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 그리고 퇴계등의 성리학에서 사단칠정론을 말했다.
여기서 '사단'이란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 등의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칠정(七情)'이라는 '즐거워 하는 희(喜), 노여워하는 노(怒), 슬퍼하는 애(哀), 두려워하는 구(懼), 그리고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랑하는 애(愛)와 미워하는 오(惡), 욕심을 부리는 욕(慾)'도 있는 것이며, 또 필자처럼 쌍과부 집에 가 막걸리 퍼 마시고 헬렐레해지는 재미 등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처럼 자주 헬렐레해지는 기분은 사단칠정 어디에 속하는가?
어찌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사단칠정으로 끊어서 말할 수 있는가?
백 가지 천 가지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성생설(性生說)
위에서 성선설이니 성악설, 또 성리학을 말씀하신 할배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필자는 모르겠다.
꼭 자다가 남의 다리를 긁는 것 같다.
이에 필자는 없는 이론을 또 하나 만든다.
뭐 링컨은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 어쩌고 하는 말을 하다가 총에 맞았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겡제를 학실히 살려야 한다." 라는 말을 하다가 IMF 를 만났고, 노무현 대통령은 "했읍니다, 했고요." 하는 말을 하다가 태통령 탄핵이라는 수모를 당했다.
또 누구든가 살인범은 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을 남겼다가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필자도 유명한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죽자. 아니 이미 먼저 몇 개 남겼었다.
먼저 것은 '백두산 올라가는 길은 달라도 천지는 하나다'하는 말인데, 이는 지금 각 종교가 서로 옳다고 싸우지만 결국 정점은 하나란 말이고, 다음은 '말이란 것짓말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하는 것인데(자세한 이론은 필자 카페 게시판 ' 책에 추가할글과...' 212 번을 보시라), 또 하나는 창조적 진화론으로 '부자 되는길 6 번, 신의 염색체는 Y' 등에 있다. 그러나 필자는 욕심꾸러기이다. 욕심꾸러기 필자는 여기에 만족을 못하고 또 한 마디 명언을 남기고 일찍 죽자.
이것은 성생설(性生說)이다.
맹자 순자, 영자가 -아니 영자는 아니고- 성선설, 성악설을 말했으니 필자도 그들과 같이 유명해지고 싶어서 性 자를 써서 '성생설'이라 하자.
성생설 이라고 말하니 그 발음조차 고약한 신조어이지만 그래도 하나 더 남기자!
성생설이란 성 생명설(性 生命說)을 단축한 말이다. 어때? 그럴 듯하지? 히히
성(性)이란?
성(性)은 성품이고, 이 성품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성품이며, 부처의 성품이며, 여호아의 성품이며, 예수의 성품이며, 알라의 성품이며, 개똥이의 성품이 아닌가?
그러나 노자 도덕경 1장에서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즉 '도를 도라고 하는것은 가능하나 항상 도일 수 없으며 이름을 그 이름으로 하는 것은 가능하나 항상 그 이름이 아니다.'라 하였다. 즉, 도니 이름이니 하는 것은 어느넘이 제멋대로 지은 것이고 항상 그렇게 부를 수도 없으니 이는 엿장수한테 물어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어떤 것은 차치하고 도대체 이 우주를 창조한 신의 성품에 어디 선과 악 등이 있는가?
누가 선과 악의 기준을 세워놓았는가?
우주의식은 어떤 것인가?
위 물리학, 천문학, 분자생물학에서 보았듯이 이 우주는 그저 아무 것도 없는 것과, 아무 것도 있는 것들의 복합체 아닌가?
우주에 어떤 의식이 애초부터 있었다면 그것은 새끼를 치고 번식하며 살라는 생명의식 밖에 더 있던가?
性理學은 성품의 이치가 아니라 性器, 性生活에 쓰이는 性의 이치이고, 또 이 性은 心+生= 性이니 성생활로 번식하는 마음의 이치가 아니던가? 이 생명의식이 과연 선과 악이 있을까?
인간과 동물과 그 생명 현상이 다른가?
호랑이, 사자가 양을 잡아먹고 개들이 개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이 악인가? 다 먹고 살자니 그런 것 아닌가?
인간이 태어나서 엄마 젖을 빨고 무엇인가 먹이가 있으면 자기 입으로 먼저 가져가는 것이 악인가?
