안내 팸플릿 한 장 보여주지 않았으며 여행 일자에 맞춰 잘 다녀오라는 메시지 몇 글자 뿐이었다.
홍보와 서비스로 승부를 거는 관광 산업에서 이렇게 무성의하고 구시대적인 사고로 운영하는 것을 보고 아직도 이러한 여행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으며 이후에는 여행사 선택을 엄선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여행상품 가격이 약간 상회하더라도 대기업이 운영하는 여행사라야 서비스와 가이드의 횡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 같고 추구하는 여행의 묘미를 달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찾고자하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유여행도 아니고 패키지여행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행하는 사람이 불만이 있었다면 여행사 측은 손해되는 장사를 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라는 말이 있다.
비록 발은 없지만 여행자 한 사람의 말이 순식간에 널리 퍼질 수도 있다는 뜻도 된다.
여행사는 장기적인 측면에서도 여행하는 사람이 소수라고 할지라도 친절과 서비스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출발 전부터 이렇게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니 모든 여행 일정이 제대로 이행되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하여 불안한 마음이 솟아오르는 가운데 인천 국제공항 3층 대합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한가하고 평화스러웠다.
대한민국의 빨리빨리라는 언어에 맞는 행동은 찾아볼 수 없었고 느긋하고 여유있는
풍경이었다.
시작부터 여행에 대한 의혹과 불안이 쌓여나간다면 여행의 전 일정이 망가질 것 같아서 모두를 잊기로 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짧은 교과서적인 지식을 생각하면서 꿈을 꾸기로 하였다.
동행할 몇몇 사람들과 함께 여행사 인천공항 파견 직원의 테이블로 이동하여 출국에 관한 안내와 주의사항을 들으며 출국서류를 인계받았다.
그러나 소박한 나의 꿈이 너무 높았던지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가고 있었다.
머릿속에 잠자고 있는 역사 지식을 현실과 접목시켜보려는 것이 이번 윈난성 여행의 목적이었는데 과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여행에 대한 즐거움은 점점 상쇄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체력은 자신하고 있었으나 동행하는 사람들의 이상과 사고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사고의 충돌이라도 발생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 능히 이들과 잘 조화하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 시점에서는 한계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천 공항에서 쿤밍(곤명) 공항까지는 대충 소요시간이 3시간 45분 정도여서 중국시간으로 오후 11:30분에는 예정대로 쿤밍(곤명) 공항에 도착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쿤밍(곤명)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심사를 마친 후 곧장 공항 청사 밖으로 이동하니 조선족 가이드가 피켓을 흔들면서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트렁크 하나를 끌고 작은 배낭을 짊어진 채 관광 버스로 이동하였다.
가이드는 자신은 조선족이며 조부모는 모두 한국 인천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행하는 여러분을 위하여 여행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할 것이며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자고 하였다.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가자는 가이드의 말이 찻잔 속의 태풍처럼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여서 차창 밖을 쳐다보니 중국 윈난성 쿤밍(곤명)시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차창 밖은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끊겨 가고 있었고 야간 전등들만이 넓은 가로를 밝혀주고 있었다.
차창 밖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도 하였으며 우리나라 제주도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기간산업 확포장이 이곳저곳에서 한창 진행 중에 있었다.
그래서 인지 먼지투성이가 밴 가로수가 눈에 띄기도 하고 어두웠으나 주택 건설 사업으로 시내 경관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인천 국제공항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버스로 이동하여 쿤밍(곤명)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는데 그때서야 가이드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였다.
외국 여행을 할 때마다 여권 분실을 염려하며 걱정을 하였는데 오늘따라 가이드는 유독 여권 관리를 강조하였다.
쿤밍(곤명)은 약 2,5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고도라고 할 수 있었다.
기원전 279년 주나라 말 전국 7웅(진, 초, 제, 위, 조, 연, 한) 중의 하나였던 초(楚)나라 장수가 지금의 사천 성 청두(성도)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이동하여 윈난 성에 정착한 것이 그 시원이었다.
그 이후 몽고제국(원) 기마부대의 끈질긴 침략을 받아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난공불락의 고원지대인 윈난 성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윈난 성이 아무리 높고 험하다고 한 들 몽고제국과 명나라, 청나라와 같은 대제국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들 나라들은 황하와 양쯔 강 유역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식량을 기반으로 대제국을 형성하였던 국가였다.
