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두 길이 넘는 수직 출구를 이제 반정도 올라왔다. 이제 남은 높이는 일미터 남짓. 두어번만 더 발길질을 하면 손이 출구 끝에 닿을 것 같다. 땀이 온 몸에 흐르고 바위에 기댄 등이 따갑다. 손을 뒤로 뻗어 디딤돌을 집으며 발로 잔뜩 힘주어 밀며 한자 한자 위로 위로 오른다.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출구에 쓰여진 글을 읽으며 나는 온 힘을 다해 동굴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동굴밖은 산정 근처일거란 나의 예상과는 달리 끝간데 없이 푸른 바다가 펼쳐진 갯바위이다.
모든 생명의 끝은 죽음이다. 생명에 있어 죽음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 생명의 시간은 짧고, 생명은 떨어지는 물방울보다 가볍고 여리다. 죽음보다 낮은 곳은 없다. 삶이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생명은 물이 아래로 흘러흘러 바다에 닿듯이 삶은 하루하루 죽음의 바다로 흘러 내려간다. 나는 절벽을 오르듯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좀 더 높이 오르려 애썼지만 실상은 매번 내려만가고 있었다.
지난 일만년의 인류 문명의 역사. 인류문명은 전쟁의 문명이다. 역사책을 들여다보라. 내용의 절반은 전쟁과 그 전쟁의 영웅 이야기이다. 전쟁으로 나라와 나라가 바뀌고, 민족의 흥망성쇄가 결정된다.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고 당연히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 패자의 재산과 권리 목숨까지도 승자의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민족이나 나라도 모든 국력과 지혜를 전쟁에 집중하였다.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혹은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하여 보다 강한 군대, 보다 좋은 무기와 병장비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발달하여 문명의 발달을 가져왔다. 철로 만든 칼과 창이 만들어지고 나중에 철제 농기구가 나온다. 원자폭탄이 만들어져 사용된 후에 원자력 발전이 생겼고, 인터넷과 GPS의 시작은 군용이었다. 인공위성 가운데 가장 성능이 좋은 위성은 군사첩보위성이다.
나라와 나라는 전쟁을, 집단과 집단은 투쟁을, 개인과 개인은 경쟁의 방법으로 싸운다. 인간의 삶은 평생 그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라고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 끊임없이 싸워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롭겠는가? 싸움의 결과 마침내 등급이 매겨지고 신분이 생겼다. 신분은 하늘에서 내린 축복이며 재앙이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 되고 귀족은 하늘이 선택한 가문이된다. 신분 세습의 당위성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 하늘을 명분으로 갖춰진다. 양반의 자식, 귀족의 자식은 아무리 못나도 양반이며 귀족이고, 천민의 자식, 노예의 자식은 아무리 잘나도 천민이며 노예이다. 이것이 인류의 오랜 전통이었고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신분제가 없어졌지만 아직도 그 잔재는 양반의 자식, 상놈의 자식이라는 우리의 통념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인류 문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앞면에는 평화와 번영이, 뒷면에는 전쟁과 파괴가 항상 함께 다닌다. 이 둘은 파괴와 건설을 반복하며 인류의 문명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문명을 시작한지 불과 일만년도 안되는 기간에 인류는 우주의 역사를 대부분 이해했고,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이해하였으며, 지구를 지배한 어떤 종족도 이루지 못한 과학기술 문명을 이룩하였으며, 마침내 우리는 우주와 생명과 프로그래머의 관계를 미약하나마 깨닫기 시작하였다.
현대에 있어 개인간 신분 차별은 상당히 많이 개선되었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왕의 나라 즉 왕국이며 왕조였다. 왕이 국가의 대표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였다. 그를 위해 죽는 것이 곧 충이었다. 그 아래 양반이라 불리는 소수 지배층들이 있었고 약간의 중인과 대부분의 평민, 그리고 평민 축에도 못 끼는 천민들이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세상은 신분제도가 있었던 그 때에 비하면 확실히 진보한 것은 맞지만 아직도 우리는 많은 권력의 차별 아래 놓여 있다. 그것이 우리 이름 앞뒤로 붙는 계급이나 직책일수도 있고, 재산의 양일수도 있고, 단순한 나이일 수도 있고, 질서란 이름으로 혹은 예의란 이름의 문화일 수도 있다.