동물과 아기는 자기가 먹고 배가 부르면 그 먹기를 그만둔다. 그럼 다른 동물이 먹는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서부터인가 성장하면 자기가 먹고 남은 먹이(돈)를 어딘가에 감추어 쌓아두는 지혜가 생겼다. 이것이 애초부터 있었던 악의 본능인가?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것은 순전히 창조적 지성이 있으냐 없느냐의 차이뿐이다.
동물은 신이 준 본능대로 그대로 살아가는데 인간은 이 본능 이외에 무엇인가 좀더 창조를 하려 한다. 특히 물질적으로 보다 편하게, 보다 쉽게 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물질적 지혜가 발달하는 것은 좋은데 이 물질적 지혜가 발달함으로써 본능의 지혜가 가려진다. 이것의 좋은 예가 바로 서남아시아 쓰나미 사건에서 동물은 산으로 도망 가 모두 살았는데 인간은 자신의 알량한 지혜만 믿다가 몰사하고 만 것과 같다.
또 동물은 본능대로 살아가니 죽음이 없다.
여기 벌이나 개미 둥지가 있다. 이들은 몇 십만 년 전, 몇 백만 년 전 그들의 종족이 분화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다.
뭐 개체적인 벌, 개미 한 마리가 죽었다 해서 그 벌이나 개미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개체란 우리 몸의 세포 하나가 새 세포와 교환되듯이 그저 낡은 세포가 새 세포로 교환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개체가 자신으로 아는 물질적 지혜가 생기다 보니 자기 몸이 죽음으로써 자신이 죽는 줄 아는 지혜가 생겼다. 이것이 애초부터 있었던 악과 죄의 본능인가?
동물이나 인간이 죽음을 싫어한다는것은 이 생명 개체가 생성될 때 그 개체를 잘 보전하여 생명을 이어가라는 본능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곧 전체 생명의 번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대장균 등 세균한테는 일정 범위 안에서 어느 정도 번식을 하면 더 이상 생식을 중지한다. 만약 더 했다가는 영양소 등이 결핍되어 전 종족이 몰살하기 때문이며, 또 동물의 경우 나그네 쥐(lemming)는 일정한 범위의 섬에 살다가 개체수가 증가하면 그들 중 반은 바다에 빠져 자살해버리고 만다. 과학자들은 왜 이 쥐들이 자살하는지 모른다. 이것은 간단하다. 이 역시 그대로 있다가는 억을 것이 없어 전 종족이 멸종되기 때문이다.
또 가끔 고래 떼들이 해변에 나와 자살하려 할 때 아무리 인간이 도로 바다에 넣으려 해도 다시 나와 결국 자살하는 것도 이와 같은 본능이 있어 넓은 바다를 하나의 우리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도 윤봉길이나 안중근 의사 같은 분이 결국은 자살과도 같은 의거를 한 것은 바로 이 전체 자기 종족의 전체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지만 그들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자신 개체의 죽음을 자신이 죽는 것으로 착각한다.
즉, 인간에게 있던 창조 지성이 왜곡되어 인간에게만 죽음이 있는 것도 이 창조적 지성의 오해에 의한 착각 때문이다. 이게 애초부터 있었던 죄와 악의 본능인가?
<창세기>에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서 무엇을 먹으면 더 오래 살까 무엇을 먹으면 더 예뻐질까를 근심하게 되었지만 결국은 죽게 되었다. 이게 악의 본능 때문인가?
이상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 '창조적 지성이 있는가 없는가'인데 잘못 착각하다가는 오히려 근심과 걱정과 죽음만이 있게 된다. 이것은 애초 인간의 성품이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지성을 착각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생명의 본질
여기 동물이 있다.
그들이 하는 짓은 둘 밖에 없다.
첫째가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 먹기를 위해서는 우선 식욕이 생겨야 한다. 그리고 먹고 난 다음에는 배설욕이 생긴다.
다음은 생식이다. 그 짝과 교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교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욕이 생기는데, 이 성욕을 좋은 말로 하면 바로 '사랑'이라 한다.
그리고 교접을 한 다음엔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새끼가 나온다.
그런데 이 새끼는 길러야 한다는 마음이 생긴다. 이 새끼를 기르자니 여기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그러나 먹는 것이 교접에 우선할 수는 없다.