튼튼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윈난 성까지 파상공세로 침략하니 적군의 파죽지세에 밀려난 윈난 성 소수민족들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높은 산속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제국은 세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광활한 영토를 확장하여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 과정에서 씨를 남기지 않으려는 살육과 잔인한 방법으로 도시를 파괴하였던 것을 그들의 정복 역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의도적으로 공포심을 심어주려는 계산된 심리전에서 였다.
주변 소수 민족들은 몽고족의 무차별 살육 공격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미리 가족과 함께 도망을 가거나 몽고족이 도래할 수 없는 고산 지대로 이동하여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소수 민족은 민족의 운명을 고산지대에 맡기고 신에게 의탁하면서 몽고족의 침략을 모면해보려 하였으나 몽고족의 세계화 정책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몽고 제국은 아시아와 서남아시아는 물론 북부 유럽까지 영토를 확산시켜 갔다.
이러한 광활한 영토를 효율적인 방법으로 통제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나 영토 내 요소요소마다 역참이라고 하는 신속한 군사 및 통신체계를 구축하여 전제 군주 한사람이 제국을 호령할 수 있었다.
테무친(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이라 하고 말자 상속 제도 원칙에 입각하여 막내에게 원나라를 세습하였으며 장자에게 오고타이한국을 차가타이에게 차가타이한국을, 공신인 바투에게 킵차크한국을, 훌라구에게 일한국을 분할 상속시켜 효율적인 방법으로 제국을 통치하여 나갔다.
이것이 원나라 내 4한국 탄생의 시초였다.
그러나 아무리 효율적인 방법을 채택하여 다민족을 다독이고 아우른다 할지라도 여러 민족들과의 연대를 강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몽고족의 기본 정복정책은 정복지의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항복하지 않는 왕은 끝까지 추적하여 죽였으며 왕족은 물론 귀족까지도 씨를 말려버렸다.
몽고족의 침략을 받은 소수 민족들은 그들의 무자비 함에 놀라 좀 더 깊은 골짜기나 지형이 가파른 산악지대로 피해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묘족이나 백족, 회족 등 여러 소수 민족들이 고산지대인 윈난 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고산지대인 윈난 성으로 피신하여 잠시 피해를 모면할 수 있었으나 원나라의 팽창과 세계국가 건설을 위한 정책을 피해나갈 수는 없었다.
쿤밍(곤명)이라는 이름이 중국 사서에 등장한 것은 한나라시대 사가였던 사마천의 『사기』에서였다.
이러한 역사 기록으로 보아 사마천 시대인 한나라 이전부터 이미 쿤밍(곤명)이라는 민족이 이 지역에 정착한 듯 보이며 이외에 한족은 물론 백족, 묘족, 합니족, 회족 등 26개 소수민족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갔을 것이다.
베트남과 라오스,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윈난 성은 제 1의 성도가 쿤밍(곤명)이었다.
성도인 쿤밍을 중심으로 한 윈난 성은 해발 2,000m가 넘는 윈구이 고원(운귀고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계절 내내 꽃이 피워있고 지지 않는 꽃의 도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는데 온난한 기후 때문인지 봄의 도시(춘성)라고도 불렀다.
서구 열강의 서세동점 정책으로 베트남은 한 때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베트남을 발판 삼아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프랑스는 하노이에서 시작하는 협괘 열차를 윈난 성까지 개통하여 지금까지 운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쿤밍(곤명)은 태평양전쟁 당시까지만 하여도 지방 토호들의 수중에 있었으나 일제의 동남아 진출 야욕 때문에 중국은 쿤밍(곤명)을 일본의 동남아 진출 교두보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때는 태평양전쟁을 이끌기 위한 일제의 군수물자 공급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쿤밍(곤명)이 한 때는 프랑스의 조차지여서 가톨릭성당이나 수녀원, 프랑스 풍 클럽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혹시나 하고 성당을 찾던 중 민족 촌 안에서 우연히 성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당에 들어가 내부를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더니 전면에 십자가만 걸려 있었을 뿐 교황청의 권위나 신성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성당 내부는 너무 형식적이고 삭막하였다.
왠지 썰렁한 분위기가 들어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 가톨릭이 들어온 루트는 바로 중국이었다.
이수광이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가톨릭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여러 차례 사신으로 중국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천주교 지식과 서양 문물을 조선에 소개하여 조선 최초의 가톨릭 전래자가 되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중국 가톨릭은 우리나보다는 훨씬 뿌리가 깊다고 보아야 옳다.