남성과 여성.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부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지어미가 지아비를 따르는 것이 당연한 질서였고, 심지어 딸과 아내가 남자의 재산의 의미였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이슬람이나 일부 문화에서는 이런 관습이 남아있고, 남자들의 머리속엔 아직까지 여자는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럼에도 현대에 들어 여성의 권리는 점차 높아지는 것 같다. 아무튼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며 평등하다. 그러나 형식적이나마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기 위한 과정은 그리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 민주주의를 처음 시작한 나라 영국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918년, 30세이상의 여성에게만, 1928년이 되서야 남성과 같이 21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다. 이때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느냐 안주느냐 의견이 분분할 때 영국을 대표하는 신문 The Times는 사설을 통해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어야 한다면 개에게도 주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을 정도이다. 신사의 나라, 민주주의의 모태가 된 영국에서 조차 여성이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은 것은 불과 100년도 안되는 최근의 일이다.
서양사회에서 이렇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크다. 오랫동안 서양 문화를 지배했던 그리스도교는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 중에 하나로 인식하였다. 실상은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여성의 뱃 속에서 만들어지는데 어떻게 창세기에 이런 이야기가 실리고 사람들은 종교적 가르침이니 당연히 그럴거라고 의심이나 조건없이 받아들여 진 것도 참으로 미스테리이다. 신약에 와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남성의 머리는 그리스도, 아내의 머리는 남편, 남자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영광이라 머리를 가려서는 안되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 하여 머리를 가리지 않으려면 아예 밀어버리라고 공갈협박(?)을 하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지금이라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천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이유로 전락한다.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여성은 미완성 남성이라 표현하며 성적 표현에 있어 남성은 능동적 여성은 수동적이라는 이유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기준을 둔다.
동양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동양의 문화를 지배한 유교의 삼강오륜 중 하나인 부부유별(夫婦有別)의 덕목은 동양 문화를 오랫동안 지배하였던 유학의 기본 덕목이다. 여기서 부부는 동등관계가 아니라 상하의 관계이다. 칠거지악이니 열녀문이니 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을 제한하는 못된 규범 중 하나이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편견은 일견 치졸하기 그지 없다.
사실 이제와 말하자면 생태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이 인간 생태의 계보를 잇는 중심이고, 남성은 보조자의 역할이다. 예전에는 남자의 정자를 씨로 표현했고 여성의 난자와 자궁을 밭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밭에 관계없이 뿌린 씨에 의해 종자가 결정되듯 사람도 그리되는줄 알았다. 그리하여 남성의 씨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가문의 족보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제는 남자에게서 오는 것은 유전 정보의 반뿐이고, 나머지 반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란이 3Kg의 거대한 아기가 되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까지 아기의 구성물질인 육체뿐 아니라 어머니의 정서까지도 아기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에 자연에 생태 족보가 있다면 그 족보에는 외할머니, 어머니, 딸로 이어지는 여성 계열의 족보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생태계에서는 여성이 주체이다. 만약에 당신이 창조주라면 암컷과 수컷, 남자와 여자 중 누굴 먼저 만들겠는가? 종족보존과 번식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여성이 아니겠는가? 남자 한명에 여자가 백명이 있고, 반대로 여자 한명에 남자가 백명이 있다고 한다면 전자는 일년에 백명씩 아기를 낳을 수 있고, 후자는 일년에 고작 한명씩 밖에 아기를 낳을 수 없다. 남성중심의 인류 문화의 개념으로는 여성이 남성의 아기를 낳아 키워주는 입장이지만, 생태계의 입장에서는 여성의 아기를 남성이 보호하며 키워주는 것이다. 생명력에 있어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우월하다. 자연 유산되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남자아이이다. 극한 상황에서 더 오래 버틸 수 있는것은 여성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물리적 힘이 약하다고 생명력이 약한 것은 아니다.