많이 먹고 빨리 커서 빨리 그 짓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짓을 하다 보면 새끼가 나온다. 새끼를 다 치고 나면 늙어 죽는다.
그러니까 생물이 사는 것 목적은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식을 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니 위에서 동물이 두 가지 짓을 한다고 했던 것을 수정해야 한다.
즉, 동물이 하는 목적은 오직 새끼 치기 위한 짓 하나 뿐이다.
이는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람도 15~16세가 되면 연꽃 같이 예뻐져서 서로를 끈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새끼칠 짓을 하고는 새끼를 다 치고 나면 쭈글쭈글한 대추처럼 추하게 늙어서 결국 흙이 된다.
신의 섭리는 냉정하다. 통사정해봐야 소용없다.
동물들은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하여 얼누는 것(성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욕망은 그저 원초적으로 얼루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 얼루는 것을 하게 하고 이 이 얼루는 것으로 인하여 태어난 새끼들을 키우기 위해서 사랑, 즉 애욕 같은 것이 부수적으로 따른다고 했다.
수컷들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서 암컷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아양을 떨고 총각놈이 처녀를 꼬시기 위해 사랑 어쩌고 사기 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
새끼를 바라고 얼루는 동물이 있는가?
자식을 바라고 얼루는 넘이 있는가? 혹 씨가 귀한 집안에서 그러기도 하지만 이건 나중에 씨족의 개념이 생긴 후의 일이다.
인간의 얼룸도 동물처럼 그저 그렇게 하고 싶으니 하는 것뿐인데, 그 얼룸 속에는 자식이 생기고 또 씨족이 번성한다.
그렇다면 그 얼룸을 하도록 하는 원초적 욕망은 누가 부어넣어준 것인가?
여기 지금 갑순이와 갑돌이가 태어났다.
그들은 젖을 먹건 또 무엇을 먹건 어떡하던 자라려고 하고 자란다. 무엇 때문에 자라는가?
그들이 15~16세가 되면 얼굴이 연꽃 처럼 예뻐져서 서로의 관심을 끌게 하고 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로 새끼칠 궁리만 하고 결국 그 짓거리를 해서 새끼를 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의 그 짓거리는 뭐 누굴 보고 흉내 내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무인도에 살았다 해도 그들은 그 나이가 되면 그 짓을 한다.
결혼 같은 걸 한다는 건 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풍속에 불과하다.
늙은 필자가 예쁜 샥씨를 보면 헬렐레해지는 것도 결국은 그 습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혹 자신의 새끼가 아니라 하더라도, 즉 업둥이나 양자를 들여왔다 하더라도 기르다 보면 애정이 생긴다. 이는 자신의 새끼를 길러야 할 때 부수적으로 따라 붙는 사랑이 있기에 남의 새끼를 길러도 이와 같아진다.
또 이것은 자신이 만든 작품을 자신이 완성해가는 재미와도 같다.
어떤 작가가 자신의 예술 작품을 완성해가는 재미와 같다.
이것은 비단 업둥이나 양자 등 사람뿐 아니라 개새끼를 길러도 이와 같고, 생물이 아닌 장난감, 즉 전에 일본에서 전자제품 화상으로 계란을 부화하고 이것이 병아리가 되게 하며, 또 커서 닭이 되게 하는 재미에 빠져 전 일본 여학생이 여기에 빠진 일이 있고, 또 어떤 넘이 피씨방에서 자기의 무사를 용감하게 키워 결국 대적할 자가 없었는데 다른 어떤 놈이 이 자신의 희망인 무사를 죽이자 칼로 살인을 했던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자기 것을 기르려 하는 욕망도 있으나, 이것 역시 생명번식의 부산물로 나온 감정에 불과하다.
누가 그랬는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인간은 인의예지 등 性善과 또 음악 감각이 나 미적 감각이 있는데, 개나 소는 꽃밭을 짓밟으니 미적 감각이 없으니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러나 개코는 인간보다 만 배는 냄새를 잘 맡아 똥속에 영양분 냄새를 찾는 이유와 독수리가 수천Km 상공에서 새양쥐를 알아본다. 사람에게 미적 감각이 있는 것은 모두 이성을 끌어 새끼를 치려는 본능에서 나온 것이고 개코, 그리고 독수리 눈에 그런 감각이 있는 것은 모두 먹고 살며 새끼 치기 위한 것이니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위에서 말한 '생물이 하는 짓은 둘'이란 말은 수정해야 한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살려고 먹느냐, 먹으려고 사느냐 하는 질문은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결국 동물이 하는 짓은 새끼 치자고 하는 짓 하나이다.