그럼에도 내가 바라본 중국 쿤밍(곤명)의 성당은 맥이 빠져 있었다.
껍데기만 덜렁 있었던 것이다.
성당 내부는 제대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탁자가 앞에 놓여 있었으나 그 옆의 의자 위에 앉아있는 성직자는 세상을 초월한 듯 무관심한 표정으로 허공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좌우로 흔들면서 이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성금 함에 넣고 돌아서야 하였다.
의자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 관리인인지 사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돌아서려는 나와 눈빛을 마주치고는 어색하고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 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멋쩍어하고 불안해 하였던 그의 행동을 오랫동안 가슴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서야 문득 생각나 당시 상황을 대충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중국의 가톨릭체계는 로마 교황청과는 전혀 무관하였다.
성당에 있었던 사람은 성직자라기보다는 성당을 관리하는 관리라고 볼 수도 있었다.
중국의 모든 성당은 중국 정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정부에서 임명한 사람이 성당을 관리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니 나를 보고 멋쩍어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은 당연하였으리라 생각되었다.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이 중국에서도 널리 퍼져나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로마 교황청과 교류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10시에 소형 관광버스를 타고 원통사로 이동하였다.
원통사는 당나라 때 중건된 사찰로 도교가 황금기를 이루고 있을 때 진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관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사찰을 원통보전이라고 한다면 관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이 부불전일 경우에는 관음전이라 하였다.
원통사의 원통보전에 안치되어 있는 관음보살은 모양과 장대함이 한국의 불상이나 보살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며 불교사찰인 줄 알았으나 중국 민족 종교였던 도교 사원이었다.
도교 사원을 방문한 중국 사람들은 내세보다는 현세의 기복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토착신앙과도 교감하고 있었다.
중국의 불교사찰이나 도교사원에 있는 불상이 화려하고 장대한 면에 치중하였다면 우리나라 불상은 섬세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추구한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한국과 중국의 불상은 각기 다른 특색이 있었으나 그것은 대륙적인 기질과 반도라는 협소한 지형적 특징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섬세하고 우아한 멋은 한국이 한수 위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원통사 원통보전의 처마위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을 형상화하여 올려놓은 것을 보고 중국의 도교는 불교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불교와 도교가 가닥이 없어서 정신적으로 약간 혼란스럽기는 하였으나 사실 원통사에 방문한 중국인들의 행위로 보아 불교보다는 도교에 더 관심이 많은 듯보였다.
중국에서는 도교가 민중들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으며 민중들의 생활 종교로서 톡톡히 함 몫을 하고 있었다.
삼복더위인 한 여름에 이곳 원통사를 관광하고 있었는데도 이곳을 비롯한 쿤밍(곤명)은 별로 덮지가 않았다.
삼복더위인 여름에도 기온이 20℃를 넘지 않고 겨울에도 8℃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 듯싶었다.
그러나 올해는 유난히 더워서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이곳 쿤밍(곤명) 시는 30℃를 웃도는 더위가 연일 지속되고 있어서 뜨거워진 지구의 온난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쿤밍(곤명) 시는 변화의 개혁을 실험하고 있었다.
모든 시민들이 시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역동성의 활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식당이나 열차 안에서 담배를 열심히 피워대는 습성이 줄어든다면 세계 초강대국의 대열에 쉽게 진입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물새들과 쿤밍(곤명) 시민들의 휴식처인 취호공원을 방문하였다.
취호공원은 나봉산 아래 운남대학 정문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면적은 그다지 넓지 않았으나 늘어진 버드나무와 푸른 호수물이 주요 특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취호"라는 정식명칭이 붙은 것 같았다.
취호가 원래는 만이었는데 점차 수위가 낮아져 푸른 호수가 되었다고 하였다.
취호는 크게 5곳의 풍경구로 구분되어 있었다.
호심도는 호심정과 관어루 등 청대 건축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동남쪽은 수월헌과 금어도, 동북쪽은 죽림도와 구룡연못, 남쪽은 호로도와 구곡교, 서쪽은 해심정으로 나뉘어 있었다.
물의 색깔이 비취처럼 빛나고 아름답다고 하여 취호라 하였다는 말을 듣고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서산 정상을 향하여
취호에서 이것저것을 관람하고 시민들과 한데 어울리다 보니 내가 중국 쿤밍( 곤명) 시의 한 시민처럼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취호공원의 아름다운 물의 빛과 수양버드나무에 매료된 나는 어느 사이 부녀자들이 추는 군무를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취호공원은 14세기 중엽 원나라 때부터 개방되어 지금과 같은 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취호 공원 자리에는 8개의 물 비취와 사계절의 대나무 비취, 봄 여름의 버드나무 비취가 장관을 이루어 있어 오늘날의 비취라는 이름이 탄생되었다고 하였다.