지난 일만년 싸움의 문명에서 힘이 약한 여성은 남성의 지배권으로 들어가 스스로 약자의 길을 선택함으로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보호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인간 암컷인 여성의 생존방식이었다. 물론 이제는 바뀐다.
인류는 오랫동안 농경사회를 유지하였다. 농경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은 경험과 힘이다. 몇백년 전부터 인류문명은 산업사회로 바뀌었다. 산업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은 기술과 지식이다. 이 모든 것은 남성에게 유리한 동력이다. 지식이 남성에게 유리한 동력이 된 이유는 예전에는 남자아이들에게만 교육의 혜택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21세기 현대사회를 지식정보화사회라 한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은 속도와 디자인이다.
속도는 어른들에 비하여 아이들이 훨씬 빠르다. 스마트폰 하나만 보더라도 아이들의 습득 속도와 어른들의 습득 속도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예전에는 질문은 아이가 어른에게 하는 것이다. 경험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스승의 다른 말이 먼저 태어난 사람이란 의미의 선생이겠는가? 요즘의 기술은 속도 경쟁이다. 우리 생활과 밀접한 컴퓨터, 가전제품, 통신기기, 자동차 등의 변하는 속도를 보라. 실로 놀랍지 아니한가? 스마트폰은 새로 나온지 불과 반년이면 구닥다리 휴대폰이된다. 요즘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물어야 하는 시대이다. 젊은이의 문화를 기성세대는 이해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시대는 인류의 지난 몇천년의 차이를 한 세대에서 다 경험하고 있다. 봉건시대 그 이전부터 미래 그 이 후 시대까지.
혹시 이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새로운 사업에 관심이 있는분이 있다면 3D Printer에 투자하시라 권하고 싶다. 3D Printer가 차세대 전자산업의 주역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지난 몇십년간 인간의 생활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면 차 후 몇십년은 3D Printer 계열의 제조기계가 인류 생활의 변화를 지배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단어 둘을 뽑으라 한다면 <은행과 공장>이다.
은행은 돈에 대한 개념과 의식이 바뀌면서 사라지거나 역할이 축소 변형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돈을 한국은행이라는 국가기관에서 발행하지만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는 FRB (미국 연방준비은행)에서 발행한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정부기관이 아니라, 미국의 힘 있는 몇몇 은행가들이 만든 민간은행의 연합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돈은 누군가의 빚이고, 은행의 동력은 이자이다. 자본의 속성. 이자의 속성.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돈이 얼마나 허구적인 괴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어렵지 않다. 이자는 공동체의 정의를 거역한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에게 부과되는 이자율은 서로 다르다. 정의의 개념으로 본다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낮은 이율을, 부자에게는 높은 이율을 부과하여야한다. 그대가 하느님이라면 당연히 그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간세상은 그 반대이다. 자본의 허상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 허상의 실체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위력과 공포는 커지겠지만, 거꾸로 그 허상의 풍선이 터져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밤하늘을 온통 뒤덮은 불꽃놀이 처럼 자본주의는 인류문명의 화려하고 찬란한 주역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것이다.