<노자 도덕경> 6 장을 보자.
谷神不死 是謂玄牝,
골(생명의 구멍) 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빈(玄牝)이라 한다.
여기서 谷은 유방 두 개 아래 가리쟁이(人)가 있고 그 아래 입(口) 가 있는 글자이며, 玄은 신묘하다는 뜻이 있고, 牝은 牛 뒷부분을 비수(匕)로 찍은 글자이다. 이게 뭔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玄牝의 문, 이것은 말하면 천지의 근본이 된다.
綿綿若存 用之不勤
면면히 이어진 것 같고 써도 수고롭지 않다.
이것을 더 정확히 알려면 필자 카페 <노자 도덕경> 6 을 참고하시라.
이상을 보더라도 노자보다 '우주의식이 생명'임을 더 잘 설명한 이는 없다.
이상 인간은 본능 이외에 창조적 지성이 동물과 달라서 TV, 핸드폰 등이나 우주(별, 인공위성)를 창조하고 파괴(딥 임팩트)하나, 새가 그렇게 신기하게 집을 지을줄 안다는 것은 그냥 단순한 본능 때문이다. 더 이상은 못한다.
태초로부터 이 우주 안에는 우주의식만 있었다고 본다.
이 우주 의식은 선이고 악 따위는 있지도 않고 그저 새끼를 치고 번식하는 생명의식 뿐이었다.
선이고 사랑이고 美고 어쩌고 하는 것은 다 새끼를 치려는 생명의 조건에 불과한 것이라 했다.
대 생명은 한 생명
이 우주 의식인 생명을 大生命이라 하자. 아니 大는 그저 '크다'는 뜻 밖에 없으니 우리말 '크고, 밝고, 많고, 희다'는 '한'으로 대치한다. 이 '한' 속에는 무려 20여 개의 뜻이 있다.
* 하늘 : 한울
* 하느님 : 한울님
* 밝다 : 한하다 (환하다) -햇빛 이므로
* 숫자 : 하나, 한을 숫자로 쓸 때는 '하나'라 한다. - 해와 햇빛, 하나님은 하나이므로-
* 크다 : 한밭(한밭,大田), 한길(큰길), 한물(큰물, 홍수), 한비(큰비), 한새(황 새), 한숨(큰숨), 한아비(큰아비, 할아비) 한박눈(함박눈, 한지박(함지박) - 온누리를 비추는 해와 햇빛은 크므로
* 처음부터 끝까지 같다 : 한결같이(하나의 결 같이) - 해는 한결 같으므로
* 모두가 : 한반, 한통속, 한가지 - 해는 전부이므로
* 보다 더 제법, 꽤, 크게 : 한결(한결 따습다) - 해는 최상급이므로
* 얼마 - 한동안 - 해는 항상 있으므로 그 중의 어느 때
* 여러 군데 : 한눈 팔다(여러 군데 시선을 둔다) - 햇빛은 여러 군데를 비추므로
* 바르다(正確, 가운데) : 한복판, 한가운데, 한가위, 한가을, 한낮 - 해는 정확하므로
* 가득 찬 : 한 사발, 한뉘, 한평생 - 햇빛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으므로
* 성(盛)하다 : 한더위 - 해는 盛 하므로
* 넓다 : 한 데(하늘을 가리지 않는 방밖 넓은 곳) - 해는 넓은 하늘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 혼자 : 혼자 - 해는 혼자 있으므로
* 많다 : 흔하다 - 햇빛은 많으므로
* 따뜻하다 : 훈훈하다 - 햇빛은 훈훈하므로
* 오래되다 : 헌 것 , 헌옷 - 해는 오래됐으므로
이상을 보면서 우주의 의식이 대 생명이라 하기보다는 한생명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생명들이 새끼를 치며 번식하려면 어떤 질서가 뒤따라야 무리 생명이 번식한다.
오직 제 새끼만 치고 제 새끼만 번식시킨다면 전체 생명은 멸종하고 만다.