취호공원을 관람하고 빠져나오려 하였는데 나이 지긋한 한 남성이 도복을 입고 칼을 좌우로 흔들면서 검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과연 인간의 행복이란 명예와 권력과 재력이 모두 갖추어진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남루한 옷에 한 자루의 칼을 들고 춤을 추면서 자신의 경지를 펼쳐 보이는 저 사람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이드는 이번 여행에서도 여지없이 선택 관광 옵션을 들이 밀었다.
옵션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시로 변화하는 얼굴 표정을 보기가 싫어서라도 옵션을 선택하여야 하였다.
윈난 성 영상 가무 쇼 극장으로 이동하였다.
별 것 아닐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극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윈난 성 영상 가무 쇼는 원, 명, 청 이래 소수민족들의 생존과 자손 보존을 위한 고통을 심층 분석하여 연출한 것으로 그들의 전통무용과 생활양상을 배우들이 춤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스토리 내용이 다양하면서도 동기와 의미 부여가 간결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공연 중 사용되었던 악기와 도구들은 모두 소수 민족들이 평소에 사용해왔던 수공 도구 그대로를 옮겨와 쇼에 활용하고 있었으며 배우 중 70%는 전업주부가 아닌 지역 소수민족들이 직접 연출에 참여하고 있었다.
전통과 현대무용을 결합시킨 윈난 성 영상 가무 쇼를 통하여 중국 소수 민족들의 문화를 한 층 더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윈난 성 영상 가무 쇼를 보기 위하여 극장에 들어갈 때까지만 하여도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인형극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과거에 정지된 때의 사고였다는 것을 금새 깨달았다.
관람석은 이미 관객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주변에서 들리는 언어로 보아 유럽이나 미국인들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밖에 한국인들도 주변에 앉아 있었는데 소수가 아니라 대다수여서 한국인들이 세계 여러 관광지를 거의 휩쓸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아주 흐뭇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이면에는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반증으로 여겨져 나라밖에서 느끼는 한국이라는 위상은 상상 밖의 감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용하던 극장이 갑자기 술렁이고 있었다.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소수민족의 전통 의상을 입은 한 노인이 등장하고 있었다.
허리는 꾸부정하고 발걸음이 무거운 것으로 보아서 노인임에는 틀림 없었다.
무거운 돌을 가슴에 안고 꾸부정한 자세로 고지대의 안개 낀 산 능선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힘이 들면 언덕에 앉아서 쉬었다 가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너무 인상적인 장면이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나라 어느 시골 할아버지가 5일 장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잠깐 언덕에 앉아 쉬는 모습과도 너무 비슷하였다.
그 할아버지는 그들의 지성소를 찾아 치성을 드리기 위하여 제물을 가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사전에 목욕재계를 하고 전통 의상을 차려 입은 채 걸어가는 모습으로 보아 마을의 지도자인 무당일 것으로 보였으며 자손의 번성과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신석기시대나 훨씬 이전의 애니미즘 적 정령신앙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원시시대 어느 씨족이나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태양과 달을 숭상하는 것이 민족의 생존과 자손의 번성을 위한 수단이요 민족의 운명이라 여기고 돌을 차곡차곡 쌓아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잠시 후 현란한 불빛이 번쩍번쩍하면서 소수민족 전통 의상을 입은 고수들이 북을 가지고 등장하였고 2~30명되는 배우들과 함께 북소리에 맞추어 프랑스의 캉캉이 춤처럼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북소리가 갑자기 빨라지고 배우들의 움직임이 신속하게 변해갔다.
박진감 넘치는 북소리가 관중들을 압도하자 동시에 관중석에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디선가는 휘파람소리가 들렸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분위기가 고조되고 율동이 빨라지자 나도 몰래 어깨가 들썩들썩해지기 시작하였다.
옵션관광이라고 하여 인형극 정도로 시원찮게 생각하였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순간 한국의 두타 공연이 생각났다.
극장이라고하는 폐쇄된 공간에서 뽀얀 연기 같은 먼지를 마시며 북을 치는 고수들의 동작과 박자 소리에 나도 모르게 흥이 솟구쳤던 두타공연을 또올려 보았다.