공장은 대량생산의 상징이다. 대량생산은 인류에게 대량소비라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대량폐기라는 허물도 함께 짊어진다. 3D Printer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3D Printer는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의 개별생산이 가능하다. 꼭 필요한 제품만 생산할 수 있고 다 쓰고나면 분해해서 재활용할 수도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일부러 농작물을 경작하지 않아도 아무 식물이나 동물이라도 분해해서 필요한 성분만 뽑아 재조립해서 음식물로 만들수도 있을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는 100% 재활용이 가능하다. 인류의 식량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의미이고, 수렵, 채집의 원시자연인류가 농사, 목축의 신석기 혁명을 통하여 문명인류로 진화하였듯이, 분해, 가공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새로운 문명으로 진화하는 기본틀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3D Printer는 집단생산이 아니라 소비자가 필요로하고 원하는 제품을 3D Printer가 있는 작은 공간에서 개별 생산해, 공장과 유통산업이라는 대량생산 시스템의 파기가 예측 가능한 눈 앞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획일적인 브랜드의 시대에서 소비자의 개성과 취향을 강조한 특화 개별 상품이 생산되어 디자인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고, 폐기되는 제품을 분해해 재활용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여 대량폐기를 막고 지구 자원을 보호하며 환경문제도 혁명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하다. 3D Printer는 컴퓨터가 세상을 바꾼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그것 이상으로 우리시대를 바꾸어 나갈 것이다.
21세기는 디자인의 시대이고, 디자인은 감성의 표현이다. 감성의 표현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유리하다. 이래저래 미래는 여성과 젊은이가 주축이 되는 시대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인류의 지난 일만년 역사와 문명은 남성이 지배하는 문화였었고, 싸움의 문명이었으며, 계급 질서의 사회였다. 나는 이것을 권력중심사회라 명명한다. 권력중심사회에서 사람들의 목표는 위로 오르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상관없이 윗자리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이다. 모든 권력은 남성이 독점하였다. 여성의 권력은 남성의 권력 높낮이에 의해 유지되었다. 여성에 대한 글을 길게 쓴 것은 남성이 가지고 있는 편견, 혹은 여성 스스로도 남성중심문화에서의 잘못된 교육을 통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잘못 교육받고 인식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그런 편견을 깨라는 의미이다. 이 인식을 깨는 것은 다음 이야기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며 평등하다. 미래에 여성에게 더 유리한 사회구조가 형성된다 하더라도 이 전제는 유효하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의 생명나무에 걸린 나뭇가지와 나뭇잎처럼 한 프로그래머의 의지의 분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동일한 계열의 DNA 접합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명의 진화의 과정을 표현한 한그루의 생명나무는 우리가 하나의 근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뭇가지 하나하나는 DNA 구조가 동일한 종족을 의미하며, 나뭇잎은 그 종족의 개별 생명체를 의미한다. 모든 생명은 형제관계이며 한 프로그래머 즉, 한 하느님의 분사이며 하느님의 부분이고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지극히 높은 분이 아니라, 지극히 넓은 분이다.> 다음 문명으로 진화하기 위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그리하여 <나는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은 내가 아니다.> 나뭇잎은 나무이지만, 나무는 나뭇잎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왜 인간이 저지르는 사악한 현장을 막지않고 벌하지 않는가? 나치가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하였을 때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나는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은 내가 아니다.> 아직 잘 이해가 안되는가? <물고기는 바다이지만, 바다는 물고기가 아니다.> 물고기는 바다에서 나온 것이다. 물고기는 바다의 구성성분이다. 하여 물고기는 바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다가 물고기는 아니다. 물고기는 바다를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지만 바다가 물고기를 어찌 할 수 있지는 않다. 다만 물고기의 짧은 생애가 끝나면 물고기는 분해되어 다시 바다의 일부가 되고 다시 다른 생명의 부분이 된다. 이것은 불교에서의 윤회와 상통한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바로 이와같다. <나는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은 내가 아니다.> 인간이 사악한 짓을 저지를 때 왜 하느님은 개입하지 않는가? 생명은 하느님의 부분이며 하느님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 왜 착한 사람들에게 불행이 오는 경우가 있는가? 바로 이 이유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이고, 하느님도 곧 나이다.> 이것은 도이다. 기독교에서는 성인의 단계이고, 불교에서는 부처의 단계이며, 도교에서는 신선의 단계이고, 유교에서는 성현의 단계이다.