동물들은 먼저 대장균이나 나그네 쥐, 그리고 고래 등에서 보았듯이 나름대로 새끼치며 번식하는 질서가 있었다.
그럼 사람한테는 어떤 질서가 있어야 새끼를 잘 치고 잘 번식할까?
홍익인간이란?
善이 구태여 있다면 이는 '생명체들이 잘 살게 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공생'해야 한다.
마이크로 생물학에서는 바이러스등 미생물이 공생하여 대장균 등 단세포 생물이 되고, 또 이들이 공생하여 동식물등 다세포 생물을 만든다. 즉, 우리 몸은 대장균처럼 단세포가 아니라 수 십조 개의 세포가 공생하고 있고, 이 세포 하나하나에는 수 십, 백조 개의 바이러스가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생의 원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홍익인간이다.
홍익인간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임금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임금은 백성의 대표이니 백성에게 충성하는 것이며, 인간은 만물의 대표이니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은 바로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만물'이다.
이것은 너 좋고 나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고, 이렇게 결혼하면 행복한 결혼생활이 되어 번식하지만 나만 좋아할 줄 알았다가 하는 결혼은 이혼하게 되고 결국 멸종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말한 분은 석가도 아니고 예수도 아닌 오직 우리 하느님의 천부경뿐이다.
지금 헌법 이하 교육법 제 1조에도 있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한자 해석대로 '널리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것 정도에서 그치는 말이 아니다.
우선 무엇은 어떻게 해야 인간이 널리 이로운 것인가?
이 말씀을 한 이는 우리 하느님뿐이고, 이는 우리 숫자 '하나, 둘, 셋... 열'을 말하는 <진본 천부경 신지녹도 문자> 속에 있다.
신지녹도전자의 그림 속에 이 부분은 '새가 솟아오르는 그림'이다.
이것은 새가 답답한 새장(無匱化三)에서 궤를 열고 나가는 그림이다.
이 '열'의 우리말 뜻은 숫자 '열'보다 '열다(開)'인데, 무엇을 여는가? 이는 '아홉'이 '씨족의 울타리'이니 틀림없는 울타리 문 일 것이고, 문을 열었다면 쳐다만 볼 것인가? 나가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씨족의 울타리를 열고 나가면 반드시 다른 종족을 만난다. 그러면 다른 종족을 미국이 인디언을 학살하고 나라를 세웠듯이 죽이고 새 나라를 세울 것인가?
환웅이 울타리를 열고 나간 목적은 당시 주민이 얼마 되지 않으니 근친 상간이 되어 종족이 왜소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 원주민을 모조리 학살하면 다시 근친상간이 된다. 보다 강건한 민족을 세울 수는 없다. 다른 종족인 곰족과 혼혈해야 될것이 아닌가? 현재 우리 민족은 지나(China)족이나 토종 왜인보다 건장하고 얼굴도 잘 생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환웅은 그 씨족의 울타리를 열고 나가 타 종족인 곰족과 동화하여 우리 민족을 세웠으니 이것이 이 지상에 제1차로 펼쳐진 위대한 홍익인간이고, 바로 홍익인간의 뜻인 '열'이다. 우리 88 올림픽에서 떠들던 'We are the world'이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한 최치원의 81자에서 최치원이 그것만 말했으면 성자가 아니다.
다음에 그는 無匱化三, 즉 化三까지 말한다.
즉, 하느님의 심성을 너무나 정확히 꿰뚫은 성자이다. 즉, 울타리를 열고 나가 다른 씨족과 동화하는 것 뿐 아니라 '집과 씨족이 완성되고 때가 되면, 즉 하늘의 정신인 '한'을 땅인 물질이 둘러싸고 있던 자신의 모든 것,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은 물론 자신의 몸뚱이까지 집착하지 말고 열고 나가서 걸림이 없는 사람으로 승화하라'는 말씀을 하신 하느님의 교훈이고, 이는 바로 ,신선이 되라,는 말이며, 이는 다시 ''한'이 되라' 하신 하느님 말씀을 꿰뚫어본 것이니 최치원은 역시 필자는 범접도 할 수 없는 대 성자이다. 그래서 환웅이나 단군들 그리고 최치원은 나중에 산 속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는 것 하나가 있다.