환희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하였던 동적인 두타공연과 윈난 성 영상 가무 쇼가 상당히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한국의 두타공연이 북을 치는 기교면에서 예술이라고 한다면 윈난 성 영상 가무 쇼는 기교는 떨어지나 순수하고 소박한 면이 있었다.
중국의 북 난타 공연이 어느 사이에 한국을 뒤따를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어서 진행되었던 것은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노래에 담아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자신의 짝을 찾아 해메는 따오기 울음소리마냥 처량하고 애처롭게 들려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도도하고 고고한 학을 묘사한 춤 또한 애잔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었던 노래만큼이나 어려웠던 삶을 반영하고 있었다.
고산지대에서의 생활이 고통스럽고 어려웠을 것이나 그들의 생존을 위한 문화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서 최고의 기예를 아끼지 않고 보여주고 있었다.
실과 바늘처럼 천지가 개벽되었던 이후 남자와 여자는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 인연을 함께 하여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강조한 춤인 듯 생각되었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과 희생이라도 이들은 감수하여야 하였다.
그렇기 위해서는 민족의 혼을 강조하여야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 윈난 성 영상 가무 쇼가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한민족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은 세계사에서 흔하지 않다는 것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우리 민족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영상 가쇼 중에서 나의 가슴을 가장 뭉클하게 하였던 것은 공작새의 영혼이었다.
산맥과 산들로 연결된 첩첩산중의 어두움 속에서 보름달이 태양처럼 떠오르고 있었는데 외로운 달빛 아래로 홀연히 공작새가 나타나 홀로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북쪽에서는 원나라 첨병들이 여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만족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방인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위급함에서도 민족이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였다.
공작새로 분장한 배우의 모습은 환상적이기까지 하였다.
달빛 아래서 홀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배우가 분장한 공작새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공작새가 홀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실제 상황이라고밖에 믿을 수가 없었다.
공작새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하면 저렇게 연출해 낼 수 있을까 하고 감격해할 뿐이었다.
미끄러지듯 쓰러질 듯하면서 연출해내는 손짓이나 행위가 가냘프고 애처로우면서도 환상적이었다.
이 모든 행위는 소수민족의 영혼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족의 정신과 혼을 후손들에게 계승시켜주려는 무언의 철학이 담겨져 있었다.
소수민족의 생존을 위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를 나는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윈난 성 영상 가무 쇼를 감상하면서 소리없이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강동을 받았다.
나는 윈난 성 영상 가무 쇼에서 자신의 민족을 생각하며 다산의 고통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였던 여인들을 보았다.
남편들이 없는 가정을 일끌어나가야 하였고 척박한 땅을 경작하면서 시부모님도 돌봐야 하였다.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돌아올까 시선은 대문으로 향하였으나 언제나 썰렁한 허공뿐이었다.
가축을 몰고 이산 저산을 헤매다가 혹시라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뒷산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 노래는 구성지고 가냘픈 가락이었으나 그녀들의 생활이 담긴 철학이었다.
들꽃처럼 거칠고 까칠해서 누구 한 사람 관심가져주고 만져준 이 없었으나 남편은 자신을 사랑하였다.
공작의 영혼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그녀들의 혼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들의 고통을 영혼에 담은 공작새가 무대에서 홀로 춤을 추고 있었는데 저게 어디 인간인가하고 생각이 들었다.
보름달 밝은 달빛 아래 홀로 춤을 추는 것이 너무도 고고하고 환상적이었다.
공작새의 외로움만큼이나 소수민족의 생존과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고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가시밭 길이었다.
그러한 역경과 고통을 춤으로 승화시켜 연출한 것이 공작새의 춤이었다.
흉노족이 월지를 격파시키고 월지의 왕을 사로잡아 목을 쳤던 사실이나 선비족이 북위를 세워 중국 북방을 통치하였던 역사, 실크로드를 지나치면서 보았던 사막의 열사 속에 묻혀있는 이름 모를 왕조들의 흔적,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여진족이나 거란족, 이들은 모두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진 민족들이었다.
여러 강대국의 위협이 상시하고 있는 가운데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생존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민족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운남 영상 가무쇼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도중에 “지구에는 수많은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는데 현재 지구에 남아있는 민족은 지구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전체 민족의 1/3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강인한 끈기와 변화의 달인이 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현재 생존을 지속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위대한 민족일 것이다.” 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