우리가 목표하는 다음 세대의 사회구조는 수평평등관계이다. 그것은 몸과 지체와의 관계와 같다. 우리 몸은 수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하는 역할이 다를 뿐이다. 머리가 중요하다고 해서 손가락보다 더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손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손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머리는 머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손은 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겐 높낮이가 없다. 하느님마저도 나보다 높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평등 관계 아래 권력 지위가 아닌, 직책과 역할이 분배된 미래사회. 나는 이 사회를 <역할분담사회>로 명명한다.
인류의 다음 세대인 역할 분담 사회의 기본정신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퍼져 수평적 평등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내가 누구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반대로 내가 누구보다 더 낮다 라고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보다 높은가?' 대답은 당연히 No이다.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자식은 자식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보다 높다는 생각은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게 하고, 자식의 인생에 간섭을 한다. 관심을 갖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지만 간섭은 사랑의 행위가 아닌 부모의 집착이며 욕심의 표현이다. 부모와 자식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희생이 필요한 특수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특수한 경우이어야만 한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이 청소부 아저씨보다 더 높은 것이 아니라,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청소부 아저씨는 청소부 아저씨의 역할을 하는 사회로 진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차이가 아니라 차별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같은 시간의 노동을 하였을 때, 그 벌이의 차이를 모두 다 똑 같이 하는 것은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이므로 안 되겠지만, 지금과 같이 엄청나게 커서도 또한 안된다. 나는 노동법에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의 비율을 정했으면 좋겠다. <임금 비율제>. <최고 임금제>와 더불어 <역할 분담 사회>에서 도입했으면 하는 제도이다. 그것이 자본의 노동과 기술에 대한 횡포를 막고 기업공동체로 가는 길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교육을 바로 서게 할 것이다. 무조건 높은 자리가 아니라 자기가 가장 잘 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고 사회는 더욱 더 발전할 수 있다. 무조건 100점을 맞게 해서 공부를 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할수 있는 일, 즉, 적성을 찾아 주는 일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우리나라의 큰 문제이다. 그러나 사회구조, 노동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교육의 변화는 없다.
현대 인류는 고도의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백을 생산하기 위해서 백 명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한명, 아니 영점오명이면 족하다. 과학 기술이 인류의 생산력을 그렇게 발전시켰다. 사람은 남고, 노동의 가치가 떨어진다. 단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최저임금제로 내몰리는 이유이다. 서민, 빈민 계층이 중산층으로 올라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중산층이 서민 계층으로 떨어지기는 쉬워진다. 빈부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사회는 각박해져 간다. 종교가 인류 문명의 땅을 다지고, 과학이 다진 땅 위에 멋진 집을 지었지만 이 집은 점차 감옥이 되어간다. 이 집을 놀이공원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철학이 해야할 일이고, 그것은 우리의 사고를 전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역할분담사회로 가는 길은 어느 한 단편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권력과 자본의 분배 문제, 노동의 문제, 교육의 문제, 사회 문화의 문제들이 동시에 같이 발전하고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평등과 자유의 바탕위에서 가능하다. 예전에 사회 교과서에서 나온 이론. '자유를 신장하면 평등이 제한을 받고, 평등을 중요시하면 자유가 제한을 받는다.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제도가 자본주의 민주주의 제도이고, 평등을 바탕으로 한 제도가 공산주의이다.' 이것은 권력 중심 사회이었기에 가능하였던 말이다. 역할 분담 사회가 되면 ‘자유’와 ‘평등’은 동시에 가능하고, 또 반드시 그러하여야만 한다. 역할 중심 사회로 가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인간과 자연의 모든 사물을 높낮이의 상하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다른 수평한 관계로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싸움의 시대를 마감하고, 어울림의 시대로 도약하라!
인간과 인간의 어울림. 인간과 자연의 어울림. 인간과 하느님의 어울림.
이것이 지금 이 시대 인류에게 내리는 우주와 우주의 프로그래머인 하느님의 명령이고 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