흔히 열고 나가라 하니까 그냥 열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영토가 지금 이렇게 쭈그러들고 열강들 사이에서 그 서러움을 받는 것은 모두 하느님이 교훈 천부경을 착각한 때문이다.
진본 천부경인 신지녹도 문자는 '하나, 둘, 셋... 열'이라 했다.
여기서 하나는 하늘(정신)이고, 둘은 땅(물질) 두르는 것이며, 셋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늘과 땅이 만든 작품이다. 이 사람(사내)인 사내가 그 핵심인 숫, 즉 남근의 집, 즉 칼 집과 같은 겨집을 만나 땅 위에 정착하는 것이 '다섯'이고, 이렇게 되면 '번성한다'는 '여섯'이 된다.
여기까지는 그저 신의 섭리이다. 그러나 '일곱'에서 사내는 다시 가정과 씨족을 일구어야 할 의무가 있다.
즉,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아홉'이다. 그런 다음 '열'고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무리부터 튼튼히 한 다음 대문을 열어야 하는데, 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도 하지 못한 놈이 무조건 문부터 열다 보니 우리는 쪼그러든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선 부모 처자식을 먹인 다음에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부모 처자식을 굶긴 놈이 이웃에게 자선부터 베푼다면 이는 위선이 된다.
성녀 테레사 수녀는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누가 자선기금이라도 내러오면 우선 묻는 게 있다.
"당신 부모 처자식은 배 불린 다음에 여기 헌금하러 왔습니까?"
만약 아니라면 그 돈을 돌려보낸다.
그러니까 홍익인간이란 무조건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상대보다 무엇인가 더 강하게 하고 난 다음에 문을 여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인처럼 자신들의 무기가 더 강하다 하여 인디먼을 몰살하고 자기네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다. 환웅께서는 미치 짐승과 같은 곰족에게 마늘과 쑥으로 지금 싸스와 같은 풍토병을 치료하고, 또 자신들의 문명을 전수하며 피를 섞은 것이다. 그러니까 환웅의 홍익인간이야말로 이 지상에 펼쳐진 가장 위대한 사건이란 말이다.
이상을 보더라도 '생명의 번식'을 위해서는 홍익인간 밖에 없다.
그렇다면 '악'이니 '죄'니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이 번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처자식이야 굶어 죽건 말건 저만 처먹고, 이웃이야 굶어 죽건 말건 저만 처먹으며, 상대인 짝이야 불감증에 걸리건 말건 저의 욕망만 배설하며... 결국 '번식현상을 막는 것'이 바로 죄악이라면 죄악인 것이다.
즉, 죄악을 구태어 말하고 싶다면 바로 이 '홍익인간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죄악이다.
또 '생명'이란 바로 '빛'이다. 창세기 1장, 첫머리에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의 빛인 형이상학의 빛이 되었건 태양이 만들어진 후 그 태양의 형이하학적 빛이었건 '빛'은 일단 '생명'이다.
그리고 우리 하느님 천부경에서 그것을 '한'이라 했다. 좀 자세히 보자
최치원의 81자에서 一始無始一이고, 一終無終一이며, 一析三極 이란 말이 있고, 이것은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에서 말했듯이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최치원의 81자에서 一析三極이란 말이 있고, 이것은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에서 말했듯이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원래 우리민족의 뿌리는 '하느님'인데, 이 하느님은 '해(태양)'이고, 이고 그래서 우리는 '해(하+이) 의 민족'이다. 해는 하얗기 때문에 '하얀민족> '한'민족'이다.
이 해인 '한' 이 天地人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원래 햇빛은 하얗치만 나누면 '빨강, 녹색, 파랑'의 '삼원색'이 되고 다시 합치면 원래대로 하얀 색이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림자와 같은 '검은색'은 원래 '빛의 없음'이다. 즉, 신에게 어떤 의식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신한테는 '생명 의식' 밖에 없고 그것은 바로 '빛'이다. 그리고 성악설에서 혹시 신의 성품이 악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빛의 부재(不在) 상태이지 원래 악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우주 의식은 생명의식인 '한' 밖에는 없다.
참으로 그 당시 분광기도 없었을 텐데 햇빛이 빨강, 녹색, 피랑의 삼색으로 나눠지고 다시 합치면 다시 '한'이 된다는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천지인을 뜻하는 삼태극과 하블 망원경으로 본 또 하나의 삼태극